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 지 오늘로써 40년이 됐다. 40년 전 광주는 피바다였다. 전두환 일당이 보낸 진압군들은 광주를 피로 물들였다. 그들은 광주인민 수천 명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 당시 광주를 피로 물들인 그 일당들은 아직도 살아있고, 학살의 주범인 전두환은 재산 29만원으로 호화생활을 누리고 있다. 오늘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인 만큼, 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자신의 부하 김재규가 쏜 총탄에 맞고 사망했다. 박정희가 암살당하자, 당시의 국무총리이던 최규하가 대통령권한대행이 되었다가,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최규하가 대통령이 된 이후 박정희 암살사건의 조사를 맡았던 국군보안사령관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세력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 세력들은 계엄사령관인 정승화를 박정희 암살사건과 연관이 있다는 이유로 참모총장 공관에서 총격전을 벌여 보안사령부 취조실로 연행하면서 12·12 쿠데타를 일으켰다. 12·12 쿠데타를 통해 전두환 등의 신군부가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전두환은 최규하를 압박하면서 권력 찬탈의 야심을 본격적으로 드러냈다.
박정희의 유신체제를 경험했던, 민주화운동 세력과 일반국민들은 이를 원하지 않았다. 12·12 쿠데타의 주역인 전두환은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확장해나갔다. 1980년 3월 중순 주한 미대사 글라이스틴은 자신이 작성한 한국의 정치 상황 보고서에서 “전두환이 군을 장악하고 이제 정권을 장악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박정희 사망 이후 내려진 비상계엄에도 불구하고, 1980년 ‘서울의 봄’ 시기에는 학생운동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이런 학생운동은 학원자율화운동 또는 학원민주화운동으로 시작되었다. 4월 들어 학생운동은 학내문제를 넘어 점차 병영집체훈련 거부투쟁으로 이어졌고, 노동자들의 투쟁도 가열됐다. 노동자 투쟁은 꽤나 적극적으로 일어났는데, 5·17 군사 쿠데타 이전까지 총 897건의 노동쟁의와 총인원이 20만명에 달했다.
1980년 4월 14일 최규하 대통령은 공석 중인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을 겸임 발령했다. 이렇게 전두환은 신군부의 정치개입 의사를 공공연히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되면서 5월 여러 민주화 운동들이 전국적으로 일어났고 대학가의 시위도 일어났다. 5월 13일부터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전국적인 대규모 학생 시위로 나타났다. 5월 14일에는 계엄령 철폐를 요구하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전국 곳곳에서 격렬하게 전개되었고, 15일에는 시위가 더 확대되었다. 하지만 군대 투입을 우려했던 서울 경인지역의 총학생회장단은 군 병력의 이동소식이 전해지는 가운데 유혈사태를 염려하여 가두시위 철수를 결정했다.
신군부 세력이 군대를 이동시키고 배치시키기 시작하면서 16일 이후 광주등 일부 지방을 제외하고는 서울을 비롯한 대부분 지역의 학생 시위는 중단되었다. 한편 학생 시위가 중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쿠데타를 감행하기로 한 신군부 세력은 충정부대의 이동과 배치를 중단하지 않았다.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선포지역이 제주도를 포함하면서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5월 17일 하루에만 600명이 넘는 재야·학생운동 지도자, 언론인 등이 체포됐고, 야당인사 김대중은 내란 음모죄로 체포됐다.
하지만 다른 지역과 달리 전라도 광주에서는 시위가 계속됐다. 특히나 야당 인사 김대중을 지지했던 광주의 경우 박정희 시절부터 차별과 멸시가 있었다. 그런 감정속에서 김대중이 체포되자 광주 시민들은 더욱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전두환은 광주의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될까 봐 두려워했다. 결국 전두환은 “초기에 강경진압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군대를 광주에 보내게 된다.
1980년 5월 18일 오전 10시 전남대학교 정문에 1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농성을 시작했다. 이때 학교를 지키고 있던 공수부대는 특수 곤봉으로 공격을 시작했고, 공수부대원이 휘두르는 곤봉은 학생들을 잔혹하게 구타했다. 공수부대의 진압이 과도하자 학생들은 이런 상황을 시민들에게 알리기로 하고, 시내에서 시위를 시작했다. 그날 오후 3시 30분쯤 신군부 세력은 광주에 7여단을 투입하여 본격적인 시위 진압에 나섰다. 공수부대는 진압봉, 개머리판, 군홧발로 시위하는 광주 학생들을 잔인하게 진압했다. 이들은 시위대를 잡는다는 이유로 가택수색은 물론이고, 나이를 불문하고 가차 없이 폭력을 행사했다. 심지어 여학생과 주부 등 여자들에게조차 옷을 벗기고 구타했는데, 이런 시위 진압은 18일 저녁 늦도록 이어졌다.
다음날인 19일 공수부대의 시위 진압은 더욱 폭력적으로 변했다. 이날 등장한 부대는 서울 동국대를 떠나 밤새 광주에 도착한 11여단 소속이었다. 장갑차까지 앞세워 출동한 그들은 지역대 단위로 시위대를 추적하여 곤봉과 소총 개머리판으로 공격하고, 일부 대원은 대검까지 사용했다. 이들은 다방, 여관, 민가 등을 샅샅이 수색하며 걸리는 사람마다 구타하고 연행했다. 이날 오후에는 11여단과 7여단의 5개 대대 병력 모두가 투입됐다. 물론 공수부대의 잔인한 구타에 광주시민들도 일방적으로 당하지만은 않았다. 광주시민들은 산발적인 시위를 전개하며 맞섰다. 이에 더 악을 쓰게된 공수부대원들은 시위대 뿐만 아니라 시내버스나 택시를 세워 운전기사까지 구타하는 짓을 저질렀다. 이때 시위대는 화염병, 벽돌, 각목 등으로 계엄군에 맞섰고, 시위는 더더욱 확산됐다. 이때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학생 청년뿐 아니라 노인 부녀자 심지어 어린아이까지 죽게 되는 경우가 벌어졌다.
다음날인 20일 오후 시위대의 규모는 수만 명으로 늘어났다. 전남대학교 학생들의 시위로 시작된 데모는 민중 항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오후 7시에는 대형 트럭, 고속버스, 시외버스와 택시 200여 대가 금남로를 가득 메운 채 시위에 참여했다. 시위 규모는 20만 명을 넘어섰다. 당시 광주에서의 시위양상은 언론에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다. 특히나 KBS나 MBC같은 매체는 마치 공산주의자나 폭도들이 일으킨 것처럼 사건을 왜곡해서 보도했다. 그 결과 20일 저녁 광주의 MBC와 KBS가 불탔다.
5월 21일 도청을 중심으로 30만 명이 모여들어 투쟁의 정점을 이뤘다. 당시 시위대가 대규모로 확산되니까, 공수부대가 물러날 것이라는 희망적인 관측도 나왔었다. 그러나 정오가 되고 애국가가 울려 퍼질 때 공수부대 병사들의 M-16 소총은 불을 뿜었다. 잘 훈련된 병사들은 조준 사격으로 광주 시민을 하나둘씩 쏴 죽였다. 이렇게 최소 수백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이걸 직접 목격하게 된 광주시민들은 무차별 학살을 감행한 공수부대에 무장으로 맞서 싸우기로 결정했다. 이들 중에는 경찰서에 있는 무기고를 접수하여 M-1 카빈 소총으로 무장해 계엄군에 저항했다. 이렇게 하여 시민군이 형성된 것이다. 시민군은 저항으로 21일 저녁 계엄군을 몰아내고 전남도청에 진입했다.
5월 22일 광주는 시민군이 잔인한 공수부대에 맞서는 해방구가 됐다. 시민군은 자체 조직을 정비해 계엄군의 반격에 대비하면서 시내의 치안을 유지하는 일을 했다. 헌혈하는 사람들이 넘쳐났고, 아주머니들은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군들에게 식량으로 보급했다. 시민군 측 차량들은 구호·연락·수송·보급·순찰·전투 등의 임무를 나눠 조직했다. 이런 혼란한 상황에서 은행이나 신용금고에서의 사고는 단 한 건도 없었다. 목적은 달랐지만, 1871년 당시 지배계급에 맞서 민중들이 조직했던 파리 코뮌과 비슷했다.
하지만 광주는 고립되어 갔다. 고립되어 가자 시민군 지도부 내부에선 총기를 반납하고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5월 25일 저녁에는 정상용과 윤상원 등 광주의 재야 청년운동권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항쟁 지도부가 등장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계엄군에 맞서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이들은 끝까지 싸우기로 결정했다. 전두환과 신군부 일당들은 시민군을 진압하고 싶어 했다. 5월 27일 새벽 1시 계엄군은 탱크와 장갑차까지 동원하여 진압작전을 전개했다. 결국 새벽 4시 55분 계엄군이 도청을 완전히 점령하면서 광주 민주화 운동은 막을 내렸다.
광주 민주화 운동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전두환과 대한민국 군대의 잔인성도 있지만,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미국의 이중적인 행태다. 미국은 전두환이 광주에서 시위가 확산되지 않기를 바라며 그들이 진압하기를 원했고, 신군부 세력의 진압작전을 지원했다. 우선적으로 미국은 한미연합사의 작전통제권하에 있는 20사단의 광주 투입을 승인해주었다. 또한 미국은 신군부가 광주의 진압작전을 안정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오키나와 기지에서 조기경보기 2대와 필리핀 수빅 만에 정박 중이던 항공모함 코럴시호를 한국 근해에 출동시켰다. 당시 미국에게는 한국의 민주화 보다 북한으로부터의 안보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따라서 미국은 신군부를 지원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수백명 내지는 수천명이 죽었다. 공식자료에 따르면 161명이 사망한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죽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무튼 전두환의 광주학살로 많은 사람이 학살당했다. 광주에서 학살을 벌일 수 있었던 기본적인 동기부여는 반공주의였다. 그 반공주의라는 사상이 기본적인 바탕에 놓여 있었고, 극단적 반공주의가 광주 시민 전체를 폭도 내지는 빨갱이 새끼로 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반공주의는 민주화된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도 그대로 남아서 극단적인 경우에는 5·18을 북한군의 폭동으로 규정하는 심각한 역사 왜곡을 저지르고 있다. 심지어 지만원 같은 사람들은 5·18 민주화운동을 북한이 개입했다는 어처구니 없는 책을 써서 광주시민들을 모욕하기 까지 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시민들이 군사독재 정권에 들고 일어나 저항하고, 그 이후 전두환 정권에서의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를 갖는다. 광주 민주화 운동 40주년인 오늘 만큼은 군부독재에 싸우다 죽은 이들을 기리도록 하자! 광주를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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