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시위에 대한 단상

작년 봄부터 홍콩시위가 격해지기 시작했다. 중국 공산당 정부에 반대하여 대규모 민중항쟁적 성격을 가지고 일어난 홍콩시위는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 시위에는 수백만에 달하는 시민들이 참가했고, 홍콩 전체가 시위 현장으로 돌변했다. 몇몇군데는 화염병과 돌을 던지며 저항하는 전선이 나타났을 정도고, 중국측은 이를 진압하고자 했다.

홍콩시위가 격해지는 가운데 한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홍콩시위를 보며 5.18 경제민주화운동과 6.10 민중항쟁을 떠올렸던 것 같다. 영화 ‘택시운전사‘나 ‘1987‘를 보며 홍콩에서 시위하는 대학생들이 하는 얘기를 듣다보면 그럴싸하기도 하다. 또한 그들은 민주주의라는 가치(정확히 말해 서구식 민주주의)를 가장 중요시하고 있다.

홍콩 시위에서 중국측의 대응은 전 세계 매스미디어를 통해 전파됐다. 홍콩 시위를 대응하는 중국의 행위가 잘못됐고 그렇지 않고를 떠나서 전 세계는 중국에 대해 비판적인 모습을 보이고 홍콩 시위에 대해 긍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홍콩시위의 전 세계적 지지는 한국 사람들 또한 좌우를 막론하고 이를 지지하게 만들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홍콩 시위를 지지하는 대규모 연대집회가 있었다. 오히려 홍콩시위에 대해 일반적인 견해와 다른 논평을 냈던 민중당(현재 진보당)은 홍콩 시위 지지자들에게 대차게 까였다.

물론 홍콩시위가 격해지며 중국 공산당측에서 보인 대응은 상당히 강경적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 홍콩시위가 지나치게 극우 반공주의적 관점이 반영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다. 이것은 마치 한국전쟁에 대한 일반적인 입장과 다를게 없다.

홍콩 시위가 일어나게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그 중에선 중국의 자본주의식 극심한 빈부격차나 생계문제도 한점했다. 즉 홍콩과 중국 사이의 모순에는 자본주의적 모순이 정확히 있다. 그러나 홍콩 시위가 격해지면서 국내의 노동문제나 인권탄압 빈부격차등 자본주의적 모순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극우 반공주의자들이 홍콩 시위를 전적으로 지지하기 시작했다.(물론 그들의 진 목적은 친미반공기조하에 근거한 중공정권타도지, 홍콩 시민의 생활 질 향상이 아니다.) 박근혜 탄핵 무효를 외쳤던 그들까지 말이다. 미국 공화당 네오콘들도 마찬가지였다. 난 이점이 흥미롭다.

여기서 부터 난 홍콩시위에 대해 많은 의심을 했었고, 지금도 이런점들 때문에 개인적으로 지지하지 않고 있다. 물론 그렇다 해서 필자는 홍콩 시위 자체가 파시스트들의 시위라는 일부좌파적 견해라든지, 모든 사람이 미국 앞잡이라든지 하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이 시위 자체가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반공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가 없다고 본다.

홍콩시위를 지지하고 연대하는 사람들의 행위에 대해 딱히 욕하거나 그들이 무조건 잘못됐다 결론짓고 싶지도 않다. 다만 홍콩 문제의 역사적 맥락을 파악하려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적으로 ‘너 중공 지지자냐?‘라는 식의 논리는 전개하지 않았으면 한다. 어쨌든 난 홍콩시위에 대해 긍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따라서 홍콩시위를 다르게 보는 관점도 필요하고, 인정받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홍콩시위에서 제기되는 문제에 대해 얘기하겠다. 수백만의 참가한 홍콩시위는 걷으로 보기엔 중국 공산당에 맞서는 양상이지만, 그들이 모인 이유중 가장 결정적인 것은 중국의 자본주의식 체제가 빛어낸 극심한 빈부격차다. 그 빈부격차를 해결할 수 있는건 영미식 자유주의 체제는 역사가 입증하듯이 절대 아니다. 결과적으로 전인민적 복지와 민중혜택을 혜택을 적용한 사회주의다. 이것이 핵심이다. 따라서 홍콩시위는 사회주의로 나가기 위한 방향으로 가야지, 자본주의를 활성화 시키기 위한 방향으로 가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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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공방전이 한참이던 1941년 12월 독일의 총통인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는 이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미국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기 때문이다. 1941년 12월 7일 아침 일본은 하와이에 있는 미해군 기지를 기습 공격했다. 애리조나호를 비롯한 다수의 미국 군함과 선박이 파괴되었고, 이로써 27개월간 중립을 표방해오던 루스벨트 대통령이 선전포고를 감행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Pearl of Harbor)의 소식은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치 독일에게도 전해졌고, 이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매우 기뻐했다. 그는 기뻐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전쟁에서 질 수가 없다. 3천 년 동안 한 번도 정복당하지 않은 나라가 동맹국으로 있기 때문이다. 그런나라에게 공격을 받았으니 루스벨트도 충격이 컷을 것이다.”

 

히틀러의 이런 황당무계한 전제의 밑바탕에는 그가 오래전부터 품어 온 시나리오가 있었다. 즉 일본이 참전하면 미국은 태평양에 발이 묶이게 되고 극동에 식민지를 둔 영국도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의 심복이자 선전장관인 괴벨스 또한 이런 히틀러의 반응에 맞장구를 쳤다. 그는 히틀러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며 맞장구를 쳤다.

 

“일본과 미국이 전쟁에 돌입하면서 세계의 그림이 확 바뀌었다. 이제 미국은 소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영국에도 변변한 물자를 공급하기 어려운 입장에 놓일 것이다.”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선포하자 히틀러 또한 미국과 전쟁을 하고자 했다. 그러나 나치독일의 모든 정치권력자들이 미국과의 전쟁을 환영하지는 않았다. 특히나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리벤트로프가 그러했다. 리벤트로프는 히틀러에게 “우리가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참가할 의무는 없습니다. 그건 그들의 전쟁입니다. 먼저 미국을 도발한건 일본입니다.”라고 말했다. 물론 히틀러는 이 말에 대해 “그것은 동맹 조약을 무시하는 것”이라며 듣지 않았다.

 

진주만 기습 공격이 있은 다음날 히틀러는 베를린 주재 일본 대사인 오시마 히로시를 불러 이를 축하해줬다. 또한 히틀러는 12월 8일에서 9일 사이 카를 되니츠 제독이 이끄는 유보트 부대에게 미국 배를 침몰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히틀러와 나치 독일은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하기 위해 차츰차츰 그 과정을 진행해 나갔다.

 

미국을 향한 나치 독일의 선전포고는 진주만 기습 공격 4일 후인 1941년 12월 11일에 이뤄졌다. 목요일 오후에 있던 히틀러의 ‘대미선전포고’ 연설은 1시간 30분 동안 이루어졌다. 그는 연설 전반부에선 유럽 전선 즉 소련과의 전쟁에서 나온 전과를 세세하게 나열했고, 후반부에선 “악마처럼 교활한 유대인의 사주를 받고 루스벨트가 전쟁으로 독일을 파괴하려 한다.”는 주장을 하며 반유대주의를 자극했다. 이렇게 하여 히틀러는 미국을 제2차 세계대전의 유럽전선으로 끌어들였다.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한 다음 날 히틀러는 진주만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부터 설명했다. 일본이 나서지 않았으면 독일이 언젠가는 미국에 선전포고를 햇을 것이라 그는 이야기했다. 또한 그는 “확전이 되면 유보트도 대서양에서 활개를 펼 수 있고, 유보트에 침몰되는 적의 선박도 크게 늘어나며 이것은 전세를 크게 좌우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히틀러는 굳이 일본이 일으키지 않았더라도 미국하고 전쟁을 할 생각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로부터 2일 뒤인 12월 14일 히틀러는 베를린 주재 일본 대사인 오시마 히로시에게 독일독수리황금대십자훈장을 수여했다. 이처럼 히틀러는 미국과의 전쟁을 환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생각했던 장밋빛 그림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얘기였다. 오히려 현실을 아주 정확하게 직시했던 인물은 히틀러가 아닌 윈스턴 처칠이었다. 일본이 미국에게 선전포고 했다는 소식을 들은 처칠은 매우 기뻐하며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감행했다. 그는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하는 것을 보며 연합국의 승리를 확신했다. 이후 역사가 증명하듯이 제2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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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의 아프팍 전쟁 오늘날의 마르크스주의 5
조너선 닐 외 지음, 차승일 옮김 / 책갈피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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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의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전쟁

COVID-19가 전 세계적으로 창궐하는 가운데, 아프가니스탄에선 전쟁이 사실상 종결됐다. 아프가니스탄인들이 20년간 치렀던 미국과의 전쟁은 그 이전 미국이 치렀던 베트남 전쟁보다도 긴 시간이었다. 그런 전쟁이 올해 2월 29일 도하합의를 성사시키며 미국의 패배로 끝난 것이다.

사실 아프가니스탄인들은 20세기 후반부터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러왔다. 1979년 소련의 침공으로 시작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은 10년간 전개됐다. 그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7~8년 동안의 내전 즉 종족분쟁과 세력분쟁이 1990년대 아프가니스탄을 휩쓸었다. 그런 내전이 얼마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아프가니스탄은 2001년 미국과의 전쟁을 치르게 된 것이었다.

2001년 9.11 테러로 인해 미국인 3000명 이상이 사망했다.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단 한번도 자국 영토가 공격받아본 적이 없던 미국은 충격에 휩싸였다. 그것도 테러리즘에 바탕을 둔 단 한번의 공격으로 진주만 기습 공격 보다 더 많은 사망자가 나왔으니 미국사회는 충격과 공포 그리고 이슬람에 대한 공포에 휩싸였다.

9.11 테러를 시작으로 미국이 일반적인 침공을 감행했던 나라가 있다. 하나는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였고 다른 하나가 아프가니스탄이었다. 위에서 상술했듯이 아프가니스탄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에 속한다. 이들은 미국에게 침략 받던 시점에서 이미 20년동안 전쟁을 치른 상태였다. 즉 2001년 9월 미국이 침략해서 일으킨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세계 최강의 경제국이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를 공격한 것이었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할때 내세운 명분은 크게 나눠 두가지다. 첫번째는 9.11 테러를 일으킨 알카에다가 아프가니스탄에 있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여성억압적이고 비민주적인 국가라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미국이 표면적으로 내세운 명분이었지,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한진정한 목적은 아니었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한 진정한 이유는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중동 사이의 패권경쟁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함이었다.

9.11 테러 이후부터 미국 네오콘의 상징인 도널드 럼즈펠트 국방장관과 부통령 딕 체니는 9.11의 희생양으로써 이라크를 침공하고 싶어했다. 아프가니스탄은 지리적으로 이란과 붙어있어 미국이 장악했을시 그들이 소위 ‘악의축‘이라 부르던 이란을 압박하는데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다. 따라서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가거 이라크에 들어가면 이란을 견제하는데 미국이 매우 유리해진다. 이것이 바로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간 진짜 이유였다.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미국은 개전 초기 큰 저항을 받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 농촌에서 저항이 일어나긴 했지만, 초반에 들어간 미군이 한 것은 지역을 다스리며 통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2004년부터 아프가니스탄에선 탈레반이 주도하는 게릴라전이 미군 점령 지역에서 거세게 일어났다. 여기에 미군이 대응하는 방식은 간단했다. 과거 베트남 전쟁에서 사용했던 게릴라 소탕 방법 그대로였다.

그 결과 오히려 아프가니스탄인들이 미국을 더 지지하지 않게 되었다. 미군이 얘기하는 소위 부수적 피해는 민간인들이 많이 죽게되는 이유였다. 과거 베트남에서 그랬듯이 미군은 아프가니스탄에 병력 증강을 감행했고, 이것은 부시 행정부를 이어받은 오바마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오바마는 부시 행정부 보다 더 나갔다. 그들은 탈레반이 있을거라 예상되는 파기스탄까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했다. 2007년부터 시작된 드론 공격은 오바마 정부가 들어서면서 그 횟수가 더 늘어났다. 오바마 또한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수렁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것이다.

이 책은 오바마 집권 초기인 2009년에 출간된 책이다. 책에서 언급하듯이 실제로 오바마는 2010년 아프가니스탄의 주둔 병력을 10만 명 이상까지 증강했다. 10만 명까지 증강하던 해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사한 미군은 최소 500명을 넘겼었다. 2009년에 집필한 책이기에 그 이후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한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 점이 조금 아쉽다.

지난 12월 필자가 읽었던 ‘아프가니스탄 왜?‘라는 책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이 그것보다 더 났다. 왜냐하면 전자는 아프가니스탄 지원사업에 나섰던 인물이 쓴거라 미국에 대한 비판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오바마의 아프팍 전쟁‘은 미제국주의에 대한 고찰이 있다.

미국이 침략해서 일으킨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과거 베트남 전쟁에서 보였던 미국의 실책과 과오 그 자체다. 미국은 애초에 가망이 없는 전쟁을 일으켰다. 이게 바로 베트남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연결고리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왜 미국의 패배로 끝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알고 싶은 이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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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 - 역사의 전복자들
길(도서출판)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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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일 영국의 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가 96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그는 오스트리아계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살아온 인물이었고,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역사를 재조명하고자 했던 인물이었다. 그가 바로 에릭 홉스봄(Eric Hobsbawn)이다. 젊은 시절부터 생을 마감할 때까지 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삶을 살았던 에릭 홉스봄은 생전에 여러 저서들을 남겼다. 그의 대표적인 4대 저서인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 극단의 시대는 마르크스주의적인 관점에서 역사를 조명한 성과물로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준책들이다.

 

필자는 올해 초 SNS상에서 잘 알고 있는 한 동지로부터 에릭 홉스봄의 저서를 알게 됐다. 이에 따라 필자는 그가 집필한 극단의 시대를 전 페이지는 아니더라도 일부분 참고할 용도로 읽게 되었는데, 그에게 상당한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20세기의 역사를 조명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그가 인식한 냉전에 대한 관점이 많이 기억에 남는다.

 

그의 저서 극단의 시대는 분명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역사를 조명한 명저지만, 지난번 액기스로 읽은 그 책을 뒤로하고 필자는 이번에 그의 저서인 혁명가 역사의 전복자들을 읽었다. 이 책이 더 끌렸던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저 혁명가 역사의 전복자들의 책 표지가 끌렸기 때문이다. 그의 책 혁명가 역사의 전복자들은 총 5부로 나뉘어있다. 공산당의 투쟁을 다룬 1부와 아나키즘에 대한 성찰과 비판을 다룬 2, 마르크스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노동운동에 미친 영향을 다룬 3, 군인과 게릴라를 다룬 4부 그리고 반란자와 혁명을 다룬 5부로 나뉘어 있다.

 

아나키즘에 대한 그의 성찰 및 날카로운 비판은 상당히 볼만 했다. 아나키즘이라는 이데올로기가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무대책성을 홉스봄은 아주 날카롭게 비판한다. 그와 동시에 홉스봄은 과거 아나키스트들이 혁명에 헌신하여 기존의 체제를 타파하고자 했던 역사적인 부분을 인정하기도 한다. 즉 홉스봄은 아나키즘의 양면을 아주 잘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각 당의 공산당의 역사적 사건과 활동들을 통해 유럽 각국의 공산주의 운동사를 조명한다. 그는 기존에 소련의 스탈린주의에 머물러 있는 점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기도 하지만 그렇다 해서 소련과 현실 사회주의 그 자체를 절대로 부정하지 않는다. 물론 이 점에서 홉스봄은 필자와 좀 다른 견해를 가졌는지는 몰라도, 그가 끝까지 소련의 사회주의 체제를 믿었다는 점에서 그를 나쁘게 보지 않는다.

 

그가 마지막 장인 5부에서 다루는 주제는 대체로 68혁명 시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무엇보다 그가 가지고 있는 성에 대한 인식은 좀 구식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한 점이 있긴 하지만, 그 나름 고찰해볼만한 분석을 하기도 한다. 그는 68혁명에서 왜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키지 못했는지를 분석하고자 했다. 그의 분석은 생각보다 타당한 근거를 제시한다. 따라서 그는 혁명을 성공하기 위해 어떤 방법이 적합한지 그 대안이 뭔지를 자기 나름의 생각을 가지고 알려준다.

 

책의 제4부에서 다룬 군인과 게릴라 파트에서 그는 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콩 게릴라 투쟁을 통해 게릴라전의 특성과 본질을 분석한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베트남 전쟁에서의 베트콩은 민중과 함께하는 조직이다. 따라서 그는 이에 맞서는 미국은 그런 게릴라전의 본질을 쉽게 무시하고, 거기에는 반공주의라는 사상이 있다고 주장한다. 베트남 전쟁을 통해 그가 분석한 게릴라에 대한 내용도 상당히 감명 깊었다.

 

에릭 홉스봄의 혁명가 역사의 전복자들1960년대(특히 68혁명을 전후로 해서)1970년대 그가 쓴 논문들을 모으거나 핵심을 간추린 책이다. 개인적으로 그의 분석이 상당히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의 글들이 신선하게 다가온 이유에는 그가 끝까지 영국 공산당에 남아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마르크스주의자로 남았던 행적도 한몫 했던 것 같다. 그의 책 혁명가 역사의 전복자들은 홉스봄 나름의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여러 가지 역사와 주제를 분석한 책이기에 읽어볼 가치가 있다.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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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진주만 기습공격을 이미 알고 있었다(United States already expected the Japanese Attack in Pearl Harbor)?

많은 사람이 알고 있듯이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 이유는 일본때문이었다. 1939년 9월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은 ‘중립국(Neutral)‘을 표방했었다. 폴란드 침공이 시작된 1939년 9월부터 진주만 기습 공격이 있던 1941년 12월까지 미국은 총 27월이라는 기간동안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고, 그과정에서 대다수의 유럽은 나치 독일이 점령했다. 1941년 6월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했을때도 미국은 중립을 유지했을 정도인데, 이는 미국이 유럽 문제에 군사적으로 개입하기를 꺼려했다는 반증이다.

물론 미국은 전쟁에 참전하기 이전부터 연합국들(특히 영국)에 막대한 물자를 지원하고 있었는데, 나치독일의 유보트(U-Boat)가 이에 훼방을 놓기도 했다. 유보트의 어뢰공격으로 미국의 상선들이 침몰당했지만, 히틀러에 대한 선전포고는 있지 않았었다. 그렇다면 왜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경험에 있었다. 1917년 4월 2일 참전을 결정했던 윌슨 행정부는 자원병 100만 명 확보를 목표했지만 모집 공고 6주 동안 입대를 자원한 사람은 7만 3천 명에 불과했다. 결국 자원이 아닌 징병을 통해 병력을 충원할 수 있었다. 여기서 윌슨 행정부는 방첩법, 선동금지법 등 악법을 제정해 시민들의 반전운동을 철저히 억압하는 한편, 대대적 선전 선동을(참전 결정 직후 결성된 선전기구 CPI의 홍보 요원은 자그마치 7만 5000명이었다) 통해 국민들의 전쟁 의욕을 고취시켰다. 결국 100만 이상의 대규모 병력을 확보한 미국은 러시아 혁명 이후 대부분의 병력을 서부전선에 투입한 독일 제국의 군대의 공세를 무찌를 수 있었고, 1918년 11월 독일측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1차 대전의 실상이 드러나면서 미국인의 반전여론은 극에 달했다. 수정주의 역사가들과 의회 청문회 등을 통해 미국의 참전은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JP 모건 등 대기업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고 이를 위해 무고한 미국 시민의 목숨이 희생됐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미국인들의 시각은 어떤면에선 전쟁 참전을 회피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미국인들의 강력한 반전 여론에 따라 미 의회는 1935년 이후 4차례 중립법을 제정해 미국의 해외 전쟁 참여를 막으려 했지만, 국제 정세는 또다른 전쟁을 향해 나아갔다. 1933년 히틀러가 독일의 수상자리에 올랐고,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에티오피아를 침공했으며,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이처럼 전세계는 전운에 휩싸였고, 1939년 9월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미국은 27개월 동안 중립국을 표방했지만,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됐다. 진주만 기습공격 다음 날인 1941년 12월 8일 미국의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의회에서 일본의 불법 기습을 공식 발표했고, 연설 직후‘전쟁 참가법’을 발표했다. ‘전쟁 참가법’은 상원에서는 만장일치로 하원에서는 388:1로 가결됐다. 이로써 미국은 일본에게 최종적으로 선전포고를 한 것이었다.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은 진주만 기습 공격이 있던 날을 ‘치욕의 날(Day of Infamy)‘로 선포했을 정도로 이 사건은 미국인들에게 역사적으로 각인되었다.

그러나 이 진주만 기습 공격이 사실은 ˝미국이 알고서 계획한 것˝이라는 주장이 역사학계에서 나오기도 했었는데, 이들의 주장은 상당한 근거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진주만 기습 공격을 미국측이 이미 알고 있었다는 주장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번째, ‘루스벨트를 비롯한 미국의 핵심 정책 입안자들은 일본을 자극함으로써 일본이 먼저 미국을 공격하도록 도발한 것은 아닌가?‘

두번째, ‘미국이 일본의 비밀 암호문을 감청하고 해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을 감춤으로써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부추긴 것은 아닌가?‘

세번째,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막거나 방해할 수도 있었던 미군의 군사 활동을 미국의 고위 정치지도자가 고의로 저지하지는 않았는가?‘

이와같은 시각이 등장한건 1948년 미국 역사가 찰스 비어드가 <루스벨트 대통령과 1941년 전쟁의 도래 : 겉모습과 실제에 관한 연구>를 펴내면서 본격 제기됐는데, 이 시기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인데다가 미소냉전이 격화되는 시기어서, 그의 진주만 기습 공격에 대한 수정주의적 역사관은 그 시기 철저히 매장당했다. 하지만 이런 수정주의적 시각은 다른 미국인 학자들이 이어받기도 했는데, 1970년대 ‘일본 제국 패망사(The Rising Sun, The Decline and Fall of The Japanese Empire 1936~1945)‘의 저자인 존 톨랜드(John Tolland)가 그러했다. 이후에도 이런 수정주의적 주장들이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수정주의적 논란을 확실히 잠재우지는 못했다. 즉 진주만의 진실은 여전히 논란거리로 남아있다.

진주만 기습 공격에 대한 수정주의적 시각은 한편으로 우리에게 큰 논란거리를 만들기도 한다. 일본 제국 패망사를 쓴 존 톨랜드의 주장을 보면, 태평양 전쟁을 백인 대 아시아인의 구도로 보았는데, 그런 구도에 증거하여 ˝미국이 일본을 자극하지 않았다면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발상도 있다. 저자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이는 일본 제국의 위험성을 간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진주만 기습 공격 이전 일본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조셉 그루(Joseph Grew)‘라는 인물이 루스벨트에게 ˝미국에 대한 일본의 공격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여러번 알렸다. 또한 11월 25일 미국의 최후통첩을 일본에 보내기 하루 전날, 루스벨트는 ˝미국이 며칠 안에 일본과 총격전을 벌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일본의 공격이 11월 27일-12월 1일에 있을 것으로 예상하기까지 했다. 이날 전쟁부 장관 스팀슨은 백악관에서 헐, 녹스, 마셜 육군 참모총장, 스타크 해군 작전부장 등과 회합을 가진 후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문제는 어떻게 해서 일본이 먼저 공격하도록 할 것인가, 우리 편에 지나치게 큰 피해가 없이 일본의 선제공격을 유도할(maneuver) 것인가이다˝

이와같은 사실을 생각해볼때 미국이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유도했을거라는 주장이 그저 빈말은 아니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미국의 의도하고 안하고를 떠나 진주만 기습 공격을 시작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은 유럽과 태평양 전선에서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 초기 미국은 태평양 전역에서 일본군한테 밀렸다. 필리핀 사령관이던 맥아더는 필리핀을 등지고 호주로 도망쳤고, 괌과 웨이크 같은 미국측 섬들과 심지어 알래스카령 섬들까지 일본군에게 점령당했다. 일본군의 진격은 거침없이 이어져 버마와 말레이시아, 싱가폴, 인도네시아, 파푸아뉴기니까지 접수했다. 이것은 영국 미국, 중국,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했던 ‘ABCD 포위망‘의 일시적 붕괴를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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