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엔비엔푸 전투(The Battle Of Dien Bien Phu)

20세기 전쟁사에 있어 지배받던 식민지 세력이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빛나는 승리와 독립을 쟁취한 전투가 있다. 그게 바로 1954년 프랑스군이 대패한 디엔비엔푸 전투다.

1. 배경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항복했다. 일본이 항복한 이후 호치민은 전함 미주리호에서 있을 일본의 공식적인 항복 날과 맞추어 하노이 바딘광장에서 독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강대국은 일본군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북베트남에는 중국 국민당군을 남베트남에는 영국군을 주둔시켰다. 이후 중국 국민당군은 철수했지만 영국군은 과거 베트남을 식민지로 삼았던 프랑스를 앞세운 뒤 철수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가 베트남에 들어온 이유는 단 하나였다. 베트남을 다시 자신들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1946년 호치민은 프랑스와의 협상을 통하여 그 나름 베트남 독립을 위해 노력했지만 협상은 쉽지 않았고 1946년 11월 북베트남의 항구도시 하이퐁에서 프랑스군과 베트민군이 충돌하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초기 전세는 프랑스 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1947년 10월 프랑스군은 비엣 박에 있는 베트민 기지를 공격하여 점령했고 호치민을 체포할 뻔했다. 프랑스군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군은 게릴라전으로 프랑스군에 맞서 싸웠다. 1949년 중국의 국공내전이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의 승리로 끝이 났다. 프랑스에 맞서 싸우던 베트민군에게도 매우 든든한 우군이 생긴 것이다.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중국 공산당은 프랑스군에 맞서 싸우고 있던 베트민에게 식량과 무기 그리고 탄약을 지원했다.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물자 지원을 받은 베트민은 1950년 9월 국경지역 전체에 걸쳐 프랑스군을 공격했고, 홍 강 삼각주 지역 전체를 손에 넣었다. 이에 희망을 얻은 베트민군은 1951년 프랑스군에게 총공격을 가했지만 미국으로부터 네이팜 폭탄을 비롯한 온갖 물자를 지원받은 프랑스군은 네이팜 폭탄으로 이에 맞섰고 1951년 베트민의 총 공세는 수많은 사상자를 낸 채 실패로 끝났다.

비록 1951년 베트민의 공세가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프랑스군의 상황이 진전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자체가 정글전과 게릴라전 위주였고 따라서 프랑스군의 전선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심지어 1953년 베트민군은 북부지역을 거의 다 장악하고 중국의 국경지대를 완전히 장악한 뒤, 라오스까지 진격 하고자 했다. 이에 고심하던 프랑스군은 라오스와 베트남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인 디엔비엔푸를 선정하여 프랑스 육군 공수부대를 투하해서 지역을 점령한 후 요새를 건설하고, 해당 요새에 최대한의 병력을 모아 베트민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적을 유인하여 싸우고자 했다. 프랑스군 입장에서는 다시 한 번 베트민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줘서 전세를 되돌릴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2. 프랑스군의 준비

프랑스 육군은 해당 작전을 위해 현지 주둔 병력은 물론 본국에서 지원 가능한 거의 모든 병력, 장비, 물자를 총동원했다. 그 숫자를 다 합치면 투입병력만 16,000명, 지원 병력까지 합치면 2만 명에 육박했다. 당장 요새를 건축하기 위한 각종 장비는 물론이거니와, 포병도 105mm 견인곡사포를 28문이나 확보했고, 심지어 전차도 경전차지만 M24 채피를 분해해서 수송기로 실어와 현지에서 조립하는 방법으로 10대를 확보했다. 여기에 더해서 요새를 지원할 항공전력도 프랑스 공군의 F8F 베어캣을 중심으로 한 270여대를 배치했으며, 수송기도 100대를 확보했다.

이런 식으로 만반의 준비를 갖춘 침공부대는 1953년 11월 20일 2개 대대규모의 공수부대(제6식민지공수대대(6 BPC), 제1샤쇠르공수연대 2대대(II/1 RCP))가 현지공수강하에 성공하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 순식간에 전체 병력을 공중으로 수송하는데 성공했으며, 즉시 비행장을 건설하고 비행장을 지킬 요새를 건축했고, 비행장에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해 반경 3km 이내에 8개나 되는 전초진지를 탄탄하게 건축하고 병력을 배치했다.

3. 디엔비엔푸 전투 시작과 승리

사실 디엔비엔푸는 사방이 산에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라 한번 고립되면 거의 탈출이 불가능한 지역인데다가, 애초에 공중에서 병력을 투하해서 만든 요새라 처음부터 프랑스가 지배하는 지역과의 육상교통로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트민군의 화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던 프랑스는 병력의 열세와 보급의 문제를 압도적 화력과 항공수송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베트민군은 다수의 대공포를 포함한 포병화력을 모아놓고 있었다.

베트민의 보 웅우옌 지압(Vo Nguyen Giap) 장군은 이미 프랑스가 결전을 시도할 것이라 예상하고 전력을 비축해 놓고 있었고, 프랑스군의 디엔비엔푸 투입을 파악하자 3개 사단을 디엔비엔푸로 집결시켰다. 다수의 병력을 험준한 산악지역으로 이동시키기 위해 보응우옌잡 장군은 육군 제351공병포병(Engineering Artillery)사단에게 디엔비엔푸로 가는 도로 82km를 확장시키라고 명령했고, 사단 병력뿐만 아니라 민간인들까지 가세한 결과 디엔비엔푸로 통하는 확장 도로가 완성되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베트민 병력들은 중기관총, 대공포, 야포 등을 손수 인력으로 옮기거나 혹은 부품 단위로 분해하여 정상에서 조립하는 식으로 설치를 하는 상상을 초월한 집념을 보여줬다. 당시 베트민 육군은 자전거를 개조하여 수백 킬로그램의 군수물자를 운반하였는데 산악이동중에 타이어가 손상되면 헝겊을 말아 타이어대신 사용했다.

프랑스군이 투입된 지 약 2개월이 지나고 1954년 1월말이 되자 베트민군은 프랑스군 포병의 배치를 파악할 목적으로 간헐적으로 포병 공격을 가하는 동시에 모든 방향에서 프랑스군의 정찰을 방해했다. 그러면서도 베트민군은 약 5만 명의 대군을 집결하는 동안 섣부른 공격을 삼갔고, 마침내 공격자 대비 방어자의 승리 비율인 3대 1의 상황을 만들었다. 거기에 더해서 프랑스의 예상과는 달리 베트민군은 프랑스군의 4배에 달하는 포병과 방공 전력을 투입하였다.

1954년 3월 13일부터 베트민군이 본격적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압도적 포병 화력에 의해 프랑스군의 북동쪽 전초진지가 순식간에 함락되었다. 다음날에도 압도적인 포병 화력의 지원을 받은 베트민의 파상공세가 정예 제7알제리 척후병 연대 5대대가 방어하고 있던 북쪽 진지에 가해졌고, 이 진지는 이틀만에 함락되었다. 이렇게 북쪽의 고지대를 장악한 베트민군은 비행장에 정밀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비행장이 폐쇄되자 이제 프랑스군의 항공지원은 낙하산을 통해서만 가능해졌다. 한편 이렇게 프랑스군의 진지 2군데가 차례로 함락되자 사기가 땅바닥에 떨어진 베트남인들로 이뤄진 징병군이 다음날 자욱한 안개를 틈타 항복해 왔고, 이들이 지키고 있던 옆 진지마저 베트민에게 넘어갔다.

물론 프랑스군도 놀고 있던 것은 아니라서 전투 초기에는 매일 10회 이상의 공습을 퍼붓고, 보급물자는 물론 하루 100명 이상의 증원 병력을 낙하산으로 투입하는 등 지속적인 증원을 했다. 그러나 베트민군이 투입한 중화기의 숫자도 많아서 요새의 화력으로 대응하기는 역부족이었다. 당장 대공포만 80여문 이상이었으므로 공습하는 프랑스 공군 항공기에 대해 맹렬하게 대응하는 바람에 전투가 진행되면서 프랑스측 항공 전력도 날로 축소되었다.

전투 개시 며칠 만에 북쪽의 3개진지가 모두 베트민에게 넘어갔고 프랑스군에게 남은 것은 중심부의 4개진지와 남쪽에 멀찍이 떨어진 1개 진지였다. 베트민은 잘 방어되고 있던 남쪽 진지를 본진과 차단시킨 채 본진에 맹공을 퍼부었고, 프랑스군은 위태위태한 상황에서도 간신히 붕괴를 막아내었다. 본진 주변의 개활지에서 공세를 퍼붓느라 1주일간 많은 인명피해를 본 베트민군은 이제 전략을 바꾸어 참호를 파면서 접근해 왔고, 이후 약 1개월간의 전투는 제 1차 세계대전 시대의 참호전 양상으로 흘러가게 된다. 이 기간 동안 베트민 측은 뚜렷한 성과 없이 발생한 엄청난 사상자와 의약품의 부족으로 사기가 심각하게 저하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측 역시 보급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참호전에 익숙하지 못한 지휘부가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내 4월 말 베트민은 서북쪽 진지 일부를 점거하고 비행장 영역 대부분에 화력을 퍼부을 수 있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프랑스의 낙하산 공수조차도 착륙 지점을 제대로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

5월로 넘어가자 베트민은 카츄샤 다연장로켓마저 구해와서 파상공세를 퍼부었고, 프랑스군은 TOT 사격을 통해 적의 대열을 붕괴시키면서 저항했지만 병력과 물자 모두에서 막바지에 몰려 있었다. 막바지인 5월 6일에는 베트민이 맹랑한 심리전까지 벌였다. 프랑스군의 사기를 꺾기 위해 프랑스 노래를 불렀는데 다른 노래도 아닌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노래였다. 결국 5월 7일 저녁 프랑스군의 모든 진지가 함락되었고 프랑스군은 베트민군에게 항복했다. 56일간 지속되었던 디엔비엔푸 전투는 이로써 끝이 났다.

4.결론

56일간 지속되었던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총 2000명에서 3000명이 전사했고 1만 명 이상이 베트민군의 포로로 붙잡혔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군은 8년간의 전쟁에서 약 7만 명이 전사했다. 디엔비엔푸 전투가 호치민과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이 이끄는 베트민군의 승리로 끝난 뒤 1954년 7월 21일, 스위스 제네바서 열린 회담을 통해 휴전협정이 조인, 프랑스군의 철수와 함께 북위 17도선을 휴전선으로 설정하고 합계 8km의 비무장지대를 설치하며, 2년 내에 남북통합 선거를 실시한다는 합의를 함으로써 8년간 지속되었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끝이 났다.

디엔비엔푸 전투는 식민지 지배를 받던 베트남이 프랑스 제국주의에 맞서 스스로 승리를 쟁취한 위대한 전투이자 식민지 지배를 받는 나라가 제국주의에 맞서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전투였다. 이런 저항정신을 가진 베트남이었기에 미국과 싸워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참고 문헌

* 호치민 평전, 윌리엄J듀이커, 푸른숲(2003)

*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마이클 매클리어, 을유문화사(2002)

* 왜 호찌민인가, 송필경, 에녹스(2013)

*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정토웅, 가람기획(2010)

* 호찌민과 베트남 전쟁, 손영운/김태완, 주니어김영사(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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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알아두어야합니다 2018-08-29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디엔비엔푸는 마오쩌둥이 사단급에 해당하는 최신무기를
공짜로 제공해주어서 가능한것이었지
그 이전에는 숫제 나무몽둥이로 프랑스 몰아내잔 꼴밖에 안되었음

NamGiKim 2018-08-29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후에 남베트남의 지도자가 될넘들은 그 당시 프랑스에 부역했죠. 호치민과 지압같은 사람들은 프랑스에 맞서 싸울때 프랑스가 식민지 유지하도록 전비 70%를 댄 것도 미국이었고, 어쨌든 이겨서 몰아낸거니 대단한거지. 난 적어도 그렇다고 봄.
 
공산당선언 범우문고 88
마르크스.엥겔스 지음, 서석연 옮김 / 범우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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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해서 개봉했던 영화 '청년 마르크스'를 영화관에서 봤다. 워낙 개봉하는 곳도 적고, 공산주의하면 절대악으로 생각하는 편협하기 짝이 없는 고정관념이 사회를 지배하는 대한민국이다보니 네이버 영화 평은 영혼없는 알바들의 평테(평점테러)로 도배되어 있었다.  영화 청년 마르크스는 청년 마르크스가 자신의 평생 동지인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만나 19세기 부조리한 체제를 변혁시키기 위해 위대한 선언문인 '공산당 선언'을 쓰기 까지의 스토리를 다뤘다.

 

공산당 선언은 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런던에서 책으로 출판한 선언문이다. 이 100페이지 안팎의 선언문은 굉장한 호소력을 가졌었다. 수많은 사회주의자들이 이 책을 읽고, 부조리한 체제에 맞서 저항했다. 암울했던 1980년대 전두환 군사독재에 맞서 싸웠던 민주화 투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전 세계적으로 "사회주의는 실패한 사상"이라는 인식이 생겨났고, 사회주의는 마치 "실패한 사상 혹은 불가능한 사상"으로만 간주되고 있는듯 하다. 특히 지금도 메카시즘이라는 반공주의적 레파토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한국사회는 더더욱 그런듯 하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말한 사회주의가 다시한번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기술의 발전이 보여줬다. '4차산업혁명'이 바록 그것이다.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노동의 종말과 기술이 발전이 온다면 그것이 마르크스가 말한 사회를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일각에서는 19세기에 쓰인 이 위대한 선언문이 굉장히 낡은 사상이라 폄하한다. 개인적인 의견을 덧붙이자면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일각에서 주장하는 데로 소련이라는 사회가 막스가 얘기한 사회주의였다면 그말은 보다 현실성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소련 사회는 사회주의로의 이행단계에서 멈췄던 사회주의 국가지, 막스가 얘기한 세상은 아니었다고 본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자본주의 국가에서 태어났고, 지금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자본주의에서 누릴 수 있는 혜택을 누리며 살고 있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나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인류의 진보는 자본주의에서 그쳐서는 안된다 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또한 고질적인 문제가 많다. 그리고 사회주의자들이 목표로 하는 사회는 과거의 유물 따위가 아닌 현재 서방 자본주의보다 더 좋은 사회를 목표로 해야한다!!

 

공산당 선언이 매우 야만적이었던 19세기 자본주의보다 더 나은 세상을 목표로 했다면, 21세기 자본주의 국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식 천박한 자본주의 혹은 미국식 자본주의 보다 더 나은 세상을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사회주읠르 공부하기 위해선 마르크스가 쓴 공산당 선언을 읽는 것이 필수다. 마르크스가 쓴 공산당 선언은 자본론에 비하면 분명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지만, 처음읽는 이에게는 다소 난해한 용어들이 적잖게 존재하는 책이다. 나 또한 3년전 이 책을 읽었을 때 그런 어려움을 겪었었다. 그래도 이 책이 나한테 준 호소력과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은 엄청났다. 나와 같은 20대 젊은 이들이 이책을 읽기를 적극 권한다. 마지막으로 공산당 선언의 내용을 인용하겠다.

 

"프롤레타리아가 잃을 것이라곤 족쇄뿐이고 그들이 얻을 것은 전 세계다.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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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꼴들이 지껄이는 문재인 적화통일론, 혹은 ˝현 대한민국은 적화통일되기 일보직전이다.˝와 같은 얘기는 환단고기급 개애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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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일본 오이타, 유수인, 후쿠오카 여행중입니다. 하지만 내일 모래 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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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노동자 연대에서 개최한 맑시즘에 참가했었다. 1년에 한 번씩 열리는 맑시즘에선 항상 북카페를 여는데, 그 북카페에서 파는 책들 중에는 위대한 혁명가 마르크스나 엥겔스 레닌이 쓴 사회주의 관련 혁명 서적들도 있지만, 노엄 촘스키나 하워드 진 같은 미국의 진보학자들이 쓴 책들도 적잖게 팔았다. 난 그중에 하워드 진이 쓴 미국민중사를 샀고, 맑시즘이 끝난 뒤 이 책을 읽었다. 책은 총2권으로 구성되어 있고 2권의 분량을 합치면 총 1200페이지나 된다. 올해 4월 하워드 진이 쓴 <만화로 보는 미국사>를 읽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던 나는 그가 쓴 <미국민중사> 또한 아주 감명 깊게 읽었다.

 

일반인들이 인식하는 미국의 역사는 대체로 미국 주류사회의 시각을 반영하는 것 같다.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한 미국의 역사, 유럽에서 종교적 박해를 받던 사람들이 자유와 신앙적 권리를 찾아 아메리카라는 땅을 찾아갔던 역사, 영국의 식민지배에 맞서 독립을 쟁취한 역사, 흑인 노예제에 반발하여 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을 선언한 역사, 새 삶을 찾아 서쪽으로 향했던 자랑스러운 서부 개척의 역사,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연합국을 승리로 이끈 자랑스러운 미국의 역사.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나치독일과 일본을 패망시키고 파시즘으로부터 세상을 구한 미국의 역사, 소련이라는 공산 세력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킨 미국의 역사 그리고 이슬람 극단주의에 맞서 세계평화에 기여한 미국의 역사, 이게 바로 소위 미국사회와 한국의 자칭 보수주의자들과 미국의 주류역사학자들이 상상하는 미국의 역사일 것이다.

 

미국의 진보학자를 대표하는 하워드 진은 미국 주류사회와 주류학계가 주장하는 이와 같은 제국주의적인 시각과 역사를 일부 정치인과 제국주의자들의 전유물인냥 해석하는 시각을 단호히 배척하고 미국의 역사를 민중의 시각에서 해석하고자 했다. 즉 하워드 진은 미국의 역사를 일부 주류 정치인과 인물의 역사로 보지 않고, 신항로 개척시기 제국주의자들에게 억압받던 피지배계급과 노예들의 시각에서, 남자들에게 성적으로 사회적으로 차별받던 여성인민들의 시각에서, 백인사회로부터 노예화되어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았던 흑인 노예들의 시각에서, 스페인 미국 전쟁 당시 지배받던 쿠바인들의 시각에서, 산업화 시기 대자본가들에게 무제한 착취 받던 노동자들의 시각에서. 1차 세계대전 당시 사회주의 이론에 따라 전쟁에 반대 했던 미국 사회주의자들의 시각에서,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에 반대했던 평화주의자들의 시각에서, 1950년대 사회적으로 차별 받던 흑인들의 시각에서, 베트남 전쟁 시기 베트남 반전운동에 나섰던 반전 운동가들의 시각에서 그리고 미국의 폭격으로 가족과 이웃을 잃은 베트남 인민들 의 시각에서, 1990년대 미국의 제제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어 갔던 이라크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리고 9.11 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 당시 미군의 무차별 폭격을 받아 수많은 민간인이 죽어가는 것을 보았던 중동 인민의 관점에서 미국사를 서술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제대로 알지 못했거나(혹은 수박 겉핥기식으로 알았거나)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책의 내용을 얘기 해볼까 한다.

 

책의 첫 시작은 콜럼버스의 신항로 개척과 더불어 그 이면에 정복자 콜럼버스가 토착 원주민들에게 저지른 추악한 만행에 대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책을 읽다보면 우리가 알던 개척자 콜럼버스는 개척자가 아닌 정복자였다. 콜럼버스는 그 지역 원주민들을 무자비하게 노예로 부려먹고, 학살했으며, 원주민 부녀자들을 마음대로 겁탈했다. 콜럼버스와 그 일행의 악행으로 수많은 원주민들이 도륙됐다. 토착 원주민을 본 콜럼버스는 항해일지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내가 칼 한 자루 보여주자 아무 생각 없이 칼날을 쥐다가 손을 베이기도 했다. 이들에게는 철이 없다. 이들의 창은 막대기에 불과하다. 이들은 좋은 하인이 될 듯하다. 50명만 있으면 이들 모두 정복해서 마음껏 부릴 수 있을 것이다.”(미국민중사1 p.15)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17세기 들어서 유럽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미국이라는 나라에 건너 왔다. 미주대륙으로 이민 가게 된 이민자들은 노예를 대리고 왔고, 그 지역 원주민들을 노예로 부리려고도 했었다. 17세기 중후반 현재 미국의 버지니아 지역은 옥수수와 수출용 담배를 재배하기 위해 노동력을 필요로 했고, 따라서 자신들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노예를 필요로 했다. 여기서 엄청난 인권유린과 억압이 있었다.

 

노예소유주들은 노동력 공급과 자기들의 생활방식을 유지하기 위해서 복잡하고 강력한 통제체제를 발전시켰다." "노예들은 규율을 배웠으며, '자신의 분수를 알고', 검은색을 종속의 징표로 보며, 주인의 힘을 경외하고, 자신의 개인적인 욕구를 버리고 주인의 이익을 자신의 이익이라 인식하도록 자신이 열등하다는 사고를 끊임없이 주입받았다. 법률의 힘과 감독의 직접적인 힘을 통해 태형, 단근질, 수족절단, 사형에 처하는 방법이 필요했다.”(미국민중사1 p.77)

 

1700년대 중후반이 되자 미국에서도 영국의 지배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게 결국 조지워싱턴을 비롯한 소위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미국의 독립을 선포하고 영국과의 전쟁을 선포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몇 년간의 전쟁을 통해 미국은 영국을 몰아냈다. 1776년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의 선포한 미국 독립선언서의 시작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신은 그들에게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몇 가지 권리를 부여했다.”라는 멋진 말과 함께 시작하지만, 미국을 건국한 소위 건국의 아버지들이 인식하는 평등에 개념은 참으로 저급한 수준이었다. 저자 하워드 진은 책에서 다음과 같은 자신의 견해 밝힌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훌륭한 균형을 이루려고 노력한 현명하고 공명정대한 사람들이었을까? 실제로 그들은 현상을 유지하는 것 즉 당시 지배세력 간의 균형을 제외하고는 다른 균형을 원하지 않았다. 확실히 그들은 노예와 주인, 무산자와 유산자, 인디언과 백인 간의 평등한 균형을 원하지 않았다.”(미국민중사1, p.186)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들은 독립선언서에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신은 그들에게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몇 가지 권리를 부여했다.”라고 써놓고서 인디언들이나 흑인들 그리고 여성들에게는 평등한 인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19세기 들어서 미국 남부는 목화 산업으로 먹고 살았고, 따라서 미국 남부사회는 부를 축적하기 위해 흑인들을 노예로 부려 먹었다. 흑인들은 백인 지배계층에 의해 엄청난 착취와 억압(심지어 흑인 여성들은 백인 지배자들로부터 성적 노리개가 되기도 했다.)을 당했다. 남부의 비인권적인 흑인 착취에 맞서 흑인들을 해방시키고 구출하기 위한 흑인들의 투쟁도 전개됐지만 노예 제도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남북전쟁 시기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 링컨이 노예 제도를 반대하여 흑인 노예를 해방시킨 영웅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대통령 링컨은 그런 인간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연방주의자였다. 따라서 링컨은 연방을 유지하기 위해선 노예제 따위는 남부 연방 꼴통들에게 양보할 인간이었다.

 

링컨은 18613월의 취임연설에서 남부와 탈퇴한 주들을 회유했다. "나는 남부 주들에 존재하는 노예제도에 대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간섭할 의사가 없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내게는 그렇게 할 법적 권리가 없으며 또 그렇게 할 의향도 없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넉 달째 이어지면서 프레먼트 장군이 미주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연방에 저항하는 노예주인들의 노예는 자유인이 될 것이라고 말하자, 링컨은 이 훈령을 철회했다. 링컨은 메릴랜드, 켄터키, 미주리, 델라웨어 등 4개 노예주를 연방에 묶어두려고 안달이 나 있었다. 전쟁이 점점 격화되면서 사상자가 급증하고, 승리에 대한 절망감이 고조되고, 노예폐지론자들의 비판이 링컨을 떠받치는 너덜너덜한 연합세력을 갈가리 찢어 버릴 태세를 보이자, 링컨은 그제야 비로소 노예제를 반대하는 행동에 착수했다”(미국민중사1 p.333)

 

남북전쟁은 북부의 승리로 끝이 났다. 남북전쟁 이후 흑인들은 노예제도로 부터는 해방이 됐지만, 자본주의 치하에서의 사실상 노예와 다를 게 없이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상황에선 큰 개선이 없었다. 미국사회는 흑인뿐만 아니라 여성도 억압했다.(흑인이 투표권을 가진 것이 19세기인 데에 비해 여성은 1920년대 들어서 투표권이 생겼다.) 19세기 산업혁명의 여파에 따라 미국도 산업혁명의 영향을 받았다. 거기다 19세기 미국은 서부개척에 나섰고, 그 결과 엄청난 영토를 차지 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의 자본주의는 노동자들의 엄청난 착취와 억압을 토대로 하여 자라났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인권은 유보됐고,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대자본가들은 자신들의 부를 축척하기 위해서 더더욱 노동자들을 착취했다. 마치 19세기 산업혁명을 거친 유럽 국가들이 그랬듯이 말이다. 그와는 별개로 자신들의 땅을 빼앗긴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무장투쟁은 19세기 후반 까지 계속되었다. 1890년에는 운디드니라는 곳에서 백인들에 의해 수백 명의 원주민들이 무차별 학살당했다.

 

인디언들은 서부의 평원에서 영원히 쫓겨났다. 1890년의 어느 추운 겨울날, 미 육군 병사들이 사우스다코타 주의 운디드니에 있는 인디언 막사를 습격해 300명의 남성과 여성, 어린이를 살해했다. 이 학살은 콜럼버스와 함께 시작된 400년간의 폭력 중에서 정점을 이루었고, 이로써 이 대륙은 백인들의 소유임이 굳어졌다.”(미국민중사1 p.504)

 

19세기 미국의 팽창은 서부개척으로 멈추지 않았다. 1867년 미국은 러시아가 소유하고 있던 알래스카를 저가에 매입했고, 1890년대에는 하와이 섬을 완벽히 합병했으며, 1898년에 터졌던 미국 스페인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쿠바를 사실상 미국의 식민지 국가로 만들었고, 필리핀 또한 미국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19세기 수많은 유럽 국가들이 제국주의국가가 되었듯이 미국 또한 제국주의국가가 되었다. 이런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쟁탈전이 거세지고 20세기 초에 들어서자 전 세계에 크나큰 전쟁의 먹구름이 나타났다. 1914년 유럽에서 터진 제1차 세계대전이 바로 그것이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그 나라를 중심으로 한 동맹국들에게 물자와 무기를 지원하며 그저 지켜만 봤다. 그러던 1917년 전쟁에 참전했고, 1918년 승리했다. 1차 세계대전을 통해서 미국은 강대국으로 성장할 확실한 발판을 마련했다.

 

“1914년 미국은 경제불황에 시달렸지만 1915년에 이르면 연합국(대부분 영국)의 군수품 주문이 경제를 자극하면서 19174월까지 20억 달러 이상의 상품이 연합국에 팔려 나갔다. 호프스테터의 말처럼, "미국은 전쟁과 번영의 숙명적인 결합 속에서 연합국들과 이해를 같이하게 됐다.”(미국민중사2 p.16)

 

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은 그저 경제적인 호황을 누렸다. 1920년대는 과잉과 풍요 그리고 흑자 연속의 경제였다. 그걸 바탕으로 미국 정부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활동이 활발했던 노동자들의 파업과 투쟁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파업 주동자들과 투쟁한 노동자들을 쉽게 연행하고 구속시킬 수 있었다. 그러던 1929년 미국에게 최악의 위기가 닥쳤다. 경제대공황이 바로 그것이다. 경제대공황으로 인하여 미국은 적자와 실업이 극에 달했다.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경제적으로 궁핍해졌다. 1930년대 세계는 파시즘의 물결에 휩쓸렸다. 1931년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킨 뒤 국제연맹에서 탈퇴했고, 1933년 독일에선 히틀러가 등장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났고, 1939년에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1940년엔 제국주의국가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군사적인 동맹을 맺고, 여러 나라를 침략했다. 1941127일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고, 나치독일과 일본을 패배시키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러나 그 기간 동안 미국 또한 엄청난 인권유린과 억압이 존재했다.

 

2차 대전 기간 동안 제정된 미국의 여러 정책 가운데 하나는 파시즘의 복사판에 가까운 것이었다. "루즈벨트는 19422월에 대통령령 9066호에 조용히 서명함으로써 영장이나 기소절차, 심문과정 없이도 태평양 연안지역의 모든 일본계 미국인11만 명의 남자, 여자, 어린이을 체포해 그들이 살고 있는 집에서 소개시키고 내륙의 수용소로 이송해 감옥과 동일한 조건 아래 구금할 수 있는 권한을 군에 부여했다.”(미국민중사2 p.112)

 

애국심과 전쟁 승리에 대한 전면적인 헌신이라는 압도적인 분위기가 넘쳐났고 미국노동연맹과 산업별조직회의가 무파업서약no-strike pledge까지 했지만, 기업의 이윤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데 반해 임금은 동결되는 데 좌절한 이 나라의 많은 노동자들은 파업을 벌였다. 전쟁 기간에 14,000회의 파업이 벌어져 총 677만 명의 노동자가 참여했는데, 이것은 미국 역사상 어떤 시기보다도 더 많은 수치였다.”(미국민중사2 p.114)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소련과 경쟁하는 냉전체제에 돌입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자신들의 세력 유지를 위해 1947년 그리스 내전에 개입하여 진보정권이 권력을 잡지 못하도록 방해했고, 중국내전에선 국민당을 지원해줬다. 소련과의 경쟁이 시작됨에 따라 미국사회는 반공주의라는 광기에 휩싸였다. 거기다 1949년 중국의 국공내전이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의 승리로 끝이 나고,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미국 내의 반공주의는 극에 달했다. 자칭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반공이라는 명분아래 수많은 지식인들을 공산주의자로 낙인찍었고, 심지어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목숨을 잃기까지 했다.

 

“1950년에 공화당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나 '공산주의 전선'임이 드러난 조직을 등록시키기 위한 국가보안법Internal Security Act을 발의했을 때, 자유주의적 상원의원들은 이에 정면으로 대항하지 않았다." "1947년에 트루먼은 충성에 관한 대통령령을 반포, 법무부로 하여금 "전체주의나 파시즘, 공산주의, 정부전복의 성격을 갖거나 ····· 위헌적인 수단으로 미국의 정부형태를 바꾸려 하는 것으로" 확인된 조직들의 명단을 작성하도록 했다." 국가적인 반공 분위기를 고조시킨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은 1950년 여름에 있었던 줄리어스 로젠버그와 이설 로젠버그 부부에 대한 기소였다.”(미국민중사2 p.138-9)

 

냉전시기 미국의 군사개입은 한국전쟁에서 그치지 않았다. 1950년 한국전쟁에 개입했던 미국은 그로부터 15년 뒤 아시아에서 일어난 또 다른 전쟁에 개입했다. 그게 바로 베트남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베트남의 독립운동가 호치민은 독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베트남을 다시 식민지화하기 위해 들어왔고, 그 때문에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났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가 대패하면서 끝났다. 그러나 도미노 이론에 빠져있던 미국은 베트남 문제에 개입했고, 남베트남의 반민중적인 응오딘지엠 정권을 지속적으로 후원했다. 그래도 남베트남 정권이 무너질 기미가 보이자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다. 최신식 무기를 동원한 미국은 베트남에 엄청난 폭탄을 퍼붓고 고엽제를 투하해가며 베트남 민간인에게 테러를 가했지만, 결국 호치민이 이끄는 민족주의 세력에게 패배했다. 세계 최강의 제국주의 국가가 베트남의 혁명적 민족주의 운동을 파괴하는데 실패함으로써 패배한 것이다.

 

“1964~1972년까지, 세계역사상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나라가 한 작은 농업국가의 혁명적 민족주의 운동을 파괴하기 위해 원자탄을 제외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군사적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패배했다. 이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에서는 일찍이 이 나라가 경험해보지 못한 거대한 반전운동이 있었고 이 운동은 전쟁을 종식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미국민중사2 p.207)

 

베트남 전쟁은 결국 1975년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승리로 끝났다. 이후 미국은 베트남 전쟁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1980년대 미국의 레이건 정부가 들어섰다. 레이건 정부는 다시 강력한 반공정책과 군비증강 하는데 있어서 온 노력을 기울였다. 뿐만 아니라 1970,80년대 미국은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명분아래 남미에 있는 수많은 우익독재국가들을 지원했다. 1991년 걸프전쟁을 일으킨 미국은 이라크군을 박살내면서 베트남 트라우마를 사막에다 묻어버렸다. 미국은 이라크를 경제적으로 봉쇄하여 무려 100만이나 되는(이중 50만은 어린이와 유아) 이라크인 들을 아사시켰다. 20019.11테러가 일어나 무려 3000명이나 되는 무고한 민간인이 사망했다. 미국의 부시 정부는 이를 계기로 미제국을 또 한 번 발호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았다. 그래서 미국은 2001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고, 2003년 이라크를 침공했다. 그리고 이런 중동분쟁은 현재진행형이 되어버렸다.

 

“20019·11 사태가 벌어지자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즉시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테러리스트들과 그들을 숨겨주는 나라들을 똑같이 다룰 것입니다." "의회는 헌법이 요구하는 선전포고 없이 군사행동에 착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시에게 부여하는 결의안을 서둘러 통과시켰다. 이 결의안은 상원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됐고 하원에서는 단 한 명아프리카계 미국인인 캘리포니아 출신 바버라 리만이 반대표를 던졌다.”(미국민중사2 p.552-3)

 

곧이어 "의회에서 통과된 '미국애국자법'은 단순한 혐의만으로도 기소 없이, 그리고 헌법에 규정된 정당한 법 절차에 따른 권리 없이 시민권이 없는 사람들을 구금할 수 있는 권한을 법무부에 부여했다. 이 법에 따르면 국무장관은 어떤 집단이든 '테러리스트'로 지정할 수 있으며, 그런 조직의 성원이거나 자금을 제공한 사람을 체포하고 구금, 추방할 수 있었다.”(미국민중사2 p.557-8)

 

하워드 진의 미국민중사는 미국이라는 한 제국주의국가가 국내의 문제가 있을 때 마다 어떤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노동자의 파업투쟁과 다른 나라의 자주적인 역량을 어떻게 짓밟고, 자신들이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내세워 어떻게 그 이면에서 수많은 백색 독재국가들을 지원했는지를 아주 낱낱이 보여준다. 역사라는 학문을 한 인물과 정치집단 혹은 제국주의 국가의 전유물로만 생각하는 관점을 배척했고, 제국주의의 침략과 착취아래 고통 받고 억압받고 착취당하던 민중의 입장에서 재조명 했다.

 

지난 2015년 대한민국의 박근혜 정부는 좌편향 교육은 잘못됐다.”는 시각을 가지고 국정교과서 사태를 초래했었다. 수많은 학자들이 반대했음에도 박근혜 정부는 이를 시행했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교과서 사태를 지지하던 일부 뉴라이트 계열 교수들과 극우집단들이 내세우던 논리는 아주 심플했다.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가 바로 그것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들은 역사라는 학문 자체를 국가주의라는 맹목적이고 전근대적인 사상에 그대로 대입해서 본 것이다. 역사는 정직하다. 정직하기 때문에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를 있는 그대로 사실에 근거하여 기록해야지 그들이 얘기하는 대로 단순히 자랑스러운 국가의 역사 따위를 일부 정치인들 입맛에 맞게 만들기 위해서 역사를 집필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일이다.

  

  

하워드진의 미국민중사를 읽으며 필자는 역사라는 학문은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해야 하는가.”를 이 책을 통해서 제대로 배웠다. 미국민중사는 미국이라는 사회와 역사를 이해하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되는 책이다. 일부에선 이 책의 편향성을 문제 삼을 것이다. 하워드 진도 이 책을 쓰면서 그리고 책 후기에서 밝히는 대로 이 책은 철저히 억압받던 민중의 입장에서 서술된 책이기에 중립성을 보장하기 매우 힘들뿐더러 애초에 보장 할 수가 없는 책이다. 중요한건 이러한 문제를 인식해야한다는 중요한 교훈이지 중립성 따위의 문제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하워드 진의 말을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달리는 기차위에 중립은 없다(You Can't be Neutral on a Moving Tr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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