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호치민 주석 묘와 집무실 그리고 박물관까지 풀코스로 돌았습니다. 워낙 존경하는 인물이다 보니 더욱 감동적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베트남 인민의 영웅입니다. 한 평생을 투쟁으로 살아온 그를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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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후에 황궁을 방문했습니다. 1802년에 탄생한 응우옌 왕조의 옛 황궁인 후에는 1945년 3월 일본 제국주의가 내세운 꼭두각시 황제 바오다이까지 이어졌습다. 그리고 후에 황궁은 베트남 전쟁 당시 구정 공세가 있을 때 미군의 폭격으로 70%가 파괴되었었죠. 개인적으론 후에 황궁이 약간 자금성하고 비슷한 느낌도 있지만 뭔가 자신들 만의 독특한 것이 있어 보이네요. 확실히 후에는 옛 전통을 강조하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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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니퐁넛 학살 증오비를 방문하며

구정 공세 52주년인 오늘 아침 1월 31일, 나는 꼭 들려보고 싶은 곳을 들렸다. 그 장소는 바로 1968년 2월 12일 한국군 청룡 부대에 의하여 수십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한 곳이다. 구정 공세가 한참이던 1968년 2월 12일 꽝남성 디엔반현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한국군들은 작전도중 부대원이 희생당한 사건이 있자 소위 안전 구역으로 알려진 퐁니 퐁넛 마을에 들어가서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당시 그 마을에 들어간 한국군은 여자와 아이 노인을 대상으로 무차별 학살을 함으로써 대략 74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희생당한 이들중 가장 나이가 많은이는 80살이었고, 가장 어린사람은 임산부 배속에 있던 아이었다. 퐁니 퐁넛 학살이 국내에 이슈가 된건 1990년대 구수정 박사께서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 민간인 학살 문제가 공론화 시키면서 부터였다.

베트남 전쟁에 대해 공부를 한 필자는 다낭을 방문하게 되면 학살 증오비를 방문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 무차별적인 학살의 진실을 알기 때문이다. 어제 다낭에서 만난 베트남 페친과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30분을 달려 퐁니 퐁넛 학살 한국군 증오비가 있는 곳에 방문하게 되니 나는 저절로 마음이 숙연해졌다.

증오비에는 한국군에게 학살당한 피해자들의 명단이 나이순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시작은 1890년 생이었지만 끝은 1968년 생이었다. 참으로 마음이 아프다. 따라서 난 증오비 앞에서 무릎꿇고 사죄했다.

왜 한국군은 이토록 잔혹한 범죄를 베트남에서 저지른 것일까? 나는 그것이 해방후 제주4.3 항쟁과 여순항쟁, 한국전쟁시기의 민간인 학살 그리고 1980년 광주학살까지 이어지는 연장선상이라 생각한다. 즉 한국군의 뿌리는 해방 후 친일세력의 뿌리를 두었고, 그런 역사와 경험이 있었기에 베트남에서도 참혹한 학살이 일어나 많은 베트남인들에게 상처를 준것이다.

근래에 들어서 많은 한국 사람들이 먹고 즐기기 위해 다낭을 찾고 있다. 그러나 놀고 먹는 곳 근처에서 52년 전 한국군에 의해 베트남 민간인이 학살당했다는 사실을 아는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런 민간인 학살을 벌였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베트남 분들에게 항상 죄송함을 느낀다. 최근들어 수구세력들이 베트남 전쟁 당시의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부정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난 그들에게 이 증오비들을 꼭 보고 오라고 얘기해주고 싶다. 기회가 생긴다면 나는 한베평화재단에서 하는 평화기행에 꼭 참여할 것이다.

다시 한번 베트남 분들에게 머리 숙여 사죄합니다! 항상 죄송스럽습니다! 미안해요 베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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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31 17: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7-21 2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현재 베트남 다낭에 있습니다. 그냥 생각없이 잡은 호텔에서 엄청 가까운 거리에 1965년 미해병대 3500명이 상륙했던 해변이 있더군요. 참고로 오늘 베트남 페친과 참으로 의미있는 대화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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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한 그는 누구인가?

1966년 9월 22일 대한민국 국회는 삼성그룹의 사카린 밀수로 인하여 시끄러웠다. 그 국회에서 정일권을 비롯한 국무총리 각료들에게 똥물을 투척한 인물이 있었다. 그는 ‘조선 최고의 주먹‘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건달이자 대한민국 국회의원인 김두한이었다.

김두한은 대중매체를 통해 생애가 나름 잘 알려진 인물이다. 1990년대에 개봉한 ‘장군의 아들‘이나 최고 시청률 57%까지 찍었던 124부작의 대하 드라마 야인시대를 비롯하여 김두한은 국민들에게 많이 알려진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등장하는 매체는 대체로 그를 협객이나 주먹왕으로 묘사되기에 그의 실체는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따라서 김두한의 생애를 정확히 아는 것도 중요하다.

김두한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1918년에 태어났다. 1924년 그가 7살이던 시절 청산리 대첩의 영웅이자 자신의 아버지 김좌진 장군을 만났다고 한다. 그러나 그 주장에도 역사적 고증이 전혀 맞지 않는 오류가 있는데, 김두한의 주장에 따르면 ˝자신이 7살이 되던 시절 만주로 가서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김좌진 장군을 만났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일본군 수천명이 전사했다고 알려진 청산리 전투는 1920년에 있었다. 그외에도 그는 여러 역사적 고증 오류로 인하여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 아니라는 의심을 받고 있고, 무엇보다 김두한의 딸인 김을동 의원이 DNA검사를 거부했다는 점에서 사실무근 관련한 의심을 받을만 하다. 따라서 드라마 야인시대에 나오는 김두한과 김좌진의 만남은 처음부터 허구에 기반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가 가족 했던 주장중 가장 황당한 주장은 ˝자신의 할아버지가 1884년 3일천하 갑신정변의 주요 인사인 김옥균˝이라는 소리다. 이것또한 전혀 사실관계가 맞지 않는 거짓말이다. 일단 김좌진 자체가 김옥균의 양자가 아니다. 즉 김옥균과 김좌진이 족보적으로 연결되는 접점이 전혀 없다. 굳이 김옥균, 김좌진, 김두한의 공통점이라 하자면 안동 김씨라는 같은 성씨라는 사실 뿐이다.

어린 시절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거지 생활을 했던 김두한은 원노인에게 거두어져 자랐다고 한다. 물론 이것도 확실히 확인된 바는 없다. 아무튼 그는 18세가 되던 1935년 종로의 유명한 극장 우미관에서 일하며, 건달로써 유명해졌다. 우미관에서 일하던 그가 당시 유명했던 건달 구마적과 신마적을 넘어서고 종로 제1일의 주먹패가 된 것은 아주 거짓말은 아닌듯 하다.

그러나 김두한을 비롯하여 몇몇 사람들이 주장하는 ˝일본 상인들로부터 조선의 심장이자 마지막 보루인 종로 상권을 지켜냈다.˝는 주장은 믿기 힘들다. 당시 시기를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조선 전체가 이미 일제의 식민통치에 철저하네 유린당했기 때문이다. 즉 그 시기에 일본 상인들로부터 지킨다는 것 자체가 사실상 말이 안된다는 거다. 김상구 저자의 ‘김두한 출세기‘라는 책에 나온 표를 보면 1930년부터 1940년까지 폭력배 관련 언론 기사에는 일본 야쿠자와의 싸움에 대한 기사는 없다. 김두한 및 그의 동료 깡패들은 쉽게 말해 종로 상인들 자릿세를 갈취해 가고, 극장 및 유흥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폭력배일 뿐이다. 설사 하야시와 같은 혼마찌 일본 건달들과 싸웠다 하더라도 그것은 경제적 이권 다툼일 것이다.

김두한의 주먹 조직이 또 다른 변화를 겪게된 것은 1941년 태평양 전쟁이 격해지면서 부터다. 태평양 전쟁이 격해지면서 일본은 대대적인 징용을 시작했고, 그 범위가 주먹패까지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하여 주먹패들중 일부도 징용되어 전선에 나가게 되었는데, 그게 일본군 내의 사고 및 문제로 이어졌다. 그로 인하여 조선 총독부는 김두한을 비롯한 주먹패들을 모아 1943년 소위 ‘반도의용정신대‘를 조직했다. 이들중 일부가 친일의혹이 있지만, 김두한 개인의 친일행적은 특별히 없다. 이들은 후방에서 지원하는 용도로 만들어졌기에 김두한과 그의 주먹패는 거기서 활동하다 1945년 해방을 맞았다.

김두한 본인 회고에 따르면 해방 이후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 치안대에서 활동하며, 일본 해군무관부를 접수했다고 한다. 그러나 2000년대 나온 다큐멘터리 ‘건달의 역사‘에 따르면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 김두한의 주장은 건준에 잠시 있었다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빠를 것이다. 본인 주장에 따르면 ˝자신의 아버지 김좌진 장군이 공산주의자에게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좌익에서 우익으로 전향했다.˝고 한다. 이유가 어찌됐건 그는 모스크바3상회의 이후 반탁 진영의 선봉에 서면서 무차별 테러를 자행했다.

1946년 4월 그는 대한민청이라는 극우 조직을 결성했고, 여러 테러활동들을 전개했다. 대한민청은 극우파쇼인 이범석이 주도로 만들어진 족청이 발전한 것이었다. 그가 쓴 대한민국건국청년운동사에 나온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1946년 중앙극장 폭파사건, 철도파업진압, 전평 본부 습격, 민청집회장소인 삼각산 문수암 급습, 경전 파업 진압, 인천 조선기계제작소 파업 진압, 남로당 대회장 습격 등이 있다. 이런 활동은 무자비한 파업 진압은 좌익 노조활동의 근본적 파괴를 가지고 왔다. 심지어 그는 당당하게 ˝자신이 여운형 암살에 관여했다.˝는 소리를 하기도 했다. 드라마 야인시대의 패러디 소재인 심영 습격도 실제로 김두한 측에서 실행했고, 심영의 다리를 총으로 쏘아 맞췄다고 한다. 또한 김두한은 이화룡측의 서북청년단과도 큰 인연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거지시절 친하게 지냈던 친구 정진영이 사회주의 쪽에서 활동하자 무자비하게 죽였다.

정리하자면 김두한은 해방 이후 정치활동을 하면서 조직이 더 커졌다. 그가 자행한 백색테러는 경찰총장 조병옥과 장택상의 대대적인 지원과 친일파들의 지원 그리고 미군정의 방관속에서 이루어졌다. 해방정국 시기 여러 테러 활동이 있었다. 그중 대다수는 우익쪽에서 했고, 그 대상은 어린이, 노인, 임산부까지 확대되었었다.

1948년도에 김두한은 미군정에 의해 구속되어 하지 사령부에게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러나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의 특전으로 그는 사면되었다. 일각에서는 사형수 시절 오키나와 미군형무소에 수감되었다고 하나 이 또한 김두한의 자작극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여러 조직에서 배제되었다.

한국전쟁 시기 그는 군인으로 참전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포항 전투에 참전했다는 얘기 또한 확실한 증거가 없어서 있는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한국전쟁 시기 김두한 또한 부산으로 피난을 갔고, 전쟁이 끝날때 까지 부산서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시기 이승만으로 부터 내무부장관직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는 하나, 이 또한 근거가 없다.

한국전쟁 이후 김두한은 서울로 돌아와 1954년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됐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당선이 된 이후부터는 반이승만 반자유당 노선에서 활동했고, 심지어 진보당의 조봉암을 옹호하기도 했었다. 사실 이는 해방 후 이승만 못지 않게 레드 컴플렉스를 보이던 조병옥과 장택상 그리고 유진산 같은 인물들이 반이승만 노선을 1950년대에 택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아무튼 그는 1950년대 반이승만 노선을 표명했고, 형식적으로 야당쪽에 있었다. 그 바람에 한때 동료였던 자유당의 이정재측과 여러 갈등을 보였었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부가 물러난 뒤, 1961년 5.16 쿠데타로 박정희가 집권하자 그는 박정희 정부를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시기 정치쪽에서 밀려나 있었던 김두한은 1965년 제6대 국회의원선거의 재보궐선거에서 용산구에 한국독립당의 후보로 출마, 당선되었다. 이로써 생애 두번째로 국회의원이 되어 8년 만에 국회 재입성했다. 하지만 김두한은 당선되자마자 한일회담 시위관련하여 한독당 내란 음모 사건으로 체포되어 감옥에 같혔었다. 물론 그게 국회에 문제가 되어 석방되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1966년 현재 이건희의 아버지 이병철이 사카린을 밀수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그는 똥물을 가지고 와 말 그대로 똥물을 투척했다.

참으로 재밌는 것은 그 시기 김두한은 해방 후 자신이 했던 백색테러를 합리화 하면서 한편으로는 복지가 어떻다니 노동자가 어떻다니 하며 권리니 하는 이야기를 했다는 점이다. 이후 김두한은 1967년 신민당 후보로 출마했었고 당선도 되었지만,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유세 연설 도중 체포되기도 했었다. 그러던 1971년 다시 선거에 나서서 그 동안 얻었던 득표율에 비하면 큰 표를 얻었기는 했다만 간발의 차이로 낙선하였고, 1972년 11월 김두한은 뇌출혈로 사망했다.

김두한이라는 존재는 참으로 묘한 존재다. 그는 일제시기 깡패였고, 해방 후에는 정치 깡패로 변모하여 민간인에게 무차별 테러를 자행했으며, 한국전쟁 이후에는 이승만 박정희에 맞서는 야당인사였다. 또한 말년에는 자신이 받고 있던 국가 유공자 연금 전액을 고아원에 지원했었다. 그리고 그는 공공연하게 거짓말을 일삼았다. 그런 점에서 그는 참으로 독특한 인생을 가진 인물이다. 그러나 대중 매체에서 나타난 그의 모습은 지극히 김두한 자신이 미화한 것을 어떠한 검증없이 받아들인 것이기에 당연히 비판적으로 봐야 하고, 해방 후 자주국가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테러로 대응했다는 점에서 그는 역사의 심판대에 올려 놓아야할 인물이다.

참고자료

김두한 출세기, 책과 나무, 김상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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