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9월 2일 호치민(Ho Chi Minh)이 베트남민주공화국(Democratic Republic of Vietnam)을 선포하고 난 이후 프랑스는 베트남을 다시 식민지화 하려고 했다. 호치민과 프랑스측은 퐁텐블로 협상(Fontainebleau Agreements)을 통해,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책을 찾으려 했으나, 프랑스는 자신들의 제국주의적인 야욕을 베트남에게 드러냄으로써 협상은 결렬됐다. 그러던 1946년 11월 프랑스는 베트남의 항구도시 하이퐁(Hai Phong)을 무차별적으로 포격 및 폭격했다. 이 과정에서 최소 6,000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이와 더불어 프랑스군은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수도 하노이(Ha Noi)를 점령했다. 이러자 호치민은 1946년 12월 19일<전 인민에게 저항전쟁 수행을 촉구하는 호소문>을 발표하여,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에 맞선 항전을 선포했다. 프랑스-베트민 전쟁 즉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퐁텐블로 협상 당시 프랑스에 들렸던 호치민과 베트민 지도부, 일설에 따르면 당시 호치민은 젊은 시절 프랑스에 있던 생활을 떠올리며 거리를 돌아다니기도 했었다고 한다.)
프랑스군은 전쟁 초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항공기와 탱크 그리고 장갑차 등과 같은 현대화된 전쟁장비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호치민과 보 응우옌 잡(Vo Nguyen Giap) 그리고 공산당이 이끄는 베트민(Viet Minh)은 혁명적 농민군과 이를 지지하는 민중들 그리고 일본군과 미국 0SS로부터 노획한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하노이 전투가 프랑스의 점령으로 끝나면서 베트민은 후퇴할 수박에 없었다. 그러나 베트민은 1945년에 이미 전국적으로 대중적인 조직으로 성장한 상태였고, 식민지 지배를 위해 다시 들어온 프랑스군을 환영하는 베트남인들은 소수의 가톨릭과 기득권층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다.
(보 응우옌 잡 장군이 이끌었던 베트민, 베트민은 빠르게 군대를 양성했고, 1946년 12월 시점에서 정규군 6만 명을 보유했었다.)
거기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되던 1946년 12월 베트민의 군사력은 6만 명이었으며, 소총을 보유한 군대는 4만 명이나 됐다. 『호치민 평전』의 저자 윌리엄 J. 듀이커에 따르면, “이 6만 명의 병력은 숫자 확인이 불가능한 지역의 의용대와 게릴라는 포함하지 않은 수치”라고 책에서 주장했다. 즉 이 얘기는 베트민이 그 숫자보다 더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1947년 1월 중순 프랑스 부대가 중국인 구역의 가장자리에 있는 시장까지 도착하자, 베트민군은 많은 지역 주민과 더불어 그 지역을 버리고 홍 강(Hong River)을 건너 북쪽으로 달아났었는데, 그 전투에서 대략 수백 명의 베트민이 전사하고 프랑스군 100명 정도가 전사했었다. 이에 따라 호치민과 베트민의 주력부대는 북부 통킹의 근거지인 비엣박(Viet Bac) 지역으로 후퇴하여 게릴라전을 전개했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프랑스군에 항복한 베트민으로 추정되는 민간인)
프랑스는 전쟁을 단기간에 승리로 이끌기 위한 계획을 세웠는데, 그것이 바로 레아 작전(Operation Léa, Chiến dịch Việt Bắc)이었다. 당시 프랑스군이 레아 작전을 개시한 이유 중 하나는 산악과 밀림 지역에서 베트민이 농민과 열성 지지자들 그리고 소수민족을 아우르는 민중들을 자신들 편으로 규합시키며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레아 작전의 목적은 8,000㎢에 달하는 호치민 정부의 거점인 험난한 산악지대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프랑스군은 랑썬과 까오방을 점령한 다음 병력을 남하시키고, 그러는 한편 다른 부대를 배로 홍강과 로강을 거슬러 올라가게 함으로써, 베트민의 중심부인 박칸을 공격하는 양면작전을 전개했다.
(레아 작전 전개도)
레아 작전은 박칸에 프랑스 공수부대를 투하하는 것으로 시작됐으며, 프랑스군은 빠르게 진군하여 곧 베트민 본부를 찾아냈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군은 베트민에게 막대한 피해를 줬고, 호치민 정부 지배 아래 있던 몇몇 도시를 점령하는 한편 보급과 무기 생산시설을 파괴했다. 또한 수천 명에 달하는 베트민군을 사살하거나 생포한 것으로 알려졌다. 『세계게릴라전사』를 집필한 로버트 에스프레이(Robert B. Asprey)에 따르면, “마치 독일군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과 유고슬라비아에서 허풍을 떨었던 것처럼, 이곳의 프랑스군 지휘관들도 적을 포위한다고 떠들어 댔으며”, 또한 “프랑스군은 적군 8,000명을 사살하고 수천 정의 무기와 탄약을 노획했다고 주장했으나, 베트민의 군사력을 오랫동안 분산시키는 데도 실패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기고만장 했었다는 것이다.
(비엣 박을 점령하고 나서 현장에서 사진을 찍은 프랑스군)
초기 기선 제압으로 프랑스군은 호치민 지휘부의 거점과 비엣 박의 마을들을 점령했지만, 궁극적으로 호치민을 체포하지 못했다. 참고로 호치민은 공격을 당했을 당시 사령부에서 회의를 주재하고 있었지만, 프랑스 공수부대가 가까이 다가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을 즉시 탈출했다. 이것이 프랑스군이 호치민 사령부를 점령하기 하루 전의 일이었고, 다음날 프랑스군이 사령부를 점령했을 당시엔 미국의 역사학자 버나드 폴(Bernard Fall)에 따르면, 프랑스군은 오두막의 책상에서 불이 꺼지지 않은 담배꽁초들과 호치민의 서명만 남겨놓은 편지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 이후 며칠 동안 프랑스군은 소탕작전을 전개 하려 했지만, 실제로 베트민 부대와 직접 맞닥뜨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며, 베트민군은 자신들이 원하는 장소에서 프랑스군을 고전하게 만들었다. 결국 프랑스군은 병력 부족으로 얼마 후 점령지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결국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됐다. 따라서 레아 작전은 궁극적으로 실패한 작전으로 종결됐다. 프랑스군의 염원과는 달리 전쟁은 이 시점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에 따라 여러 전선에서 프랑스군은 베트민의 게릴라전에 고전했고, 교착된 전선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한 가지 외교적인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것이 바로 바오다이 해결책(Bao Dai Solution)이었으며, 이것은 당연히 식민주의의 유산이라는 토대 위에서 계획된 것이었다.
참고문헌
『세계게릴라전사 3』, R.B 에스프레이, 편집부, 일윌서각, 1989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 유인선, 이산, 2002
『호치민 평전』, 윌리엄 J. 듀이커, 정영목, 푸른숲,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