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한 그는 누구인가?

1966년 9월 22일 대한민국 국회는 삼성그룹의 사카린 밀수로 인하여 시끄러웠다. 그 국회에서 정일권을 비롯한 국무총리 각료들에게 똥물을 투척한 인물이 있었다. 그는 ‘조선 최고의 주먹‘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건달이자 대한민국 국회의원인 김두한이었다.

김두한은 대중매체를 통해 생애가 나름 잘 알려진 인물이다. 1990년대에 개봉한 ‘장군의 아들‘이나 최고 시청률 57%까지 찍었던 124부작의 대하 드라마 야인시대를 비롯하여 김두한은 국민들에게 많이 알려진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등장하는 매체는 대체로 그를 협객이나 주먹왕으로 묘사되기에 그의 실체는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따라서 김두한의 생애를 정확히 아는 것도 중요하다.

김두한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1918년에 태어났다. 1924년 그가 7살이던 시절 청산리 대첩의 영웅이자 자신의 아버지 김좌진 장군을 만났다고 한다. 그러나 그 주장에도 역사적 고증이 전혀 맞지 않는 오류가 있는데, 김두한의 주장에 따르면 ˝자신이 7살이 되던 시절 만주로 가서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김좌진 장군을 만났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일본군 수천명이 전사했다고 알려진 청산리 전투는 1920년에 있었다. 그외에도 그는 여러 역사적 고증 오류로 인하여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 아니라는 의심을 받고 있고, 무엇보다 김두한의 딸인 김을동 의원이 DNA검사를 거부했다는 점에서 사실무근 관련한 의심을 받을만 하다. 따라서 드라마 야인시대에 나오는 김두한과 김좌진의 만남은 처음부터 허구에 기반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가 가족 했던 주장중 가장 황당한 주장은 ˝자신의 할아버지가 1884년 3일천하 갑신정변의 주요 인사인 김옥균˝이라는 소리다. 이것또한 전혀 사실관계가 맞지 않는 거짓말이다. 일단 김좌진 자체가 김옥균의 양자가 아니다. 즉 김옥균과 김좌진이 족보적으로 연결되는 접점이 전혀 없다. 굳이 김옥균, 김좌진, 김두한의 공통점이라 하자면 안동 김씨라는 같은 성씨라는 사실 뿐이다.

어린 시절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거지 생활을 했던 김두한은 원노인에게 거두어져 자랐다고 한다. 물론 이것도 확실히 확인된 바는 없다. 아무튼 그는 18세가 되던 1935년 종로의 유명한 극장 우미관에서 일하며, 건달로써 유명해졌다. 우미관에서 일하던 그가 당시 유명했던 건달 구마적과 신마적을 넘어서고 종로 제1일의 주먹패가 된 것은 아주 거짓말은 아닌듯 하다.

그러나 김두한을 비롯하여 몇몇 사람들이 주장하는 ˝일본 상인들로부터 조선의 심장이자 마지막 보루인 종로 상권을 지켜냈다.˝는 주장은 믿기 힘들다. 당시 시기를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조선 전체가 이미 일제의 식민통치에 철저하네 유린당했기 때문이다. 즉 그 시기에 일본 상인들로부터 지킨다는 것 자체가 사실상 말이 안된다는 거다. 김상구 저자의 ‘김두한 출세기‘라는 책에 나온 표를 보면 1930년부터 1940년까지 폭력배 관련 언론 기사에는 일본 야쿠자와의 싸움에 대한 기사는 없다. 김두한 및 그의 동료 깡패들은 쉽게 말해 종로 상인들 자릿세를 갈취해 가고, 극장 및 유흥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폭력배일 뿐이다. 설사 하야시와 같은 혼마찌 일본 건달들과 싸웠다 하더라도 그것은 경제적 이권 다툼일 것이다.

김두한의 주먹 조직이 또 다른 변화를 겪게된 것은 1941년 태평양 전쟁이 격해지면서 부터다. 태평양 전쟁이 격해지면서 일본은 대대적인 징용을 시작했고, 그 범위가 주먹패까지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하여 주먹패들중 일부도 징용되어 전선에 나가게 되었는데, 그게 일본군 내의 사고 및 문제로 이어졌다. 그로 인하여 조선 총독부는 김두한을 비롯한 주먹패들을 모아 1943년 소위 ‘반도의용정신대‘를 조직했다. 이들중 일부가 친일의혹이 있지만, 김두한 개인의 친일행적은 특별히 없다. 이들은 후방에서 지원하는 용도로 만들어졌기에 김두한과 그의 주먹패는 거기서 활동하다 1945년 해방을 맞았다.

김두한 본인 회고에 따르면 해방 이후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 치안대에서 활동하며, 일본 해군무관부를 접수했다고 한다. 그러나 2000년대 나온 다큐멘터리 ‘건달의 역사‘에 따르면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 김두한의 주장은 건준에 잠시 있었다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빠를 것이다. 본인 주장에 따르면 ˝자신의 아버지 김좌진 장군이 공산주의자에게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좌익에서 우익으로 전향했다.˝고 한다. 이유가 어찌됐건 그는 모스크바3상회의 이후 반탁 진영의 선봉에 서면서 무차별 테러를 자행했다.

1946년 4월 그는 대한민청이라는 극우 조직을 결성했고, 여러 테러활동들을 전개했다. 대한민청은 극우파쇼인 이범석이 주도로 만들어진 족청이 발전한 것이었다. 그가 쓴 대한민국건국청년운동사에 나온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1946년 중앙극장 폭파사건, 철도파업진압, 전평 본부 습격, 민청집회장소인 삼각산 문수암 급습, 경전 파업 진압, 인천 조선기계제작소 파업 진압, 남로당 대회장 습격 등이 있다. 이런 활동은 무자비한 파업 진압은 좌익 노조활동의 근본적 파괴를 가지고 왔다. 심지어 그는 당당하게 ˝자신이 여운형 암살에 관여했다.˝는 소리를 하기도 했다. 드라마 야인시대의 패러디 소재인 심영 습격도 실제로 김두한 측에서 실행했고, 심영의 다리를 총으로 쏘아 맞췄다고 한다. 또한 김두한은 이화룡측의 서북청년단과도 큰 인연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거지시절 친하게 지냈던 친구 정진영이 사회주의 쪽에서 활동하자 무자비하게 죽였다.

정리하자면 김두한은 해방 이후 정치활동을 하면서 조직이 더 커졌다. 그가 자행한 백색테러는 경찰총장 조병옥과 장택상의 대대적인 지원과 친일파들의 지원 그리고 미군정의 방관속에서 이루어졌다. 해방정국 시기 여러 테러 활동이 있었다. 그중 대다수는 우익쪽에서 했고, 그 대상은 어린이, 노인, 임산부까지 확대되었었다.

1948년도에 김두한은 미군정에 의해 구속되어 하지 사령부에게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러나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의 특전으로 그는 사면되었다. 일각에서는 사형수 시절 오키나와 미군형무소에 수감되었다고 하나 이 또한 김두한의 자작극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여러 조직에서 배제되었다.

한국전쟁 시기 그는 군인으로 참전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포항 전투에 참전했다는 얘기 또한 확실한 증거가 없어서 있는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한국전쟁 시기 김두한 또한 부산으로 피난을 갔고, 전쟁이 끝날때 까지 부산서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시기 이승만으로 부터 내무부장관직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는 하나, 이 또한 근거가 없다.

한국전쟁 이후 김두한은 서울로 돌아와 1954년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됐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당선이 된 이후부터는 반이승만 반자유당 노선에서 활동했고, 심지어 진보당의 조봉암을 옹호하기도 했었다. 사실 이는 해방 후 이승만 못지 않게 레드 컴플렉스를 보이던 조병옥과 장택상 그리고 유진산 같은 인물들이 반이승만 노선을 1950년대에 택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아무튼 그는 1950년대 반이승만 노선을 표명했고, 형식적으로 야당쪽에 있었다. 그 바람에 한때 동료였던 자유당의 이정재측과 여러 갈등을 보였었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부가 물러난 뒤, 1961년 5.16 쿠데타로 박정희가 집권하자 그는 박정희 정부를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시기 정치쪽에서 밀려나 있었던 김두한은 1965년 제6대 국회의원선거의 재보궐선거에서 용산구에 한국독립당의 후보로 출마, 당선되었다. 이로써 생애 두번째로 국회의원이 되어 8년 만에 국회 재입성했다. 하지만 김두한은 당선되자마자 한일회담 시위관련하여 한독당 내란 음모 사건으로 체포되어 감옥에 같혔었다. 물론 그게 국회에 문제가 되어 석방되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1966년 현재 이건희의 아버지 이병철이 사카린을 밀수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그는 똥물을 가지고 와 말 그대로 똥물을 투척했다.

참으로 재밌는 것은 그 시기 김두한은 해방 후 자신이 했던 백색테러를 합리화 하면서 한편으로는 복지가 어떻다니 노동자가 어떻다니 하며 권리니 하는 이야기를 했다는 점이다. 이후 김두한은 1967년 신민당 후보로 출마했었고 당선도 되었지만,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유세 연설 도중 체포되기도 했었다. 그러던 1971년 다시 선거에 나서서 그 동안 얻었던 득표율에 비하면 큰 표를 얻었기는 했다만 간발의 차이로 낙선하였고, 1972년 11월 김두한은 뇌출혈로 사망했다.

김두한이라는 존재는 참으로 묘한 존재다. 그는 일제시기 깡패였고, 해방 후에는 정치 깡패로 변모하여 민간인에게 무차별 테러를 자행했으며, 한국전쟁 이후에는 이승만 박정희에 맞서는 야당인사였다. 또한 말년에는 자신이 받고 있던 국가 유공자 연금 전액을 고아원에 지원했었다. 그리고 그는 공공연하게 거짓말을 일삼았다. 그런 점에서 그는 참으로 독특한 인생을 가진 인물이다. 그러나 대중 매체에서 나타난 그의 모습은 지극히 김두한 자신이 미화한 것을 어떠한 검증없이 받아들인 것이기에 당연히 비판적으로 봐야 하고, 해방 후 자주국가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테러로 대응했다는 점에서 그는 역사의 심판대에 올려 놓아야할 인물이다.

참고자료

김두한 출세기, 책과 나무, 김상구, 201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것은 1941년이 되서였다. 1차 세계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형식적인 중립주의를 내세웠던 미국은 1941127일 진주만 기지가 일본군에 의해 기습 공격을 당하자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감행했고, 일본의 동맹세력인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하게 되자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 것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현재 CIA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OSS(Office Strategic Services)를 창설하여 유럽과 태평양 전선에서 많은 활약을 펼쳤다. 태평양 전쟁 기간 미국은 아시아에서 자신들과 협력하여 대일전을 전개할 수 있는 대상을 찾았고, 그 결과 중월 국경지대에서 베트민 조직을 이끌던 베트남의 호치민(Ho Chi Minh)과 협력하게 되었다.

 

1941년 베트남을 떠난 지 30년 만에 돌아온 호치민은 베트민을 창설하여 일본과 프랑스에 맞서 여러 투쟁을 전개했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미국과 영국 중국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반파시즘 연합전선이 형성되자, 호치민은 연합국의 지원을 얻기 위해 노력해왔었다. 그 과정에서 국민당 측에게 공산당 스파이로 오인받아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황이 급격히 변해가던 시기에 감옥에서 보내야 하는 불행이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던 194411월 미국의 루돌프 쇼 중위가 모는 정찰기가 중월 국경의 산악지대를 비행하다가 엔진 고장으로 인하여 정글에 불시착한 적이 있었다. 그 지역 베트민 부대원들은 쇼 중위를 찾았고, 그를 호치민이 있는 곳으로 보내기로 한 그들은 1달 후 호치민에게 보냈다. 쇼 중위를 만난 호치민은 그를 중국 국경을 넘어 쿤밍에 있는 공군지상지원국에 돌려보내면서, 1945년 초가 되어 최종적으로 미국 측과 접촉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호치민은 미국 해병대 찰스 펜 중위와 앨리슨 토머스 소령 그리고 아키메데스 패티 소령과 같은 미군측 요인들과 접촉하여 협력관계를 형성했다.

 

19454월 미국 OSS의 패티 소령이 중국 운남성의 한 찻집에서 호치민과 만난 이후, OSS는 베트민에게 의약품, 무전기 한 대, 추가의 무기 등 보급품을 팍 보 근처에서 공중 투하해주었다. 당시 베트남에 남아있던 프랑스 측은 호치민과 베트민을 방해하기 위해 미국에게 온갖 선전을 했었지만, 1945년 초중순 부터는 호치민의 베트민과 미국 OSS측의 관계는 점차 좋아졌다. 19455월부터 일본군 진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던 호치민의 베트민 부대는 OSS에게 미국이 필요하다면 인도차이나에서 언제든지 약 1000명의 베트남 게릴라를 지원할 수 있다고 제안하기까지 했었다.

 

1945716OSS 사령부로부터 베트민과 접촉하라는 임무를 받은 패티의 후배 장교이자 디어 팀(Deer Team)’의 지휘관 앨리슨 토머스 소령은 대략 50명 규모의 게릴라 부대원들과 함께 북쪽 산악 지대의 작은 마을에 낙하산으로 투하되었다. 앨리슨 토머스 소령이 이끄는 사슴팀은 보 응우옌 잡(Vo Nguyen Giap)이 이끄는 게릴라 부대와 함께 작전을 수행했다. 잡 장군은 OSS에게 은신처를 제공했고, OSS는 기관총, 브라우닝 자동소총, 수류탄 등을 낙하산으로 제공하여 베트민을 현대식 무기로 무장시켰으며, 훈련까지 담당해줬다. 이렇게 미군의 훈련을 받은 잡 장군의 게릴라 부대는 몇 개의 일본군 외곽 초소를 공격하여 성과를 올렸고, OSS의 사슴팀 또한 베트민과 공동 작전을 펼치면서 관할 지배 지역을 확대해 나갔다.

 

그러나 이들의 협력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황이 급격히 변하면서 변화를 맞게 되었다. 19456월 오키나와 전투에서 미국에게 패배한 일본은 미국의 B-29 폭격기에게 융단 폭격을 받게 되면서 패망해가고 있었다. 호치민과 OSS가 협력하게 되었을 쯤에는 태평양에서의 전황이 급격히 바뀌어 가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호치민은 베트민 조직에 있는 지도부들과 협의하여 총 봉기를 계획했고, 19458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이를 실행에 옮겼다. 총 봉기를 일으킨 호치민은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키고, 194592100만 명의 인파가 모인 하노이 광장에서 베트남의 독립(Vietnam Independence)’을 선포하게 된다.

 

2차 세계대전 말기 호치민과 베트민은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과 협력하는 노선을 택했다. 그 당시 호치민을 만났던 미국의 주요 인사들은 그를 사회주의자 보단 민족주의자로 판단했고, 전쟁이 끝나가던 시점에 베트민 조직에게 소총과 수류탄, 기관총 등의 무기를 지원해주기도 했으며, 그들과 협력해 일본군에 맞서 소규모의 전투를 벌이기도 했었다. 당시 호치민과 협력했던 OSS의 아키메데스 패티 소령은 자신이 쓴 책 <왜 베트남인가?>에서 우리들 중 몇 사람은 우리가 제공한 무기와 훈련이 언젠가는 프랑스 사람들과 싸울 때 사용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의 상대가 미국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고 밝혔다. 안타깝게도 호치민과 협력관계를 구축했던 미국은 그로부터 20년 뒤, 한때 자신들이 지원했던 그들과 전면전을 치르게 된다. 그런점을 생각해 보았을 때,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호치민의 협력관계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역사라 할 수 있다.

 

참고 자료

 

윌리엄 J 듀이커, 정영목(), 호치민 평전, 푸른숲, 2003

 

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을유문화사, 200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945815일 일본 제국주의가 연합국에게 항복을 선언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었다. 일본이 항복함에 따라 국민당과 공산당은 제2차 국공합작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차례의 격렬한 경쟁이 전개되었는데, 양측 모두 먼저 일본군의 점령지역에 들어가 일본군의 항복을 받음으로써 적이 가지고 있던 대량의 무기와 군사 장비를 접수하려 했기 때문이다. 중일전쟁 당시 해방구를 넓혀나갔던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전쟁이 끝났을 무렵 대략 100만 명의 정규군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는 1930년대 대장정 당시 병력이 2만 명 안팎이었던 공산당을 고려했을 때, 세력을 많이 확장한 것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중국으로 와서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를 지원하며 공산당과 회담하는 정책을 펼쳤었다. 194511월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 군인인 조지 C. 마셜 장군(George C. Marshall)을 중국 주재 대통령 특사를 임명하여 장제스에게 공산당과의 화해 및 중재하도록 했다. 조지 마셜 장군은 194512월 중순 양당 대표 모두가 중재를 받아들이게 했는데, 이 세 가지 목표에는 내전 중지, 정치협상회의 개최 및 연합정부 수립 논의 그리고 국공 양당의 군대를 하나의 국가 군대로 편성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양측 모두 서로를 불신했다. 장제스의 국민당은 1946년 초에 중국 공산당보다 5배나 많은 군사를 보유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런 규모의 차이는 국민당으로 하여금 공산당군을 궤멸시킬 수 있을 것이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은 서로가 추구하는 정치적 방향이 너무나도 달랐다. 이러한 갈등 및 차이는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다. 19464월 만주에서 소련군이 철군한 이후 중국 공산당이 만주지역을 접수하자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갈등이 깊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67월부터 국민당 정부가 압도적인 군사력을 바탕으로 중구 공산당의 거점지역을 대상으로 대규모의 군사적 공격을 감행하면서, 2차 국공내전이 일어났다.

 

1946년 중엽 중국 국민당군의 총병력은 대략 430만이었던 데에 비해 공산당군은 120만 안팎이었다. 수적으로 공산당보다 3.5배가 많았던 국민당군은 19467월부터 12월까지, 공산당이 수중하의 165개의 도시와 174000제곱킬로미터의 영토를 빼앗았다. 19473월에는 중국공산당과 인민해방군의 중심지인 연안까지 점령했다. 하지만 인민대중의 민심을 잘 사로잡았던 중국 공산당은 19476월에 이르러 병력이 대략 195만 명까지 증가했고, 그 해 하반기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하여 허난과 허베이에서 국민당군에 맞서 승리를 거두었다.

 

국민당군이 점차 불리해진 데에는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민심을 얻지못했다는 사실에 있었다. 미국의 물자지원을 받고, 수적으로도 공산당보다 많았던 국민당군은 점령한 지역에서 민심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 점령지역에서의 국민당군은 민중을 대사으로 약탈을 일삼았고, 관료들은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체우기 위해 부패를 일삼았다. 그에 반해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당군은 민중 사이에서 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그들을 설득하고, 존중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다. 따라서 국공내전에서 민중은 국민당이 아닌 공산당을 지지했던 것이었다.

  

1948년에 들어오면서 군사적인 정세는 확실히 내전의 초기단계와 비교했을 때 공산당측에게 유리하게 역전되었다. 비록 그때까지도 국민당군이 수적으로는 우세를 유지했지만, 19466월 기준으로 국민당의 총병력이 360만이었던 데에 반해, 공산당의 총병력이 280만 명이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공산당이 민중들의 지지를 받으며 성장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내전 시기 국민당군의 큰 손실은 만주에서 발생했다. 1947년 크리스마스 이후 3개월 동안 린뱌오의 중국 공산당 부대는 국민당의 정예부대에게 15만 명의 손실을 입혔다. 1948년 중반에 중국 공산당군은 국민당군을 겹겹이 포위했고, 10만 명의 국민당군을 섬멸한 이후 19481014일에 진저우를 점령하고, 18일에는 창춘을 빼앗았으며, 112일에는 선양을 점령했다. 만주에서 치러진 전투에서 장제스에게 47만 이상의 최정예부대에게 손실을 입게했고, 국민당군의 사기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만주에서 린뱌오가 이끄는 부대가 국민당군을 섬멸하는 것과 동시에 천이가 이끄는 또다른 중국 공산당군은 공세를 전개했다. 천이가 이끄는 공산당군은 1948926일 지냔 대전이 있은 후 산둥을 점령했다. 이에 장제스는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탱크와 주포, 장갑차를 갖춘 40만 명의 기계화 부대를 배치하여 난징으로 통하는 관문을 보위했지만, 194810월 회해 전투가 막 시작되었을 무렵 국민당군 2개 사단 전체가 반기를 들었고, 탱크와 장갑차는 폭우와 눈바람으로 무용지물이 되었으며, 1111일부터 22일까지 10만 명의 국민당군이 섬멸되었다. 그 결과 19481215일 쉬저우까지 함락되었다. 또한 1948117일 유백승과 덩샤오핑이 지휘하는 군대는 소위 화해전역을 개시하여 약 100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 그리고 쉬저우를 점령했다. 19481224일 중국 공산당의 군대는 장가구를 점령했고, 다음해 14일에는 천진을 131일에는 베이징을 각각 점령했다.

 

19489월부터 19491월까지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대략 150만 명이나 되는 인력을 상실했다. 19491월 장제스는 국민당 정부 총톡직을 사임하고, 총통대리로 선임된 이종인은 화평교섭을 제안했다. 194941일부터 시작되었지만, 중국공산당은 국민당의 실질적인 항복을 요구하는 국공화평협정 8개조를 제시함으로써 화평교섭의 조속한 결렬을 유도했다. 당연히 국민당은 이를 거부했고, 이를 거부한 1949420일 중국의 인민해방군은 역사적인 양자강 도하작전을 감행하여 국민당정부의 심장인 난징과 상하이로 진격했다. 1949424일 난징이 함락되고, 527일에는 상하이가 점령되었다.

 

이렇게 국공내전에서 승기를 잡은 마오쩌둥은 1949101일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했고, 현재의 중국이 건국되었다. 19495월 이후에도 중국 공산당군은 남하를 계속하여 그해 12월에는 대만을 제외한 중국 전 지역을 해방했다. 장제스는 121050만의 국민당군을 이끌고 대만으로 도피하였고, 이로써 중국 혁명은 공산당의 승리로 끝이 났다.

 

참고문헌

 

중국혁명사, 서진영 저, 한울 아카데미, 1992

근현대중국사-, 이매뉴얼 C. Y. 쉬 저, 조윤수 서정희 역, 까치, 20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박정희 경제성장 찬양하는 것들은 분명히 자본가 마인드가 맞다. 박정희식 경제성장은 단순히 재벌과 부자들을 위한 성장이었다. 민중의 복지는 개좆만큼 생각한게 박정희였다. 1930년대 FDR의 뉴딜보다도 못했다. 아무리봐도 무슨 박정희가 경제 살렸네 이 소리 하는것들은 생각하는 수준이 개돼지 수준이다.

단순히 경제성장 도표만 보고, 재벌이 진출한 것만 보며 그것이 최고의 경제 성장인냥 찬양하는 종자들은 복지는 왜 필요한지, 교육, 주거, 의료, 공공시설 등이 국가가 제공해야하는 것이 인권이라는 사실은 전혀 생각치 못한다. 아니 부자들이 성장하면 우리도 덩달아 잘 살것이라는 심각한 착각 밑 뇌망상에 빠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근데 이것보다도 더 자본가 같은 생각을 가졌던 인물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이승만이었다. 그 이승만이라는 작자는 미국에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해!˝라고 해도, ㄴㄴ 그거는 사회주의에서나 하는거임 하며 안하던 인물이다. 정리하자면 이승만이나 박정희가 경제 살렸네 우리를 잘살게 만들었네와 같은 소리는 우리가 받아야 했던 권리를 알지도 못한채 파블로프의 개마냥 읊어대는 미친소리다.

또한 최근 보면 주 52시간도 부족하다 지껄이는 저 자유한국당 쓰레기들만 보더라도 한국인들 복지 의식 수준이 아직도 저급한 수준을 받어나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雨香 2020-01-13 2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정희 신화에 대해서도 다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박정희가 본격적인 경제성장은 1970년대인데, 1970년대에 지속적으로 고속성장을 한 나라는 단 네나라입니다. 일본, 한국, 대만, 이스라엘.
1960년대 남미로 몰리던 자본이, 남미의 사회주의화로 1970년대 위 네나라로 몰렸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경제성장은 냉전 경쟁체제의 산물로 보는게 더 합리적일 듯 합니다.

NamGiKim 2020-01-16 22:19   좋아요 1 | URL
한국은 지정학적 특수성이 있었다 봅니다. 한국 위에 북한과 중국 소련이 있으니 미국은 태평양 라인에서 반공국가를 만들어야 했고, 이는 상대적으로 한국에 대한 많은 지원으로 이어졌죠. 그리고 사실 한국의 복지는 민주화 투쟁과 노동운동의 성과죠.
 

국내에서는 나는 관대하다라는 패러디 대사로 인터넷 네티즌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었던 영화 하나가 있다. 영화는 2500년 전 페르시아 제국이 그리스를 정벌하기 위해 제2차 원정을 갔을 당시 있었던 테르모필레 전투(Battle of Thermopylae)’를 소재로 한 영화로 페르시아의 침략에 맞서 그리스를 지켜낸 300명의 스파르타 전사의 이야기를 다뤘다. 그 영화가 바로 300이다.

 

영화 300에서 나온 스파르타 군대를 보면 삼각팬티를 입고 강철 방패와 창을 든 근육빵빵 보디빌더 몸매의 전사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조국을 지키겠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혀 있고, 가장으로서의 가족에 대한 의무감도 강하며, 군대 내에서의 질서정연한 모습을 보인다. 이들은 당연히 다 백인이다.

 

반면에 300명의 스파르타 정예부대가 상대하는 페르시아군은 전부다 피부가 갈색과 검정색 사이이고, 스파르타에다 보낸 페르시아 전령은 흑인이며, 병사들은 그저 머릿수에 의존한 전투를 전개한다. 그들 중 일부는 아프리카나 아시아 지역에서 대려왔을 법한 코뿔소와 그 사이에서 깃털 문양의 장식을 쓰고 있는 일부 원주민들이고, 거대한 코끼리도 있으며, 이모탈이라는 부대는 사람이 아닌 오크부대다. 300에 나오는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 또한 현실적 고증과는 전혀 동떨어진 인물이고, 무슨 팬티만 입고 다니며, “나는 관대하다를 외친다. 그리고 그가 있는 왕국에는 미노타우르스 얼굴을 한 괴생명체도 존재한다.

 

이렇듯 영화 300은 페르시아 제국에 대한 엄청난 왜곡과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 당연히 이 영화는 미국에서 만들어졌고, 오리엔탈리즘이라는 큰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 그렇다면 영화 300에서 나온 페르시아의 후손들은 과연 누구일까? 그 후손들이 세운나라고 바로 이란이다. 냉전시대부터 미국은 이란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1979년 이란-이라크 전쟁이 터졌을 시기 미국은 이란을 적대시하는 정책을 폈었고, 그 이후에도 이란에 대한 각종 제제를 비롯하여 제국주의적 처사를 일삼았었다. 냉전이 끝난 이후부터 현재까지 미국은 대략 30년간 중동에서 끊임없는 분쟁을 일으키고 있다.

 

다시 영화 300으로 얘기를 돌리자면, 영화 300은 현재 미국이 중동에 대해 가지고 있는 온갖 편견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에게 있어서 이란을 포함한 중동의 국가들은 그저 이슬람이나 믿고, 여성들의 인권은 바닥이며, 자살폭탄 테러나 일삼는 야만족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미제국주의적 오만과 편견이 2020년 새해에 이란의 특수부대 사령관 카셈 솔레이마니를 폭격으로 살해하고 미국-이란 사이의 전쟁 위협으로 내몬 것이다. 물론 필자는 현재의 이란과 미국의 갈등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갈 거라 믿지는 않지만, 곧 머지않아 적어도 군사적 충돌은 당분간 지속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2020년 새해 시작과 더불어 300에서 나왔던 미국의 오만과 편견을 이란 사태를 통해 볼 수 있었다. 멀고 험한 길이지만 중동에 평화가 오기를 기원한다. 미국은 중동에서 물러나야 한다. 안그러면 그 대가는 미국 자신이 받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