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엔비엔푸 전투(The Battle Of Dien Bien Phu)

20세기 전쟁사에 있어 지배받던 식민지 세력이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빛나는 승리와 독립을 쟁취한 전투가 있다. 그게 바로 1954년 프랑스군이 대패한 디엔비엔푸 전투다.

1. 배경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항복했다. 일본이 항복한 이후 호치민은 전함 미주리호에서 있을 일본의 공식적인 항복 날과 맞추어 하노이 바딘광장에서 독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강대국은 일본군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북베트남에는 중국 국민당군을 남베트남에는 영국군을 주둔시켰다. 이후 중국 국민당군은 철수했지만 영국군은 과거 베트남을 식민지로 삼았던 프랑스를 앞세운 뒤 철수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가 베트남에 들어온 이유는 단 하나였다. 베트남을 다시 자신들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1946년 호치민은 프랑스와의 협상을 통하여 그 나름 베트남 독립을 위해 노력했지만 협상은 쉽지 않았고 1946년 11월 북베트남의 항구도시 하이퐁에서 프랑스군과 베트민군이 충돌하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초기 전세는 프랑스 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1947년 10월 프랑스군은 비엣 박에 있는 베트민 기지를 공격하여 점령했고 호치민을 체포할 뻔했다. 프랑스군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군은 게릴라전으로 프랑스군에 맞서 싸웠다. 1949년 중국의 국공내전이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의 승리로 끝이 났다. 프랑스에 맞서 싸우던 베트민군에게도 매우 든든한 우군이 생긴 것이다.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중국 공산당은 프랑스군에 맞서 싸우고 있던 베트민에게 식량과 무기 그리고 탄약을 지원했다.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물자 지원을 받은 베트민은 1950년 9월 국경지역 전체에 걸쳐 프랑스군을 공격했고, 홍 강 삼각주 지역 전체를 손에 넣었다. 이에 희망을 얻은 베트민군은 1951년 프랑스군에게 총공격을 가했지만 미국으로부터 네이팜 폭탄을 비롯한 온갖 물자를 지원받은 프랑스군은 네이팜 폭탄으로 이에 맞섰고 1951년 베트민의 총 공세는 수많은 사상자를 낸 채 실패로 끝났다.

비록 1951년 베트민의 공세가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프랑스군의 상황이 진전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자체가 정글전과 게릴라전 위주였고 따라서 프랑스군의 전선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심지어 1953년 베트민군은 북부지역을 거의 다 장악하고 중국의 국경지대를 완전히 장악한 뒤, 라오스까지 진격 하고자 했다. 이에 고심하던 프랑스군은 라오스와 베트남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인 디엔비엔푸를 선정하여 프랑스 육군 공수부대를 투하해서 지역을 점령한 후 요새를 건설하고, 해당 요새에 최대한의 병력을 모아 베트민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적을 유인하여 싸우고자 했다. 프랑스군 입장에서는 다시 한 번 베트민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줘서 전세를 되돌릴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2. 프랑스군의 준비

프랑스 육군은 해당 작전을 위해 현지 주둔 병력은 물론 본국에서 지원 가능한 거의 모든 병력, 장비, 물자를 총동원했다. 그 숫자를 다 합치면 투입병력만 16,000명, 지원 병력까지 합치면 2만 명에 육박했다. 당장 요새를 건축하기 위한 각종 장비는 물론이거니와, 포병도 105mm 견인곡사포를 28문이나 확보했고, 심지어 전차도 경전차지만 M24 채피를 분해해서 수송기로 실어와 현지에서 조립하는 방법으로 10대를 확보했다. 여기에 더해서 요새를 지원할 항공전력도 프랑스 공군의 F8F 베어캣을 중심으로 한 270여대를 배치했으며, 수송기도 100대를 확보했다.

이런 식으로 만반의 준비를 갖춘 침공부대는 1953년 11월 20일 2개 대대규모의 공수부대(제6식민지공수대대(6 BPC), 제1샤쇠르공수연대 2대대(II/1 RCP))가 현지공수강하에 성공하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 순식간에 전체 병력을 공중으로 수송하는데 성공했으며, 즉시 비행장을 건설하고 비행장을 지킬 요새를 건축했고, 비행장에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해 반경 3km 이내에 8개나 되는 전초진지를 탄탄하게 건축하고 병력을 배치했다.

3. 디엔비엔푸 전투 시작과 승리

사실 디엔비엔푸는 사방이 산에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라 한번 고립되면 거의 탈출이 불가능한 지역인데다가, 애초에 공중에서 병력을 투하해서 만든 요새라 처음부터 프랑스가 지배하는 지역과의 육상교통로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트민군의 화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던 프랑스는 병력의 열세와 보급의 문제를 압도적 화력과 항공수송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베트민군은 다수의 대공포를 포함한 포병화력을 모아놓고 있었다.

베트민의 보 웅우옌 지압(Vo Nguyen Giap) 장군은 이미 프랑스가 결전을 시도할 것이라 예상하고 전력을 비축해 놓고 있었고, 프랑스군의 디엔비엔푸 투입을 파악하자 3개 사단을 디엔비엔푸로 집결시켰다. 다수의 병력을 험준한 산악지역으로 이동시키기 위해 보응우옌잡 장군은 육군 제351공병포병(Engineering Artillery)사단에게 디엔비엔푸로 가는 도로 82km를 확장시키라고 명령했고, 사단 병력뿐만 아니라 민간인들까지 가세한 결과 디엔비엔푸로 통하는 확장 도로가 완성되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베트민 병력들은 중기관총, 대공포, 야포 등을 손수 인력으로 옮기거나 혹은 부품 단위로 분해하여 정상에서 조립하는 식으로 설치를 하는 상상을 초월한 집념을 보여줬다. 당시 베트민 육군은 자전거를 개조하여 수백 킬로그램의 군수물자를 운반하였는데 산악이동중에 타이어가 손상되면 헝겊을 말아 타이어대신 사용했다.

프랑스군이 투입된 지 약 2개월이 지나고 1954년 1월말이 되자 베트민군은 프랑스군 포병의 배치를 파악할 목적으로 간헐적으로 포병 공격을 가하는 동시에 모든 방향에서 프랑스군의 정찰을 방해했다. 그러면서도 베트민군은 약 5만 명의 대군을 집결하는 동안 섣부른 공격을 삼갔고, 마침내 공격자 대비 방어자의 승리 비율인 3대 1의 상황을 만들었다. 거기에 더해서 프랑스의 예상과는 달리 베트민군은 프랑스군의 4배에 달하는 포병과 방공 전력을 투입하였다.

1954년 3월 13일부터 베트민군이 본격적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압도적 포병 화력에 의해 프랑스군의 북동쪽 전초진지가 순식간에 함락되었다. 다음날에도 압도적인 포병 화력의 지원을 받은 베트민의 파상공세가 정예 제7알제리 척후병 연대 5대대가 방어하고 있던 북쪽 진지에 가해졌고, 이 진지는 이틀만에 함락되었다. 이렇게 북쪽의 고지대를 장악한 베트민군은 비행장에 정밀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비행장이 폐쇄되자 이제 프랑스군의 항공지원은 낙하산을 통해서만 가능해졌다. 한편 이렇게 프랑스군의 진지 2군데가 차례로 함락되자 사기가 땅바닥에 떨어진 베트남인들로 이뤄진 징병군이 다음날 자욱한 안개를 틈타 항복해 왔고, 이들이 지키고 있던 옆 진지마저 베트민에게 넘어갔다.

물론 프랑스군도 놀고 있던 것은 아니라서 전투 초기에는 매일 10회 이상의 공습을 퍼붓고, 보급물자는 물론 하루 100명 이상의 증원 병력을 낙하산으로 투입하는 등 지속적인 증원을 했다. 그러나 베트민군이 투입한 중화기의 숫자도 많아서 요새의 화력으로 대응하기는 역부족이었다. 당장 대공포만 80여문 이상이었으므로 공습하는 프랑스 공군 항공기에 대해 맹렬하게 대응하는 바람에 전투가 진행되면서 프랑스측 항공 전력도 날로 축소되었다.

전투 개시 며칠 만에 북쪽의 3개진지가 모두 베트민에게 넘어갔고 프랑스군에게 남은 것은 중심부의 4개진지와 남쪽에 멀찍이 떨어진 1개 진지였다. 베트민은 잘 방어되고 있던 남쪽 진지를 본진과 차단시킨 채 본진에 맹공을 퍼부었고, 프랑스군은 위태위태한 상황에서도 간신히 붕괴를 막아내었다. 본진 주변의 개활지에서 공세를 퍼붓느라 1주일간 많은 인명피해를 본 베트민군은 이제 전략을 바꾸어 참호를 파면서 접근해 왔고, 이후 약 1개월간의 전투는 제 1차 세계대전 시대의 참호전 양상으로 흘러가게 된다. 이 기간 동안 베트민 측은 뚜렷한 성과 없이 발생한 엄청난 사상자와 의약품의 부족으로 사기가 심각하게 저하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측 역시 보급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참호전에 익숙하지 못한 지휘부가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내 4월 말 베트민은 서북쪽 진지 일부를 점거하고 비행장 영역 대부분에 화력을 퍼부을 수 있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프랑스의 낙하산 공수조차도 착륙 지점을 제대로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

5월로 넘어가자 베트민은 카츄샤 다연장로켓마저 구해와서 파상공세를 퍼부었고, 프랑스군은 TOT 사격을 통해 적의 대열을 붕괴시키면서 저항했지만 병력과 물자 모두에서 막바지에 몰려 있었다. 막바지인 5월 6일에는 베트민이 맹랑한 심리전까지 벌였다. 프랑스군의 사기를 꺾기 위해 프랑스 노래를 불렀는데 다른 노래도 아닌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노래였다. 결국 5월 7일 저녁 프랑스군의 모든 진지가 함락되었고 프랑스군은 베트민군에게 항복했다. 56일간 지속되었던 디엔비엔푸 전투는 이로써 끝이 났다.

4.결론

56일간 지속되었던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총 2000명에서 3000명이 전사했고 1만 명 이상이 베트민군의 포로로 붙잡혔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군은 8년간의 전쟁에서 약 7만 명이 전사했다. 디엔비엔푸 전투가 호치민과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이 이끄는 베트민군의 승리로 끝난 뒤 1954년 7월 21일, 스위스 제네바서 열린 회담을 통해 휴전협정이 조인, 프랑스군의 철수와 함께 북위 17도선을 휴전선으로 설정하고 합계 8km의 비무장지대를 설치하며, 2년 내에 남북통합 선거를 실시한다는 합의를 함으로써 8년간 지속되었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끝이 났다.

디엔비엔푸 전투는 식민지 지배를 받던 베트남이 프랑스 제국주의에 맞서 스스로 승리를 쟁취한 위대한 전투이자 식민지 지배를 받는 나라가 제국주의에 맞서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전투였다. 이런 저항정신을 가진 베트남이었기에 미국과 싸워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참고 문헌

* 호치민 평전, 윌리엄J듀이커, 푸른숲(2003)

*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마이클 매클리어, 을유문화사(2002)

* 왜 호찌민인가, 송필경, 에녹스(2013)

*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정토웅, 가람기획(2010)

* 호찌민과 베트남 전쟁, 손영운/김태완, 주니어김영사(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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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알아두어야합니다 2018-08-29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디엔비엔푸는 마오쩌둥이 사단급에 해당하는 최신무기를
공짜로 제공해주어서 가능한것이었지
그 이전에는 숫제 나무몽둥이로 프랑스 몰아내잔 꼴밖에 안되었음

NamGiKim 2018-08-29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후에 남베트남의 지도자가 될넘들은 그 당시 프랑스에 부역했죠. 호치민과 지압같은 사람들은 프랑스에 맞서 싸울때 프랑스가 식민지 유지하도록 전비 70%를 댄 것도 미국이었고, 어쨌든 이겨서 몰아낸거니 대단한거지. 난 적어도 그렇다고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