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위의 작업실>을 리뷰해주세요
지구 위의 작업실
김갑수 지음, 김상민 그림, 김선규 사진 / 푸른숲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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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이 책은 내 취향이 아니다. 서평단 도서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사지도 읽지도 않았을 책이다. 겉멋이 들어서인지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기록한 에세이나 신변잡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까닭이다. 오죽하면 법정 스님의 무소유 외에는 읽어본 에시이 집이 손에 꼽을 정도가 되겠는가? 그런 이유로 의무감을 가지고 책을 읽기시작했다. 간간이 보이는 사진들, 책의 넓은 공백이 있었다면 무척이나 힘든 작업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이 책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커피 때문이다. 차를 즐겨마시던 나이지만 군 전역 후, 그리고 아이들이 태어난 후 차를 마실만한 시간적인 여유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커피를 달고 살기 시작했다. 접근이 용이한 스타벅스에 가서 원두를 사오고, 일렉트로럭스 커피 메이커를 책상에 올려 놓고 매일 커피를 내린다. 가지고 있던 전동 그라인더는 리콜 제품인지라 반품시켜 버렸고, 결국은 매일 스타벅스 매장에 신세를 지고 있다.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는 이유는 간단하다. 자주, 그리고 소량의 커피를 스타벅스 제품에 한해서 갈아준다는 것이다. 그라인더가 없는 나에게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일주일에서 이주일치 분량만 갈아서 보관했다가 그것이 다 떨어지면 다시 가서 갈아오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상황 가운데 가장 신선한 커피를 마시는 방법이다. 언젠가는 더치커피를 마시겠다는 일념으로 자주 워터드롭을 인터넷으로 찾아본다. 아직 돈이 없어서 쳐다만 보고 있다.(나는 솔로가 아니다.) 또한 에스프레소 머신에도 혹해 있다. 그러나 역시 워터드롭과 같은 이유로 침만 삼키고 있을 뿐이다. 이런 처지의 나에게 저자의 커피머신과 바는 꿈에 그리던 물품들이니 내가 책에 빠져드는 것이야 당연한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침을 꼴깍 삼키면서 책을 보노라면 자연스럽게 풍겨오는 커피 향기에 취해 나도 모르게 몸 안에 카페인을 충전하곤 한다. 언젠가는 나도 워터드롭과 에스프레소 머신을 장만하고 말리라는 다짐과 함께. 

  오디오 편을 보고 있노라면 당최 무슨 말인지 못알아 먹겠더라. 그래서 다시 책임감 모드로 돌입했다. 그러다 "내 이름은 톤팔이, 실은 나 불안하다."라는 제목에서 눈이 멈췄다. 그리고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렇다. 저자가 작업실이라는 동굴을 마련한 이유도, 오디오와 판에 미친 이유도, 커피에 꼭지가 돈 이유도, 내가 이 책에 빠져들게 된 이유도 다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실은 불안했던 것이다. 내 삶이 불안하고, 미래가 불안하고,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불안했던 것이다. 매일의 일상이 줄타기이다. 사람들이 내 뜻대로 안된다. 힘들다는 이야기만 하면서 내 자신감과 자존심과 자존감은 애초에 무너졌고, 그저 악으로만 버티는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은 불안이다. 남아야 하는가, 옮겨야 하는가라는 선택의 기로에서 어떤 선택을 해도 불안했던 것이다.  

  한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아내가 있고, 연년생인 두 아이가 있지다. 그들을 정말 사랑하지만 때론 혼자만의 시간이 한없이 그리울 때가 있다.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어서도 아니다. 그냥 나혼자 뒹굴거리다가 책이나 잔득 읽다가, 그것도 아니면 문명이나 삼국지 같은 게임을 하면서 천하통일이라는 목표를 달성한 순간 의기양양해 하는 그런 유치한 삶을 누려보고 싶어서이기 때문이다. 아내오 아이가 불편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러고 싶을 때가 1년에 한두번은 있다는 것이다. 나만의 공간과 시간 속에서 정신줄을 놓고 싶다는 말이다. 이런 면에서 김갑수씨가 부럽다. 작업실에서 말 그래도 산수갑산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을 점하고 있는 갑수씨가 부럽다.  물론 그의 커피머신이 한없이 부럽다. 이게 욕심인가? 

  오덕후의 기질로 불안을 달래고 그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그의 모습이 한없이 부럽다. 내게 이런 것이 무엇일까? 나에게 작업실은 어떤 것일까? 불안을 달래고, 그 불안 안으로 들어가서 불안과 함게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약간은 건설적인 오턱후질이 무엇일까? 현재로서는 책이 아닐까? 아직 읽을 책이 많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필이 꽂히는 책이라면 일단 지르고 보는, 그리고 꽂아 놓고 언젠가는 보리라 다짐하면서 혼자 흐뭇해 하는 책질이 나에게는 작업실이 아닐까? (물론 이런 짓때문에 1년에 50~60권 정도의 책은 읽지만) 

  오디오질이나 커피질을 좋아하는 사람, 오덕후질로 불안해 하는 사람들에게 한번은 권해 주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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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즐거움>을 리뷰해주세요
노년의 즐거움 - 은퇴 후 30년… 그 가슴 뛰는 삶의 시작!
김열규 지음 / 비아북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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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어릴 적에 시골에 살았다. 아버지의 고향도 시골이었고, 아버지께서 이사다니신 곳도 시골이었다. 학교가 폐교될 정도로 깡촌이었으며, 그곳은 여전히 발전이 비켜간 곳이다. 그 덕택일까? 내 나이에 경험하기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내가 30대 초반인데 연날리기와 자치기, 구슬치기, 딱지치기 등을 하고 놀았다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일 것이다. 할머니의 집은 그야 말로 보물 창고였다. 뒤주도 있었고, 병풍도 있었으며, 다락에는 나를 위해 준비된 온갖 군것질 거리가 있었다. 문은 우리가 생각하는 유리문이 아니라 격자무늬로 짜여진 나무에 창호지를 바른 전통식 문이었다. 1년에서 2년 정도 사요하여 찢어진 문에는 풀을 먹여 창호지를 바르고 창호지가 팽팽하게 달라붙도록 입으로 물을 머금고 뿌린다. 그렇게 하고 햇볕에 말리면 어느새 창호지를 새로 바른 깨끗한 문이 된다. 그런데 그 문을 바라보면서 개운함을 느끼기 보다는 아쉬움을 느끼기 일쑤였다. 어린 내 생각에도 창초지의 색은 새하얀 것이 아니라 누리끼리한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다. 아직짜기도 내 머릿 속에 창호지는 새하얀 빛으로 생각되기 보다는 누리끼리한 빛으로 생각이 된다. 

  왜 창호지를 생각하면서 새하얀 빛이 아니라 누리끼리한 빛이 생각이 날까? 고운 샛노란 빛도 아니고 얼룩이 묻어 지저분해 보이기까지 하는 누리끼리한 빛이 떠오르는 것일까? 그 종이가 창호지이기 때문이 아닐까? 창호지는 세월의 연륜이 묻어 있는 고풍스러움이 멋이다. 몇 년동안 비바람을 이겨내고 사람의 손때가 뭍어 있어서 누리끼리하고 어느 부분은 꾀죄죄하기까지 하며, 중간 중간 찢어진 부분을 창호지를 고게 잘라붙여 덧대어 붙인 것, 나는 이것이 창호지의 멋이라고 생각한다. 창호지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깨끗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 속에서 친근함으로 다가갈 수 있는, 그렇다고 그 고마움을 무시해 버릴 수도 없는 그런 존재이다. 

  노년이 꼭 이렇다. 노년은 세월의 얼룩이 뭍어 있고, 그 안에 연륜이 깊이 숨어 있어서 치근하면서도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이다. 그런데 요즘 이 노년이 위기를 맞고 있다. 노인들은 쓸모없는 삼류인생 취급을 당하고 있으며, 노인들 스스로도 늙으면 죽어야지를 입버릇처럼 달고 산다. 그러다보니 나이를 먹는 것이 두려워 진다. 세상에 태어나서 한살 한살 나이를 먹는 것은 생의 당연한 이치임에도 어떻게 해서든 나이를 먹지 않기 위해서 애를 쓴다. 어떻게 해서든 한살을 깎아보려고 만으로 나이를 계산하기도 하며, 주민등록상의 나이를 앞세우기도 한다. 그러다 이것마저 여의치 않으면 몸에 투자하기 시작한다. 동안, 웰빙, 주름살 제거, 보톡스 등등 주름살을 제거하고 어떻게 해서든 세월을 비켜가기 위해서 목숨을 건다. 

  그렇지만 이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행동이다. 노년의 경쟁력이 무엇일까? 바로 그 노숙함이 아니던가? 아무리 애를 써도 젊은이들을 따라해서는 방법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를 쓰고 젊은이들을 따라가려는 것은 늙음에 대한 우리 사회의 그릇된 시각 때문이 아니던가? 늙음은 재앙이 아니다. 피할 대상이 아니다. 자연스러움이다. 그 안에 성숙함과 지혜를 갈무리하고 있는 선망의 대상이다.  

  세월의 연륜이 뭍어 있는 창호지처럼 그렇게 멋있게 늙어가고 싶다. 쫓기다 쫓기다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내게 주어진 시간들을 맞이하면서 그렇게 숙성되고 싶다. 그래서 소로가 되고 중로가 되고 대로가 되었을 때, 내 얼굴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내가 아는 분 중에 꼭 이렇게 살고 계신 목사님이 계시다. 70으로 정년 퇴임을 하신지 몇 년이 지나셨는데도 여전히 정정하시다. 활동적이시고, 컴푸터 사용법을 배우셔서 당신이 찍은 사진과 놓은 글들을 메일로 보내주신다. 그분이 보내 주신 글 중에 이런 것이 있다.   

  나는 젊었을 때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 결과 나는 실력을 인정받았고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 덕에 65세때 당당한 은퇴를 할 수 있었죠. 그런 내가 30년 후인 95살 생일 때 얼마나 후회의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내 65년의 생애는 자랑스럽고 떳떳했지만, 이후 30년의 삶은 부끄럽고 후회되고 비통한 삶이었습니다. 나는 퇴직 후 "이제 다 살았다, 남은 인생은 그냥 덤이다."라는 생각으로 그저 고통없이 죽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덧없고 희망이 없는 삶... 그런 삶을 무려 30년이나 살았습니다. 30년의 시간은 지금 내 나이 95세로 보면... 3분의 1에 해당하는 기나긴 시간입니다. 만일 내가 퇴직 할 때 앞으로 30년을 더 살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난 정말 그렇게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때 나 스스로가 늙었다고, 뭔가를 시작하기엔 늦었다고 생각했던 것이 큰 잘못이었습니다. 나는 지금 95살이지만 정신이 또렷합니다. 앞으로 10년, 20년을 더 살지 모릅니다. 이제 나는 하고 싶었던 어학공부를 시작하려 합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10년후 맞이하게 될 105번째 생일 날, 95살때 왜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는지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동아일보의 오피니언란에 실렸던 어느 95세 노인의 수필인데 늙어감에 대하여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던 글이다. 멋있게 늙어간다는 것, 생각만해도 즐겁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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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탄생 - 다빈치에서 파인먼까지 창조성을 빛낸 사람들의 13가지 생각도구
로버트 루트번스타인 외 지음, 박종성 옮김 / 에코의서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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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전에 읽었던 책 중에 이어령씨의 "디지로그"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의 표지에 적힌 문구를 보면서 왠지 이어령씨의 디지로그가 떠올랐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어령씨가 추천을 한 책이었더라. 약간은 두껍고 과학적이고 수학적인 개념,예술적인 개념을 결들여 설명하는 책이기 때문에 상당히 난해하다고 느낄 법도 하다. 아마 외국에서 일반인들이 이 책을 쉽게 읽을 수 있다면 우리나라의 교육이 문제일 것이고, 외국인들도 이 책을 쉽게 읽지 못하고 일부 지성인들에게 읽혀지고 있다면 이 글을 쓴 작가의 문제일 것이다.  

  여하튼 이 책의 논지는 간단하다. 지금까지 역사는 비범한 천재들에 의하여 발전해 왔는데 천재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똑똑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진정한 천재는 자기 분야에만 똑똑한 편협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도 아니요, 논리적인 사람도 아니라는 것이다. 진짜 천재는 논리적이라기보다는 직관적인 사람이며, 음악과 예술과 과학 등 모든 분야에서 그 창조성을 인정받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저 우연히, 혹은 개인적인 취향 때문에 과학이든, 수학이든, 문학이든, 예술이든 어느 한 분야로 나가게 되었지만 그들의 관심이 약간만 다른 분야로 나갔어도 그들은 그 분야에서 성공하지 않았을까? 문학 전공자가 조각가가 되고, 과학 전공자가 시인이 되며, 집에서 땅을 파고 놀던 아이가 시인이 되고, 곤충학자가 된다. 우리 나라에서는 애초에 말라 비틀어져 버린 천재들의 대열이 왜 외국에선 가능한 것인가? 교육의 문제가 아닐까? 

  이 책에서 진정한 천재, 창조적인 사람은 자유로운 생활과 사고, 그리고 호기심 탐구에서부터 출발한다고 한다. 음악적인 사고, 수학적인 사고, 과학적인 논리성 등, 다방면에 걸친 사고의 틀이 직관을 통하여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 낸다고 하는데 과연 이러한 직관과 창조가 한국에서 가능할까? 아시다시피 우리나라 교육은 대입을 최고의 목표로 둔다. 대입을 위해서는 국어 한자, 영어 한 단어, 수학 문제 하나라도 더 풀어야 하지만, 체육과 음악과 미술은 무시해도 좋을 그런 과목이 되어 버렸다. 음악은 학교 종이 땡땡땡만 외우면 되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음악을 전공할 사람이 가곡을 즐기고, 기타 연주를 즐기는 순간 낙오자 취급을 받는다. 미대 입시생이 아닌 이상은 미술을 깊이 파고 들면 안된다. 체대 입시생이 아닌 이상은 구기 종목도, 과외 활동도 모두 포기해야 한다. 이게 한국의 교육이 아니던가? 이시에 성공해서도 그림 하나 못그리는 대학생, 문학하나 모르는 지성인, 소크라테스와, 맑스 조차 모르는 학사 석사들이 두루 넘쳐나는 세상이 아니던가? 단순 무식한 일꾼을 만들어 내는 교육 속에 우리들의 창조성은 메말라 비틀어 죽어 버리지 않았는가? 그것도 BK21이라는 허울 좋은 지식 산업이라는 타이틀 하에서 말이다. 돈이 되지 않으면 학문으로조차 여겨지지 못하는 아주 이상한 세대를 살아가면서 이 당에 천재가 태어나지 않는 이유에 대하여 절대 공감할 수 밖에 없는 내 현실이 너무 슬플 뿐이다. 

  21세기는 창조성의 시대다. 더 이상 포디즘이 먹히지 않는 포스트 포디즘의 시대에 포디즘에 적합한 교육을 고집하고, 그 교육을 강화하는 오늘의 어처구니 없는 교육 현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공부에 목을 매고 하루에 4시간씩 자면서 공부하는 한국 학생이 주말에 파티를 즐기면서 공부하는 외국 학생들에 비하여 창조성과 능율성이 떨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번쯤은 깊이 생각해 봐야할 문제이다.  앞으로의 시대는 분명 통합적인 사고만이 살아 남을 수 있는 구조로 변하게 될 것이다. 기존에 있는 것들을 통합하여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 내는 유형의 창조가 사회를 변화시켜가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 것인가? 두말하면 자소리가 될 것이다.  

ps. 차라리 각주를 달아라. 각주를 달지 않고 책의 측면에 기록했기 때문에 집주하기 어렵고 지저분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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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온 남자, 도쿄에서 온 여자>를 리뷰해주세요.
뉴욕에서 온 남자, 도쿄에서 온 여자
권진.이화정 지음 / 씨네21북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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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에서 온 남자, 도쿄에서 온 여자. 

  왠지 그 남자 작사, 그 여자 작곡, 혹은 뉴욕에서 온 남자, 파리에서 온 여자를 연상기킨다. 그래서 책을 열기 전에는 서울이라는 공간 안에서 뉴욕 출신의 남자와 도쿄 출신의 여자가 만나 사랑에 빠진다는 식의 스토리를 기대하고 책을 열었다. 그러나 낚였다는 느낌이 강하게 왔다. 그냥 서울에서 살고 있는 몇몇들의 신변잡기적인 삶의 이야기를 인터뷰 형식을 빌려 기록하고 있을 뿐 새로울 것이 없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런 류의 이야기가 책으로 출판되어, 그것도 이정도의 가격에 판매되고 있다는 것이 솔직하게 이해가 안된다. 아마 서평 도서가 아니었다면 나로서는 절대로 사보지 않았을 책일 것이다. 일단 나와는 너무나 취향이 다른 분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평을 쓰겠다는 일념으로 마지막까지 책을 넘겼고, 그 가운데에서 얻은 것이 몇 가지가 있어서 적어본다. 내가 볼 때 이 책은 위에서 이야기한 딱 두가지의 단어로 정리가 된다. 첫째 한없이 부러움을 느껴본다. 어찌되었던 용기를 가지고 낯선 곳에 가서 자신의 삶을 새롭게 시작할수 있다는 것 자체가 부러움의 대상이다. 나는 과연 어디를 가봐던가? 외국은 고사하고 이렇게 훨훨 날아다녀봤던 적이 있었는가? 삶에 매리고, 책임감에 매여서 자유를 상실하고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고국을 떠나 서울이라는 낯선 도시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은 한없이 부러움 자체다. 

  그러나 동시에 서글픔을 느낀다. 한국에서 몇 년을 살건 여전히 타자요, 이방인으로 취급받을 수밖에 없는 그들의 삶의 현실이 참 서글프다. 한국을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일을 위해 열심히 한국말을 배우고, 한국 문화를 익히지만 그 어느 누구도 한국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한국에 대하여 조금 잘 알고 있는 이방인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 한국 사회의 특징이 있지 않을까? 창조성과 자유를 끊임없이 억압하여 획일하하느 획일주의. 그리고 이방인을 포용하지 못하는 편협한 폐쇄주의. 21세기 세계화 시대를 세계화를 외치며 살아가는 한국인의 모습이다. 진정한 세계화와 개방을 위해서는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을 해본다.  

  마지막으로 한국에서 한국을 이해하기 위해 살아가는 많은 이드, 그리고 한국에 시집온 많은 여인들, 한국에서 뿌리내리고 살고, 한국을 이해하기 위해 오늘도 노력하는 많은 이방인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들을 이방인으로 부르는 것을 보면 나도 아직 세계화 하기엔 멀은 것 같아 서글픔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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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의 '죽음준비학교' - 삶의 소풍을 즐기고 있는 이들을 위한
유경 지음 / 궁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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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988234!  구십구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들앓고 사흘째 죽는다.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죽음의 모습이 아닐가? 연로하신 분들 앞에서 죽음을 가르치고 준비하자는 것은 어뜻 보면 그분들을 모욕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결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연로하신 분들만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생과 사의 경계선을 살아가는 존재이다. 인류가 삶에 관한 질문을 던진 것만큼이나 죽음에 관한 질문 또한 오래 되었다. 사람에게 있어서 죽는다는 것은 산다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래로 현자들이 죽음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 많은 질문을 던져 왔던 것이다. 그러나 죽음에 관한 문제는 삶에 관한 문제만큼 건강하지 않다. 죽음이라는 것은 차마 입에 올리기도 힘든 주제이며, 성에 관한 것만큼이나 음성적으로 이야기되어져 왔다. 이 책은 이러한 죽음에 관한 문제를 솔직 담백하게 까발리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에게 죽음은 무엇인가? 죽는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뇌사? 아니면 신체 기능의 정지? 그것도 아니면 사람들의 기억에서 완전히 잊혀지는 기억의 소멸? 글쎄다. 무엇이라 딱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사람은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라는 것이다. 저 불로장생의 꿈을 꾸었던 진시황도 결국은 죽었으며, 막강한 권려을 휘두르고 사후의 세계마저 자신의 권력하게 두려던 이집트의 파라오마저 죽음을 맞이하여 박물관에 전시된 것을 본다면 인류에게 있어서 가장 평등한 것은 삶보다는 죽음이 아닐까? 아무리 대단한 권력을 누렸다고 할지라도, 명예를 얻었다고 할지라도 죽고 나면 한줌의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평등한 것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먼저 가느냐 나중에 가느냐 정도가 아닐까? 

  사람에게 이만큼 중요한 죽음의 의미를 한번 생각해 본다. 누구나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것을 자각하고 살아가지는 못한다. 죽을 것은 알지만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죽음이 이렇게 빨리 다가 올지 몰랐다는 것이 죽음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가 아닐까? 그러다 보니 죽음이 임박해서 급해진다.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지난 삶을 반추하기 보다는 죽기 싫어 몸부림치다가 떠난다. 어찌보면 허무하기까지 한 우리들의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 보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돌아보게 만드는 것이 이 책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웰빙에 많은 관심을 갖고 많은 물질을 쏟아붓는 시대에 웰다잉을 이야기하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겸손이 아닐까? 인간이 신이 아니라는 자각, 그리고 남겨진 시간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더 열심히 살자는 것이 웰다잉의 의미가 아니겠는가?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삶을 반추해본다. 나는 과연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가? 죽음을 접하여 나는 과연 의연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생의 소풍을 마치고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이고 절대자 앞에 설 수 있겠는가? 이런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지만 솔직하게 자신이 없다. 그간 무엇을 하며 살아왔던가? 왜 그리 부질없는 삶을 살았던가 후회해도 늦기 전에 내 삶을 정비해 본다. 올해의 계획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나의 모습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그리고 앞으로 나의 삶을 계획해 본다. 

   그러면서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려 본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축복이 무엇이겠는가? 죽음이 아니겠는가? 죽음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현실에 충실하다. 언젠가는 이 세상의 것들을 훌훌 털고 떠나야 할 것을 알기에 더 그렇다. 모래시계에 모래가 다 덜어지면 미련없이 사우나 실을 나오는 사람처럼 내게 주어진 인생이라는 모래가 다 떨어지면 내가 세상을 살면서 얻었던 것들을 훌훌 던지고 절대자 앞에 서야 한다. 그리고 삶이란 그 날을 의식하면서 준비하는 것이다. 이제부터 열심히 준비하자. 최대한 열심히 살자. 그리고 마지막이 다가왔을 때 다 주고 떠나자. 인생의 설거지를 하자. 아름다운 죽음이란 아름답게살아가는 것만큼이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마지막으로 천상병 시인의 소풍을 음미해 보며 나의 삶을 다잡아 본다. 

소풍 -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닿으면 스러지는 

이슬과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 놀다가 구름 손직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노라고 말하리라. 

 

  내 삶이 아름다운 소풍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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