(조선의용대 시절 약산 김원봉)


2015년에 개봉했던 영화 암살은 박근혜의 국정 교과서 사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큰 인기를 얻었다. 관객 1,270만 명을 동원한 영화 암살에서는 배우 조승우가 연기한 카리스마 넘치는 독립운동가가 나온다. 그가 바로 의열단 단장인 약산 김원봉이다. 1898년에 태어나 1958년에 생을 마감한 약산 김원봉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독립운동가다. 그는 1919년에 창설된 의열단의 단장이었으며, 민족혁명당 총서기였고, 조선의용군을 창설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위원 및 군무부장이었다. 그는 명실상부 독립운동가였고, 수많은 독립투쟁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19191110일에 창설된 의열단은 약산 김원봉을 단장으로 하였고, 1920년대와 1930년대 일본 제국주의를 대상으로 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영화 암살도 엄밀히 따지고 보자면, 김원봉의 의열투쟁을 모티브로 한 것이다. 많은 한국인들이 누군가를 암살하거나 어떤 기관을 파괴하는 독립운동을 생각한다면 백범 김구가 했던, 이봉창 의거나 윤봉길 의거를 생각할 것이다. 물론 김구의 노력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국민당의 장제스로부터 독립자금을 지원받게 되었으며, 이것은 궁극적으로 한국광복군 창설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나 김구가 추진했던 이봉창과 윤봉길 의거는 의열투쟁 중 극히 일부일 뿐이다. 왜냐하면, 1920년대와 1930년대 약산 김원봉과 의열단이 했던 투쟁들은 김구가 한 것에 비해 훨씬 많기 때문이다.

 

전 독립기념관장인 김삼웅이 쓴 약산 김원봉 평전에는 1920년대 당시 의열단 주요활동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19203~6월 곽재기, 이성우 등이 국내활동에 사용할 폭탄을 밀양으로 반입하려한 의거

 

19209월 밀양 폭탄 반입사건에 대한 응징으로 박재혁이 부산 경찰서장을 폭사시킨 의거

 

192011월 최수봉이 밀양 경찰서를 폭파한 의거

 

19219월 김익상이 종로 경찰서를 폭파한 의거

 

19223월 김익상, 이종암, 오성륜이 상해 황포탄 부두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저격한 의거.

 

19233월 김시현, 남정각, 유석현 등이 경기도 경찰부 황옥 경부를 동원해 무기와 폭탄을 국내로 반입하려 한 의거

 

19241월 관동 대지진 때 한인 학살에 대한 응징으로 구여순, 오세덕 등이 국내폭동을 시도한 의거

 

19253월 이인홍과 이기환이 북경에서 일제밀정 김달하를 처단한 의거

 

192511월 이종암, 배중세, 고인덕 등이 국외로부터 무기를 반입해 거사를 준비했던 경북 의열단 사건

 

192612월 나석주가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을 습격한 의거

 

출처: 약산 김원봉 평전 p.75

 

그 외에도 여러 활동들을 김원봉은 전개했다. 무엇보다 내가 김원봉이라는 인물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1930~1940년대 당시의 무장투쟁에 있다. 193810월 약산 김원봉은 조선 의용대를 창설했다. 조선의용대는 엄밀히 따지자면 전투부대가 아니었지만, 이들이 일차적으로 맡은 임무는 대적선전공작이었다. 이것은 일본군 병사들에게 반전과 염전의 정서를 주입하고 사기를 저하시켜 투항을 유도하는 작전이었으며,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온 조선청년들을 독립군 쪽으로 끌어오는 역할이었다.

 

이들은 주로 일본군 주둔지역 주민들에게 국제정세와 일본군의 만행에 대한 강연을 하고 창가를 가르쳐 반일분위기를 고취시키기도 했고, 일본어와 중국어로 된 소책자와 전단·삐라 등을 수십만 장씩 만들어 살포하고 일본군이 투항할 때 쓸 신변보호용 통행증을 만들어 배포하기도 했다. 물론 이들이 선전활동만 했던 것은 아니다. 이들 또한 중국군과 합동하여 일본군에 대한 기습 공격을 감행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1940323일에는 매복전에서 일본군 탱크 2대와 차량 8대를 파괴하고 적군 30명 이상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었다. 즉 이러한 유격전을 통해 일본군에게 군사적인 타격을 가했었다.

 

조선의용대은 19416월 조선청년전위동맹쪽 조선의용대원 80여 명 정도가 북상하여 팔로군 지역인 화북으로 가게 되면서 사실상 해체되었다. 그 이후 조선의용군에 있던 대원들은 대대적으로 북상하게 되면서 19427월에는 조선독립동맹으로 창립됐다. 이 조선독립동맹은 창립선언에서 당파를 망라하여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하며, 중국 특히 중국공산당과 공동전선을 결성하여 항일전에 참가하고, 무장부대를 확충하며, 대중을 조직하고, 동방 피압박 민족해방운동 및 일본의 반전운동과 연계하겠다고 밝혔다. 이들이 모여 생긴 군대가 바로 조선의용군이다.

 

조선의용군은 주로 화북지역에 근거지를 둔 무장 선전 부대임과 동시에 전투 부대였다. 이들은 주로 태항산 일대에서 전투를 치렀다. 이들은 조선의용대에 있을 당시 194112월에는 호가장 전투와 형태 전투 그리고 19425월에는 편성 전투 등을 치렀다. 조선의용군은 화북 지방의 각지에 흩어져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는데, 전지공작과 병사모집, 선전활동, 첩보활동 등이 있었다. 19436월에는 중국 팔로군과 함께 태항선 곳곳에서 이른바 일본군 반소탕전을 전개했다. 이와 동시에 조직의 규모도 확장해 나갔으며, 1945년 해방 시점에서 최소 1,000명 이상의 군대로 성장했다. 이들 중 대다수는 마오쩌둥 휘하에 있던 중국 공산당 측의 조선인 부대와 합류하여, 냉전 초기에 벌어진 제2차 국공내전에서 장제스의 국민당군에 맞서 활약을 펼쳤으며, 중국 통일 이후 북한으로 귀국하여 조선 인민군에 편입됐다.

 

김원봉을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있자, 일각에서는 그를 한국전쟁을 일으킨 주범이라고 한다. 즉 그가 1948년에 월북하여, 북한의 고위직을 맡았고, 그것은 결국 한국전쟁을 일으킨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냥 반공주의 콤플렉스일 뿐이다. 단순히 북한에서 고위직을 맡았다는 이유로 독립운동가로써 재조명 받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과 주장 그리고 사상은 지극히 편향적이고 친일중심적인 사고관이다. 그렇다면, 악질 친일경찰이자 고문왕이던 노덕술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애국자가 되는 것은 말이 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지금까지는 반공주의 콤플렉스에 도취되어 노덕술이나 김창룡 그리고 하판락같은 악질 친일파들이 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애국자로 대우받았다. 그러나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김원봉에 대해서 그런 구차한 변명을 하는 것은 편향과 역사조작 그 자체일 뿐이다. 설사 그가 한국전쟁을 일으켰다고 하더라도, 그의 독립운동 업적이 폄하당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사회주의를 벗어날 수 있는 독립운동가는 김구나 이승만 일부를 빼면 거의 없다. 아무튼 독립운동사에서 그런 유치한 이데올로기 트집을 잡는 것은 반공주의자들의 특징일 것이다.

 

나는 약산 김원봉을 존경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김원봉은 독립운동 시기 의열투쟁을 전개했고, 무엇보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중국 연안과 화북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이 만주와 소련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면, 김원봉은 중국 연안과 화북에서 했다. 조선의용군의 존재는 김원봉이 독립운동사에서 높게 평가받아야할 이유를 알려준다. 따라서 김원봉을 재조명하는 움직임은 좋은 것이며, 비록 우익적 색체에서 진행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반대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앞으로 약산 김원봉의 업적은 독립운동사에서 더 높게 재조명 받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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