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 천연균과 마르크스에서 찾은 진정한 삶의 가치와 노동의 의미
와타나베 이타루 지음, 정문주 옮김 / 더숲 / 201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텔레비전을 틀면 손범수씨가 심심치 않게 나오신다. 가입 조건도 그렇게 까다롭지 않고 모든 것을 다 처리해 주겠단다. 이 광고의 특징이 있는데, 광고를 계속 보고 있노라면 세상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암에 걸릴 것 같다는 것이고, 나도 살면서 암에 걸리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보험 하나 들어놓지 않는다면 나는 가족들에게 상당히 무책임한 가장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암보험에 가입한다. 전형적인 공포 마케팅이다. 이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은 것들이 많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암에 관해서만 말하고자 않다. 사람들이 암 선고를 받으면 불안해 한다. 마치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는 것처럼 꼭 죽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왜 그런가? 암의 특징 때문이다. 암의 특징은 무한증식에 있다. 암세포는 어느 정도 선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증식을 하고, 그 결과 암세포가 기생하고 있는 생명체를 죽음으로 인도한다.

 

  흔히 자본에 관해서 반대하는 사람들은 자본을 암에 비유한다. 끝을 모르는 자본의 자가 증식, 그리고 이 자가 증식 과정 속에서 피도 눈물도 없으며, 결국에는 자본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까지 망가뜨리기 때문에 자본을 암세포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이렇게 마지막까지 증식하는 자본에 대해서 다른 관점을 제기한다.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는다는 책의 제목만 보고 있으면, 레드 콤플렉스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어마 뜨거라 하면서 깜짝 놀랄 것이다. 반대로 기대감을 가지고 보는 사람들은 상당히 특이한 제목인데라는 기대감으로 이 책을 펼 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쪽이라고 할지라도 뜨악하게 된다. 책의 내용은 책 제목처럼 빨갛지도 않고, 전혀 사상적이지도 않다. 물론 저자의 글 행간에 담겨 있는 사상이 맑스의 자본론에 입각한 것임을 부정할 수 없지만 말이다.

 

  저자는 도시 생활의 부적응자이다. 자기 부인과 함께 천연 효모를 가지고 빵을 만드는 방법을 연구한 다음 조용한 시골에 정착한다. 쉽게 말하면 귀농을 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말이다. 이 사람이 꽤나 행복하게 산다. 자기의 시골 생활에 대해서 패배 의식도 없고, 그렇다고 불편함을 느끼지도 않는다. 가족들과 꽤나 행복하게 살아간다. 자기가 원하는 천연 효모를 가지고 빵을 만드는 분야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연구를 하여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그의 빵집은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탔다. 여기까지 읽은 사람들은 그의 다음 행동이 무엇일지에 대해서 온갖 상상을 한다. 대개는 이렇게 인기를 끄는 사람은 돈을 벌 수 있을 때 바짝 벌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게를 더 넓히고, 삶의 많은 부분을 빵집을 경영하는데 쏟을 것이라 상상할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삶은 전혀 반대로 간다. 빵집을 운영하고 있지만 일주일 가운데 며칠은 빵집의 문을 닫는다. 빵집 운영 시간도 한국의 유명 프렌차이즈 빵집처럼 늦은 시간까지 열지도 않는다. 딱 그날 정해진 분량만 팔고, 그렇게 늦지 않은 시간에 마감을 한다. 그것만이 아니라 여름 휴가 또한 상당히 길다. 복지가 잘 되어 있는 유럽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빵집을 운영하면 금방 망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현실은 다르다. 그의 빵집은 망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적자가 누적되지도 않는다.

 

  왜 그럴까? 저자의 경영 마인드가 다르기 때문이다. 흔히 사람들은 사업이 잘되고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면 욕망을 키운다. 그렇지만 저자는 빵집을 키우기보다는 자기의 욕망을 줄이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저자에게 가장 중요한 삶의 가치는 지속 가능성에 있기 때문이다. 욕망으로 자신을 가득채워서 빵집 경영에 올인하면 그 삶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을 일찍이 깨달았기 때문에 저자는 자신의 빵집을 유지하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월급을 줄 정도가 되는 선에서 자신의 욕망을 컨트롤하고 있다. 그의 자제력과 실험이 어느 정도까지 지속될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대로만 갈 수 있었어면 좋겠다.

 

  지금 한국에서는 철지난 트리클 다운 이론이 힘을 얻고 있다. 파이를 키운다음에 나누자고 하는 선성장 후분배를 말한다.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를 외치던 과거로 회귀를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이미 세상의 가치관은 많이 달라져 있다. 고령의 국민들도 이대로는 안된다는 위기 의식이 팽배하다. 다만 그 목소리가 하나로 모아지지 않고 있을 뿐이다. 정치인들과 경제인들도 자본에 종속될 것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성장에 좀 더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그것이 진정한 삶의 가치를 높이는 유일한 방법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춘추전국 이야기 8 - 합종연횡 춘추전국이야기 (역사의아침) 8
공원국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전국시대의 중심축은 누가 뭐래도 진(秦: 중원의 晉이 조,한,위로 분열되었기 때문에 향후 진은 秦을 말한다)이다. 소련이 붕괴하고 한동안 미국이 세계의 넘버 원이었던 상황과 비슷하다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제나 초와 같은 강대국들도, 조위한과 같은 준강대국들도, 연과 송같은 약소국들도 진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에 따라 자국의 미래 기울기도 하고 성하기도 하며 국제 정세의 판도가 복잡하게 되기 때문에 진과의 외교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서 비교적 냉철하게 접근하는 현군이 있는가 하면, 감정과 욕심에 충실한 암군도 있었다.

 

  현실이 이렇기 때문일까? 외교에 대한 전문가 집단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중 대표적인 주자가 우리가 잘아는 소진과 장의다. 소진은 진을 배제하고 6국이 동맹을 맺는 합종을, 장의는 개별 국가가 진과 1대1로 동맹을 맺는 연횡을 주장했다. 소진은 진에 대한 6국의 두려움을 기반으로 합종을 성사시켰으며, 장의는 각국이 가지는 욕망을 부추기는 방식으로 합종을 깨고 연횡을 성사시켰다. 결과적으로는 장의의 연회이 합종을 깨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이는 연횡이 합종보다 우위에 선 정책이라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외교정책적으로 본다면 합종이 연횡보다는 완성도가 높다고 하겠다. 다만 합종이 너무 개별 국가의 이익에 대한 부분을 감안하지 않았고, 냉철하고 합리적인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기에, 음모와 사기, 적절한 음험함으로 무장한 장의를 이길 수 없었던 것이다.

 

  전국 시대는 결국 압도적인 무력과 시황제라는 냉혹한 군주의 결합이라는 시너지 효과를 톡톡히 본 진에 의해서 종말을 고하고, 중국은 진이라는 하나의 나라로 통일된다. 그러나 진이 중국을 통일한 것이 결코 압도적인 무력과 냉혹한 군주와 법령 때문만은 아니다. 장의와 그 뒤를 잇는 외교가들의 치열한 암투와 그곳에서의 승리가 뒷받침 해주었기 때문이다. 만일 장의의 연횡책이 소진의 합종책을 깨뜨리지 못했다면 진이 함곡관 밖으로 나와 중원을 도모하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설령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최소한 1-2백년은 더 전국 시대가 유지된 다음에나 가능하지 않았을까?

 

  흔히 우리는 합종연횡이라는 말은 두고 자기 욕심에 기반하여 정당들이 이합집산을 반복할 때 사용한다. 그렇지만 합종연횡은 이런 단순한 차원의 개념이 아니다. 욕망과 두려움, 자국의 안보라는 복잡한 셈법이 그 안에 담겨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처럼 열강으로 둘러싸여 있는 분단국가는, 매일 육자회담을 운운해야 하는 대한민국으로서는 이 복잡한 셈법에 대해서 깊이 연구하고 적용하기 위해서 애를 써야 한다. 그렇지만 대통령이 이산화가스를 연구하신(?) 공대 출신이시라서인지 몰라도 이 부분에 대한 감이 전혀 없다.

 

  그분에게 외교가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합종, 연횡? 이명박 대통령처럼 사기이긴 하지만 자원외교라는 그럴듯한 말이라도 하든지. 이도저도 아니다. 오죽하면 언론들이 대통령이 무슨 옷을 입었는지를 연일 보도하면서, 패션외교하는 말을 하고 있겠는가? 외교에 패션이 무엇이 중요한가? 박근혜 대통령의 패션이 장의의 혀와 같다는 말인가? 장의처럼 아무리 맞아도 혀만 무사하다면 무엇이든 못하겠는가라는 생각으로 패션만 있다면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생각하고 있으신 것인지? 대통령은 영부인과는 다르다. 과거 영부인을 대신하여 외국 사절을 대접한 경험을 가지고 그것이 외교의 전부하고 생각한다면 그는 외교 점수는 빵점이다.

 

  아무리 언론이 그럴듯하게 포장한다고 할지라도 내용이 없으면 한계가 드러난다. 요즘 나는 박근혜 대통령의 외교의 실체를 보는 것 같아서 답답하다. 무리한 F-35 기종 선전으로 엄청난 리스크를 떠안으면서 유럽을 물먹였다. THAAD 배치를 언급하면서 미국과 맞장뜨려고 하는 중국을 자극했다. 중국의 열병식 참석을 통해 영원한 우방, 혈맹이라고 보수집단들이 믿고 있는 미국을 자극했다. 그뿐이랴 대북정책은 정책이라고 말하기에 민망할 수준이다. 우리나라가 무슨 진도 아니고 그렇게 여러 나라와 트러블을 만드는지 모르겠다. 전국 시대 진도 두 세 나라만 연합해도 급히 사과하고 전쟁을 멈추곤 했는데, 무슨 깡으로 좌충우돌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통일은 대박이라는 말도 그냥 하는 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북한을 자극한다.

 

  대한민국은 분단국가다. 게다가 우리나라를 둘러싸고 있는 나라들이 평범한 나라들이 아니다. 미국, 러시아, 중국(순서대로 세계 군사력 1,2,3위 국가), 일본(9위, 사실 이 부분이 이해가 잘 안된다), 북한(36위, 참고로 한국은 7위인데 어떻게 그렇게 매일 진다는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이다. 게다가 세 나라는 핵 보유국이고, 일본은 마음만 먹으면 핵을 만들 수 있는 나라라고 하고, 북한은 미국이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인정을 했다. 이렇게 한발만 잘못 내디디면 전세계를 멸망시킬 수 있는, 그정도까지 아니더라고, 최소한 한반도는 초토화될 수 있는 복잡한 정세 속에서 갈지자 횡보를 하고 있는 우리나라 정부의 외교정책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저 한심스러울 뿐이다. 속이고, 사기를 치라는 말은 아니지만, 상황에 따라서 전략적으로 유연한 사고 방식이 필요한데 전혀 그렇지 못하다.

 

  한국을 제외한 각국의 나라들은 자기들의 이익에 맞추어 합조연횡을 하고 있다. 이 속에서 우리나라를 어떤 포지션을 취해야할 것인가? 진의 입장에서 초나 위, 한을 압박하는 정책은 절대 아니다. 누가 뭐래도 우리나라는 진의 위치가 될 수는 없다. 아무리 많이 쳐줘야 조, 위, 한이다. 내 포지션과 상대방의 포지션을 제대로 파악하고 관계를 맺는 것 이것이 외교의 기본이고, 우리나라 정부에게 가장 절실한 덕목이다. 갈지자 횡보는 염상섭만으로도 족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날,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 세월호와 기독교 신앙의 과제
박영식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안산에 화정감리교회가 있다. 내가 다니는 교단에 속한 교회이기 때문에 약간이나마 그 사정에 대해서 풍문으로 들은 것들도 있고, 인터뷰 기사도 관심을 가지고 보고 있다. 화정교회 담임목사인 박인환 목사의 인터뷰 기사를 읽다가 눈물이 났던 적이 있다.

 

  사고난 아이들 가운데 예은이라는 아이가 있다. 세월호 대변인 유경근씨가 예은이 아빠다. 예은이 엄마는 화정교회 심방전도사이다. 사고를 당하고 박인환 목사는 뭐라고 위로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해서 교단 회의에 서명지를 내밀면 친한 후배들도 자신을 피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다른 교단은 수없이 많은 서명지를 가져오지만 자신은 그렇지 못한 모습을 보면서 속도 많이 상했다고 한다. 박인환 목사가 예은이 엄마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열심히 싸우라고 그렇지만 주일날은 꼭 예배에 나오라고. 힘들고 어렵고, 소상하지만 주일에는 예배에 나와서 새로운 힘을 얻고 또 싸움하러 나가라고. 다른 인터뷰 기사에서도 예은이 아빠에게 한달에 한번마이라도 예배에 나와서 심신을 충전했으면 좋겠다고, 지금까지 애를 썼으니, 잠시 다른 사람에게 일을 맡겨두고 재충전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그가 하는 말이 단순히 시간 벌기가 아니다. 박목사는 교회 앞마당을 보면서 그 안에서 뛰놀던 예은이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말했다.

 

  세월호 사건이 나간 후에 교회는 이상한 말을 했다. 세월호 사건을 뒤에서 조종하는 사람들이 종북 좌빨이라는 말에 동의하면서, 유가족들이 더 많은 보상을 얻어내기 위해서 그런 것이라고 말하면서 유가족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도대체 교회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일까? 세월호 사건의 유가족들을 향하여 최소한의 공감도, 연민도 느끼지 못하면서 인류를 사랑한다는 예수님의 사랑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몇년 전 동남아에 있었던 쓰나미 사건에 대해서 주일에 예배를 드리지 않고 놀러가니 벌을 받은 것이라고 말했던 그 분도 내가 다니는 교단의 목사님이다. 그런데 그 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교단을 막론하고 왠만큼 크다고 했던 교회들은 대체로 공감하지 못하고 정죄하는 분위기였다. 도대체 교회가 이렇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팽배한 물신주의도 문제지만, 신학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특별히 신정론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세월호 같은 비극적인 사건 앞에서 이렇게 묻게 된다. "하나님, 제게 왜 그러세요. 하나님 그 때 당신은 어디계셨습니까?" 2차대전을 겪었던 유대인들도, 독일의 고백교회도, 일제의 침략에 신음하던 한국 교회도 그러한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교회는 약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과 함께 싸웠다. 그런데 그러한 전통은 다 어디로 갔는가? 그러한 공감 능력은 다 어디로 갔는가? 신학은 둘째로 치고, 최소한 인간이라면, 인간에 대한 예의가 있다면 그러한 말은 하지 못하리라.

 

  이 책을 읽고 신학적으로 말할 거리도 많다. 신정론에 대해서 알기 쉽게 풀어 놓았다. 그러나 난 이 책을 읽고서 신학적인 말을 하려고 하지 않겠다. 다만 교회가 최소한 위로라도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같이 곁에 있어주고, 같이 울어주고, 흐느끼는 어깨와 등을 쓰다듬어 줄 수만 있었으면 좋겠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애 2015-09-09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라도 언제든지 어떻게든 잊지 않아야 하죠. 기억해야죠.

saint236 2015-09-09 10:39   좋아요 0 | URL
그렇지요. 기억한다는 것이 힘들겠지만 기억해야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지요

transient-guest 2015-09-16 0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aint236님 같이 생각하는 분들이 제 주변에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현실은, 멀쩡한 고객이 저한테 반말쓰고 이름부르다가 자기는 xx선생님 또는 xx장로님이라고 부르라는 사람을 만날 확율이 더 높어서 문제지만요. 주변에 좋은 분들도 많은데, 유독 저는 교회분들하고는 인연이 없네요. 그래도 saint236님을 생각하면, 또 저도 천주교인으로서 신을 믿는 사람인데, 같은 신을 섬기는 사람들을 함부로 욕하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많이 들기도 하구요. 좋은 분들도 많은데, 주류의 방향, 그리고 권력을 가진 자들의 권위의식과 기득권의식이 큰 문제가 아닌가 해요. 공감을 막고 일단 비난하고 정죄하게 만드는 주요 요소라고 생각됩니다.

saint236 2015-09-16 10:35   좋아요 0 | URL
가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하는 부분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걸 포기하면 기독교가 아니니까요. 다만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한다면 타인에 대해서 예의는 갖출 줄 알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더라고요. 한국의 기독교는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많이 어긋나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픕니다.
 
예수는 왜 죽었는가 - 신화가 아닌 역사
빌 오라일리 외 지음, 이광일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과 출판사에 속았다.

 

  역사적인 예수도 아니고, 그렇다고 신앙서적도 아닌 어중간한 책이다. 전혀 복음서를 반영하지도 못했고, 신학 입문을 위한 책도 아니다. 게다가 오타는 왜 그리 많은지. 처음에는 오타를 찾아보겠다고 사진도 찍고 체크했지만 나중에 오타가 너무 많아서, 게다가 똑같은 오타가 너무 많아서 포기했다. 띄어 쓰기와 조사 사용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이해가 부족한 책이다. "의"와 "에"를 구분하지 못하는 책을 보고 싶은 독서가들이 있겠는가? 이 책은 딱 그런 책이다.

 

  진심으로 돈이 아깝다. 지금까지 한번도 중고서점에 책을 팔아본 적이 없는데 만약 내가 책을 판다면 이 책이 일순위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끼나와, 구조적 차별과 저항의 현장
아라사키 모리테루 지음, 백영서 외 옮김 / 창비 / 201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읽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이다. 내가 즐겨 듣는 팟캐스트 중에 그알싫이 있다. 그동안 듣지 않아서 밀려있던 방송을 운전을 하면서 들었다. 5번에 걸쳐서 몇번씩 나눠 들었는데 그 노래의 마지막에 이 노래가 소개되어 있다. 노래의 분위기는 정말 발랄하다. 내용도 그렇게 어둡지 않다. 오히려 목가적인 분위기를 풍기기 때문에 아련히 추억에 젖을만하다. 그렇지만 이 노래가 만들어진 배경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마음이 먹먹해지고, 울컥했다. 노래의 내용은 이렇다.

 

  노래를 만든 키나 쇼키치가 어린 시절에 자기 옆집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옆집 아저씨의 부인은 오키나와 전쟁으로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같이 살면서 부부싸움이 잦았다고 한다. 어느날 부인이 자기 딸의 목을 자르고 머리를 냄비에 넣고 끓인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부인은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아저씨는 동네에서 따돌림을 당했다고 한다. 이 아저씨는 매일 옆집의 키나씨에게 술을 달라고 왔다고 한다. 아저씨와 이야기를 하면서 이 아저씨가 힘을 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 노래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노래도 그렇게 발랄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노래의 배경을 아는 사람에게 이 노래를 발랄하고 기분 좋은 노래는 아니다. 오히려 너무나 슬프고 속상한 노래이다.

 

  한때 디스코텍과 롤러장에서 신나는 분위기를 위해서 틀었던 노래 가운데 보니엠의 "바이 더 리버 오브 바빌론"이 있다. 이 또한 그렇게 경쾌한 CCM이지만 그 가사의 내용은 이스라엘의 슬픈 역사인 바벨론 유수를 담고 있다. 우리나라의 아리랑처럼 서글프지도 않고, 그렇다고 한오백년처럼 한을 밖으로 표출하고 있지 않지만 그 안에 담긴 슬픔과 비극은 너무나 처절하다. 이와 비교할만한 노래를 꼽자면 언뜻 생각은 안나지만 리쌍의 광대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하니사이라는 말은 오키나와 어로 안녕하세요란다. 오지상은 아저씨라는 말이다. 키나가 오지상에게 무슨 말을 했었을까? 오지상은 어린 키나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전쟁에 대해서 말은 하지 않지만 그 안에 담긴 비극과 슬픔은 나이를 넘어서 두 사람을 하나로 묶지 않았을까? 그런데 더 슬픈 것은 하이사이 오지상은 아직도 진행형이라는데 있다. 원래 일본과는 다른 류큐 왕국이 1609년 사쓰마번의 침입을 받아서 침탈을 당하다가 1879년 폐번치현이 조처로 일본에 강제 병합되었다. 일본의 태평양 전쟁 시에는 본토를 수비하고 천황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많은 희생을 강요당했고, 패전 후에는 미국에 의해서 점령당하다가 1972년 일본에 반환은 되었지만 여전히 미국의 최전선 기지로 남아 있다. 미국의 수많은 기지들은 일본에 미군 기지를 두지 않기 위한 목적으로 이용되었고, 베트남전 당시 미군의 폭격기가 오키나와에서 출격했다. 베트남 사람들은 오키나와를 악귀들이 살고 있는 악귀도로 불렀다.

 

  일본의 방어를 위하여 끊임없이 침탈당하던 오키나와가 이제는 일본의 이국적인 관광지로 주목을 받고 있다. 사람들은 사탕수수와 이국적인 풍경에 눈을 빼앗기지만 오키나와의 역사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이용하는 자본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끝모를 천박함에 가슴이 먹먹해 진다. 일본에 유행하는 것 중에 배드 트립이라는 것이 있단다. 역사적으로 비극적인 장소들을 여행하면서 역사의 교훈을 잊지 말자는 취지의 여행이지만 오키나와에 대한 조금의 사과도 없이 이루어지는 배드 트립은 그저 돈벌이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도 계속되는 오키나와의 슬픔을 보면서 제주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얼마전 휴가를 맞이하여 제주도에 다녀왔다. 아내가 나한테 어디 갈지 물어 보기에 나한테 묻지마라고 나한테 가자고 하면 강정마을에 갈 것이라고 말했다가 한 소리 들었다. 결국 제주도의 풍경 좋은 곳을 다녔지만 그러면서도 내 마음 한 구석에는 제주도의 슬픔과, 제주도에 대한 본토인으로서의 부채감이 자리잡고 있었다. 여전히 제주도에서는 차별이 진행되고 있고, 본토 방어를 위해서 제주도에 해군 기지를 만들고, 본토인들의 휴가를 위해 관광지로 개발되고 있다. 그 어떤 산업 기반도 없기 때문에 제주도는 여전히 관광 수입에 의존하게 된다. 특별 자치도라는 말도 내가 보기에는 그저 제주도민들을 위로하기 위한 꼼수일 뿐이다.

 

  오키나와의 슬픔, 제주의 슬픔은 다수를 위해 희생한 소수의 슬픔이고, 그 희생도 선택이 아닌 강요이기에 그 누구의 관심도 받지 않고 있다. 오키나와도 제주도 그냥 그런 곳이다. 원래부터 그렇게 되어 있는 곳이라 여길 뿐 이 문제에 대해서 인식조차 하고 있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하이사이 오지상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것도 더 정교화되고, 고착화되어 가는 시스템에 의해서 말이다.

 

  ps. 하이사이 오지상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포털검색에 하이사이만 치면 하이사이 오지상이라는 완성어가 검색되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관심이 없을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