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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 어려운 시대에 안주하는 사토리 세대의 정체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이언숙 옮김, 오찬호 해제 / 민음사 / 2014년 12월
평점 :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절망이라는 말과 행복이라는 말만큼 모순되는 이야기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책은 절말이라는 나라에서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나라가 가난하지만 젊은이들을 위해서 막대한 투자를 하기 때문에 젊은들이 행복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해이다. 이 책은 젊은이들이 행복한 이유는 그들이 객관적으로 행복하다는 말이 아니라 상당히 주관적으로 행복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오히려 젊은이들의 상황은 매우 절망적이라고 한다.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고, 그들의 고용은 불안정하다. 말이 좋아 프리터이지 그들은 고용 유연성의 최전선에 서 있다. 신학자 바울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독신의 은사를 받은 것도 아니고, 어쩔 수 없이 독신을 강요당한다. 마초라는 반대편에 초식남이라는 개념을 설정해 놓는다. 초식남이라는 말 자체가 상당히 평화적으로 보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 나라로 말하면 삼포세대 혹은 삼무세대 쯤 되지 않을까?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인데도 그들은 왜 행복할까? 글쓴이는 한 마디로 명쾌하게 그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더 절망스럽고 눈물겹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음 => 미래에 대한 도전 포기 => 현실에의 안주 = > 현실의 의미 찾기 => 지금 나는 행복하다.
이 책의 내용을 거칠게 요약하면 위와 같다. 물론 과거에 비하면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편리한 것은 맞다. 그렇지만 그것이 어느 일부분만 누리는 특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누리는 보편적인 가치가 되어 버린다면 그 때도 그것을 바라보면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군에 가본 남자들이라면 모두 동감하는 이야기가 있다. 아들을 군에 보내놓고 걱정되는 부모님들을 초청하여 아들은 생각보다 쾌적한 시설에서 살고 있음을 강변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어머니들이야 아들의 일인지라 어떤 조건에서도 안쓰럽지만 의외로 아버지들은 괜찮다고 아들이 꽤나 좋은 조건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왜 그런지 아는가? 아버지 시대의 내무실하고 비교하기 때문이다. 30여명의 소대원들이 한 내무실에서 군용 모포 덮고 바글거리면서 생활하는 내무실에 비하면 2인 침대를 쓰고 분대원끼리 사용하는 내무실의 여건은 상당히 쾌적하다. 게다가 과거에 3끼를 거친 식사로 때우던 시절에 비하면 오늘날 군용 식단은 꽤나 좋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요즘 군생활 못하겠다고 힘들다고 말하는 젊은이들은 호강에 겨워서 배부른 소리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에 한 가지 사실을 더한다면 그들의 불평이 이해가 간다. 요즘 대부분의 병사들은 집에서 외아들 혹은 두 명 정도로 생활한다는 것이다. 각자 자기 방을 사용하고, 사춘기에는 방문을 걸어 잠그는 녀석들이 군에 와서 8~10명이 같이 내무실을 쓴다는 것은 꽤나 스트레스를 동반하는 일일 것이다. 게다가 집에서는 밥을 먹으라고 해도 먹지 않았는데 군에 오면 자기의 기호와는 상관없이 나오는 모든 음식은 의무적으로 먹어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 내무 생활이 결코 즐거울리 없다. 과거에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이 초코파이였던 세대와 콜라와 피자, 햄버거인 세대는 분명히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불평을 하던 병사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내무실을 편안하게 느낀다는 것이다. 왜? 현실에 적응을 하니까? 자기들이 아무리 불평을 해도 내무실이 좋아지지는 않으니까 적응하는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은 이와 비슷하다. 과거에 비하여 객관적으로 본다면 여건은 나아졌지만 상대적으로 느끼는 것들은, 그리고 이 시대의 기준으로 바라본다면 분명히 차이가 있다. 과거에 아르바이트해서 2500원 벌었던 시절과 5000원 넘게 버는 시절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 그런데 아무리 불평해도, 아무리 도전해도 미래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인간은 현실에 적응하기 마련이다. 스스로 현실은 행복하다고 자기를 속이게 된다. 일본의 젊은이들이 처한 상황이 이렇다.
그런데 더 눈물 겨운 것은 추천자의 글이다. 일본은 절망적이다. 그런데 한국은 더 그렇다는 단 한 마디의 문장 말이다. 오늘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불안정한 노동현실, 살인적인 주거비용, 무한 경쟁의 시대, 학력은 곧 개인의 브랜드가 되는 시대에 우리는 어디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우리의 젊은이들은 과연 행복할까? 아직 이런 조사를 해보지 않았지만 우리의 젊은이들은 행복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아이폰이 있으니 행복하고, 친구가 있으니 행복하고, 집이 있으니 행복하고 등등. 행복의 조건들을 많이 찾아낼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것이야 종교의 영역이 아니겠는가? 현실에 감사하라는 것은 종교에서 할 말이지, 사회학자들이 어른들이 할 말은 아니다.
요즘 것들은 감사를 모른다, 배고픔을 모른다고 매도하기 전에, 그들이 제발 행복하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면서 주저 앉지 않게 해 주는 것이 기성 세대의 몫이 아닐까? 절망의 나라에서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젊은이들"만" 있는 것, 이것은 이미 이 사회가 결코 행복하지 않다는 증거이리라.
* 이 서평은 알라딘에서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