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존 톨랜드의 저서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2에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작성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의 전개양상은 엄밀히 따지자면 독일·이탈리아·일본이 중심이 된 추축국과 미국·영국·소련·중국·프랑스 등이 중심이 된 연합국의 전쟁이었다추축국 안에도 헝가리나 루마니아 그리고 불가리아 등에서 차출된 그 나라 병력들이 있었지만그래도 역사적인 맥락에서 독일의 동맹세력으로써 알려진 이는 바로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이탈리아일 것이다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추축국(Axis Power)은 독일·이탈리아·일본이 중심적인 나라들이었다그러나 일본은 지구반대편에 있었고지정학적인 부분에서 나치독일의 동맹국은 사실상 이탈리아 밖에 없었다.

(무솔리니와 히틀러, 무솔리니는 히틀러의 파시스트 선배다. 물론 1930년대 히틀러의 독일이 성장하고 군사력을 발휘하면서 그 위치는 히틀러가 더 앞서게 됐다.)

 

그러나 독일의 동맹국인 이탈리아는 군사적인 측면에서 매우 무능력한 군대였다2차 세계대전에서 이탈리아의 침략은 거의 다 실패를 맞보아서 독일군의 지원을 받아 유지하는 신세였다대표적으로 이탈리아의 알바니아와 그리스 침공은 이탈리아군의 무능력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는 사례였다또한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군은 게릴라전을 전개하던 티토의 빨치산에게도 연전연패를 맞보았다북아프리카전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이탈리아군은 영국군에게도 계속 패배를 맞보았다.

(오토 슈코르체니, 히틀러가 아끼던 군인으로 ss친위대 소속이었다. ss에 있으면서 여러 특수작전을 전개했었다.)

 

이처럼 이탈리아군은 제2차 세계대전 와중에서 독일군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고독일군의 지원에 의존하고 있던 형편이었다북아프리카 전투가 지속되고 있던 1942년과 1943년 이탈리아는 영미 연합군의 대대적인 폭격을 받고 있었다거기다 독일의 롬멜 장군이 투입됐던 북아프리카 전투도 1943년 5월에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그로부터 2개월 뒤인 7월 연합군은 이른바 허스키 작전(Operation Huskey)을 감행하여 시칠리아 섬에 상륙했다.

 

1943년 7월 24일 연합군이 이탈리아 본토에 위협을 가하자 이탈리아의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를 포함한 국가 파시스트당 내부에서도 무솔리니를 축출하려고 했다결국 왕에게 사임 요청을 받은 무솔리니는 실각했고피에트로 바돌리오 원수를 행정수반으로 임명됐다이탈리아의 지도자가 된 바돌리오는 두 달 뒤인 1943년 9월 8일 연합국과 휴전협정을 맺었다.

(무솔리니를 구출하기 위해 투입된 특공대, 여기에는 독일 공수부대인 팔슈름 야거도 투입됐다.)

 

당연히 무솔리니는 체포되었다체포된 무솔리니는 로마에서 161km 떨어진 아펜니노 산맥의 높은 봉우리인 그란사소 꼭대기 부근의 한 호텔에 감금되어 있었다거기다 연합군은 이탈리아 수도 로마를 향해 진격해 나갔다따라서 히틀러는 비록 도움은 안 되는 인물 무솔리니를 구출하기로 결심한다이것은 아돌프 히틀러 입장에서도 이 선택지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고그렇게 해서라도 연합군의 진격을 막아야 했다.

(무솔리니가 감금되어 있던 호텔과 인근 지역 위치)

 

무솔리니 구출작전을 위해 히틀러는 SS친위대 대위인 오토 슈코르체니(Otto Skorzeny)를 불렀다그는 키 190cm인 인물로 특수작전에 매우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오토 슈코르체니 휘하의 특공대가 편성되었다이 특공대는 독일 공수부대인 팔슈름 야거 출신들이었다히틀러의 명령을 받은 오토 슈코르체니와 107명의 특공대는 9월 12일 일요일 오후 1시 글라이더에 오라 이륙했고무솔리니가 감금되어 있던 곳에 착륙했다글라이더에서 나온 독일 군인 4~5명이 기관총을 설치하였고슈코르체니의 글라이더는 호텔에서 18m도 안 되는 거리에 착륙했다슈코르체니의 부대원들은 저항하는 경비병력을 쓰러뜨리고 무솔리니가 있는 방문을 열고 그를 구출했다.

(호텔 근처에 착륙했던 독일 특공대의 글라이더)

 

무솔리니를 만난 오토 슈코르체니는 다음과 같이 말했는데그것은 지도자가 나를 보냈다당신은 이제 자유다였다이를 들은 무솔리니는 슈코르체니를 껴안았다고 한다또한 무솔리니는 나의 친구 아돌프 히틀러가 나를 버리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서 특공대원들에게 엄청난 감사의 표시를 했다고 한다무솔리니를 구출한 특공대원들은 목초지 경사면에서 겨우 안전하게 착륙한 피젤러슈토르히 소형 비행기에 올랐고이륙 과정에서 불가피할 추락의 위험이 있었지만비행기는 이륙했다.

(교전을 치르며 호텔 진입을 시도하는 독일 특공대)

 

구출된 무솔리니는 9월 14일 아침 일찍 동프로이센으로 향하여 히틀러를 만났고매우 고맙다는 표시를 히틀러에게 했다이 작전을 성공시킨 오토 슈코르체니는 영원히 히틀러가 아끼는 군인이 되었다거기다 무솔리니가 구출되자 독일인의 사기가 올랐다물론 히틀러가 그를 구출한 것은 연합군의 진격을 막기 위한 목적이 강했다따라서 구출된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북부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즉 살로 공화국을 수립했다.

(구출되어 비행기에 오른 무솔리니, 오토 슈코르체니와 함께 찍었다.)

 

그러나 살로 공화국은 군대가 그리 많지 않았다따라서 이탈리아 전선에서 연합군에 맞서 싸웠던 대부분의 군대는 독일군이었다거기다 1941년에 점령되었던 유고슬라비아에선 티토가 이끄는 빨치산이 무솔리니의 권력 공백기를 틈타서 유고슬라비아 내에 있던 이탈리아군 거점 지역들을 단숨에 접수해버렸다따라서 거기서도 나치 독일은 이탈리아군을 버려야 하는 상황에 놓였었다결국 살로 공화국은 제대로 된 싸움 한번 해보지 못하고 독일 꼭두각시 노릇(그 이전부터도 사실상 꼭두각시였지만)을 하다가 1945년 4월 25일 공식적으로 사라졌다그리고 무솔리니도 이탈리아 빨치산 유격대에 체포되어 총살되는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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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을 반공 이데올로기적으로 보는 이들은 파블로프의 개들이다!

베트남 전쟁은 베트남 독립전쟁 혹은 베트남 민족해방전쟁으로 봐야한다. 미제국주의자들의 침략에 맞선 베트남 인민들의 전인민적 항쟁말이다. 미제는 제네바 협정에 조인하기가 무섭게 남베트남에 응오딘지엠이라는 미제국의 앞잡이를 세웠고, 총선을 거부하며 독립운동 세력들에게 야수적인 범죄를 저질렀다.

이들에게 있에 독립운동가들은 공산주의자였으며, 처형ㆍ구금ㆍ체포의 대상이었다. 이들은 고문단이라는 이름으로 제국주의 침략 군대를 증강했으며, 네이팜 폭탄 투하와 고엽제 살포 전략촌 건설과 같은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또한 비밀리에 파견된 특수부대들은 북베트남과 라오스, 캄보디아의 영토에 잠입하여 이른바 침략행위를 일삼았다. 당연히 이런 과정에서 인명피해는 공산주의자 소탕 따위로 미화됐다.

1964년 미제국주의자들과 사이공 괴뢰세력들은 자신들의 침략행위 정당화 하기위해 북베트남의 영해에 침범하여 남베트남의 특수부대를 상륙시켰고, 구축함의 어뢰공격을 조작하였다. 이것이 통킹만 사건이었고, 통킹만 사건은 사전에 미제가 계획한 자작극이었다.

더 나아가 미제는 1965년 2월 플레이쿠에 있는 미군 특수부대 기지가 공격당했다는 구실을 들어 이른바 북폭에 나섰고, 남북베트남 전역을 네이팜 폭탄과 소이탄으로 초토화 시키는 야수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이것은 히틀러 파시스트도당이 저지른 만행과 맞먹는 수준이었으며, 미제국주의자들의 반인륜적인 전쟁범죄였다. 공격하는 시설들이 거의다 학교, 병원, 요양시설, 고아원, 협동농장, 공장같은 민간시설이었기에, 이것은 계획적인 학살이었다.

따라서 베트남 전쟁은 침략자 미제에 맞선 호치민의 민족해방전쟁이었으며, 미제가 끌어들린 한국과 오스트레일리아 등은 부도덕한 침략전쟁을 자행했던 것이다. 이러한 본질적인 사실조차 무시하는 이들은 역사공부를 안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오로지 이승만식 친미반공주의가 머리에 박힌 파블로프의 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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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20년에 출간된 소병국 교수의 동남아시아사에 있는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됐습니다최근에 미얀마에서 쿠데타가 일어나고 아웅산 수치의 복권을 통한 민주주의의 열망이 불타오르고 있습니다그런 상황이라 한 번 아웅산 수치의 아버지가 어떠한 인물인지 알아보는 것도 좋겠다는 차원에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19세기 당시 동남아시아의 역사를 보면 태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들이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식민 지배를 받은 역사다현재 미얀마라고 불리는 버마 또한 19세기 중반부터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이것도 영국령 인도제국으로서 병합 당했으며, 19세기 중후반 영국의 식민지배가 강화되면서 이에 저항하는 독립운동이 거세졌다. 1900년대부터 버마에서는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1930년대에 접어들었을 무렵 미국발 경제 대공황으로 인한 영향과 더불어 민족주의 운동이 다소 괴격해지기도 했었다. 1915년 영국령 버마에서 한 남자아이가 태어났는데그가 바로 아웅산(Aung San)이었다.

(아웅산, 그는 버마의 독립영웅으로 인정받고 있다. 또한 최근에 쿠데타로 체포된 아웅산 수치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버마 독립을 위해 영국을 방문했을 당시의 사진이다.)

 

버마 건국의 아버지로 유명한 아웅산은 1932년 양곤대학에 들어가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인물이다그 또한 마르크스주의에 영향을 받았고, 1939년 1월 31일 버마공산당을 창설하여 민족해방활동을 이끌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이 동남아시아에서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당시 동남아시아에 있던 독립운동 세력들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해방자로 받아들이는 치명적인 실수를 했었다.(물론 베트남의 호치민의 경우는 시작부터 항일투쟁을 했지만.) 버마의 독립영웅 아웅산 또한 마찬가지였다그들은 일본의 도움을 받아 BIA라는 독자적인 단체 및 군대를 만들었다.

(BIA 깃발을 흔들고 있는 버마 시민들과 버마군인들, 아웅산을 비롯한 이들은 당시 대동아공영권을 부르짓던 일본을 해방자로 맞이했다. 물론 그것은 크나큰 실책이었다.)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그러자 일본의 지원을 받아 독립을 이루고자 했던아웅산과 BIA는 일본의 버마 침공을 도왔다. 1942년 3월 일본은 버마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고그해 7월에는 버마 전역이 일본에게 넘어갔다물론 일본의 지원을 받았던 BIA의 규모는 1942년 3월에는 1만 명이었지만 4개월 뒤에는 2만 3000명에 이르렀다물론 일본 군정은 BIA를 해산하고 아웅산을 총사령관으로 소수 정예인 버마방위군(BDA)를 창설해 감시와 통제에 들어갔다.

 

이와 더불어 일본은 카렌족과 같이 영국 식민지 시절 분할통치로써 이용된 소수민족들을 이용하여 본인들의 통치를 강화했으며버마의 대중종교인 불교의 유물들을 가져가기도 했다또한 일본군의 점령으로 버마인들의 생활이 전반적으로 처참해졌으며, ‘죽음의 철도라 불리는 콰이강 교량 건설과 같은 일들을 저질렀다또한 이 과정에서 항만이나 교통시설 등 대부분의 기반시설이 파괴되어 버마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졌으며일본은 화폐 개혁을 통해 일본 화폐를 쓰도록 강요하고 이를 어길 시에는 고문을 가하게 했다이로 인한 인플레이션이 심화됐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태평양 전쟁의 전황은 일본에게 불리해져 갔고, 1942년 일본의 잔인한 점령이 시작되자 아웅산은 이른바 버마 독립을 위한 독립투쟁에 나섰다이 과정에서 아웅산은 일본과 맞서 싸울 연합전선 구축에 노력을 쏟아 부었다그는 버마의 좌파 독립운동 단체인 공산당과 민중혁명당하고 손을 잡았다이렇게 연합한 이들은 1944년 자유와 독립을 위해서는 파시스트 일본을 몰아내야 한다는 강령을 채택했다버마 내 반파시스트기구가 결성된 것이다반파시스트기구는 일본의 패망이 임박하자 아웅산을 국군 총사령관으로 내세웠고일본 파시스트 정권을 완전히 몰아내고자 했다또한 이들은 버마 내에서 무장봉기를 준비했으며, 1945년 3월 27일 대대적인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1942년 수도 양곤에 입성한 버마 독립군, 당시는 일본군에 의해 군대가 사라지기 전이었다.)

 

1945년 5월 3일 영국 인도연합군이 버마의 수도 양공을 탈환했다당시 아웅산이 이끌던 반파시스트기구는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즉각 독립할 것을 기대했다당연하게도 전 지배자인 제국주의 영국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따라서 양측의 전쟁은 불가피한 것으로 기정사실화 되었다당시 영국은 아웅산이 주도하는 반파시스트기구의 후신인 반파시스트인민자유연맹을 해산하려고 했다이런 과정속에서 아웅산은 영국과 담판을 벌여 버마의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다.

 

1946년부터 아웅산은 버마의 독립을 논하기 위해 영국과의 협상을 시작했다이러한 영국과의 협상과정에서 이슈가 되었던 것은 독립된 버마가 영국연방에 남는가 하는 문제였다. 1947년초부터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고, 1월 13~27일 아웅산은 영국 수상 클레멘트 애틀리의 초대로 런던에서 독립 회담에 참석했다이 회담의 결과로 다음과 같은 합의 사항이 버마에 발표되었다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버마는 1년 내에 독립을 달성할 것이며독립 버마가 영연방에 남을지는 스스로 결정한다. 1947년 4월 의회 선거를 실시하고 5월에 의회가 개원하며과도기에는 각료회의가 정부 기능을 한다변방의 소수민족들이 새 버마에 합류할지는 스스로 결정한다.”

 

귀국한 이후 아웅산은 1947년 2월 12일부터 버마의 일부 소수민족 지도자들을 만나 협상을 시도했으며이들과의 통합 협상에서 성공을 이끌었다다만 최대 소수민족인 카렌족의 경우는 달랐지만대다수의 소수민족과의 합의를 본 것은 사실이었다선거는 예정대로 치루어졌다아웅산의 조직은 210석 중 204석을 얻어 압승했다이로써 반파시스트인민자유연맹은 정통성을 확보했고새로 구성된 의회에서 헌법을 제정했다또한 영국연방에 가입하지 않고신생 독립 국가를 수립하는 안을 의결했다그러나 버마의 완전한 독립을 앞두던 1947년 7월 19일 그는 각료 회의실에서 암살당했다그의 나의 32세였고아이러니 하게도 해방 이후 좌우합작운동을 이끌었던 여운형이 괴한의 총탄에 암살당한 날이기도 했다.

(현재 버마에 있는 아웅산 동상, 그는 지금까지도 버마에서 독립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

 

1947년 9월 24일 새 정부의 제헌의회가 새 헌법을 채택했고, 10월 17일에는 영국과 협의한 협정서를 바탕으로 작성된 독립 문서에 서명했다아울러 버마-영국 간 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었고영국은 버마의 부채 4000만 달러를 탕감해주었다. 12월 영국 의회가 독립 문서를 비준했다. 1948년 1월 4일 버마는 드디어 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른다하지만 아웅산 암살 뒤 탄생한 독립국가 버마에서는 영국과의 협의과정에서 서방의 지원을 받기 위해 탄압받았던 공산당과 카렌족과 같은 소수민족들이 무장투쟁을 벌이면서 내전에 돌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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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당시 중국 연안에 온 딕시 사절단의 데이비드 배럿 대령과 주더 그리고 마오쩌둥)


2차 세계대전 초기 중립국의 위치를 고수하던 미국은 194112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을 받게 되면서 전쟁에 참전하게 됐다. 2차 세계대전에서 유럽과 태평양 전선 양측에서 전투를 치렀던 미국은 미드웨이 해전에서의 승리가 있던 19426월 새로운 조직 하나를 창설하는 데, 그게 바로 현재 CIA의 전신인 OSS 즉 전략사무국이었다. 전략 사무국은 유럽과 태평양 전선에서 반파시즘 연합전선을 구축하는 차원에서의 활동을 전개했었다. 쉽게 말해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활동했던 조직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당시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우던 중국은 미국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었다. 특히나 랜드리스(Land Lease)라 하여 미국은 중국 국민당 정부에게 결코 적잖은 물자와 탄약을 지원했었다. 장제스 휘하의 중국 국민당군이 전통적인 전투를 많이 치렀던 것은 사실이지만, 미국인들에게는 무능하고 부패한 집단으로 보였다. 물론 장제스와 국민당 측의 부정부패는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고, 전투에서의 무능함을 보였던 점이 미국인들 눈에 들어왔던 것도 있었다. 중국 내 미군 총사령관이었던 조지프 스틸웰 중장의 경우 국민당 군대는 일본군과 싸우는 데 최소한의 물자만 쓰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분명 국민당군은 전통적인 군사작전에 있어서 결코 적잖은 전투를 치렀지만, 본인들이 기존에 부각시켰던 이미지를 결정적으로 다시 한 번 미국에게 부각시켰다. 바로 1944년 일본이 전개한 대규모 군사작전인 이치고 작전에서였다. 60만 명의 병력과 800대 이상의 탱크가 동원되었던 이 작전에서 장제스의 국민당군은 참패를 거듭했었다. 이것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장제스 정권을 권위적이며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으로 인식하고, 국민당에 등을 돌리게 된 이유였다. 여기서 미국은 중국에서 또 다른 세력과 접촉을 시도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마오쩌둥이 이끄는 연안지대의 중국 공산당이었다.

 

2차 국공합작 이후 대장정에서의 명성과 민심을 토대로 세력을 확장했던 마오쩌둥은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과정속에서 군대와 당원의 숫자를 기하급수적으로 증강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장제스군은 1941년 이른바 신사군 사건을 일으켜 1만 명에 달하는 중국 공산당 정예부대인 신사군을 포위하여 궤멸시키기는 짓을 벌이기도 했었다. 그래도 마오쩌둥은 세력을 확장했다. 1942년부터 시작한 당내 권력투쟁 및 계급투쟁이었던 정풍운동은 1943년 마오쩌둥이 중국 공산당에서 세력을 공고히 하면서 마무리 되었으며, 연안에 근거지를 둔 중국 공산당 또한 국민당이나 일본에게 있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거기다 마오쩌둥은 좌파적 저널리스트인 에드가 스노의 저서 <중국의 붉은 별>을 통해 명성을 얻기까지 했었다. 따라서 미국은 이러한 중국 공산당과 접촉하고자 했던 것이다.

 

아무튼 루스벨트 정부는 장제스와 중국 국민당 정부에게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장제스는 공산당과 싸움을 완전히 끝내기 전에는 일본과 전쟁하지 않는다며 고집을 꺽지 않는 모습도 보였다. 또한 실제로 버마 전투 당시 장제스는 미국의 지원하는 장비의 상당량을 공산당과의 싸움을 대비하는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다. 따라서 1944년 미국 군부와 정보기관 일각에서는 중국공산당과의 협력을 공개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했다.

 

1944722일 미국 C-47 항공기 한 대가 연안 상공아 나타났다. 창륙하는 과정에서 왼쪽 바퀴가 앞에 있는 무덤에 부딪혀 휘청거리며 프로펠러까지 떨어져 나가는 불상사가 있었지만 활주로에 착륙했다. 이 비행기에는 OSS 출신 인사들이 있었다. 이들이 바로 딕시 사절단(Dixie Mission)이었다. 딕시 사절단은 중국 공산당의 저우언라이의 영접을 받았고, 이 사실을 알게된 마오저둥은 해방일보에 우리의 친구들이란 제목의 글을 게제 함으로써 환영 분위기를 조성했다. 딕시 사절단은 마오를 비롯한 공산당 지도자들에게 헐리우드 영화들을 보여주었으며, 특히나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스가 반응이 좋았다고 한다.

 

그해 8월 초 딕시 사절단의 두 번째 파견 인원이 도착했으며, 외교관인 레이먼드 러든이 사절단을 이끌었다. 당시 미국의 목적은 분명했다. 미국은 중국공산당과 합의를 이룸으로써 국민당과 공산당이 힘을 합쳐 일본을 물리치는 계기를 만들고 싶어 했다. 1944117일 패트릭 헐리 소장이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 연안을 출발했고, 마오쩌둥을 만나게 됐다. 당시 헐리는 국민당과 공산당의 협정문 초안을 직접 작성하여 마오쩌둥에게 제시하기도 했다. 비록 조항 몇몇 부분에서 마오쩌둥의 입장과 부딪혔지만 서로 신뢰를 보이는 의미에서 양측이 최종안에 정식으로 서명까지 했었다.

 

실제로 그들은 많은 것을 약속했었다. 마오쩌둥은 미국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1944년 공산당의 명칭을 신민주주의당으로 바꾸는 것을 생각하기도 했었다는 이야기가 존재할 정도다. 또한 19457월 말에는 이른바 미국 감시단(American Observer Group) 32명이 연안을 방문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미국 OSS가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당과 협력관계를 늘려나가면서 중국 공산당에 대한 물자지원도 행해졌다. 또한 마오쩌둥은 OSS의 총책임자 윌리엄 도노반에게 정보와 자금 그리고 무기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으며,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겨냥한 중대 신호를 보내기도 했었다. 더 나아가 OSS와 중국 공산당 군대가 일본이 장악하고 있는 산둥반도에 대한 공동 상륙작전을 추진하기로 합의까지 했었다.

 

미국이 주도하는 국공연합 정책 아래 마오쩌둥은 미국 루스벨트 정부와의 관계 개선에 심혈을 기울였다. 루스벨트 정부는 소련과의 협력 아래 중국 대륙을 국민당과 공산당으로 분할하여 관리하는 방향으로 협력하고 있었지만, 19454월 그가 서거하면서 강경한 반공주의자인 해리 트루먼이 권력을 승계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당연히 미국과 중국 공산당의 관계는 멀어졌고, 냉전의 조짐이 보이면서 미국도 중국 국민당 정부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갔다. 1946년 제2차 국공내전이 장제스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자, 미국은 제2차 국공내전에서 20억 달러의 원조를 장제스에게 제공하기에 이른다.

 

참고자료

 

마오쩌둥 평전, 알렉산더 판초프 스티븐 레빈, 심규호(), 민음사, 2017

 

마오쩌둥 2, 필립 쇼트, 양현수(), 교양인, 2019

 

일본 제국 패망사, 존 톨랜드, 박병화() 이두영() 권성욱(감수), 글항아리, 2019

 

미중 패권전쟁은 없다 (G2 시대 한국의 생존 전력), 한광수, 한겨레출판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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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대패한 프랑스는 제네바 협정에 따라 인도차이나에서 물러나게 됐다. 프랑스가 물러나자 제네바 협정에 따라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기점으로 남북 분단되었다. 북베트남에는 프랑스에 맞서 독립을 쟁취했던 호치민이 이끄는 공산당 정부가, 남쪽에는 1940년대 후반 프랑스가 미국을 끌어들이기 위해 선포했던 바오다이가 이끄는 베트남국이 유지됐다. 이 남북분단에는 결정적인 한 가지의 전제 조건이 붙었었다. 그것이 바로 2년 이내에 남북전역에서 통일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 때부터 반공주의에 빠져 베트남 문제에 개입을 해왔던 미국은 당연히 이 조항을 지킬 생각이 전혀 없었고, 당연히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군사기지를 만들고자 했다. 이렇게 해서 미국이 내세운 인물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남베트남의 초대 대통령이자 부패한 독재자인 응오딘지엠(Ngo Dinh Diem)이었다.

 

응오딘지엠은 식민지 시절 고위 공무원직을 보냈던, 전형적인 반공주의 성향의 가톨릭 신자였다. 반공민족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던 그는 프랑스가 식민 지배를 하기 위해 일으킨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베트남을 떠나 유럽과 미국에서 살았던 인물로, 출신 성분이나 정치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에서 대한민국의 반공 독재자 이승만을 상당히 닮은 인물이었다.

 

1950년대 초 미국에 정착했던 디엠은 미국 뉴저지의 가톨릭 신학교에서 몇 달을 보낸 뒤 자신의 동포를 무신론적인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구원해야 한다.”는 메시아적인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끝나가던 1954년 응오딘지엠은 베트남으로 귀국했는데, 당시 프랑스의 괴뢰 황제였던 바오다이는 제네바 협정이 타결되기 2주일 전 응오딘지엠을 베트남국의 수상으로 임명했다.

 

19548월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기본 정책 구상은 바오다이를 통한 해결응오딘지엠에 대한 해결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물론 1954년 베트남에 귀국했던 응오딘지엠의 권력은 미약했다. 일단 군권은 디엠에 반대하는 친프랑스 집단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는 갱 집단인 빈쑤옌(Binh Xuyen)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친프랑스적인 호아하오(Hoa Hao)와 까오다이(Cao Dai) 교파들도 그에 대항하는 조직이었다. 비록 아직까진 프랑스가 만들어낸 토착 지배세력의 권력이 강했지만, 미국이 선택한 것은 토착 지배세력의 중심이 아닌 반공 민족주의적 관료계급인 응오딘지엠이었다. 그는 CIA 요원 에드워드 랜스데일의 지원을 받으며 즉각 반대파를 분쇄하고 베트민에 가담했던 인사들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으며, 베트민이 총선을 실시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위원회 사무실들을 강제로 폐쇄했다.

 

19554월 응오딘지엠의 강력한 지지자인 미국의 맨스필드(Mansfield)는 상원 연설에서 바오다이를 응오딘지엠으로 대체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미국의 계획대로 디엠은 바오다이를 중심으로 한 군주제를 그대로 유지할지, 혹은 디엠의 새로운 정부를 인정할지를 국민투표를 통해 결정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19551023일 남베트남 전역에서 국민투표가 실행됐다. 결과는 득표율 98.2%의 지지를 얻은 응오딘지엠의 승리였다. 개표결과 찬성이 5721,735, 반대가 63,017표 그리고 무효표가 44,105표였다. 물론 이 투표 자체는 아이러니 하게도 부정선거였다.

 

이 시기 응오딘지엠을 후원하는 미국의 엘리트 계층은 꽤나 많았다. 그들은 베트남의 미국 친구들(American Friends of Vietnam)’이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열렬한 디엠 지지파로는 프랜시스 스펠먼 추기경, 조지프 케네디(케네디 대통령의 아버지), 상원 의원 마이크 맨스필드, 휴버트 험프리, F.케네디 등이 있었다. 이들은 강경 보수 성향으로 반공주의자인 지엠이 입맛에 맞았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민족주의자인 그가 대세를 뒤집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와 더불어 응오딘지엠은 1954년부터 이른바 반부패운동을 전개했었다. 물론 이 반부패운동은 말이 좋아 반부패운동이지, 그 중심에는 관료들을 통제함으로써 디엠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한다는 목표가 자리잡고 있었다. 1955년 말 응오딘지엠은 이른바 4대 악덕운동으로 도박, 알콜, 마약중동 그리고 성매매의 추방을 추진했었는데, 이것은 대중들에게 정권의 정당성을 선전할 기회로 작용했으며, 이것 또한 정치 경제적 계산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의 핵심은 본인의 반대세력인 빈쑤옌의 경제적 기반을 파괴하는 데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친프랑스 빈쑤옌이 몰락하면서 이 4대운동 또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쉽게 말해 응오딘지엠은 이 프로그램을 본인의 권력 강화차원에서 이용한 것이지,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서 한 것이 절대 아니었다.

 

또한 응오딘지엠이 까오다이나 호아하오 그리고 빈쑤옌 같은 친프랑스적 토착 조직에 대항하였던 것 또한 프랑스 제국주의에 부역했던 세력이나 인사를 청산하고 숙청하기 위한 작업이 아니었다. 물론 형식상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이후 프랑스가 물러나면서 남은 토착 지배층의 기반이 응오딘지엠의 숙청으로 사라지기도 했지만, 흡수되어 남베트남 정부의 지지기반을 형성했다. 그러나 응오딘지엠은 권력을 장악한 이후 구세력 척결 후 등용한 인물들은 월남한 가톨릭 세력과 친프랑스 매판세력 그리고 지주세력이었다. 또한 남베트남의 군부는 죄다 프랑스군 사관학교를 나온 매국노들이었다. 그래서 민주화운동가이자 베트남 전쟁을 연구했던 리영희 교수는 남베트남 군대에는 육군 중령 1명 외에는 죄다 친불친미 매국노들이라고 표현했을 정도였다.

 

19551023일 투표를 통해 옹오딘지엠은 남베트남의 대통령이 되었고, 이른바 베트남 공화국(Republic of Vietnam)을 선포했다. 그리고 이후 응오딘지엠 정권은 제네바 협정에서 약속했던 총선거를 일방적으로 파기했고, 식민지 시절 일본 제국주의와 프랑스에 맞서 싸웠던 항불항일조직인 베트민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이들을 공산주의자들로 몰아 구금하고 처형하는 반인륜적 범죄를 미국의 지원 아래 저질렀다. 따라서 응오딘지엠은 미제국주의자들의 하수인이었으며, 반동적 지배계급을 대변하였으며 당연히 혁명으로 타도되어야할 반동이었다. 보 응우옌 잡 장군이 1964년에 썼던 글의 일부를 인용하면서 마치겠다.

 

미제국주의자들은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뻔뻔스럽게도 제네바 협정을 파기하고 남베트남을 그들의 새로운 식민지와 군사 기지로 만들기 위해 우리나라를 영원히 양분하는 음모를 꾸몄다. 정전협정 조인이래, 남쪽에서는 침략자에 의해 야기된 전쟁이 결코 그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미국의 허수아비, 응오딘지엠 정부는 파시스트적 독재 법률로 테러와 집단학살 정책을 추구해 왔다. 그 지도자들은 수백 번의 소탕작전을 감행하고, 말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으며, 적에 대항하고, 독립, 민주주의, 국가 통일과 생존권을 주장하는 정치적 투쟁에 가담한 비무장 동포들을 체포하고 죽였다. 지난 몇 년간, 미제국주의자들은 군 인사와 전투부대를 유입시키면서 남베트남에 공공연한 간섭을 자행했다. 그들은 수만 톤의 무기를 들여왔고, 수십억 달러를 지출했다. 그들은 여러 나라의 해방 운동을 억압하기 위해, 남베트남을 그들이 특별한 전쟁이라 부르는 이론을 시험하기 위한 전장으로 사용하면서 선언되지 않은 전쟁에 불을 지폈다.”

 

참고자료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 을유문화사, 2002

 

호치민 평전, 윌리엄J.듀이커, 정영목(), 푸른숲, 2003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윤충로, 선인, 2005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공저), 이광일, 들녘, 2015

 

디엔비엔푸, 보 응우옌 잡, 강범두(), 길찾기,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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