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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 어려운 시대에 안주하는 사토리 세대의 정체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이언숙 옮김, 오찬호 해제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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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절망이라는 말과 행복이라는 말만큼 모순되는 이야기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책은 절말이라는 나라에서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나라가 가난하지만 젊은이들을 위해서 막대한 투자를 하기 때문에 젊은들이 행복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해이다. 이 책은 젊은이들이 행복한 이유는 그들이 객관적으로 행복하다는 말이 아니라 상당히 주관적으로 행복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오히려 젊은이들의 상황은 매우 절망적이라고 한다.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고, 그들의 고용은 불안정하다. 말이 좋아 프리터이지 그들은 고용 유연성의 최전선에 서 있다. 신학자 바울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독신의 은사를 받은 것도 아니고, 어쩔 수 없이 독신을 강요당한다. 마초라는 반대편에 초식남이라는 개념을 설정해 놓는다. 초식남이라는 말 자체가 상당히 평화적으로 보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 나라로 말하면 삼포세대 혹은 삼무세대 쯤 되지 않을까?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인데도 그들은 왜 행복할까? 글쓴이는 한 마디로 명쾌하게 그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더 절망스럽고 눈물겹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음 => 미래에 대한 도전 포기 => 현실에의 안주 = > 현실의 의미 찾기 => 지금 나는 행복하다.

 

  이 책의 내용을 거칠게 요약하면 위와 같다. 물론 과거에 비하면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편리한 것은 맞다. 그렇지만 그것이 어느 일부분만 누리는 특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누리는 보편적인 가치가 되어 버린다면 그 때도 그것을 바라보면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군에 가본 남자들이라면 모두 동감하는 이야기가 있다. 아들을 군에 보내놓고 걱정되는 부모님들을 초청하여 아들은 생각보다 쾌적한 시설에서 살고 있음을 강변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어머니들이야 아들의 일인지라 어떤 조건에서도 안쓰럽지만 의외로 아버지들은 괜찮다고 아들이 꽤나 좋은 조건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왜 그런지 아는가? 아버지 시대의 내무실하고 비교하기 때문이다. 30여명의 소대원들이 한 내무실에서 군용 모포 덮고 바글거리면서 생활하는 내무실에 비하면 2인 침대를 쓰고 분대원끼리 사용하는 내무실의 여건은 상당히 쾌적하다. 게다가 과거에 3끼를 거친 식사로 때우던 시절에 비하면 오늘날 군용 식단은 꽤나 좋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요즘 군생활 못하겠다고 힘들다고 말하는 젊은이들은 호강에 겨워서 배부른 소리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에 한 가지 사실을 더한다면 그들의 불평이 이해가 간다. 요즘 대부분의 병사들은 집에서 외아들 혹은 두 명 정도로 생활한다는 것이다. 각자 자기 방을 사용하고, 사춘기에는 방문을 걸어 잠그는 녀석들이 군에 와서 8~10명이 같이 내무실을 쓴다는 것은 꽤나 스트레스를 동반하는 일일 것이다. 게다가 집에서는 밥을 먹으라고 해도 먹지 않았는데 군에 오면 자기의 기호와는 상관없이 나오는 모든 음식은 의무적으로 먹어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 내무 생활이 결코 즐거울리 없다. 과거에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이 초코파이였던 세대와 콜라와 피자, 햄버거인 세대는 분명히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불평을 하던 병사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내무실을 편안하게 느낀다는 것이다. 왜? 현실에 적응을 하니까? 자기들이 아무리 불평을 해도 내무실이 좋아지지는 않으니까 적응하는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은 이와 비슷하다. 과거에 비하여 객관적으로 본다면 여건은 나아졌지만 상대적으로 느끼는 것들은, 그리고 이 시대의 기준으로 바라본다면 분명히 차이가 있다. 과거에 아르바이트해서 2500원 벌었던 시절과 5000원 넘게 버는 시절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 그런데 아무리 불평해도, 아무리 도전해도 미래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인간은 현실에 적응하기 마련이다. 스스로 현실은 행복하다고 자기를 속이게 된다. 일본의 젊은이들이 처한 상황이 이렇다.

 

  그런데 더 눈물 겨운 것은 추천자의 글이다. 일본은 절망적이다. 그런데 한국은 더 그렇다는 단 한 마디의 문장 말이다. 오늘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불안정한 노동현실, 살인적인 주거비용, 무한 경쟁의 시대, 학력은 곧 개인의 브랜드가 되는 시대에 우리는 어디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우리의 젊은이들은 과연 행복할까? 아직 이런 조사를 해보지 않았지만 우리의 젊은이들은 행복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아이폰이 있으니 행복하고, 친구가 있으니 행복하고, 집이 있으니 행복하고 등등. 행복의 조건들을 많이 찾아낼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것이야 종교의 영역이 아니겠는가? 현실에 감사하라는 것은 종교에서 할 말이지, 사회학자들이 어른들이 할 말은 아니다.

 

  요즘 것들은 감사를 모른다, 배고픔을 모른다고 매도하기 전에, 그들이 제발 행복하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면서 주저 앉지 않게 해 주는 것이 기성 세대의 몫이 아닐까? 절망의 나라에서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젊은이들"만" 있는 것, 이것은 이미 이 사회가 결코 행복하지 않다는 증거이리라.

 

  * 이 서평은 알라딘에서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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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5-03-07 0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본 `달관세대`라는 기레기 떡밥같은 글이 떠오릅니다. 그런 식으로 물타기 광고를 하면 정권에서 참 이뻐하겠죠?

saint236 2015-03-09 16:38   좋아요 0 | URL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고 했던 맑스의 말을 패러디하자면 조선은 대한민국의 암이다라고 하겠지요. 달관세대가 무엇인가 기사를 찾아 읽었는데 황당하네요. 지들은 왜 달관하지 못하는지
 
조선을 뒤흔든 아버지와 아들
이종호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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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는 쉬는 날이었다. 몇 주 무리를 해서인지 거의 죽기 직전의 상태였다. 아이들과 영화를 보러 가자고 약속해 놓고 잠시만 눈을 붙인다는 것이 하루가 다 지나가 버렸다. 아이들이 와서 "아빠 놀아줘"를 간절히 외쳐도 몸이 일어나지 않는다. 억지로 일어났지만 아이들과 돌아줄 힘이 없어서 다시 잠이 들었다. 아직도 몸 상태가 회복이 되지 않았지만 아내가 여간 화가 난 것이 아니다. 집에서 매일 피곤하다며 방다닥과 친구 삼아 지내는 내가 맘에 안들었던 것이다. 언젠가 아빠가 아들과 몸으로 잘 놀아줘야 아이 인성 발달에 좋다고 말은 하지만 그게 쉽지가 않다. 아이들하고 기껏 놀아주는 것이 책을 읽어 주는 것이 전부다. 뭐라고 변명을 하고 싶지만 아내에게는 정말 변명일 뿐이다.

 

  내 신세를 한탄하는 이야기가 되어 버렸지만 자녀와 부모의 관계 특별히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중요함을 말하고자 함이었다. 이 책은 조선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했던 부자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사람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의 이유에 대해서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찾고 있다. 아버지와 똑같은 길을 간 아들, 아버지와는 정 반대되는 길을 간 아들, 아버지의 의심을 받아서 요절한 아들, 아버지 때문에 평생을 의지한 스승과 갈라선 아들 등 주제 자체는 꽤나 흥미롭다. 이성계와 이방원에 관한 이야기를 흥미롭게 살펴보았기 때문에 이 책도 꽤 재미를 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주제가 흥미로움에도 불구하고 내용은 상당히 평이하다. 내가 평이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 내용이 정치적으로, 인간적으로 깊이 파고 든 것이 아니라 표면적인 내용을 서술하는데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한 예를 들어보자. 인조와 소현세자의 내용을 보면 인조와 소현세자가 갈라지게 된 원인을 청에 의해서 아버지는 조선에 아들은 청나라에 있었기 때문이고, 여기에 더하여 소현세자가 행실을 잘못하였고, 인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소현세자를 참소하여 갈라지게 되었으며 이때문에 인조는 소현세자가 죽었을 때에 그렇게 큰 슬픔을 내비치지 않았다고 기록한다. 강빈 또한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죽임을 당했고, 소현세자의 아들들이 죽게 되었다고 기록한다. 조선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리가 없는 내용들이다. 굳이 이 책을 사서 읽을 정도의 사람이라면 대체로 역사덕후일 것이고, 그런 사람들에게 마치 교과서에서 이야기하듯이 수박 겉핥기식으로 서술하는 것은 불필요한 사족일 뿐이다. 소현세자라는 소설책만도 못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렇게 흥미로운 주제도 이렇게 평이하게 기록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해본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는 분명하다. 다만 이 영향력이  아버지의 교우관계, 정치적인 입장 등에 의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아들에게 영향을 끼쳤는지를 자세하게 찾아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물론 이 책에서도 이 내용을 다루지만 지나가는 말로 표면적으로만 서술하고 있다. 게다가 정작 중요한 부자 관계가 빠져있다. 조선을 뒤흔들었다고 한다면 송시열에 관한 내용보다는 이성계와 이방원, 이방원과 양녕과 충녕, 영조와 사도세자, 사도세자와 정조, 대원군과 고종을 빼놓고 서술한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허협과 허균보다는 이러한 부자 관계에 대해서 기록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주제에 맞지 않았을까? 사람들이 잘 모르는 내용을 찾아보려는 의도는 좋았다만 자세하거나 무엇인가 특별한 것이 없다면 이렇게 평이하게 끝나버릴 것이라는 점은 몰랐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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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어떻게 말할까 - 아버지와 함께한 마지막 한 해
윌리 오스발트 지음, 김희상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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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이 다소 자극적이긴 하다. 뭘 이렇게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가 생각하겠지만, 제목만으로 책의 내용을 평가하는 것은 너무 성급한 일이 아닐까? 제목을 보고 너무 성급하게 판단하는 것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난 이 리뷰를 통하여 존엄사에 대해서 이야기를 끄집어 내보고자 한다.

 

  존엄사!

 

  1.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살기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2. 초가집도 없에고 마을길도 넓히고 푸른 동산 만들어 알뜰살뜰 다듬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3. 서로서로 도와서 땀 흘려서 일하고 소득 증대 힘써서 부자 마을 만드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4. 우리 모두 굳세게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워서 새조국을 만드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비교적 연식이 오래된 사람들이라면 이 노래가 무슨 노래인지 알 것이다. 새마을 노래다. 박정희 대통령이 작사 작곡한 노래라고 한다.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분명히 밝혀 두고 싶은 것은 이 노래를 통하여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 아니다. 나는 이 노래를 통하여 한국의 70-80년대를 사로잡은 정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한다. 나는 78년 생이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이 노래를 삶의 가치관으로 삼았던 세대는 아니다. 다만 내가 어릴 때 살던 동네가 촌동네였기 때문에 이 노래를 듣고 자랐을 뿐이다. 일요일 아침이면 애향단 활동이라는 것을 했다. 당시 초등학교 아이들은 토요일에 학교를 마치고 돌아갈 때 자기 마음대로 돌아가지 못했다. 동네별로 모여서 마을 회관까지 행진을 했고, 그곳에서 헤어졌다. 아내처럼 학교가 있는 동네 아이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일요일 아침이면 함께 모여서 동네 청소를 했다. 나오지 않는 아이들은 마을의 최고 학년인 애향단장이 기록해서 선생님께 제출했고, 참석하지 않은 나는 불려가서 혼이 나곤 했다. 정식으로 혼이 나지는 않더라도 지나가는 말로 안 좋은 소리를 듣기도 했다. 내가 애향단 활동에 참석하지 않은 이유는 내가 마을을 사랑하지 않아서(지금 생각해 보면 참 웃기는 이야기다.)가 아니라 순전히 종교적인 이유이다. 그 시간에 나는 교회에 가야했기 때문이다. 가끔 일찍 모이는 날이면 동네 청소에 참여했다. 아침마다 새마을 운동 노래가 울려퍼지고, 조금 있으면 "아!아! 이장입니다."라는 말로 마을의 중요한 사안들에 대해서 전파하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것이 다 군대문화인데 그 당시에는 그것이 당연하게 생각되었다.

 

  새마을 운동 노래와 함께 마을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노래는 "잘 살아보세"였다. 새마을 운동이나 잘 살아보세나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잘 살아보자는 것이다. 모든 것은 이 가치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학교 교육의 최고 목표도 인적자원 육성이었다. 사람을 자원으로 보는 것은 잘 살아보자는 사회적인 가치관이 교육에서 발현된 결과일 것이다. 이렇게 잘 살아보세를 외치던 시대 가장 중요했던 것은 보다 나은 삶의 조건이었다. 민주주의도, 경제정의도, 개인의 꿈의 실현도 잘 살아보자는 가치관 앞에 후순위일 수밖에 없었다.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은 잘 살아보세라는 사회적인 가치관이 어느 정도 실현된 척도로 인정되어 미술시간에 호돌이를 줄기차게 그렸던 기억도 난다.

 

  이렇게 70-80년대가 지났다. 그러다가 IMF와 구조조정이라는 90년대를 만났다. 97학번인 내 동기 중에도 학비 문제 때문에 일찍 군에 가던 친구들도 있었다. 곳곳에서 실업자가 넘쳐나면서 잘 살아보세라는 가치관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사회는 여전히 웰빙에 관한 화두가 전부였다. 그러다가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웰빙이 전부가 아니라 웰다일 또한 중요한 인간적인 가치관이라는 생각이 대두되었다. 아직까지 한국에서 웰다잉은 배부른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웰다잉은 부정할 수 없는 시대의 가치관이 되었다. 존엄사에 관한 이야기들, 자녀들에게 물질적인 피해를 주지 않고 미리 장례를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상조회사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웰다잉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던 내가 웰다인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2001년 경이다. 비교적 일찍 웰다잉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는데 이것은 순전히 내 대학원 전공 때문이다. 대학원에서 나는 인기가 없었던 윤리학을 전공했다. 사회학과 정치학 분야를 전공할 것인가, 윤리학을 전공할 것인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하다가 좀더 삶에 밀착되어 있는 윤리를 전공하기로 하고 대학원을 진학했는데 내용이 상상을 초월했다. 지금이야 논란은 되지만 많은 논의가 진전된 동성애 문제, 젠더 문제, 의료 윤리 문제 같은 내용들을 공부했고, 그 중에 가장 충격적인 것은 존엄사였다. 그 당시만해도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고, 이 가치관에 입각해서 죽음이란 인간에게 주어진 마지막 과정이고, 이를 인간이 함부로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월권 행위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 생각이 아직까지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내 친구들의 평가와는 달리 나는 보수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음을 이를 통하여 알게 된다.) 리뷰를 작성하는 이 순간에도 그들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것을 권장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책은 저자가 자기 아버지가 죽음을 선택하기 1년 전의 기록들을 충실하게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을 통하여 존엄사에 대한 논리적인 근거를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읽어보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헛수고이기에 하는 말이다. 이 책은 논리적인 내용도, 초지일관된 주장도 없다. 다만 저자가 아버지의 선택 앞에서 얼마나 고민하고, 반대했고, 존중했는지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흔들리고, 아버지를 원망한 이야기도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다만 저자는 이 책을 통하여 아버지의 죽음을 앞두고 아버지와의 관계가 어느 정도는 회복되어 가고 있었기에 감사하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본다. "인간에게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있는가? 그 권리를 사회에서는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존엄사에 대한 이해와 역사가 비교적 오래된 서유럽에서도 이 문제는 쉽지 않다. 저자가 말한대로 판사가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서 판결이 달라진다. 존엄사를 어느 정도 이해하는 판사를 만난다면 법적인 절차가 비교적 쉽게 이루어지지만, 혹 판사가 이 문제에 대해서 보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유족들은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낸 아픔에다가 법적으로 살인죄, 혹은 살인 방조죄까지 감당해야 하는 어려움을 떠 안게 된다. 저자도 이 부분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고, 심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기록하고 있다.(명확하게 이렇게 기록한 것은 아니지만 문맥 속에 담긴 이야기를 관심만 기울이면 충분히 캐치할 수 있다.)

 

  사람이 태어나는 것이 자기의 권리가 아닐진대, 사람이 죽는 것 또한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 권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문제는 간단해진다. 그렇지만 그들이 평생을 통해 이룩해 놓은 삶의 지위와 가치관들이 마지막 죽음의 몇 년을 통하여 부정되거나 허물어지는 모습을 보면 이것은 그렇게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어떻게 보면 존엄사를 택한 사람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삶의 마무리를 직접 선택한 용기있는 사람일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이 생각에 동의하고 싶지 않다. 남겨진 사람 때문이다.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낸 남겨진 가족들은 그 빈자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반려 동물을 안락사 시킨 후에도 슬퍼하며 우울증에 빠진 사람들도 있는데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그 슬픔을 무엇으로 이야기할 것인가? 더군다나 사인을 자살이라는 단 두 글자로 기록하는 사회 속에서 그들이 떠 안아야할 고통은 또 어떻게 위로할 것인가? 가족들을 위해서라면 마지막까지 용기있게 삶을 살아주는 것이 떠나가는 자의 마지막 책임이 아닐까? 물론 뇌사나 혼수 상태라는 특별한 경우는 논외로 하자. 그것까지 이야기를 하자면 이 리뷰는 리뷰가 아니라 한편의 논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리뷰에 대해서 여러가지 댓글이 달릴 수도 있을 것이다. 내 생각을 비난하는 사람이 많을 수도 있다. 비판은 받아들이겠지만 비난은 사양하고 싶다. 다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고 내 생각을 인정해 준다면, 그리고 좀 더 진지한 논의를 이끌어 간다면 언제든지 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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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최규석 지음 / 길찾기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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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3년 보물섬에 처음 연재된 아기공룡 둘리!

 

  요리보고 조리봐도 음음 알수 없는 둘리 둘리

  빙하타고 내려와 친구를 만났지만

  일억년 전 옛날이 너무나 그리워

  보고픈 엄마 찾아 모두 함께 나가자 아~~

  귀여운 둘리는 초능력 아기공룡

  호이호이 둘리는 초능력 내친구

 

  어린 시절 나는 둘리와 함게 자랐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버릇없게 길동이 아저씨를 길동이로 불렀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마이클 잭슨을 꿈꾸던 마이콜, 떼쟁이 희동이, 착하기만한 철수와 영희, 외계인 도우너, 서커스단을 탈출한 또치, 우리들의 주인공 둘리는 달려라 하니와는 또 다른 꿈과 재미를 주었다. 미국에 미키 마우스 패밀리가 있다면, 프랑스에 아스테릭스와 벨기에의 스머프(미국에서 애니메이션화 했지만 원작은 벨기에다), 일본에 아톰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둘리가 있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번씩은 둘리를 그려본 일이 있으리라. 그 둘리가 올해로 30살이 넘었다. 둘리에게 주민등록증과 호적등본이 만들어질 정도로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은 캐릭터다. 우리에게 유관순은 항상 누나이듯이 둘리는 아기공룡이다. 그런데 말이다. 만약 아기 공룡 둘리가 나이를 먹어 성인 공룡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최규석의 만화는 이런 발칙한 가정에서 출발한다. 추천사에서 볼 수 있듯이 이는 둘리의 원작자 김수정 선생도 생각하지 못한 일일 것이다. 그만큼 둘리가 성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충격적인 사건이다.

 

  둘리가 성인이 된다면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까? 성공한 사업가? 인정받는 마술사? 만화가 최규석은 이런 장밋빛 꿈이 아니라 좀더 현실적인 모습으로 둘리의 성인 시절을 그린다. 나이가 들어 직장을 잡은 둘리는 부족한 스펙 때문에 결국은 공장을 전전한다. 어떠한 활동가적 기질도 풍기지 않는 정말 평범한 노동자 인생이다. 그렇게 공장에서 일하던 둘리는 프레스기에 손이 잘리고 초능력도 잃어버린다. 이젠 막노동판을 전전하는 일용직 신세가 된다. 도우너는 어떠한가? 그는 사기꾼으로 변신하여 자신을 키워준 길동이에게 사기를 친다. 길동이는 도우너에게 속아서 집마저 날려버린다. 또치는 어떠한가? 나이가 들어 화류계를 전전하면서 폐물이 된다. 동물원 갇혀 있으면서도 웃음을 파는 하류인생이 되었다.(우리가 가끔 잊지만 또치는 암컷이다.) 사춘기를 잘못보낸 희동이는 군대를 다녀와서도 사고만 치고 다닌다. 마이콜은 한국의 마이클 잭슨이 아니라 밤무대의 딴따라로 전락한다. 철수는 희동이의 합의금을 위해서 도우너를 외국인 연구자에게 팔아 넘긴다. 만화에 등장하지 않는 영희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애들 학원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마트의 캐셔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더 끔찍한 것은 이 설정들이 너무나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꿈이 있고, 아이들의 동심을 자극했던 그 캐릭터들도 세월과 성장 앞에서는 꿈을 잃고 소시민으로 전락해 버린다. 그런 그들에게 세상은 너무나 팍팍하다.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었지만 어떻게하다가 이 지경까지 이르렀을까라는 철수의 외침은 그래서 내 마음을 저릿하게 만든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 아이에서 성인이 되어간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그것이 이렇게 슬픈 일이라니!

 

  만화를 보면서 내 삶을 반추해본다. 어린시절 뭐가 되고 싶니?라는 질문에 과학자요, 대통령이요, 장군이요라는 대답을 했었는데, 지금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물론 내 삶이 싫다는 말은 아니다. 나는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일들, 내가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일을 하고 살아가고 있지만, 그렇지 못한 다른 사람들은, 내 친구들은 어떨까? 지금 집에서 자라는 내 아이는 어떻게 성장할까?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은 8살 진이와 7살 현준이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성장하게 될까? 아기 공룡 둘리의 캐릭터들이 겪는 그 아픈 길을 내 아이들이라고 가지 않으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내 아이들의 미래로 가볼 것도 없다. 지금 20대 청년들이 겪게 될 미래는 무엇일까? 성년의 날을 맞이하여 장미꽃 스무송이와 향수를 받으며 장밋빛 미래를 꿈꿀텐데 그들의 꿈은 그냥 꿈으로 끝나버릴 가능성이 크다.

 

  미생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만화가 드라마가 되고, 직장 초년생을 미생이라는 말로 부른다. 교회 사무실에 한 자리가 있는데 복사기를 등지고 앉게 되는 자리다. 그들의 일상을 감시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다. 다만 자리를 배치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어 버렸다. 그 자리에 앉는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주변의 젊은 사람들이 그 자리를 미생 자리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 자리마저 없어서 주말이 되면 교회 주변을 전전하는 이들이 있다. 아직 그들은 학생이라 자리가 없어도 크게 불편함이 없겠지만 그것이 교회 사무실이 아닌, 직장 사무실이라면 어떨까? 미생 자리마저도 없어서 오늘도 백수라는 딱지를 붙이고, 취준생이라는 말로 자기를 위로하는 이들에게는 어떨까? 취업 준비 기간이 너무 오래 되어서 실업율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젊인이들이라면 어떨까?

 

  스무살이 되었다고 성년은 아니다. 세상에 나와서 세상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알게 될 때 그때 비로소 그들은 성인이 된다. 둘리가 길동이 아저씨의 무덤 앞에 누워 잠시만 쉬다갈께요라고 말할 때, 아기 공룡 둘리는 성인 공룡으로 변한다. 그렇게 성인이 된 둘리는 너무나 힘들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 너무 아프다고 한다. 오늘도 많은 젊은이들이 이렇게 슬픈 성인식을 감내하고 있다. 그들에게 뭐하고 위로를 할까?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원래 청춘은 아픈거라고, 아픈만큼 성숙한다고? 어느 연예인이 모 프로그램에 나와서 "그렇지 않아도 아픈 청춘인데, 그런 청춘들을 더 아프게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왜 당당하게 갑질하는 백화점 모녀에게 반항하지 않았냐는 모 교수의 말을 아픈 성인식을 지나고 있는 젊은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짧지만, 장편이 아닌 단편들을 모아놓은 책이지만, 그래서 정말 짧은 시간에 읽을 수 있는 책들이지만 그 책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무게는 너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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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1-09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년 전부터, 그러니까 학부생 시절 때 읽어보고 싶은 만화였는데 만약에 지금 읽으면 무척 암울한 느낌만 받을까봐 약간은 두렵기도 합니다.

saint236 2015-01-10 11:08   좋아요 0 | URL
암울합니다.T.T
 
철의 제국 가야 - 잊혀진 왕국 가야의 실체
김종성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가야라는 이름에서 무엇을 떠올리는가? 연맹체? 김유신? 신라?

 

  사실 우리는 가야라는 나라가 존재했다는 것은 알지만 그 나라가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건국되었고, 어떻게 성장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가야라는 나라 자체가 신라에 멸당당하고 흡수된지 오래고 중앙 집권 국가로 성장하지 못하여, 기록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철을 정련하는 기술이 뛰어났고, 중앙 집권체로 성장하지 못하여 신라에 의하여 합병되었다는 정도만 알고 있다. 그마저도 김유신이라는 걸출한 가야계 인물이 없었다면 알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가야라는 나라에 대해서 여러가지 상상과 비약으로 그 공간들을 채울 수 밖에 없다. 모 드라마에서 이야기하던 가야계 사람들의 결사체에서부터 시작하여,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왕망의 후예에 의한 가야의 건설 이야기까지 가야는 좀처럼 그 실체를 유추할 수 없는 카더라는 이야기들이 넘치는 고대국가다. 물론 카더라는 유추가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한다면 모르겠지만 그 근거가 빈약하면 그것은 역사적인 추론이 아니라 역사 소설이라고 하겠다.

 

  이 책은 역사적인 근거와 거기에 기반한 그럴듯한 이야기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이야기들이 이리저리 섞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부딪히게 되는 문제는 그렇게 많은 이야기들 가운데 어느 것을 선별할 것인가라는 점이다. 솔직하게 말해서 가야가 왕망의 후예에 의해서 건국되었다는 이야기라든지, 일본의 야마대국 여왕 히미코가 김수로의 딸이라고 하는 부분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부분이다. 재야 사학자 가운데 그러한 의견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듣고는 있지만, 아직은 소수의 학설일텐데 이것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건대 저자는 이쪽 학풍을 이어 받은 것 같다. 아마도 흉노족의 역사와 일본의 역사를 한국의 고대사로 받아들이려고 시도하는 사학자들과 맥을 같이 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아무리 우리 고대사를 좋게 포장하려고 해도 그 근거가 희박해서야 오히려 역효과가 나지 않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고등학교 시절에 읽었던 환단고기가 생각이 난다. 아직 역사적인 판단 기준이 서 있지 않던 그 시절에(물론 지금이라고 역사적인 판간 기준이 명확하게 서 있다고 할 수 없는 역사 덕후이지만) 읽어도 환단고기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세상의 모든 민족이 한민족에서 시작되었다는 투의 이야기, 기독교의 하나님 여호와가 사실은 여와가 전해진 것이라는 이야기는 충격이었다. 이렇게 황당무계할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에서 말이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환단고기에 근거해서 단군의 계보를 이야기한다든지, 우리 민족은 대단한 민족이었다는 투로 말하는 것은 역사적인 자기 위안을 넘어 자기 기만일 뿐이다. 이 책의 곳곳에서 이러한 부분들이 눈에 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도 있구나 정도로 치부하고 넘어가기를 권한다.

 

  이 책을 읽던 시기에 같이 읽었던 책이 가락국의 후예들이다. 이 책은 가락국의 성씨들의 역사를 추적하는 가문의 역사에 관련된 책이다. 그렇지만 이 책을 같이 읽었기 때문에 철의 제국 가야에서 이야기하는 부분들을 선별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혹 이 책을 읽기를 원하는 사람은 가락국의 후예들이라는 책도 같이 읽기를 권한다.

 

  역사는 자기 위안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부끄럽고 힘든 역사도 그대로 받아들이고 성찰해야 한다. 역사를 통하여 우리나라는 이렇게 대단한 조상들을 두고 있다는 식의 민족 사관은 우리 나라의 역사를 축소하는 식민사관만큼이나 위험하다. 다만 식민 사관만을 가르치는 현재의 교육은 꽤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둘을 모두 가르치고 비교하는 과정 속에서 역사의 진실을 파헤쳐 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모습이 아닐까?

 

  나름대로 재미는 있지만 꽤나 아쉬움이 남는 책이다. 아쉬움에 방점을 찍을지 재미에 방점을 찍을지는 각자의 판단이지만 나는 재미에 방점을 찍었다. 머리가 복잡할 때 잠시 쉬어가는 책으로 읽기에는 이만한 책도 없을 것 같다. 이런 연구들이 축적이 되어서 언젠가는 가야사에 대해서 조선사나 고려사만큼이나 저서들이 축적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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