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석을 이렇게 본다>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나는 다석을 이렇게 본다 (반양장)
정양모 지음 / 두레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다석 류영모... 

  참 유명한 분이다. 학교에서 주워 들은 풍월이 있는데 다가, 선배 중에도 이분의 사상을 연구하겠다고 책을 산 사람도 있다. 또 다석의 사상을 연구하는 분들 가운데 이정배 교수님의 이름이 이 책 가운데 나오는데 그분 밑에서 종교철학도 배웠다. 이대 명예 교수님이신 김흥호 할아버지(우리는 친근함의 표시로 이분을 교수님이나 선생님이 아니라 할아버지라고 불렀다.)로부터 동약철학에 대해서 배웠다. 그런 면에서 나는 축복받은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한 선배가 수업 시간에 김흥호 할아버지로부터 십우도에 대하여 강의를 듣고 내려와서 열변을 토하던 일이 기억이 난다. 낯선 동양의 철학이지만 이것을 기독교 신학과 접목시켜서 하는 강의는 우리에게 신학의 새로운 지평에 대하여 눈을 뜨게 만들어 줬다. 이 분의 스승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다석 류영모는 충분히 연구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던 차에 알라딘에서 다석 류영모의 사상에 관한 책을 받았고, 알라딘에서 이런 책도 준다고 신기해하면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게 진리를 찾는 단계를 소를 찾는 목동으로 비유한 십우도이다.(5단계 목우의 그림)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젠장이란 말이 입에서 끊이지 않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기독교 신앙에 물들어 와서 욕을 하지 않는 나에게 있어서 젠장이라는 말은 무척이나 심한 실망감의 표현이다. 동경의 대상이던 다석 류영모에 관한 책을 펴고 읽는 순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분은 천주교 신자고 나는 개신교 신자라서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 아니라 동양 사상 자체에 대한 낯설음 때문이다. 도무지 유, 불, 선 사상에 대해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직 나에게 공부가 많이 부족한가보다. 또한 다석 특유의 말장난을 이해할 수가 없다. 다석을 연구하는 많은 사람들은(이정배 교수님을 포함해서 책의 저자인 정양모 신부님까지) 깊은 영적이고 신학적인 진리가 담겨 있다고 하는데 솔직하게 말하면 나에게 그의 신조어들과 말들은 조금 이해하기 쉬운 외계어 정도이다. 그의 글을 쓰고 밑에 가다듬어 다시 기록한 글을 보는 순간, "이게 그말이야? 어떻게 이렇게 다시 고쳐 쓸 수가 있지?"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갖게 된다. 마지막으로 표음문자인 한글을 표의문자처럼 이해하고 파자해 놓은 모습을 보면서 장난스럽다는 생각, 그리고 너무 나가셨다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연구하는 분들에게 이 또한 범상치 않은 모습으로 비춰질테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의문이 드는 것, 그리고 마음 한 켠이 불편한 것은 예수에 대한 다석의 생각이다. 그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그의 예수 사상은 참신하고 교리라는 틀에 매이지 않는 것이다. 함석헌 신부같은 분은 다석의 생각을 깊이 이해하고 염화시중의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지만 나같은 범인에게 있어서 다석의 생각은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렵다. 정양모 신부는 종교다원주의를 이야기하면서 배타주의 포괄주의가 잘못되었다고 그것 때문에 종교 전쟁이 발생한다고, 그래서 다석의 예수상이 대안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나는 거기에 동의할 수가 없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인류의 구원자라는 지금의 예수상을 부인해 버린다면 기독교가 기독교일수가 있겠는가? 타종교와의 관계를 위해서 기독교의 본질을 버리고 술렁술렁 넘어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슬람교에 가서 알라신의 유일성을 부정하고, 불교에 가서 부처의 깨달음을 부인한다면 그게 이슬람교이고, 불교이겠는가? 구세주 예수상은 포기할 수 없는 최후의 마지노선이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다른 종교들에 전투적인 것은 아니지만. 학교에서 종교다원주의를 배우고, 고고학을 배우고, 신학을 배우지만, 동서양의 고전을 배우지만 결국 포기하지 못한 예수상을 부정하는 모습을 보면서 거부감이 드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괜히 읽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은 다석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는데 읽은 것은 과욕인 듯 싶다. 탐진치를 버리라는 다석의 말 한마디만이 내 마음 속에 깊이 남는다.  

ps. 솔직히 다석의 사상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다석의 사상을 번역하고 주를 달아 놓는 선에서 마무리 지은 것 같다. 논문도 아니고, 그렇고 원전도 아닌 어정쩡한 포지셔닝이 문제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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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블레의 아이들을 읽고 리뷰해 주세요.
라블레의 아이들 - 천재들의 식탁
요모타 이누히코 지음, 양경미 옮김 / 빨간머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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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번 알라딘 서평을 통하여 음식에 관한 책을 연달아 두개나 읽게 되었다. "차폰 잔폰 짬뽕"과 이 책인데 두 책은 음식이란 같은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접근한다. "차폰 잔폰 짬뽕"이 음식을 통해 동아시아의 국가들이 어떻게 영향을 주고 받았는가 하는 국제 역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면 이 책은 음식 자체에 접근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유명 작가들의 저작에 등장하거나 즐겨 먹었던 음식 중에서 몇 종류를 선정하여 그것을 재연하고 시식하여 감상을 적는 다분히 식도락적인 요소에 충실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맛의 달인이라는 만화책과 비슷하다고 할까? 

  지금까지 대략 100권 이상이 나온 맛의 달인이라는 음식 만화가 있다. 그 음식 만화를 보면서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음식에 대한 철학과 미식, 풍부한 배경지식, 그리고 실제로 만들어서 표지에 실어주는 센스. 이 책을 보는 내내 맛의 달인을 떠 올렸다. 어떤 작가를 다룰 것인지 선정하는 것도 만만치 않을 것이고, 그 작가가 다루고 있는 작품 중 어느 음식을 선택할 것인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재연할 것인지, 어떻게 사진에 담을 것인지 등등 이 책의 원래 기획의도였던 연재 기사를 쓰는 내내 저자가 겪었을 스트레스와 노고에 박수를 보내며, 음식을 향한 탐욕 비슷한 열정에 탄성을 올릴 수밖에 업었다. 

  책을 보는 내내 침을 꼴깍 거리기를 수십번. 눈 앞에 있는 사진을 통해서 왠지 나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과 쉽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무모한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하고 싶은 마음으로 남겨두지 않고 실제로 해본다면 문제는 달라지겠지만. 여하튼 이것 저것 맛볼 수 있는 저자의 특권이 그저 부러울 뿐이다.

  이 책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음식은 기억이다."라는 말이 아닐까? 이 책에 선정된 사람들은 예술 분야에 두각을 두러내고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할 금자탑을 쌓은 천재들이다. 이런 천재들이 식도락을 즐기는 미식가라는 사실은 미식과 예술적 감수성은 통한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 천재들이 즐겼던 음식들이 우리가 생각하듯이 값비싸고 진귀한 것들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늘 우리에게는 사치스러운 것들도 있겠지만 그들에게는 그렇게 비싼 음식이 아닌 경우도 수두룩하다. 귄터 그라스의 장어요리가 가장 대표적인 예까 아닐까? 물론 천황의 만찬연 음식이야 예외로 쳐야 하지만.  

  저자가 선정해서 시식한 음식들은 모두 천재들의 작품과 삶과 밀접한 관계들이 있는 것들이다. 음식을 먹음으로 인해서 어린 시절의 추억이나 고향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이 음식들의 공통점이다. 저자도 밝혔듯이 천재들은 이 음식을 먹으면서 아득한 기억 속 너머로 가물거리는 추억을 끄집어 낸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추억이 이들로 하여금 위대한 천재가 되도록 만들었고, 예술적인 감수성을 잃지 않도록 붙잡아둔 가장 강력한 힘이 아니겠는가? 

  Soul Food라는 말이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에스닉 푸드와 비슷한 말일 수도 있지만 소울 푸드라는 말이 그 의미가 더 명확하다. 원래 소울 푸드라는 말은 남부 흑인 특유의 음식을 일컫는 말이지만 요즘은 그 의미가 더 넓어져서 사람들의 영혼과도 같은 음식, 한 민족 혹은 한 집안의 정체성을 상기시켜주는 음식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아무리 힘들고 지칠 때라도 왠지 그 음식만 먹으면 힘이 나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음식이 있다. 그 음식이 바로 소울 푸드라고 할 수 있다. 천재들의 비범한 영감 속에는 소울 푸드가 숨어 있는 것이며, 한 민족의 문화 가운데에도 소울 푸드가 숨어 있는 것이다. 한국인을 한국인이게 만드는, 고국을 떠나 유학을 가거나 외국에 나가 살 때 미치도록 먹고 싶다는 된장찌개, 김치, 떡볶이 같은 것들이 한국인들에게 소울 푸드가 아니겠는가? 

  저자가 어떤 의도로 이 책을 만들었고, 음식은 기억이라고 단언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 입장에서 이 말을 이렇게 받아들이고 싶다. 한국인은 과연 소울 푸드를 보존하고 있는가? 바쁘고 정신없이 달려가는 현대 사회 속에서 TV음식, 패스트 푸드가 넘쳐나고 과연 먹고 살려고 일을 하는가, 아니면 일을 하기 위해 먹는가 의문이 들 정도로 먹는 것에 대해서 무신경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또한 마찬가지다. 아침에 일어나 우유에 콘푸라이트, 바쁘면 토스트나 햄버거로 끼니를 때우는 경우가 많은데 이렇게 바쁘게 먹는 것들이 나에게 가져다 준 것이 무엇일까? 아무런 감수성도 없고, 음식을 기다리는 설레임도 없고, 그저 한끼 때웠다는 공허한 포만감만이 가득하지 않은가?  

  가끔 식사를 제대로 하게 되면 가급적이면 예전에 먹었던 음식을 찾는다. 맷돌로 직접 갈아 만든 두부, 석쇠로 굽는 고등어, 솥뚜껑 뒤집어 놓고 부치던 전들, 잔칫날 기름 냄새 고소하게 풍기면서 부친 수수부끄미.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 없는 것들이기에 최대한 비슷한 것들로 찾아 먹으려고 한다. 아내도 가급적이면 귀잖고 자극이 덜하더라고 조미료를 쓰지 않고 음식을 조리한다. 지금은 먹을 수 없는 음식들이지만 그 음식들의 맛과 향은 내 기억 속에 그대로 살아 있고, 그 음식들에 대한 추억은 단순히 맛의 문제가 아니라 어린 시절 느꼈던 부모님의 사랑과 할머니의 추억, 썰매 타고 놀던 동심, 잔칫날의 부산스러움이 그대로 묻어 있는 것들이다. 그 음식을 통하여 나의 과거가 생생하게 살아난다고 할까? 그리고 이 느낌이 나를 살아 있게 만드는 힘이다.  

  과연 내 아이들에게 소울 푸드가 존재할까? 햄버거, 냉동식품 같은 패스트 푸드, 치킨 피자 같은 배달 음식만 먹고 살아가는 요즘 아이들에게 소울 푸드가 존재할까? 소울 푸드가 단순히 음식이 아님을 기억한다면 소울 푸드가 있고 없음의 차이는 분명하다.  

  식탁을 대하는 우리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것은 음식은 그저 음식이 아니고 맛이 아니라는 것이다. 음식은 기억이고, 그 기억은 인생을 구성하고 활력을 불어 넣어준다는 사실이다. 일주일에 다만 며칠이라도 가족들이 단란히 둘러 앉아 음식을 먹으며 아이들에게 추억을 심어 주는 것, 이것이 이 시대 우리 부모들이 심각하게 고민하고 노력해야 하는 부분이 아닐까? 

  ps. 오타가 몇 군데 있다. 204p 밑에서 둘째 줄 "아들의 상렬례"는 "아들의 상견례"가 맞을 것이고, 234p 첫째 줄 "집으로 돌아가지 전에"는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가 맞을 것이다. 239p 양파밥 만드는 방법은 3~6번까지 사진이 모두 감자를 잘라 넣는 사진이다. 이부분 때문에 별 하나를 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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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경미 2009-12-05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라블레의 아이들 역자 양경미입니다. 우연히 이 서평을 발견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습니다. 성의껏 잘 쓰신 서평이네요. 아래 지적하신 오타와 사진의 오류는 출판사에서도 책이 나온 후에 발견이 되어 2쇄부터 바로 잡겠다고 하더군요.
이 글을 제 블러그에 옮겨가도 되겠습니까? 허락해 주시면 옮겨가고 허락하지 않으셔도 섭섭해 하지 않겠습니다^^
오늘은 바람이 많이 차갑군요. 편안한 주말 오후 보내시기 빕니다.

양경미 드림

saint236 2009-12-05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옮겨가신다면야 저야 감사하죠. 좋은 책 감사합니다.

양경미 2010-01-15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라블레의 아이들 역자입니다. 이 책의 저자인 요모타 이누히코 선생에게 한국의 독자 서평 두 편을 선정해서 보내드리려고 합니다. 그 두 편 중 이 글을 보내고 싶습니다만... 괜찮으신지요?

saint236 2010-01-15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옙. 괜찮습니다.^^ 앞으로도 더 좋은 글들 소개해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유쾌하고 독한 쇼펜하우어의 철학 읽기>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유쾌하고 독한 쇼펜하우어의 철학읽기 - 쇼펜하우어의 재발견
랄프 비너 지음, 최흥주 옮김 / 시아출판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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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염세주의자! 

  쇼펜하우어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형용사이다. 쇼펜하우어라는 이름은 참 많이 들었지만 솔직하게 그에 대해서 심도 있게 공부를 해 본적도 없고, 그렇다고 그의 저작을 읽어본 적도 없다. 그저 "염세주의자구나."하는 정도만 어깨너머로 줏어들었을 뿐이다. 이 책을 받고 읽기 시자하면서 나름대로 기대감을 가졌던 것도 사실이다. 쇼펜 하우어에 대해서 좀 더 알 수 있겠구나, 그의 철학은 무엇일까, 그는 왜 염세주의자요 불평불만을 하는 사람으로 불리는 것일까? 이런 저런 생각으로 책을 읽어가기 시작했지만 괜히 읽었다는 후회랄까? 아니면 서평 도서이기 때문에 읽는다는 책임감으로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진도는 정말 안나가고, 나 자신에 대한 불신이 밀려 오기 시작했다. 내가 철학책을 오죽 안 읽었으며 이 책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솔직히 읽기는 읽었지만 무엇을 읽었는지 모르겠다 머릿 속에 남는 것이 하나도 없다. 

  단순히 내가 이해 못하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그저 잠시 핑계거리를 대보자면 책의 편집 자체와 내용 자체가 그렇기 때문이 아닐까? 이 책은 쇼펜하후어의 철학 읽기라는 말을 하지만 솔직하게 그의 철학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다. 그의 철학이 빈수레라 명확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이 책 자체가 그의 철학을 명확하게 닮고 있지 못하다는 말이다. 책의 편집은 매우 간단하다. 오렌지 색으로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대한 생각을 간략하게 적고 있으며 그 증거로 거기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말을 인용하는 검은색 글이 써 있다. 첫페이지부터 마지막페이지까지 전부 이모양이다. 감이 잘 안오는 사람을 위해서 비유하자면, 논문에서 각주들만 싹 모아서 책을 펴냈다고 할까? 책의 편집이 이러니 읽기가 쉽지 않다. 

  책을 읽으면서 그의 사상이나 생각은 어린가 사라져 버리고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지? 왜 저자는 이 글을 끌어다 쓴 것이지? 도대체 책을 쓴 의도는 무엇이지? 내내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읽는다. 제목이 "유쾌하고 독한 쇼펜하우어 첧가 읽기"이지만 유쾌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의 사상만 해도 독해서 그의 말을 유머로 받아들이자면 쉽지 않을텐데, 편집까지 이러니 그의 유머는 어디론가 증발해 버렸다. 솔직하게 이 책을 읽으면서 즐겁다, 유쾌하다, 하다 못해 시니컬한 웃음이 난다라고 말을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만약 그런 말을 한 사람이있다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모르겠다. 나중에 다시 곱씹어 가면서 읽어본다면 유쾌함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는 유쾌함을 찾지는 못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이 있다. 석가모니가 태어나면서 했다는 말이 있기도 하고. 원래 그 의미는 잘 모르지만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들을 비꼬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쇼펜하우어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 아닐까? 다른 철학자들은 모두 돈을 벌기 위하여 직식을 판매하는 부도덕한 사람들이고, 겸손한 사람들은 사실 겸손이 아니라 무능력을 감추는 것이든지 혹은 자기의 명성을 높이기 위하여 가면을 쓰는 것이라 비판하는 그의 태도는 도를 넘어섰다고도 할 수 있다. 생전에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었을만도 하다. 헤겔을 철저하게 비난하고, 괴테에게도 훈수를 둘 정도의 그의 기고만장함이 얼마나 대단한가? 그렇지만 그의 기고만장함이 그저 빈소리로 들리지 않은 것은 그의 실력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의 철학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언어에 대한 태도이다. 원어이 라틴어를 고수해야 한다고 할 정도로 학술적인 용어에 깐깐한 그의 태도는 학문을 하고 진리를 탐구함에 있어서 우리가 본받아야 하는 태도가 아니겠는가? 신조어가 쏟아지고 대학 레포트에도 이모티콘을 쓰는 웃기는 후배들의 모습을 만약 쇼펜하우어가 봤다면 어떻게 말했을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저술을 위한 저술, 돈을 위해 지식을 판다는 그의 비판 또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돈과 권력을 위해서 학자의 양심마저 팔아버리는 사람들이 오늘 이 땅에 얼마나 많은가?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저자의 말대로 유쾌한지는 모르겠지만 독한 철학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독함이 오늘 이 사회에 필요하다는 것 또한 인정한다. 시간을 갖고 그의 원저작을 읽은 후 이 책을 읽는다면 조금은 의미있고 유쾌하게 다가오지 않겠는가? 아직 이 책을 소화하기에 부족한 내공을 탓하면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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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북촌에서>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서울, 북촌에서 - 골목길에서 만난 삶, 사람
김유경 지음, 하지권 사진 / 민음인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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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생이 되면서 서울에 올라와 10여년째 살고 있다. 항상 시골에서만 살았던 나였던지라 번잡함이 좋았고, 교보, 대학로, 신촌, 종로 등을 다니면서 젊음의 도시들들을 활보하고 있다는 자부심에 행복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고궁과 옛 문화유적지들을 찾아다니곤 했는데 당시에는 이유를 몰랐다. 그저 젊음의 치기 내지는 일순간의 감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비가 오는 날이면 옷을 다 챙겨입고(평상시에는 잠바도 안 입고 다니고 양말도 안신고  슬리퍼를 신고 다녔지만) 꼭 흥화문 공원을 거쳐서 교보까지 걸어다녔다. 신학대에 입학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가기 싫었던 곳이었는지라 방황도 많이 했고, 시골 촌놈이 목격한 사회 부조리가 나를 더 방황하게 만들었다. 당시 피맛골을 지나 대한항공 건물을 거쳐 흥화문 공원, 그리고 서대문 형무소를 돌아 냉천동으로 내려 오는 길은 나의 단골 산책 고스가 되었다. 어느날은 잔득 취해서 길거에서 한두시간을 자기도 했고, 어느 날에는 머리가 깨질 정도로 고민을 했으며, 어느날에는 울면서 그 길을 걸어왔었다. 오늘이 나를 키우고 내 생각을 정립시켜준 것은 그 길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요즘도 가끔 교보를 지나 그 길을 걸어갈 때면 젊은 날의 방황과 고민이 떠올라 마음 한 구석이 따듯해지곤 한다. 

  군에 입대하기전 서대문과 동대문에 거처를 두고 살았으며 종로길과 성북동길, 가회동, 계동, 재동 등등 뒷골목을 만이 다녔고, 왠지 그곳에만 오면 편안함을 느꼈다. 경복궁도 자주 찾아가던 곳이었고 경복궁 중에서도 제일 안쪽에 위치한 명성황후의 시해 장소를 보면서 민족의 아픔과 역사의 비극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러던 서울을 군입대와 동시에 떠났고 제대와 동시에 이번에는 잠실로 이사를 왔다. 그런데 뭐랄까? 영 어색하기만 하다. 나에게 서울은 강북이고, 경복궁이고, 남대문이고, 흥화문이고 남산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문득 한 가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왜 그렇게도 비가 오면, 마음이 아프면 고궁을 찾아갔고, 유적지를 찾아갔는지 말이다. 그곳에서는 서울의 도심 한복판에서는 느낄 수 없는 여백과 여유와 허허로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치고 상한 나의 마음을 치유해주는 무엇인가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곳을 찾아 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그런데 서울 도심에서 그런 곳을 찾아간다는 것은 썩 기분 좋은 일만은 아니다. 사람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그런 곳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10년 전에 보았던 건물이 이젠 그곳에 없다. 도처에 무슨무슨 처라는 표지석만 있을 뿐이지 건물이 없다. 대신 그 자리에는 초고층의 현대식 건물만이 들어 서 있다. 얼마전 서울의 랜드마크를 짓기 위하여 동대문 운동장을 헐어버린 서울시의 만행을 신문으로 보고 분개했었다. 역사적인 가치와 건물이 가지는 의미는 천박한 자본주의 앞에서는 한줌의 가치도 가지지 못하나 보다.  

  곳곳에서 초고층 빌딩을 랜드마크로 만들기 위해서 역사적인 건물을 헐어버리는 나라가 대한민국을 제외하고 어디에 있을까? 역사적인 거리인 피맛골이 사라지는 것 또한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도시계획이라는 미명하에 보존되어야 할 거리와 건물이 사라지고 헐리는 오늘의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에 "서울 북촌에서"라는 책을 낸 것이 아닐까?  

  서울을 걷는다는 것은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동반한 것이 아니겠는가? 더 많은 것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 전에 보존해야 하지 않을까? 아쉬움과 반가움을 가지고 이 책을 읽었다. 

ps. 이 책을 더 재미있게 읽기 위해서는 한 챕터씩 읽고 그곳을 찾아가서 사진도 찍고 둘러보기도 해야 할 것이다. 책으로만 읽어서는 느낌이 분명하지 않은 곳이 몇군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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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은 사랑하지 못하는 병>을 읽고 리뷰해 주세요.
두 번은 사랑하지 못하는 병 - 사랑했으므로, 사랑이 두려운 당신을 위한 심리치유 에세이
권문수 지음 / 나무수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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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은 사랑하지 못하는 병"이라는 제목에서 순애보를 떠올렸다. 클래식에서 혹은 번지 점프를 하다와 같은 영화에서 보는 한 사람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다 바치는 사랑, 그래서 사랑이 끝났을 때 후회도 없고, 뒤 돌아 봄도 없는 그런 사랑에 관한 이야기인줄 알았다. 한창 열애에 빠진 사람들의 이야기인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두번 사랑하지 못하는 병"이라는 제목과는 달리 사랑 때문에 깊은 상처를 받은 사람들을 상당하면서 느꼈던 사랑에 관한 생각들, 그리고 상처를 딛고 일어나 다시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그러나 솔직하게 풀어 놓은 책이다. 책의 내용을 십분 반영한다면 "다시 사랑하기 위해서" 혹은 글의 제일 마지막 문장에서 인용한 이 글의 제목처럼 "사랑, 정말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가 더 어울리지 않겠는가? 

  누구나 그렇겠지만(물론 안 그런 사람도 있긴 하다.) 사랑 이라는 열병에 빠져서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해 하기도 하고 가슴 설레이면서 밤잠을 못이루기도 한다. 그러다가 불행히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깨어지게 되면 사랑한만큼 깊은 상처를 받아 눈물로 밤을 하얗게 지새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심각한 경우에는 목숨까지 포기하게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한 사랑하는 것이 숙명이고 당연한 것이라면, 실연의 아픔 때문에 상처받고 힘들어 하는 것 또한 살아 있는 인간이라면 겪게 되는 당연한 일련의 과정이 아니겠는가? 

  자연스럽게 사랑과 이별을 배우면서 인생이 성숙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자연스러운 흐름인데 그 과정이 너무나 힘들고 아픈 것 또한 사실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다시는 사랑하지 못하게 되기도 하고, 자기만의 동굴에서 살면서 다른 사람과 벽을 쌓고 살아간다. 사랑으로 인해 받은 상처를 사랑으로 치유하고자 끊임없이 다른 대상을 찾아 헤매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것들이 사랑의 상처를 치윻 주지 못한다는데 있다. 사랑의 상처란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무뎌지는 것이라는 저자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사랑의 상처란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무뎌지는 것이고 무덤덤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일뿐이다.  

  나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다. 20살에 나보다 한 살 어린 한 사람을 만났고, 25살까지 만났다. 처음 연애하는 사람 둘이 만나서 좋은 과정을 거치면서 오랜 세월동안 관계를 유지하다 보니까 어느 순간에 상대방에 대한 소중함과 설레임도 사라지는 권태기 비슷한 과정에 들어가게 되었다. 둘 다 아직 어렸고, 상대방의 상처를 안아 주기보다는 상대에게 더 큰 상처를 입히기에 급급했으며, 결국 그렇게 헤어지고 말았다. 다음 과정은 이 책에 나오는 대로 상실, 불안, 무감각, 중독, 트라우마, 오해, 금기의 과정을 차례차례 밟아갔다. 나는 이렇게 아픈데 세상은 너무나 밝아서 한 때 밤낮 모자를 쓰고 다니기도 했으며, 불면증에 몇달을 시달려 보기도 하고, 상처 때문에 밥을 거의 못먹고 음료수로 연명을 하기도 했다. 상처가 극에 달했을 때에는 약을 먹고 목숨을 포기하려도 했다. 사랑이 깊었던만큼 상처도 깊었고 그 상처가 치유되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흘렀다. 상처가 치유되기 전에 다른 사람을 만나보기도 했지만 나에게 위안이 되기보다는 상대방에게 더 큰 상처를 주고 받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상처가 무뎌지고 무덤덤하게 될 즈음에 아내를 만났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하 과정을 통해 깨닫게 된 한가지는 누구나 열렬한 사랑을 하지만 사랑을 하면서 정말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누구나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서 중간에 멈추고 포기하려고 하지만, 담을 샇고 살아가지만 그것이 사랑의 상처를 결코 치유해 줄 수 없다. 오히려 포기하면 할수록 더 상처를 받게 될 뿐이다. 다시 사랑하기를 포기한다는 것은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며,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오늘도 사랑 때문에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해 주고 싶다. 그리고 딷 이 한마디만 건네주고 싶다. 

"사랑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는 거야. 잘 모르겠지만 너는 정말로 괜찮은 사람이야. 힘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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