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호치민(Ho Chi Minh)이라는 인물을 처음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시절 만화 시리즈 중 하나인 보물찾기 시리즈를 읽게 되면서였다. 보물찾기 시리즈 중 하나인 베트남에서 보물찾기에는 아주 잠깐이나마 베트남 사람들이 국부로 여기는 호치민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고, 호치민이라는 인물에 그다지 관심이 없던 나는 아 이런 사람이 있었구나정도로만 알게 되었다. 베트남의 국부 호치민이라는 인물에 다시 관심이 생긴 것은 대학교 2학년 2학기를 마치고 나서였다. 당시 나는 한국 근현대사에 관심이 많이 생겨 여운형, 김원봉 등과 같은 잊혀진 독립운동가들의 평전을 읽었는데, 그 중 읽었던 평전 중 하나가 박헌영 평전이었다. 안재성 작가의 박헌영 평전에는 그가 베트남의 국부 호치민과 같이 대학교를 다녔다는 내용이 나왔었는데, 호치민이라는 인물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기에는 충분했다.

 

군복무를 위해 한 학기룰 휴학했던 2016년 초 나는 쿠바 혁명을 성공시킨 체게바라(Che Guevara)에 빠졌었다. 체게바라를 좋아하게 된 나는 체게바라 관련 책들과 다큐멘터리 영화 등을 닥치는 대로 보았다. 체게바라 관련한 다큐멘터리에서 진보적인 대학생들이 두 개의 초상화를 들고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하는 장면이 나왔는데, 그 대학생들은 호치민과 체게바라의 초상화를 ! ! 호치민! ! ! 체게바라!(Ho! Ho! Ho Chi Minh! Che! Che! Che Guevara!)”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 장면이 참으로 인상적으로 남겼다.

 

201610월 말부터 소방서 공익으로서 복무하게 된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박근혜 퇴진 집회에 참가하게 됐다. 매주 토요일마다 거의 빠지지 않고 퇴진집회에 참가했던 나는 박근혜의 아버지 박정희에 대해 비판적으로 알고 싶어 만화 작가 백무현 선생이 쓰신 만화 박정희를 읽게 됐다. 만화 박정희에서는 박정희의 베트남 파병에 대해 개략적으로나마 다루었고, 호치민의 얼굴과 베트콩 전사들이 그려진 파트에선 베트남 전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었다.

 

사상 첫 해외 파병인 베트남 전쟁. 그 전쟁의 진실은 무엇이었나? 그 전쟁은 역사적으로 오랜 외세의 식민지 통치하에서 그에 반항하고 민족해방과 독립을 추구하며 싸운 애국지사와 역대 외세에 빌붙어서 일산의 영달을 꾀해 온 민족반역자들과의 싸움이었다. 우리로 말하면 일제 하 독립운동을 한 애국세력과 친일세력간의 싸움이었다. 신생 독립 민족 내의 민족양심세력과 민족반역세력의 싸움이었던 것, 베트남 민중의 80%는 호치민과 공산당을 지지하고 있었다. 마치 우리가 해방 뒤 김구 등 민족세력을 지지한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그러나 미국이 지지한 쪽은 부패하고 타락한 사이공 반공정권이었다. 우리로 말하면 친일파 정권을 지지한 셈이다.”

 

이것은 내가 전혀 모르고 있었던 베트남 전쟁의 또 다른 진실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베트남 전쟁에 대한 지식은 워낙 짧아서 반공주의자들이 하는 얘기도 절반은 진실이라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이런 생각은 베트남 전쟁을 공부하면서 바뀌었지만 말이다. 만화 박정희를 읽게 된 이후 나는 알라딘에서 찰스 펜이라는 미국인이 쓴 호치민 평전을 구매하여 읽게 됐다. 그 책을 통해 베트남의 영웅 호치민 또한 젊은 시절부터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시기 나는 호치민에 대해 크게 관심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깊게 알지는 못했다. 호치민 평전을 읽게된 다음 캐나다 출신의 종군기자 마이클 매클리어(Michael Maclear)가 집필한 베트남 10000일의 전쟁(The Ten Thousand Day War Vietnam 1945~1975)’을 읽었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을 읽으면서, 2차 세계대전 당시 CIA의 전신인 OSS가 호치민 휘하에 있는 베트민(Viet Minh)을 대일전에 참가시키기 위해 훈련시키고 지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20년 뒤 미국이 전쟁을 치르게 된 세력이 한 때 자신들이 동맹이었다는 사실도 같이 알게 되었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을 읽은 이후 필자는 전 독립기념관장 김삼웅 선생이 집필한 리영희 평전을 읽게 됐다. 리영희 평전에서도 과거 민주화운동가 리영희가 분석한 베트남 전쟁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 그 내용을 읽어보면 읽어볼수록 베트남 전쟁은 미국이 일으킨 침략전쟁이자, 비인간적인 범죄행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2017년의 추석은 참으로 길었다. 나 또한 10일 가까이 쉴 수 있었는데, 그때 읽었던 책이 바로 윌리엄 J. 듀이커의 호치민 평전(Ho Chi Minh, A Life)’이었다. 사실 내가 호치민 평전을 처음 읽을 때, 듀이커의 평전 이전에 찰스 펜의 호치민 평전을 읽었던 것은 듀이커의 책이 너무나도 두꺼워 읽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호치민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고 싶었던 나는 듀이커의 호치민 평전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알라딘을 통해 그 책을 구매하게 되었다. 따라서 2017년 나는 추석 연휴를 틈타 듀이커가 집필한 호치민 평전을 읽게 됐다.

 

대략 970페이지(각주 빼면 850페이지)가 넘는 듀이커의 호치민 평전은 한 학자가 30년 동안이나 호치민을 연구한 것을 책으로 집필한 완성작이었다. 듀이커의 호치민 평전을 읽으면서, 베트남 전쟁 당시 저자 듀이커가 그랬듯이 나 또한 점차 호치민이라는 인물에 매료됐다. 젊은 시절부터 그가 걸어온 독립을 향한 투쟁과 30년간의 해외 생활 및 여러 활동은 참으로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그가 해외를 떠돌아 다니면서 세상을 배워가는 과정과 베트남 독립을 향한 열정이 과거 일제시대의 독립운동가들을 떠오르게 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1911년 베트남을 떠나서 1941년 중월 국경지대인 팍 보(Pac Bo)’에 베트민 혁명기지를 세우기까지의 호치민의 삶은 말 그대로 베트남 독립을 향한 투사의 생애였다는 사실을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됐다. 책에는 베트남의 독립과 자유를 향한 한 혁명가의 뜨거운 열정과 사랑이 담겨있었다. 특히나 베트남과 인민에 대한 그의 사랑은 194592일 하노이 바딘 광장에서 독립을 선언할 때, 더더욱 드러난다.

 

호치민이라는 인물에 더더욱 매력과 존경심을 느끼게 된 것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평전에서 자세히 읽으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얄타와 포츠담 회담에서 베트남 문제를 합의본 강대국들은 베트남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특히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전국 자리에 오른 샤를 드골의 프랑스는 베트남을 다시 식민지화하려고 했다.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 군대는 19545월 라오스 국경지대에서 벌어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8년간의 독립전쟁을 끝내고 독립을 쟁취했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던 호치민의 투쟁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비록 미국과의 전쟁인 베트남 전쟁에 대해선 매우 짧게 다뤘지만 듀이커의 호치민 평전은 혁명가 호치민이 걸어온 자유와 독립을 향한 투쟁적인 삶을 감동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듀이커의 호치민 평전을 읽으면서 나는 혁명가 호치민을 진심으로 존경하게 됐다. 듀이커의 호치민 평전을 읽고 난 이후에도 다른 책들도 읽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호치민 주석에 관한 두 권의 책은 송필경 선생께서 집필하신 왜 호치민인가?’와 호치민의 글과 연설을 모아놓은 식민주의를 타도하라를 정말 감동적으로 읽었다. 그 두 권의 책은 혁명가 호치민에 대해 많은 걸 알게 해주었다. 두 권의 책 또한 나로 하여금 호치민을 더더욱 존경하게 만들었다.

 

20대의 젊은 시절부터 80노인이 되기까지 인생을 투쟁으로 살아온 호치민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그의 생애는 나에게 참으로 깊은 감동을 주었다. 나는 호치민을 공부하면서 과거 일제시기 조선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독립운동가들이 생각나기도 했다. 그만큼 호치민도 위대한 생애와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호치민의 인간성에 대해 깊은 극찬을 보낸다. 특히나 그가 다른 지도자들과 다르게 부패하지 않았다는 점에 많이 주목한다. 물론 이 또한 사실이고 호치민 주석의 인간애는 참으로 존경받을 만한 행적이지만, 나는 그의 인간성 보다 그가 베트남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걸어온 투사로써의 모습에 더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호치민 주석의 지도 아래(비록 그는 1969년에 사망했지만) 베트남인들은 1975년 세계 최강의 제국주의 국가 미국을 무찌르고 통일을 할 수 있었다. 즉 베트남인들은 호치민을 통해 자주와 독립 그리고 통일을 쟁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민족반역자 편이었던 남베트남 정부에 부역했던 이들이 있다. 그들은 1975년 베트남이 통일을 이룩하고 난 이후 보트피플이 되어 미국에 망명했다. 보트피플이 되어 베트남을 떠난 그들은 혁명가 호치민에 대해 아무런 근거 없는 역사 왜곡과 입에 담을 수 없는 망발을 일삼으며 증오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어디까지나 신분적으로 남베트남에 부역했던 인물들이기에, 주장 자체에 신빙성이 매우 떨어진다. 그들은 그저 반공주의라는 편향된 사상을 가지고, 자기들 멋대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 정착한 보트피플들과 베트남 전쟁 파병을 찬양하는 한국의 극우 세력을 제외하면 호치민은 전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1960년대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을 당시 미국과 영국,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네덜란드, 스웨덴, 일본의 진보적인 대학생들은 호치민의 초상화를 들고 ! ! 호치민!’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반대했다. 나는 이것이 혁명가 호치민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위대함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동남아시아의 한 지도자가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끼친 본보기는 없기 때문이다.

 

2020519일인 오늘은 호치민 주석이 탄생한지 130주년이 되는 날이다. 호치민은 오늘날 베트남에서도 세대를 아울러 대다수의 인민들에게 존경받고 있다. 비록 난 한국에서 태어났고, 호치민에 대해 공부하게 된 것도 근래에 들어서이긴 하지만, 그분을 매우 존경한다. 혁명가 호치민은 비단 베트남인들 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많은 것을 가르쳐준 훌륭한 선생이자, 격 없는 아저씨 혹은 삼촌이기도 하다. 그런 분의 130주년 생일을 맞아 내가 왜 민족해방투사이자 혁명가인 호치민을 존경하게 되었는지를 얘기해보고 싶었다. 앞으로도 나는 그를 존경할 것이고, 그를 잊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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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 지 오늘로써 40년이 됐다. 40년 전 광주는 피바다였다. 전두환 일당이 보낸 진압군들은 광주를 피로 물들였다. 그들은 광주인민 수천 명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 당시 광주를 피로 물들인 그 일당들은 아직도 살아있고, 학살의 주범인 전두환은 재산 29만원으로 호화생활을 누리고 있다. 오늘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인 만큼, 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19791026일 박정희가 자신의 부하 김재규가 쏜 총탄에 맞고 사망했다. 박정희가 암살당하자, 당시의 국무총리이던 최규하가 대통령권한대행이 되었다가, 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최규하가 대통령이 된 이후 박정희 암살사건의 조사를 맡았던 국군보안사령관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세력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 세력들은 계엄사령관인 정승화를 박정희 암살사건과 연관이 있다는 이유로 참모총장 공관에서 총격전을 벌여 보안사령부 취조실로 연행하면서 12·12 쿠데타를 일으켰다. 12·12 쿠데타를 통해 전두환 등의 신군부가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전두환은 최규하를 압박하면서 권력 찬탈의 야심을 본격적으로 드러냈다.

 

박정희의 유신체제를 경험했던, 민주화운동 세력과 일반국민들은 이를 원하지 않았다. 12·12 쿠데타의 주역인 전두환은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확장해나갔다. 19803월 중순 주한 미대사 글라이스틴은 자신이 작성한 한국의 정치 상황 보고서에서 전두환이 군을 장악하고 이제 정권을 장악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박정희 사망 이후 내려진 비상계엄에도 불구하고, 1980서울의 봄시기에는 학생운동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이런 학생운동은 학원자율화운동 또는 학원민주화운동으로 시작되었다. 4월 들어 학생운동은 학내문제를 넘어 점차 병영집체훈련 거부투쟁으로 이어졌고, 노동자들의 투쟁도 가열됐다. 노동자 투쟁은 꽤나 적극적으로 일어났는데, 5·17 군사 쿠데타 이전까지 총 897건의 노동쟁의와 총인원이 20만명에 달했다.

 

1980414일 최규하 대통령은 공석 중인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을 겸임 발령했다. 이렇게 전두환은 신군부의 정치개입 의사를 공공연히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되면서 5월 여러 민주화 운동들이 전국적으로 일어났고 대학가의 시위도 일어났다. 513일부터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전국적인 대규모 학생 시위로 나타났다. 514일에는 계엄령 철폐를 요구하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전국 곳곳에서 격렬하게 전개되었고, 15일에는 시위가 더 확대되었다. 하지만 군대 투입을 우려했던 서울 경인지역의 총학생회장단은 군 병력의 이동소식이 전해지는 가운데 유혈사태를 염려하여 가두시위 철수를 결정했다.

 

신군부 세력이 군대를 이동시키고 배치시키기 시작하면서 16일 이후 광주등 일부 지방을 제외하고는 서울을 비롯한 대부분 지역의 학생 시위는 중단되었다. 한편 학생 시위가 중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쿠데타를 감행하기로 한 신군부 세력은 충정부대의 이동과 배치를 중단하지 않았다. 1980517일 비상계엄 선포지역이 제주도를 포함하면서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517일 하루에만 600명이 넘는 재야·학생운동 지도자, 언론인 등이 체포됐고, 야당인사 김대중은 내란 음모죄로 체포됐다.

 

하지만 다른 지역과 달리 전라도 광주에서는 시위가 계속됐다. 특히나 야당 인사 김대중을 지지했던 광주의 경우 박정희 시절부터 차별과 멸시가 있었다. 그런 감정속에서 김대중이 체포되자 광주 시민들은 더욱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전두환은 광주의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될까 봐 두려워했다. 결국 전두환은 초기에 강경진압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군대를 광주에 보내게 된다.

 

1980518일 오전 10시 전남대학교 정문에 1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농성을 시작했다. 이때 학교를 지키고 있던 공수부대는 특수 곤봉으로 공격을 시작했고, 공수부대원이 휘두르는 곤봉은 학생들을 잔혹하게 구타했다. 공수부대의 진압이 과도하자 학생들은 이런 상황을 시민들에게 알리기로 하고, 시내에서 시위를 시작했다. 그날 오후 330분쯤 신군부 세력은 광주에 7여단을 투입하여 본격적인 시위 진압에 나섰다. 공수부대는 진압봉, 개머리판, 군홧발로 시위하는 광주 학생들을 잔인하게 진압했다. 이들은 시위대를 잡는다는 이유로 가택수색은 물론이고, 나이를 불문하고 가차 없이 폭력을 행사했다. 심지어 여학생과 주부 등 여자들에게조차 옷을 벗기고 구타했는데, 이런 시위 진압은 18일 저녁 늦도록 이어졌다.

 

다음날인 19일 공수부대의 시위 진압은 더욱 폭력적으로 변했다. 이날 등장한 부대는 서울 동국대를 떠나 밤새 광주에 도착한 11여단 소속이었다. 장갑차까지 앞세워 출동한 그들은 지역대 단위로 시위대를 추적하여 곤봉과 소총 개머리판으로 공격하고, 일부 대원은 대검까지 사용했다. 이들은 다방, 여관, 민가 등을 샅샅이 수색하며 걸리는 사람마다 구타하고 연행했다. 이날 오후에는 11여단과 7여단의 5개 대대 병력 모두가 투입됐다. 물론 공수부대의 잔인한 구타에 광주시민들도 일방적으로 당하지만은 않았다. 광주시민들은 산발적인 시위를 전개하며 맞섰다. 이에 더 악을 쓰게된 공수부대원들은 시위대 뿐만 아니라 시내버스나 택시를 세워 운전기사까지 구타하는 짓을 저질렀다. 이때 시위대는 화염병, 벽돌, 각목 등으로 계엄군에 맞섰고, 시위는 더더욱 확산됐다. 이때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학생 청년뿐 아니라 노인 부녀자 심지어 어린아이까지 죽게 되는 경우가 벌어졌다.

 

다음날인 20일 오후 시위대의 규모는 수만 명으로 늘어났다. 전남대학교 학생들의 시위로 시작된 데모는 민중 항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오후 7시에는 대형 트럭, 고속버스, 시외버스와 택시 200여 대가 금남로를 가득 메운 채 시위에 참여했다. 시위 규모는 20만 명을 넘어섰다. 당시 광주에서의 시위양상은 언론에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다. 특히나 KBSMBC같은 매체는 마치 공산주의자나 폭도들이 일으킨 것처럼 사건을 왜곡해서 보도했다. 그 결과 20일 저녁 광주의 MBCKBS가 불탔다.

 

521일 도청을 중심으로 30만 명이 모여들어 투쟁의 정점을 이뤘다. 당시 시위대가 대규모로 확산되니까, 공수부대가 물러날 것이라는 희망적인 관측도 나왔었다. 그러나 정오가 되고 애국가가 울려 퍼질 때 공수부대 병사들의 M-16 소총은 불을 뿜었다. 잘 훈련된 병사들은 조준 사격으로 광주 시민을 하나둘씩 쏴 죽였다. 이렇게 최소 수백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이걸 직접 목격하게 된 광주시민들은 무차별 학살을 감행한 공수부대에 무장으로 맞서 싸우기로 결정했다. 이들 중에는 경찰서에 있는 무기고를 접수하여 M-1 카빈 소총으로 무장해 계엄군에 저항했다. 이렇게 하여 시민군이 형성된 것이다. 시민군은 저항으로 21일 저녁 계엄군을 몰아내고 전남도청에 진입했다.

 

522일 광주는 시민군이 잔인한 공수부대에 맞서는 해방구가 됐다. 시민군은 자체 조직을 정비해 계엄군의 반격에 대비하면서 시내의 치안을 유지하는 일을 했다. 헌혈하는 사람들이 넘쳐났고, 아주머니들은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군들에게 식량으로 보급했다. 시민군 측 차량들은 구호·연락·수송·보급·순찰·전투 등의 임무를 나눠 조직했다. 이런 혼란한 상황에서 은행이나 신용금고에서의 사고는 단 한 건도 없었다. 목적은 달랐지만, 1871년 당시 지배계급에 맞서 민중들이 조직했던 파리 코뮌과 비슷했다.

 

하지만 광주는 고립되어 갔다. 고립되어 가자 시민군 지도부 내부에선 총기를 반납하고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525일 저녁에는 정상용과 윤상원 등 광주의 재야 청년운동권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항쟁 지도부가 등장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계엄군에 맞서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이들은 끝까지 싸우기로 결정했다. 전두환과 신군부 일당들은 시민군을 진압하고 싶어 했다. 527일 새벽 1시 계엄군은 탱크와 장갑차까지 동원하여 진압작전을 전개했다. 결국 새벽 455분 계엄군이 도청을 완전히 점령하면서 광주 민주화 운동은 막을 내렸다.

 

광주 민주화 운동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전두환과 대한민국 군대의 잔인성도 있지만,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미국의 이중적인 행태다. 미국은 전두환이 광주에서 시위가 확산되지 않기를 바라며 그들이 진압하기를 원했고, 신군부 세력의 진압작전을 지원했다. 우선적으로 미국은 한미연합사의 작전통제권하에 있는 20사단의 광주 투입을 승인해주었다. 또한 미국은 신군부가 광주의 진압작전을 안정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오키나와 기지에서 조기경보기 2대와 필리핀 수빅 만에 정박 중이던 항공모함 코럴시호를 한국 근해에 출동시켰다. 당시 미국에게는 한국의 민주화 보다 북한으로부터의 안보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따라서 미국은 신군부를 지원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수백명 내지는 수천명이 죽었다. 공식자료에 따르면 161명이 사망한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죽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무튼 전두환의 광주학살로 많은 사람이 학살당했다. 광주에서 학살을 벌일 수 있었던 기본적인 동기부여는 반공주의였다. 그 반공주의라는 사상이 기본적인 바탕에 놓여 있었고, 극단적 반공주의가 광주 시민 전체를 폭도 내지는 빨갱이 새끼로 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반공주의는 민주화된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도 그대로 남아서 극단적인 경우에는 5·18을 북한군의 폭동으로 규정하는 심각한 역사 왜곡을 저지르고 있다. 심지어 지만원 같은 사람들은 5·18 민주화운동을 북한이 개입했다는 어처구니 없는 책을 써서 광주시민들을 모욕하기 까지 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시민들이 군사독재 정권에 들고 일어나 저항하고, 그 이후 전두환 정권에서의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를 갖는다. 광주 민주화 운동 40주년인 오늘 만큼은 군부독재에 싸우다 죽은 이들을 기리도록 하자! 광주를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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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류알바 단상

오늘 난생처음으로 몸으로 뛰는 노동을 했다. 용인에 있는 어떤 고기 공장이었고,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6시 30분까지 총 9시간을 노동했다. 비록 쉬는 시간도 중간에 있고, 점심도 공짜로 제공됐지만, 하나에 최소 10kg 이상이나 되는 고기상자를 수백개씩 옮기는 작업은 신체적으로 단련되지 않은 사람에겐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대량생산체제를 통해 생산된 고기상자를 옮기면서 ˝이 노동을 통해 오늘 내가한 잉여노동은 어느정도 일까? 혹은 기업의 이익을 위해 창출한 잉여가치는 얼마나 될까?˝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지금까지 노동현장에 대해 너무나도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도 참으로 많이 들었다. 그부분에 있어서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나자신을 반성할 수 있는 기회였다.

첫날 치고 일을 그렇게 나쁘게 한 것은 아니어서 크게 혼나지 않으며 최선을 다해 노동을 했던것 같다. 힘들게한 노동이라 더 보람찬 일이었다. 이번에 막노동을 해보게 되면서 올해 내가 가야할 길을 잡을 수 있었다. 매일은 아니더라도 앞으로 매주 1번씩은 그런 노동을 통해 일을 해야겠다.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이로써 앞으로 노동현장에서 경험을 쌓을 것이다.

위대한 혁명가이자 휴머니스트인 에르네스토 체게바라 동지가 쿠바의 높은 고위직에 있으면서 신성한 노동을 통해 혁명사상을 고취시키고 남는시간에 독서를 하며 모범을 보였듯이 당분간 나 또한 신성한 노동을 하며 사회주의 사상을 학습하는 모습을 실천할 것이다. 적어도 올해는 매주 1번 혹은 2주에 1번씩은 노동을 통해 학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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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트로 : 아바나 선언 레볼루션 시리즈 6
피델 카스트로 지음, 강문구 옮김, 타리크 알리 / 프레시안북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미국 플로리다주 최남단에서 육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나라 쿠바는 미제국의 각종 경제적 고립과 탄압 속에서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해온 나라다. 게릴라 투쟁으로 친미괴뢰정권을 몰아내고 사회주의를 건설한 쿠바는 1959년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선 이후부터 미제국주의의 극심한 고립과 테러 속에서 생존해왔다. 195910월 쿠바에 대한 불법공습을 개시했던 미국의 아이젠하워 정부는 19603월 쿠바의 사회주의 정권을 전복하기 위해 망명자들로 구성된 반공 게릴라를 양성했고, 44세의 나이로 미국 대통령이된 존F케네디는 19614월 쿠바의 사회주의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1500명으로 구성된 병사들을 피그스 만에 상륙시켰다. 피그스만 침공이 처절한 실패로 끝나자 케네디 정부는 그해 11월 소위 몽구스 작전(Operation Mongoose)’을 실행하여 쿠바 정부를 위협했었다.

 

이런 미제국의 위협이 지속되자 쿠바는 소련과의 관계를 형성해나갔고, 소련의 도움을 받아 미국의 노골적인 테러 및 간섭행위를 막기 위해 각종 미사일을 배치했었다. 이중의 소련제 핵ICBM이 있자 미국은 쿠바 전역을 함선들로 포위하여 고립시키고 소련까지 위협했었다. 미국은 데프콘2까지 발령하며 쿠바와 소련을 위협했으며, 결국 흐루쇼프가 미사일을 강제적으로 철수하게 했다. 이것이 바로 쿠바 미사일 위기(Cuban Missile Crisis)’였다. 쿠바 미사일 위기가 소련의 굴복으로 끝난 이후에도 쿠바에 대한 미제국의 탄압은 중단하지 않았다. 1970년대 미국의 CIA는 질병을 퍼뜨려 쿠바 국민들이 식용으로 기르는 돼지 50만 마리를 폐사시켰고, 쿠바에 대한 경제적인 제재를 풀지 않았으며, CIA를 통해 쿠바 지도자를 암살하려 했었다. 미국이 그토록 암살하고자 했던 인물이 바로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

 

미국이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쿠바에 저지른 테러리즘(Terrorism)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미국은 카스트로를 죽이기 위해 수백 번이나 암살 시도를 했었다. 미국은 왜 카스트로를 죽이려 했던 걸까? 그것은 바로 피델 카스트로가 미국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들을 했기 때문이다. 1959년 바티스타 친미 괴뢰정권을 몰아낸 피델 카스트로는 당시 쿠바를 경제적으로 수탈하고 있던 연합 과일 회사(United Fruit Company)’와 같은 미국의 기업들을 국유화 했고, 거기서 창출되는 이익을 인민들에게 분배했다. 피델 카스트로는 농지개혁을 실행하여 미국이 지원하던 지주세력들이 개인적인 단위의 이익을 추구하지 못하게 막았다. 이러한 조치들을 통해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 인민들에게 무료로 공부할 수 있는 자유와 무료로 치료받을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하고자 했다. 또한 피델 카스트로는 미국에서조차 하지 못하던 인종차별 철폐를 이루어 냈고, 남녀평등정책을 추진했다. 이것이 바로 미국이 피델 카스트로를 죽이고자 했던 이유다.

 

혁명 시리즈 중 하나인 카스트로 아바나 선언은 총 3가지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파트는 1953726일 몬카다 병역 습격 이후 재판과정에서 피델 스스로가 변호사를 자처하며 법정에서 했던 발언인 역사가 나에게 무죄를 선고하리라. 두 번째는 1960년에 발표했던 제1차 아바나 선언이며, 세 번째는 1962년에 발표한 제2차 아바나 선언이다. 이 책의 첫 번째 파트인 역사가 나에게 무죄를 선고하리라를 보면 당시 피델이 어떠한 사회를 추구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인민을 억압하고 미제국의 경제적 지배를 돕고 있는 독재자 풀헨시오 바티스타 정권을 축출해야 한다 생각했다. 피델이 보기에 바티스타 치하의 쿠바는 미제국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사회로 사회의 소수계급이 다수를 착취하고 지배하는 사회였기 때문이다.

 

바티스타 치하의 쿠바에선 미국의 기업들이 쿠바의 자원과 생산물 대다수를 독점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이익에 따라 쿠바 인민들은 착취에 시달리다 죽어 나갔다. 재판 당시 피델 카스트로는 법정에서 자신이 꿈꾸는 혁명정부의 비전을 얘기했다. 카스트로가 꿈꾼 사회는 주거 문제가 해결된 사회, 토지 불평등 문제가 해결된 사회, 부패한 관리들을 청산한 사회, 인민들에게 질좋은 유급휴가와 저렴한 대중교통 수단을 제공하는 사회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이루기 위해 더 이상 국고를 횡령하지 않고, 국가에 세금을 납부하는 대기업으로부터 관료들이 착복하지 않으며 국가의 막대한 자원을 온전히 활용하고, 국가를 위해(방어할 국경도 없고 구입한 전쟁 무기는 오히려 국민을 향해 사용되는) 탱크나 전투기 등의 무기를 지나치게 구입하지 않으며, 국민을 교육하는 데 더 관심을 쏟는 사회였다. 따라서 카스트로는 자신의 진보적인 비전을 제국주의자들의 횡령과 착복행위를 청산하고 기업을 국유화함으로써 달성할 것이라 생각했다.

 

위에서 상술했듯이 비록 혁명이 성공한 이후 쿠바는 미제국주의의 극심한 경제제재에 시달렸기에, 경제적인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피델 카스트로와 쿠바 공산당은 인민들의 복지와 삶을 개선하기 위해 각고한 노력을 보였다. 실제로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는 미제국의 극심한 고립을 받고, 경제적 위기가 있을 때, 국방 예산을 줄여서라도 의료와 교육 정책에 많은 투자를 했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오늘날 쿠바의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제도다. 쿠바의 이와 같은 진보적인 제도는 2020년인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으며, 쿠바에 사는 외국인들 또한 이러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실제로 20019.11 테러 현장에서 부상을 당한 소방관들이 의료비가 비싼 미국에서 치료받지 못하고, 쿠바로 넘어가서 제대로 치료받은 일이 있었다. 아무튼 이와같은 피델 카스트로의 사회주의적인 이데올로기가 적용된 쿠바 사회는 세계적인 의료강국으로 우뚝 서 있다. 1차 아바나 선언과 제2차 아바나 선언에는 사회주의 쿠바를 무너뜨리고자 했던 미제국주의자들이 악랄함과 사악함이 아주 잘 드러나 있다. 2차 아바나 선언에서 카스트로는 미제국주의를 아주 잘 분석했다. 대표적인 내용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제국주의 세력이 촉발시킨 2차대전은 파시즘의 격퇴, 세계 사회주의 형성, 식민지 종속국가들의 주권 투쟁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1945년과 1957년 사이 12억 이상의 인구가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독립을 쟁취했다. 민중이 흘린 피는 결코 헛되지 않았다. 식민지 종속국가의 민중운동은 세계를 뒤흔들고 제국주의의 최후 위기를 특징짓는 보편적 현상이다. 쿠바와 남아메리카는 세계의 일부다, 우리의 문제는 제국주의라는 일반적 위기와 예속 민중의 투쟁이 야기하는 문제의 일부다. 즉 그 분쟁은 새로 탄생하는 세계와 죽어가는 세계의 분쟁이다. 우리 조국을 음해하는 섬뜩하고 잔인한 캠페인은 제국주의자들이 민중의 해방을 방해하기 위해 자행하는 부질없고 처절한 노력이다. 쿠바는 특별한 방식으로 제국주의자들을 괴롭힌다. 쿠바혁명에 대한 양키들의 증오에 무엇이 은폐되어 있는가? 현 세계에서 침략 목적으로 가장 강력하고 부유한 제국주의 세력과 전 대륙의 독재 세력을 연합시키는(35000만 인구를 대변하는 이 세력은, 다른 국가의 안보를 위협할 금융, 군사 수단도 없이 경제적으로 저발전 상태에 있는 고작 인구 700만 명의 소국을 공격하려 한다) 그 음모를 어떻게 합리적으로 설명할 것인가? 그들을 연합시키고 부추기는 것은 공포다.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도 공포다. 혁명적 수단을 통해 쿠바에서 집권한 노동자, 농민, 지식인, 학생, 진보적 중산층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노동자, 농민, 학생, 지식인, 진보적 중산층이 혁명적 수단으로 양키 독점 세력과 아메리카 대륙의 반동적 독재자들이 착취하고 억압해온 가난한 국가들에서 권력을 쟁취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아메리카 대륙의 약탈 당한 민중이 압제자들에게서 총칼을 회수하여 쿠바처럼 아메리카의 자유 민중으로 우뚝 설지도 모른다는 공포다.”

 

출처 : 카스트로 아바나 선언 p.115~116

 

미제국이 두려워했던 것은 남아메리카의 반미화였다. 이는 피델 카스트로가 제2차 아바나 선언을 발표할 시기 미국이 베트남 전쟁 개입 명분으로 내세웠던 도미노 이론처럼 참으로 제국주의적인 생각에 기반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미국은 어떻게든 피델 카스트로를 죽이려 시도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 기록된 피델 카스트로의 연설들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혁명가 피델 카스트로의 투쟁적인 삶과 이데올로기가 있는 그대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피델 카스트로 그는 분명 위대한 혁명가였고, 무상의료와 무상교육 등을 통해 사회주의 쿠바를 세계 사회주의자들의 추구하는 목표 지점을 세운 인물이었다. 피델 카스트로가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지 벌써 4년이 넘었다. 피델의 죽은 뒤 그 뒤를 이은 동생 라울 또한 사회주의 쿠바를 번영으로 이끌고 있다. 더 이상 피델 카스트로는 살아있지 않지만, 그가 이룩한 사회주의적 업적은 지금도 많은 혁명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사회주의 쿠바는 앞으로도 자본주의에 맞서 사회주의 혁명을 수호할 것이다. 혁명가 피델 카스트로를 알고 싶은 사람들에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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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 있는 붉은광장 입구에는 말을 타고 있는 한 장군의 동상이 있다. 그 장군이 타고 있는 말은 나치깃발을 짓밟고 있고, 붉은광장에 놀러오는 관광객들을 항상 맞이한다. 그가 바로 게오르기 주코프(Georgy Zhukov). 게오르기 주코프는 1896122일 러시아의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농민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초등학생 시절의 주코프는 성적이 우수했다. 그의 어머니는 주코프를 그이 외삼촌에게 보내 가죽 가공 기술을 배우게 했지만 그는 끝까지 공부를 포기하지 않았고, 독학으로 시립 중학교 입학시험을 통과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주코프는 항상 돈을 벌어야 겠다는 생각이 항상 있었지만, 군인의 길을 걸을 생각은 전혀 없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바뀌었다.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게오르기 주코프는 러시아 제국의 기병대에 입대했다. 두 달 동안 전투에 참여하여 두 차례나 훈장을 받았다. 특히나 훈련과정에서 우수한 능력을 보인 그는 장교의 권유로 부사관 교육과정에 다시 들어갔고, 1916년 봄 부사관으로서 교육을 받기 위해 제10 용기병연대에 배속되었다. 주코프가 전선에서 전투를 치르고 있던 1917년 러시아에서는 레닌이 일으킨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났다. 10월 혁명이 승리한 이후 볼셰비키들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있던 러시아의 군대를 불러들였는데, 주코프가 소속된 부대도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여기서 모스크바로 돌아온 주코프는 볼셰비키가 이끄는 당에 입당한다.

 

러시아 혁명이 성공한 이후 1년도 지나지 않아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공으로 적백내전이 발발했다. 적백내전이 일어난 이후 주코프는 과거 차르 정권을 복구하려는 백군 세력에 맞서 싸웠다. 당연히 그는 내전 시기에도 기병대에서 근무했다. 그는 적군편에 서서 전투를 치렀고, 19199월에는 왼쪽 다리와 옆구리에 수류탄을 맞는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적백내전이 끝난 이후 주코프는 기병 연대장, 여단장, 사단장 등을 거쳐 부사령관의 지위에 올랐다. 1920년대와 1930년대를 거치며 게오르기 주코프는 소련에서 유명한 군사 지휘관으로써 거듭났다. 스탈린이 추진한 공업화에 따라 소련의 기병대가 탱크를 이용한 기계화 부대로 거듭나면서 주코프 또한 기갑부대를 지휘하는 사령관이 되었다. 보로실로프, 프룬제 등 소련의 육군 원수들은 주코프를 매우 높게 평가했다.

 

그는 탁월한 지휘능력을 가진 인물이었기에 스탈린의 대숙청도 피해갔고,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몇 개월 전 만주와 몽골 국경지대에서 벌어진 노몬한 전투에서 수많은 탱크 부대를 앞세워 탁월한 전략전술로 일본군을 섬멸했다. 여기서 주코프의 탱크 부대와 격전을 벌였던 일본군 부대는 소련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자 침략의 야욕을 동남아시아 쪽으로 돌리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19415월 소련군 참모총장이었던 주코프는 소련이 먼저 독일군을 선제공격해야 한다라고 주장했지만, 스탈린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었다. 그의 걱정은 1941622일 독일군이 바르바로사 작전을 전개하면서 현실이 되었다.

 

히틀러의 기습적인 침공으로 독소전쟁이 일어나자 게오르기 주코프는 여러 전선에서 활약했다. 19419월 독일군의 포위로 시작된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그는 히틀러가 그리고 점령하고 싶어했던 레닌그라드를 사수했다. 그가 이끈 군대가 레닌그라드를 사수하면서 히틀러의 계획은 무산됐다. 모스크바 전투 당시 주코프는 도시 방어의 책임자로서 모든 군사 활동을 지휘했고, 독일군 주력부대에 큰 타격을 주는 성과를 이룩했다. 결국 모스크바 전투에서도 승리를 이룩했다. 1942년 여름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시작되자 주코프는 최고사령관으로써 도시를 방어했다. 그는 독일 주력군을 스탈린그라드 밖에 묶어 둘 계획을 세워 이를 실천함으로써 독일군에게 25만 명이라는 엄청난 손실을 입혔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게오르기 주코프는 쿠르스크 전투를 포함한 여러 전선에서 많은 활약을 했다. 1945년에는 벨라루스 제1군 사령관으로서 베를린 공방전에서 군대를 지휘했다. 베를린 공방전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운 주코프는 58일 나치 독일의 무조건 항복 선언을 주관했고, 소련의 대표로 문서에 서명했다. 즉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지부를 찍는 전투와 항복 선언식에도 있었던 것이다. 이후 모스크바로 돌아온 그는 개선식에서 백마를 타며 장군으로서 큰 위엄을 보였다. 이후 주코프는 스탈린하고 사이가 크게 좋지 않았기에, 1950년대에는 원래의 직위보다 한참 낮은 우랄 지역의 사령관직으로 쫓겨났었다. 1953년 스탈린 사망 이후 그는 모스크바로 돌아와 소련 국방 제1부부장이 됐다.

 

그러나 1957년 국방부장으로 일하던 주코프는 당시 흐루쇼프와 불가닌 그리고 몰로토프의 권력 다툼에 휘말려 면직됐고 부장직에서 물러났다. 권력에서 물러난 이후 그는 자택에 머무르며 쿠르스크’, ‘베를린으로 향하는 길’, ‘수도 방어 전투 중에서등의 저서를 집필했다. 이러한 저서를 통해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직접 경험했던 기록을 후대에게 남겼다. 그러던 19746187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사후 그는 소련의 영웅으로서 크렘린궁 근처에 안장되었다.

 

게오르기 주코프는 훌륭한 군사 전략가였다. 그는 전장에서 탁월한 공을 세워 레닌 훈장 6, 10월 혁명 훈장 1, 붉은 깃발 훈장 3, 1급 수보로프 훈장 2, ‘승리최고훈장 2개 및 각종 상장뿐만 아니라 네 번에 걸쳐 소련의 영웅이라는 칭호를 들었다. 이렇게 혁혁한 공을 세웠던 주코프였기에 그는 러시아의 민족 영웅으로 이름을 남겼다. 여담으로 그는 미국산 코카콜라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스탈린이 그를 좋지 않게 보았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다. 아무튼 그는 현재 러시아사람에게도 영웅으로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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