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제국주의 침략과 학살의 역사

  

1492년 소위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알려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er Columbus)는 미국인들에게 있어 영웅으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통해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했고, 그 결과 미국이 탄생했다는 믿음을 미국인들은 가지고 있다. 이러한 콜럼버스의 이미지는 세계사 교육이 미약한 한국인들에게도 무비판적으로 수용되는 경우가 다분하다. 그러나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Howard Zinn)이 쓴 미국민중사(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를 보면 미국인들이 찬양하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무수히 많은 원주민을 학살하고 노에로 삼았던 침략자이자 제국주의자의 민낯이 낱낱이 드러난다.

 

1451년 이탈리아 제노바 근처에서 양모 직공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행적은 1477년 리스본에 나타날 때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장인이 선장이었던 콜럼버스는 바다 지도를 제작하는 일에 종사했고, 그 과정에서 항해술을 배웠다. 1484년부터 콜럼버스는 동생과 함께 항해에 들어갈 비용을 댈 후원자를 찾기 시작했고, 처음에는 포르투갈 왕 주앙 2세에게 후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런 우여곡절을 격던 중 스페인으로 건너가 이세발 여왕(Queen Isabel)을 만났고, 비록 몇 번의 거절을 당했지만, 1492년에 뜻을 이루게 됐다. 당시 스페인의 이세벨라 여왕은 해외 진출에 관심이 많았기에 콜럼버스를 후원함과 동시에 그들에게 소위 계약서를 작성하게 했는데, 이계약이 바로 산타페 계약(Santa Fe)’이다.

 

149283일 스페인 팔로스 항을 출발한 콜럼버스 일행은 120명의 선원과 3척의 배를 동원했다. 이들은 1년을 버틸 수 있는 충분한 양의 보급품도 실었고, 인도를 찾기 위해 오랜 기간에 걸쳐 서쪽으로 향해 계속했다. 14921012일 항해를 시작한 지 약 70일이 지났을 무렵 그들은 바하마 군도에 상륙했다. 바하마에 상륙한 콜럼버스는 그 섬의 이름을 서인도제도(West Indies)라고 붙였고, 거기에 살고있는 사람들을 인도사람이라고 하여 인디언(Indian)’이란 의미에서 인디오(Indio)’라고 붙였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이들에게 보답해 준 것은 학살과 노예화 뿐이었다. 그는 원주민을 보았을 때부터 그들을 노예로 삼을 생각을 했다. 아라와크족(Arawaks)이 마을에서 나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그들을 보았을 때, 다음과 같은 생각을 기록으로 남겨두었다.

 

그들은 앵무새와 솜뭉치, 창 외에도 많은 물건을 가져와서 유리구슬이나 매종(사냥용 매의 다리에 묶는 종)과 바꿨다. 그들은 자기들이 갖고 있는 물건들을 기꺼이 교환했다. 그들은 탄탄한 체구에 잘생긴 외모를 지닌 건장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심지어 무기가 무엇인지조차 모른다. 내가 칼 한 자루를 보여주자 아무 생각 없이 칼낳을 쥐다가 손을 베이기도 했다. 이들에게는 철이 없다. 이들의 창은 막대기에 불과하다. 이들은 좋은 하인이 될 듯하다. 50명만 있으면 이들 모두를 정복해서 마음껏 부릴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미국민중사 I p.15

 

당시 콜럼버스가 무엇보다도 원했던 정보는 황금의 위치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에게 약속한 것이 있었기에 맨손으로 갈 수가 없어 원주민들을 납치하고 포로로 붙잡아 배에 태운 뒤,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스페인 마드리드 궁정에 도착한 콜럼버스는 터무니 없는 과장된 내용을 보고했다. 콜럼버스는 이사벨라 여왕에게 아시아와 중국 연안의 한 섬에 도착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허구였고 거짓말이었다. 그는 이런 과장 및 왜곡 보도를 하면서 자신들이 포로로 붙잡았던 원주민에 대해서도 보고를 올렸고, 그 대가로 다음 항해에서 필요한 만큼의 황금과 원하는 만큼의 노예를 가져오겠다고 약속했다.

 

이렇게 하여 다음항해에서 콜럼버스는 17척의 배와 200여 명의 선원을 투입하여 노예와 황금을 가져오기 위해 서쪽으로 항해를 했다. 그들은 카리브 해의 섬들을 차례로 돌며 원주민을 포로로 잡았다. 또한 콜럼버스의 선원들은 무리지어 돌아다니며 황금을 약탈하고 여자와 어린이들을 성적 노리개와 노예로 사로잡았다. 현재 아이티 섬 근처에 근거지를 마련한 콜럼버스는 1495년 대규모 노예사냥에 나섰다. 그들은 아라와크족의 남자와 여자 그리고 어린이 1500명을 스페인인들과 개들이 지키고 있는 우리 안으로 몰아넣은 뒤, 우수하다고 생각되는 500명을 골라 배에 실었다. 이들 가운데 200명이 항해 도중에 목숨을 잃었다. 훗날 콜럼버스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팔 수 있는 모든 노예를 계속 잡아 보냅시다라고 하며 기록을 남겼다.

 

콜럼버스와 선원들은 거대한 금광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한 아이티의 시카오 지방에서, 14세 이상의 원주민 모두에게 석달마다 일정한 양의 금을 모아오라고 명령했다. 금을 발견하면 구리표식을 달아줬지만, 그게 없는 원주민들은 발견되는 즉시 두 발이 잘린 채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그곳에도 황금 덩어리는 없었고, 결국 원주민들은 도망쳤으며, 그 과정에서 사냥개를 대동한 선원들에게 붙잡혀 죽어갔다. 이에 분노한 아라와크족은 저항군을 모아 머스킷 총으로 무장한 스페인인들에 맞섰는데, 스페인인들은 사로잡은 포로의 목을 매달거나 불태워 죽였다. 이런 콜럼버스의 학살과 수족절단으로 인해 아이티의 원주민 25만 명 가운데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1498년과 1501년 콜럼버스는 다시 아메리카 대륙으로 제3, 4차의 항애세서 트리니다드섬과 베네수엘라 해안 그리고 파나마 일대를 탐색했다. 콜럼버스가 대서양의 북미대륙을 다녀온 이후로부터 스페인의 식민지 지배는 아메리카 대륙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많은 원주민들이 서양인들에 의해 탄압받고 학살당했고, 지배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이미지는 대체로 긍정적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노예로 삼았으며, 스페인 왕실에 거짓 보고까지 해간 인물이었다. 수많은 미국인들에게 신대륙 개척자로 인식되고 있는 인물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토착 원주민들에게 있어서 원수나 다름없는 인물이다. 2009년 당시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이었던 우고 차베스(Hugo Chavez)콜럼버스의 날로 지정된 1012일을 원주민 저항의 날로 바꿈으로써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았었다. 신대륙 발견 이후 무수히 많은 원주민을 학살하고 노예로 일삼았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이제는 그가 저질렀던 잔혹한 침략사의 진실을 제대로 알 필요가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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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일기를 들고 행진하는 일본군)

 

  

1931년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중국 대륙에 대한 정복 야욕을 드러냈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1937년 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193777일 베이징의 서남 교외의 노구교에서 총성이 울렸는데, 일본은 이를 빌미로 중국에 대한 침략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었다. 중일전쟁을 시작하게 된 일본은 자국의 군대를 중국 대륙에 파견했고, 그해 813일에는 상하이까지 전쟁이 확대됐다. 당시 중국국민당의 장제스와 공산당의 마오쩌둥은 내전을 중단하고 제2차 국공합작을 성사시켰지만, 진격해오는 일본군을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난징에 입성한 일본군 탱크)

 

그해 11월 중국국민당 정부의 지도자 장제스는 수도를 난징에서 충칭으로 이전하고, 일본군은 중국국민당 정부의 수도인 난징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중국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에 도달한 일본군은 19371213일 난징의 청부청사가 함락되면서 일본군 수중에 완전히 떨어졌다. 난징을 완벽히 점령한 일본군은 이 시점부터 약 2개월 동안 차마 말로 표현하기 힘들거나 상상조차 하기 힘든 잔인한 학살과 강간등의 전쟁 범죄를 자행했다. 당연히 이러한 전쟁범죄는 당시 일본군의 주도로 이어졌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난징에 입성하여 행진하는 일본군)

 

당시 일본군이 했던 전쟁범죄들중 대표적인 것을 언급하자면 중국군 포로나 민간인들의 목베기 시합을 들 수 있다. 당시 일본군 장교였던 무카이 도시아키와 노다 쓰요시가 10명의 목을 누가 더 빨리 베나 재는 시합, ‘100인 참수경쟁을 한 사실이 있었는데, 참으로 기가 막힌 것은 이러한 전쟁범죄가 당시 일본의 언론에 의해 스포츠 특보마냥 대서특필되었다는 사실이다. 그외에도 300인 베기에 도전한 다나카 군키치라는 범죄자도 존재했고, 이런 식으로 무수히 많은 전쟁 포로와 민간인들이 일본군의 목베기 시합에서 희생됐다.

(파놓은 땅에다 몰아넣고 중국인을 학살하는 일본군)

  

2개월간의 과정속에서 일본군의 전쟁은 상상을 초월했고, 이런 피해에 있어서 중국인 여성들 또한 무수히 많이 일본군에 의해 강간당했다. 수만 명에 달하는 중국 여성들이 일본군에 의해 강간당했고, 이에 반항하면 일본군들은 무자비하게 살해했다. 난징 지역 곳곳에서 일본군의 강간과 살인 학살 그리고 방화가 지속되었다. 또한 일본군은 난징을 점령하기 전 전투기들로 난징 전역을 무차별 폭격하여 많은 인명 피해를 만들었다

(목을 배놓고 기뻐하는 일본군)

 

이러한 학살이 계속되자 당시 나치당원이던 존 라베(John Rabe)를 포함하여 난징에 있던 외국인들은 난징 국제안전지대를 설정하여 일본군의 학살로부터 중국인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존 라베와 같은 외국인 선교사, 기업과 그리고 외교관들은 이미 일본군에게 점령당한 상하이에서 만들어진 상하이 안전구를 본떠서 안전지대를 형성했고, 대략 25만 명 이상이 중국인이 이 피난처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당시 일본에서 보도된 중국인 목베기 시합 기사)

 

1946년 극동국제군사재판, 이른바 도쿄 재판 판결에 따르면 중일전쟁 초기 일본군이 저지른 난징대학살로 인해서 살해된 사람은 비전투원 12000, 패잔병 2만 명, 포로 3만 명, 시민 5만 명 등을 합하여 13만 명이 살해되었다 하지만, 나중에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최소 20~30만 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결론내려졌다. 수치의 정확성을 떠나서 수십만명의 중국인이 일본군의 무차별 학살에 의해 죽었고, 이러한 전쟁 범죄에 대해 일본 정부는 현재까지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난징 대학살이 끝난 이후에도 일본군은 자신들이 점령한 중국 지역에서도 이와 비슷한 크고 작은 민간인 학살을 전개했다. 이 결과 총 1500만 명에 달하는 중국인들이 중일전쟁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것이 바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얘기하는 대동아공영권의 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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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한 단상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해 공부하면, 일각에서 알려진 수천만명 학살자의 이미지는 지극히 서방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과장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슨 ˝2천만을 죽였네˝, ˝4천만을 죽였네˝와 같우 소리가 인터넷과 유튜브에 떠돌고 하루에 4천명 혹은 한달에 4만명씩 학살했다는 해괴망측한 이야기도 들리지만, 지극히 악마화된 수치다.

1980년대의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공개된 자료들에 따르면 1939년 당시 노동수용소와 이주지, 구치소에 수용된 인원은 약 200만 명이었고 그중 실제 정치범은 45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1937년에서 1939년 사이에 노동수용소에서 죽어간 사람은 영미권 보수 사학자들이 주장하는 300만에 훨씬 못 미치는 16만 명이었으며, 그 기간에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도 수백 만이 아닌 약 10만 명이었다. 굴라그 수감자도 최대가 250만이었고, 이것은 1990년대 미국의 감옥보다 300만이나 적은 수치다. 즉 솔제니친 같은 허장성세들이 거시적인 측면에서 최소 10배 이상은 과장한 것이다.

물론 스탈린 또한 대숙청 도중 과오도 있었고, 무고한 희생도 있었다. 근데 왜 이러한 과오가 있음에도 우익들과 수꼴들은 만족하지 않는걸까? 그것은 본인들이 얘기하고 싶어하는 ˝악마새끼 스탈린˝의 이미지에는 뭔가 부적합한 수치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평가는 그렇다 쳐도 그가 이룩한 무상 복지체제만큼은 세계적인 업적이고 재평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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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시기 동유럽과 서유럽)

 

1945년 8월 제2차 세계대전은 파시즘에 맞서 인민전선을 구축했던 미국과 소련의 승리로 끝이 났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은 19세기부터 전 세계적 헤게모니를 장악했던 영국과 프랑스 같은 구제국주의 국가들의 쇠락을 의미했고, 세계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많은 역할을 했던 자본주의 국가 미국과 사회주의 국가 소련의 급부상을 의미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과 소련은 이데올로기적으로 다른 체제였다. 미국은 자본가들의 기업과 이윤축적이 우선시 되는 자본주의 국가였던 반면, 소련은 사적 소유가 폐지되고 공공분야에서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사회주의 국가였다. 이 때문에 미국과 소련은 냉전이라는 45년간의 세계사적 흐름속에서 서로가 정치, 경제, 군사 그리고 문화적으로 경쟁했다. 미국과 한국을 포함한 역사 학계에선 미국의 개입보다 소련의 군사적 개입과 노골적인 폭력이 더 많았다고 주장하고, 그 사례를 더 많이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진실은 그러할까?


냉전시대의 서막을 알린 것은 1946년 3월 영국의 정치인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 미국 미주리주 풀턴시에서 했던 한 연설이었다. 처칠은 “발트 해의 슈체친에서 아드리아 해의 트리에스테까지 유럽 대륙에 철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다”라는 발언을 했는데, 이것은 냉전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와같은 윈스턴 처칠의 발언이 증명하듯이, 미국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시작으로 소련과 스탈린 그리고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게 됐다. 특히나 1945년 루스벨트 사망 후 부통령 자리에서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된 ‘해리 트루먼(Harry Truman)’은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이 매우 강한 인물이었다. 쉽게 말해 전형적인 반공주의자였다. 윈스턴 처칠의 ‘철의장막(鐵의帳幕, Iron Curtain)’ 발언이 있은 지, 1년 뒤인 1947년 3월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발표한다.

(트루먼과 스탈린)

 

트루먼 독트린의 내용은 “무장한 소수 세력이 기도하는 정복에 저항하는 자유 국민을 돕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다.”라는 것이었다. 이 말은 미국이 “소련과 공산주의에 맞서 단호히 대응하겠다.”는 목적의식을 공개적으로 천명한 행위였다. 이렇게 미국이 공산주의에 대해 반감을 드러내고, 이에 소련 또한 반발하게 되자, 전 세계는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경쟁하는 체제로 거듭났다. 미국은 소련을 단지 경쟁자가 아닌 직접적인 위협으로 제시했지만, 그러나 이 냉전에서 가장 많은 영향력과 개입을 행사했던 것은 스탈린(Stalin)이 아니라 미국이었다.

(그리스 내전 당시 지도)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우익 군주독재국가였던 그리스는 나치가 물러난 직후 영국이 군사개입을 통해 대중적인 좌익 민족해방전선을 제제했다.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그리스에선 좌익 게릴라 운동이 성장하기 시작했고, 그리스 좌익은 대략 25만 이상이나 되는 지지세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스의 사태는 결국 내전으로 이어졌는데, 여기서 그리스 사태를 감당하지 못한 영국은 미국에게 지원요청을 보냈다. 미국의 트루먼 행정부는 ‘트루먼 독트린’에 의거하여 그리스의 우익세력들을 지원했다. 미국은 아테네 우익 정부에게 대포와 급강하 폭격기, 네이팜 폭탄 등 7만 4000톤에 달하는 군사장비를 보내줬고, 제임스 밴 플리트(James Van Fleet) 장군이 이끄는 250명의 미군사고문단을 전투현장에 보내 1949년 그리스 좌익을 붕괴시키고 우익독재 정부를 세웠다.

(베를린 봉쇄 당시 물자를 수송하는 미항공기)

 

미국의 트루먼이 보기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럽은 불안했다. 당시 미국 휘하의 서유럽의 상황은 공장에는 사람이 없고, 철도는 전쟁으로 파괴되어 제대로 운행되지 못했다. 특히 1946년 말에는 서유럽에서 강추위까지 몰아닥쳤었다. 그런 상황속에서 서유럽의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 그 나라 공산당이 민중들의 지지를 받게 됐다. 특히 이탈리아의 경우가 그러했다. 1948년 이탈리아가 선거에서 사회당과 연합하여 정권을 잡을 것 같자 미국은 그것을 막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었고, 만일을 대비해 과거의 파시스트들을 끌어모아 무장 지하 조직인 글라디오(Gladio)를 건설했으며, 군사적 개입을 할 것을 계획했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 제국주의가 중국에서 철수하자 중국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선 다시 갈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국은 중국에 조지 C. 마셜 장군을 중국에 파견하여 중국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화해 및 중재를 시도했었지만, 1946년 장제스의 선제공격으로 내전이 시작되자, 태도가 급변했다. 중국 민중은 부패한 관료집단인 장제스의 국민당을 선택하기보단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을 선택했다. 그러나 미국은 장제스 정권에게 막대한 원조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미국은 부패한 장제스 군대에게 20억 달러나 원조했다.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무기와 장비로 싸웠는데, 미국은 장제스를 지원함으로써 중국에서 공산주의가 확산하는 것을 막고 싶었다.

(서울에 입성한 미군)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남북으로 분단된 한반도에서도 미국의 개입은 이어졌다. 미국은 한반도에 상륙하여 미군정을 실시한 이래로, 한반도 이남의 자주적인 조직과 단체들을 인정하지 않고, 일제에 협력했던 친일 세력들을 이용했다. 이에따라 자주적인 통일 국가를 준비했던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가 미군정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고,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승만 세력들이 통일 운동과 노동운동을 진압하고 방해함에 따라, 한반도 민중의 자주적인 결정권은 무시됐다. 이렇게 해서 미군의 탄압으로 대구와 제주도 여수순천에서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학살당했고, 1950년 한국전쟁으로까지 이어졌다.

(중국 통일 당시 포스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베트남 문제에도 개입했다. 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지화 하려 하자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났는데, 미국은 1950년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식민지 해방 전쟁을 냉전의 논리로써 접근했고, 프랑스에게 막대한 무기와 자금을 지원했다. 1950년 초기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1000만 달러의 전쟁 비용을 대신 감당했지만, 전쟁이 끝나가던 1954년 이러한 전쟁 비용은 10억 달러를 초과하여 프랑스가 부담했던 총 전쟁 경비의 80%에 이르렀다. 미국은 필리핀 문제에도 개입했었다. 1945년 필리핀에서 급진주의자들이 세력을 확장하였지만, 이에 미국은 개입하여 이들을 분쇄했고, 1950년대 마르코스 우익독재 정부를 수립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남미의 과테말라에서 유비코 정권을 숙청하고 민주적인 총선으로 대통령이 된 아르벤스가 미국에 의존된 사회 체제를 바꾸려는 모습을 보이자, 미국은 아르벤스의 반대세력을 이용하여 그를 제거하기 위한 공작에 착수했었다. 1951년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피비 포춘PB Fortune’이라는 비밀공작을 승인하면서 아르벤스 정부의 정복공작은 시작되었고, 미국의 CIA는 과테말라의 우익 군부 잔당들과 접촉하여 아르벤스 정부의 전복을 위한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1954년 6월 결국 미국의 공작으로 아르벤스 대통령은 사임하게 되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프랑스와 미국 관계)

 

이처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이 시작되면서 미국은 무수히 많은 개입을 통해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패권을 넓힐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과 경쟁하던 소련의 경우는 이보다 확장력이 약했다고 할 수 있다. 소련은 발칸반도의 게릴라 본거지에서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혁명적 체제를 수립하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다. 소련이 자신들의 체제를 전파하기 위해 시도했던 것은 티토의 유고슬라비아와 알바니아였는데, 이들의 경우는 스탈린의 조언에 거역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또한, 당시 스탈린의 입장은 국제적으로나 각국 내에서나 전후의 정치가 포괄적인 반파시스트 동맹의 틀 안에서 계속돼야 한다는 것이었고, 따라서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붉은 군대가 점령했던 동유럽 지역에서 지배하거나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긴 했지만, 군사력을 통해서 자신의 영향권을 그 이상으로 확대하고자 하지는 않았으며, 냉전 시기 소련이 동유럽 국가에 형성한 사회주의 블록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당시 붉은 군대가 점령한 지역에 국한됐다. 이것이 바로 냉전 초기 미국과 소련의 결정적인 차이였다.


미국의 반공정책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소련이 1948년 베를린을 봉쇄하는 조처를 하긴 했지만, 미국은 소위 ‘마셜 플랜(Marshall Plan)’이라 하여 서유럽 경제를 대대적으로 회복시키고 원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서베를린에 대규모의 수송기를 동원하여 물자를 공수했다. 그 결과 미국은 소련의 봉쇄를 풀었고, 1949년 독일은 동독과 서독으로 나뉘었다. 베를린 봉쇄 사건 이후 미국은 군사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1949년 북대서양 조약 기구로 불리는 NATO를 창설했다. 나토 창설의 목적 중 하나는 소련에 맞서기 위함이었다. 이에 맞서 1955년 소련은 바르샤바 조약 기구를 창설했다. 이렇듯 냉전은 군사적 혹은 경제적으로 우위에 서 있던 미국이었기에 소련보다 더 위협적이었고, 당시 소련은 이에 대응하는 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정리해보자면 미국은 소련에 비해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무수히 많은 개입과 간섭을 했다. 이것이 바로 반공주의적 논리가 절대로 보지 못하거나 무시하는 역사적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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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일본 제국주의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식민지 조선에서는 친일로 변절하게 되는 이들이 많아졌다. 1930년대 중후반부부터 한반도는 중일전쟁을 도발한 일제의 병참기지가 되었고, 물적수탈에 이어 이때부터는 지원병제ㆍ국민정신총동원령 등 인적 수탈을 위한 법적ㆍ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40년 4월 일본이 세운 만주군관학교에 지원한 24살의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기혼과 연령이 초과되어 입학이 어렵게 되자 ‘일본인으로써 부끄럽지 않게 개와 말처럼 충성하겠습니다!’라는 혈서를 써 입학했다. 그가 바로 소위 국내 수구세력들이 황제나 신을 다루듯이 모시는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다.

 

1917년 경상북도 구미에서 태어난 박정희는 1930년대 교사생활을 하다가 일본 군인의 길을 걷게 됐다. 그의 형 박상희는 동아일보 선산지국장 등을 지낸 민족주의ㆍ사회주의 성향의 지역 엘리트였지만, 자신의 형과는 다르게 박정희는 친일의 길을 걸었다. 그 당시 일본 육사는 침략전쟁의 기간장교를 육성하는 기관이었고, 박정희가 지원한 만주군관학교 또한 마찬가지였다. 박정희가 이 학교에 지원하면서 쓴 혈서의 내용은 친일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계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은 소생은 일반적인 조건에 부적합한 것 같습니다. 심히 분수에 넘치고 두렵지만 무리가 있더라도 아무조록 국군에 채용시켜 주실 수 없겠습니까.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출처 : 개발 독재자 박정희 평전 p.60~61

1940년 박정희가 입교한 만주군관학교는 1931년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괴뢰 황제 푸이를 내세워 만든 괴뢰만주국 수도 신징 교외 라라툰에 있었다. 당시 제2기생은 만계와 일계가 각각 240명씩 도합 480명이었고, 이중 조선인은 박정희를 포함하여 모두 11명이었다. 그리고 이 만주군관학교 출신 중 이주일ㆍ김동하ㆍ윤태일ㆍ박임항ㆍ방원철 등 5명이 1961년 박정희가 주도한 5.16 쿠데타에 가담했던 인물들이었다. 여기서 신진군관학교 예과과정에 들어간 박정희는 제3련 제3구대에 소속되어 군사훈련을 받고 태평양 전쟁이 한참이던 1942년 3월에 졸업했다. 당시 만선일보에 실렸던 기사를 보면 다카키 마사오라고 불리는 인물이 240명의 졸업생 중에서 수석졸업의 우수성을 보였던 것으로 나온다. 그 다카키 마사오가 바로 박정희다.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에 있으면서 1936년 2.26 사건에 가담했다가 만주군으로 밀려난 일본인 장교 간노 히로시 소령과 만났었다. 2.26 사건이란 1936년 2월 26일 일본 육군 황도파인 노나카 시로 대위와 청년 장교들이 14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수상관저와 경시청 등 주요 관청을 습격하여 점거했던 사건이었다. 즉 박정희는 이런 2.26 사건의 주모자랑 만나 큰 영향을 받았고, 그것이 나중에 1961년 5.16 쿠데타로 이어진 것이다. 아무튼 당시 만주군관학교 우등생이었던 박정희는 그 특전으로 1942년 10월 도쿄 교외에 자리한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 3학년에 편입했다. 그리고 여기서 박정희는 자신의 이름을 오카모토 미노루로 바꾸었다. 두 번이나 창씨개명을 한 것이다.

 

박정희는 일본 도쿄에 있는 육군사관학교에서 본과 2년 과정을 수료하면서 우수한 성적을 보였다. 그가 졸업할 때는 3등이란 우수한 성적을 보였고, 이로 인해 조선인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일본육군대신상을 수상했다. 1944년 4월 일본육사 제57기로 졸업한 박정희는 견습사관으로 임관되어 소만 국경지대의 관동군 23사단 72연대에 배속됨으로써, 2개월 근무한 후 같은 해 7월 만주국군 제6관구 소속 보병 제8단으로 옮겨 소대장으로 근무했다. 1944년 7월에서 8월까지 박정희가 속해 있던 부대는 일본군과 합동으로 중국 팔로군을 토벌하는 일에 나섰고, 박정희도 그 토벌작전에 참가했다. 당시 중국의 팔로군은 중국 화북지역에서 활약한 중국공산등 주력군이었고, 이들 중에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팔로군에 합류한 조선인들도 있었다. 분명한건 중국의 팔로군은 일본 제국주의와 싸운 항일군이었고, 조선 청년들 또한 ‘일제 타도’를 목적으로 팔로군에서 활약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박정희는 그들을 토벌하는 일본군이었다. 심지어 국제언론인 문명자는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동창생 두 명을 인터뷰 했는데, 놀라운 사실을 밝혔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박정희는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말 한마디 없는 음침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내일 조센징 토벌 나간다”라는 명령만 떨어지면 그렇게 말이 없던 자가 갑자기 “요오시 토벌이다”하고 벽력같이 고함을 치곤했다. 그래서 우리 일본 생도들은 “저거 좀 돈 놈이 아닌가”하고 쑥덕거렸던 기억이 난다.”

 

출처 : 개발독재자 박정희 평전 p.71

 

당시 일본군으로 글려간 조선인 학병이나 징용군 가운데에는 탈주하여 항일군에 가담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박정희는 항일군대를 토벌하는데 열정을 다했다. 따라서 박정희가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하더라도, 그는 명백히 친일 행위를 한 것이나 다름 없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가던 1944년 중국 팔로군 토벌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박정희는 승승장구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45년 7월 그는 만주국군 중위로 진급했다. 같은 해 8월에는 보병 8단 예하 부대와 둬룬으로 진출하여 소련군의 진격을 막으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고 8월 10일부터 이동을 개시항려 8월 17일 싱룽에 집결했다. 그러나 독소전쟁에서 단련이 된 소련군은 8월 9일 일본 제국주의 군대를 공격한 이래로 1주일 만에 만주에 있던 일본군 주력부대를 궤멸시켰고, 박정희의 군대는 소련군과 교전을 치르기도 전에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이처럼 박정희는 1940년 만주군관학교에 지원한 이래로부터 1945년 조선이 해방될 때까지 일본군 장교로서의 삶을 보냈다. 그는 혈서를 써 일본군이 되기를 원했고, 실제로 그걸 성취해냈다. 또한 1944년부터는 중국 항일군대인 팔로군을 토벌함으로써, 친일행각을 보였다. 따라서 박정희는 민족문제연구소가 펴 낸 친일 인명 사전에 나오듯이 명백한 친일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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