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배경
독소전쟁사에 있어서 1941년과 1942년까지는 독일군의 거침없는 진격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1941년 10월에서 1942년 1월까지 전개된 모스크바 공방전(Battle of Moscow)과 1942년 8월부터 1943년 2월까지 스탈린그라드 전투(Battle of Stalingrad)에서 소련군에게 패배했고,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하여 더 이상 소련 영토를 향해 진격하지 못하게 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한 독일군은 전황을 다시 한번 바꾸기 위해서 또 다른 공격 작전을 준비했는데, 그게 바로 쿠르스크에서의 대반격이었다.
2. 양측의 전투 준비
(쿠르스크 전투 당시 평원에 있는 전차들)
그리하여 독일군 총사령부는 1943년 4월부터 대대적으로 전투를 준비하며 작전명 ‘성채’를 계획하기 시작했고, 1943년 7월 독일군은 쿠르스크 지역의 북쪽과 서쪽 양 방향에서 중앙부대와 남쪽 부대를 중심으로 대략 43만이나 되는 군대를 집결시켰다. 독일군의 준비가 길어지면서 소련군은 보다 세련되고 정교한 방어 체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역시 소련군 진지의 중핵은 대전차 방어에 있었고, 독일군과 대치하는 소련의 모든 전방 중대는 적어도 3문의 야포와 9문의 대전차포 및 1대의 전차 혹은 자주포가 할당되었으며, 방어 구역 내에 전투 공병 소대가 배속되었다.
소련군의 자료에 따르면 쿠르스크 전투 이전에 소련 중부 전선군과 보로네시 전선군에는 대략 100만 이상의 병력과 13000문 이상의 야포와 박격포 및 3200대 이상의 탱크와 자주포가 일선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에 비해 독일군은 43만 명의 병력과 9960문 이상의 야포와 박격포 그리고 탱크와 돌격포 3155문을 전선에 배치해 놓았다. 이 상황에서 소련은 추가적으로 44만 명의 병력과 6500문의 야포와 박격포 그리고 1500대의 전차와 자주포를 배치했고, 그 결과 소련군은 쿠르스크 전투에서 병력에서는 3 대 1, 주요 장비 면에서는 1.5 대 1의 우위를 점했다. 하지만 독일군에게는 앞으로 치르게 될 전차전에서 또 다른 우위를 점할 수 있었는데, 88밀리미터의 포를 장착한 신형 전차 포르셰 티거가 투입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3. 쿠르스크 전투의 전개
1943년 7월 초, 쿠르스크의 독일군과 소련군은 이미 대열을 정비하고 전투를 치를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독일군의 공격 시간은 최종적으로 1943년 7월 5일 아침으로 결정되었다. 소련군 지휘부는 이미 정찰 보고서를 통해 몇 시 몇 분에 공격할지까지 파악하고 있었고, 따라서 소련군은 독일군이 공격하는 시간보다 30분 앞서서 독일군의 모든 집결 예정지를 향해 선제 포격을 개시했다.
(쿠르스크 전투에 투입되었던 티거 전차. 당시 티거 전차는 소련군의 주력 전차인 T-34를 혼자서 10대를 격파하는 일도 있었다.)
선제 포격으로 독일군의 공격을 잠시나마 지연시키긴 했지만, 7월 6일 저녁이 되자 독일군이 북쪽과 남쪽 양 방향에서 소련군의 제1 방어선을 돌파했다. 하지만 5일 뒤인 7월 12일 소련군 병력은 독일군의 진격을 막아냈다. 쿠르스크 전투가 진행되던 1943년 7월 10일 영미 연합국이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섬에 상륙하면서 독일군에겐 또 다른 부담이 생겼고, 소련도 7월 13일 쯤에는 영미 연합군의 시칠리아 상륙 소식을 전해 들었다. 또한 히틀러는 폰 만슈타인에게 ‘성채 작전’을 중지시켰고, 제2 SS 기갑 군단을 전선에서 이탈시켜 시칠리아에 상륙한 영미 연합군을 상대하기 위해 이탈리아에 보냈다.
(보병과 함께 진격하는 소련의 T-34 전차)
1943년 7월 12일 소련군은 세심하게 준비해 왔던 전략적인 공세를 개시했다. <쿠투조프>라는 작전명으로, 우선 쿠르스크 돌출부 바로 북쪽에 해당하는 오룔 돌출부에 대한 반격이 시작되었고, 서부 전선군과 브랸스크 전선군, 최종적으로 중부 전선군까지 동원된 이 공세로 인해 독일군은 균형을 잃고 말았다. 이에 따라 독일군은 7월 14일부터는 실질적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7월 12일에 공세를 게시한 소련군은 결국 오룔에 들어갔고, 오룔에 들어간 제3 근위 전차군은 8월 5일에, 브랸스크 전선군은 8월 5일까지 자신들의 이름에 해당하는 도시로 접근해서 독일군 방어 병력을 일소했다.
(포화속에서 진격해나가는 소련군)
돈바스 지역을 목표로 진군하는 소련군에 위협을 느낀 독일군은 오룔에서의 남쪽으로 이동하여 돈바스 지역의 북쪽으로 이동했다. 독일군은 소련군을 꺾기 위해 반격을 시도했지만, 쿠르스크 전투에서의 소련군은 예전의 소련군이 아니었다. 투입된 독일군이 8월 6~7일 사이에 한 것은 소련 제40군이 가한 주공 방향 서쪽의 제2차 공격을 저지한 것 정도였다. 1943년 8월 11일에는 소련군 전차 군단이 독일 SS 기갑 사단과 보고두호프 일대에서 격돌했다. 여기서 대규모의 전차전이 벌어진 것이다. 8월 13일에서 17일 사이에 독일군은 후퇴 작전을 위해 전투를 감행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결국 1943년 8월 23일 소련군이 하리코프 지역을 되찾으면서 쿠르스크 전투는 소련의 승리로 끝났다.
4. 결과 및 의의
쿠르스크 전투는 독일군이 처음으로 소련군의 돌파 부대를 격파하지 못했던 전투이자, 독일이 동부 전선에서 전략적인 주도권조차 가지지 못하게 되는 전투이다. 쿠르스크 전투는 소련군에게 있어서 그런 기회를 제공했고, 스탈린과 게오르기 주코프 로코솝스키 등의 지휘관들이 더 체계적으로 군사 전략을 만들 수 있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독일군의 마지막 반격을 막아냈다는 점에서 의의가 매우 큰 전투다.
(쿠르스크 전투를 묘사한 그림)
물론 소련이 이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치른 대가는 매우 컸다. 양측 합쳐서 대략 1만 대 이상의 탱크와 3만 대 이상의 대포 그리고 5~6천 대 이상의 항공기가 총동원되었던 쿠르스크 전투에서 소련군의 탱크 손실은 독일군의 5~6배를 능가했었다. 독일군의 탱크 손실이 1000대 이상이었던 데에 비해 소련군은 7000대 이상이나 되는 탱크를 전투에서 잃었다. 그 이유는 포르셰 티거(혹은 6호 전차)와 같은 독일의 신형 전차가 투입되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독일군의 티거는 혼자서 소련군의 주력전차인 T-34를 10대 이상 격파할 정도로 강력했다.
그러나 소련군이 이루어 낸 ‘피로스의 승리’는 절대 헛된 승리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위에 상술했듯이 쿠르스크 전투 이후 독일은 동부전선에서 전략적인 주도권을 상실했고, 더 이상의 대규모 공격 계획을 소련군을 상대로 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중앙 러시아의 광대한 지역이 소련군의 수중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즉 쿠르스크 전투가 있었기에 소련군은 1944년 레닌그라드 포위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고, 1944년 6월에서 8월에는 바그라티온 작전을 감행하여 동부 전선 전역에서 독일군을 무찌를 수 있었다. 따라서 쿠르스크 전투는 독소전쟁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전투고, 스탈린과 게오르기 주코프 로코솝스키 그리고 수많은 소련의 병사와 인민들이 쟁취한 위대한 승리였다.
5. 참고 문헌
독소전쟁사, 데비이드 글랜츠 저, 권도승 역, 2007
러시아사, 맥세계사편찬위원회 저, 느낌이있는책,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