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것은 1941년이 되서였다. 제1차 세계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형식적인 중립주의를 내세웠던 미국은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기지가 일본군에 의해 기습 공격을 당하자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감행했고, 일본의 동맹세력인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하게 되자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현재 CIA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OSS(Office Strategic Services)를 창설하여 유럽과 태평양 전선에서 많은 활약을 펼쳤다. 태평양 전쟁 기간 미국은 아시아에서 자신들과 협력하여 대일전을 전개할 수 있는 대상을 찾았고, 그 결과 중월 국경지대에서 베트민 조직을 이끌던 베트남의 호치민(Ho Chi Minh)과 협력하게 되었다.
1941년 베트남을 떠난 지 30년 만에 돌아온 호치민은 베트민을 창설하여 일본과 프랑스에 맞서 여러 투쟁을 전개했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미국과 영국 중국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반파시즘 연합전선이 형성되자, 호치민은 연합국의 지원을 얻기 위해 노력해왔었다. 그 과정에서 국민당 측에게 공산당 스파이로 오인받아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황이 급격히 변해가던 시기에 감옥에서 보내야 하는 불행이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던 1944년 11월 미국의 루돌프 쇼 중위가 모는 정찰기가 중월 국경의 산악지대를 비행하다가 엔진 고장으로 인하여 정글에 불시착한 적이 있었다. 그 지역 베트민 부대원들은 쇼 중위를 찾았고, 그를 호치민이 있는 곳으로 보내기로 한 그들은 1달 후 호치민에게 보냈다. 쇼 중위를 만난 호치민은 그를 중국 국경을 넘어 쿤밍에 있는 공군지상지원국에 돌려보내면서, 1945년 초가 되어 최종적으로 미국 측과 접촉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호치민은 미국 해병대 찰스 펜 중위와 앨리슨 토머스 소령 그리고 아키메데스 패티 소령과 같은 미군측 요인들과 접촉하여 협력관계를 형성했다.
1945년 4월 미국 OSS의 패티 소령이 중국 운남성의 한 찻집에서 호치민과 만난 이후, OSS는 베트민에게 의약품, 무전기 한 대, 추가의 무기 등 보급품을 팍 보 근처에서 공중 투하해주었다. 당시 베트남에 남아있던 프랑스 측은 호치민과 베트민을 방해하기 위해 미국에게 온갖 선전을 했었지만, 1945년 초중순 부터는 호치민의 베트민과 미국 OSS측의 관계는 점차 좋아졌다. 1945년 5월부터 일본군 진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던 호치민의 베트민 부대는 OSS에게 “미국이 필요하다면 인도차이나에서 언제든지 약 1000명의 베트남 게릴라를 지원할 수 있다”고 제안하기까지 했었다.
1945년 7월 16일 OSS 사령부로부터 베트민과 접촉하라는 임무를 받은 패티의 후배 장교이자 ‘디어 팀(Deer Team)’의 지휘관 앨리슨 토머스 소령은 대략 50명 규모의 게릴라 부대원들과 함께 북쪽 산악 지대의 작은 마을에 낙하산으로 투하되었다. 앨리슨 토머스 소령이 이끄는 사슴팀은 보 응우옌 잡(Vo Nguyen Giap)이 이끄는 게릴라 부대와 함께 작전을 수행했다. 잡 장군은 OSS에게 은신처를 제공했고, OSS는 기관총, 브라우닝 자동소총, 수류탄 등을 낙하산으로 제공하여 베트민을 현대식 무기로 무장시켰으며, 훈련까지 담당해줬다. 이렇게 미군의 훈련을 받은 잡 장군의 게릴라 부대는 몇 개의 일본군 외곽 초소를 공격하여 성과를 올렸고, OSS의 사슴팀 또한 베트민과 공동 작전을 펼치면서 관할 지배 지역을 확대해 나갔다.
그러나 이들의 협력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황이 급격히 변하면서 변화를 맞게 되었다. 1945년 6월 오키나와 전투에서 미국에게 패배한 일본은 미국의 B-29 폭격기에게 융단 폭격을 받게 되면서 패망해가고 있었다. 호치민과 OSS가 협력하게 되었을 쯤에는 태평양에서의 전황이 급격히 바뀌어 가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호치민은 베트민 조직에 있는 지도부들과 협의하여 ‘총 봉기’를 계획했고, 1945년 8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이를 실행에 옮겼다. 총 봉기를 일으킨 호치민은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키고, 1945년 9월 2일 100만 명의 인파가 모인 하노이 광장에서 ‘베트남의 독립(Vietnam Independence)’을 선포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호치민과 베트민은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과 협력하는 노선을 택했다. 그 당시 호치민을 만났던 미국의 주요 인사들은 그를 사회주의자 보단 민족주의자로 판단했고, 전쟁이 끝나가던 시점에 베트민 조직에게 소총과 수류탄, 기관총 등의 무기를 지원해주기도 했으며, 그들과 협력해 일본군에 맞서 소규모의 전투를 벌이기도 했었다. 당시 호치민과 협력했던 OSS의 아키메데스 패티 소령은 자신이 쓴 책 <왜 베트남인가?>에서 “우리들 중 몇 사람은 우리가 제공한 무기와 훈련이 언젠가는 프랑스 사람들과 싸울 때 사용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의 상대가 미국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고 밝혔다. 안타깝게도 호치민과 협력관계를 구축했던 미국은 그로부터 20년 뒤, 한때 자신들이 지원했던 그들과 전면전을 치르게 된다. 그런점을 생각해 보았을 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호치민의 협력관계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역사라 할 수 있다.
참고 자료
윌리엄 J 듀이커, 정영목(역), 『호치민 평전』, 푸른숲, 2003
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역),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을유문화사, 20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