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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퍼 이펙트 - 무엇이 선량한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가
필립 짐바르도 지음, 이충호.임지원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Must say "No!"

   If U don't say it, U R Lucifer already! 

  나에게 누군가 이 책의 논지를 단 두 문장으로 요약하라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아니라고 말해라.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이미 루시퍼(악을 행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 상황을 지지하는 공범자)이다."

  이 책에서는 스탠포드 대학 교도소의 모의 실험을 통하여 사람이 어떻게 악을 행하고 체제에 순응하는지에 대하여 끔찍할 정도로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 실험을 통하여 얻은 생각들을 가지고 세계 경찰을 자처하는 미국에 의해서 행해지는 온갖 수용소의 불의들에 대하여 평가를 하고 있다. 이 책을 접하면서 가장 처음에 놀란 것은 미국 사람이 자국의 이익을 위반하면서가지 당당하게 "아니다."라고 말하는 용기에 놀랐다. 저자는 자신은 아니라고 말할 것이지만 이것 하나만 가지고도 나는 그를 영웅이라 칭하고 싶다. 불의한 상황에 "No"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저자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올해로 서른 하나인 나는 국민학교 세대이다. 요즘은 한글에서 국민학교라고 치면 빨간 줄이 그어질 정도로 틀린 말이 되었지만 일제 교육의 잔재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국민학교를 지냈던 시대이다. 국민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교복을 다시 착용하는 세대가 되었다. 국민학교라는 말을 쓰면 너무 고리타분한 시대라 말하겠지만 그것은 결코 아니다. 불과 1~2년의 차이를 두고 초등학교라는 시스템에서부터 벗어나 있는 국민학교의 긑자락을 장식한 세대이다. 지금 20대 중후반들과 나이차이도 그리 많이 나지 않는, 아니 오히려 같은 세대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러한 나이지만 그래도 군부독재시절의 끝자락을 지나온 사람이기에 아직도 내 가치관 속에는 국가라는 강력한 이미지가 틀어박혀 있다. 왜냐? 국민학교 시절에 그렇게 배워왔기 때문이다. 온갖 비리와 부정부패의 기사가 신문을 장식하던 시절에, 노태우 정권의 기만적인 분열 정책에(물론 그 가운데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력욕도 한 몫했지만) 사람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좌절되었던 시기를 내 눈으로 보았던 세대의 사람이다. 국민학생인지라 무엇이 옳고 그른지 내 판단을 하지 못하던 시기에 선생님들이 가르쳐 주는 대로 배웠다. 아직도 기억 나는 것은 교과서의 가장 처음에는 국기에 대한 맹세가 기록되어 있고, 대통령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교실 칠판 위에도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대통령의 사진이 걸려 있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한 것들을 보면서도 북한의 김일성은 집에도 사진을 걸어놓게 시키는 독재자라는 명제를 배우며 자랐다. 가장 인기 있었던 만화는 "똘이 장군"이었으며, 일년에 한차례씩 반공 웅변대회가 열렸다. 평화의 댐 공사를 위해 피같은 내 용돈을 모금했던 기억도 난다.

  이러한 시대를 거쳐오면서 내가 끊임없이 배워왔던 것은 국가는 신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암묵적인 동의가 넘쳐 흐르던 시대였다. 사회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들은 좌파요 빨갱이요, 살인자보다 더 무서운 범죄자였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지금에는 폐교가 될 정도로 시골 구석의 학교였다. 전교생이 백명이 안되는 학교였는데 그 학교 운동장에서도 최루탄 파편을 만져볼 정도로 시위가 빈번한 시기였다. 멋모르고 그 파편을 가지고 놀다가 눈을 만졌을 때의 그 쓰라림은 말로 할 수 없다. 그 후 "이래서 데모 하는 사람은 다 범죄자구나."라고 나만의 판단을 내리기도 했다. 데모라는 말은 내 또래의 아이들에게 있어서 데몬이라는 말만큼 무서운 단어요, 언급조차 해서는 안되는 말이었다. 시내에 나갔다가 데모하는 모습, 그들을 진압하던 전경의 폭력을 보면서 친구들에게 자랑스럽게 우리 편이 나쁜 놈들을 때려 잡았다 말하던 창피한 기억까지 생생하다. 내 어린 기억에 "청년 이한열"은, "청년 전태일"은 빨갱이요 죽어 마땅한 죄인이었다. 이렇게 살아오면서 나는 반공 글짓기에서 상도 받았고 주위 사람들에게 모범생이라 불려졌다.

  그런데 내가 20살이 되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내가 지금까지 진리라 믿었던 것이 포장된 것들이요,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이 사실은 악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고3때 96년 한총련의 연대 사건을 보면서 욕을 하던 내가 어느새 한총련을 지지하는 사람이 되었다. 처음으로 바른 생활에서 벗어나 데모에 참가하고 화염병을 들었고 쇠파이프를 들었다. 백골단을 조롱하면서 무서워 하기도 하였고 사회를 바꾸겠다는 일념으로 뛰어들었다. 모든 것은 이것으로 정당화가 되었다. 소위 말하는 선배들에 의한 의식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의식화라는 것 또한 주체만 바뀌었고 다를 뿐이지 지금까지 받아온 이데올로기화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 뒤로 맹목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거리를 두고 판단하는 모습으로 바뀌어 갔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변했다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여전하다 그런다. 변했다 함은 폭력적인 투쟁을 하지 않고 한총련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의미요 여전하다 하는 말은 사회 개혁을 아직도 부르짖는다는 말이다.

  이런 나에게 참으로 흥미롭게 다가온 것이 이 책이다. 그 실험의 내용은 알고 있다. 그러나 무엇인가 다른 것이 있을까 하는 마음에 거금을 들여 700페이지짜리 책을 읽었다. 그리고 위의 두 문장을 결론으로 얻었다. 그리고 고민하던 부분에 대하여 약간이나마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이한열"은 왜 자신의 젊음을 바친 것일까? "전태일"은 왜 분신했을까? 왜 스없이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을 바쳐가면서 그리 투쟁했던 것일까?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가족의 이익과 명예를 위해서도 아니다. 그들은 단순히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불의가 보이는데, 악이 보이는데 참고 동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동조까지는 아니더라고 침묵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행동한 것이다. 이들의 희생을 무릅쓰며 행동한 이유는 정말 단순하다. "No"라고 말하는 것이 상식이기에 말한 것이다. 나는 어떨까? 내가 그 상황이라면 나는 어땠을까? 글쎄 뭐라 말하기 어렵다. 내가 그 시절에 안살아봐서 잘 모르겠다. 비겁한 변명일지도 모르지만 솔직한 내 생각이다.

  얼마 안있으면 총선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정치에 관심이 없다 말한다. 철저하게 느낀다. 연예인 이야기엔 거품을 물며 말하는 젊은이들이 정치 이야기만 나오면 얼굴을 찌푸린다. 왜 그런 쓸데 없는 이야기를 하냐 말한다. 그렇기에 "요즘 것들은"이라는 말로 질타 당한다. 그러나 시스템이 그렇게 만든다. 정치 이야기하고 투쟁하면서 혹은 놀면서도 좋은 직장에 가던 시기가 아니다. 직장을 잡기 위해서는, 내일을 위해서는 한 눈 팔지 말고 오직 공부하고 경쟁해야 한다. 이것이 젊은이들의 상황이다. 그러나 분명 이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고, 투표를 하지 않는 것은 이들의 잘못이다. 그렇게 질타하는 시스템에 동조하며 침묵하는 것이다. 국민의 30%지지만 받고 대통령이 되는 현 시점은 이것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예일 뿐이다. 그러나 한번은 더 믿어보고 싶다. 젊은이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하기를 믿어본다.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방관자가 아니라, 시스템을 유지하는 공범자가 아니라 잘못된 것을 바꾸기 위해 일어서는 행동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한번 더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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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 - 세상을 뒤바꾼 위대한 심리실험 10장면
로렌 슬레이터 지음, 조증열 옮김 / 에코의서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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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상자야. 네가 원하는 양은 그 안에 있어"
 그러나 나의 어린 심판관의 얼굴이 환히 밝아지는 걸 보고 나는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바로 내가 원하던 거야! 이 양에게 풀을 많이 주어야 해?"
 "왜 그런걸 묻지?"
 "내가 사는 곳은 아주 작거든......"
 "거기 있는 걸로 아마 충분할거다. 네게 준 건 아주 작은 양이니까"
 그는 고개를 숙여 그림을 들여다 보았다.
 "그다지 작지도 않은걸. 어머! 잠들었네......"
 이렇게 해서 나는 어린 왕자를 알게 되었다.

  어린 왕자라는 이야기를 참 좋아한다. 그 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세 가지 이다.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여우와 장미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네모난 상자에 얽힌 이야기이다. 아무리 멋있게 양을 그리려고 할지라도 계속 맘에 들어하지 않자 결국에는 궁여지책 끝에 상자를 그려준 저자, 그리고 그 상자 그림을 받아들고 마음에 들어하는 어린 왕자. "스키너의 심리학 상자 열기"라는 책을 읽고 난 다음에 불현듯 이 이야기가 떠올랐다. 마치 인간의 심리란 어린 왕자의 상자 그림과 마찬가지라는 듯이.

  내게 있어서 심리학이라는 것은 결코 반가운 것은 아니다. 조용한 숲 속에서 나만의 공간을 갖고 생활하는 나에게 불현듯 찾아온 반갑지 않은 불청객! 이것이 심리학에 대한 나의 평가이다. 심리학이란 결코 반갑지 않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불청객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며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별 통보를 받은 후에 복잡하고 다스리기 어려웠던 나의 마음을 다독이기 위해 하는 누나가 미술 치료 기법으로 나를 달래줬으며, 어머니의 정신분열증 재발로 인한 약물 치료와 병원 입원을 옆에서 지켜 보았으며, 군목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나에게 심리검사 및 기초 상담에 관한 이론들을 배울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이것들은 놀랍게도 나로 하여금 집단 상담 2급 자격증을 따게 만들었다.)

  이 모든 과정들은 나에게 있어서 심리학이 반가운 것이 되도록 만들 수 있는 요건임에도 불구하고 심리학을 불청객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유는 단 한가지이다. 모른다는 것이다. 클리어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단을 내려야 하고 다른 이들에게 클리어한 무엇인가를 보여줘야 한다. 아무리 객관적인 검사를 하고 결과를 만들어 내고 척도를 적용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그 사람의 심리를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리학을 전공한 목사님들은 전공하면 전공할 수록 사람들의 심리를 마치 상자 열어보듯이 단언하고 평가를 하더란 말이다. 이것이 나에게 불편했고, 이것이 나에게 심리학은 결코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 되게 만들었다.

  이 책에 나오는 심리학적인 개념들 10가지는 나도 익히 알고 있던 것들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내면에 감추어진 이야기라든지 비하인드 스토리에 대하여 좀 더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심리학은 불청객이다. 왜냐 여전히 사람의 심리에 대해서 몇 가지의 판단 기준을 가지고 평가한다는 것 때문이다. 이 책에 나오는 모든 개념들은 들어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학자들은 자신들의 기준이 최선인양, 진리인양 말한다. 그리고 이것을 가지고 사람들은 평가하며 그 사람에 대하여 상자 열듯이 속속들이 알고 있다 평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보상으로 인간의 심리를 모두 설명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인지부조화 이론으로 인간의 그 세세한 면을 다 설명할 수 있을까? 아니다. 결코 그럴 수 없다. 역설적이게도 심리학에 관한 이 책을 읽고 깨달은 것은 여전히 인간의 심리는 복잡하고 상자를 열면 열수록 더 모른다는 것이다. 상자를 보고 양의 크기와 먹이를 상상하는 어린 왕자처럼 한 꺼풀을 벗기고 나면 또 다른 거풀이 나오는 양파와도 같은 인간 심리의 특성 때문이다. 결국에는 내가 바르게 가고 있나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한없이 나를 작아지게 만드는 것이 심리라는 것이다. 사람의 심리는 장난감처럼 막 주무를수 있는 것이 아님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무르고 싶어하던 심리학자들의 열망 사이의 간극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심리학의 내용에 대하여, 중요 개념에 대하여 쉽게 그리고 재미있게 소개할 수 있는 책이다. 대학교 1학년 심리학개론 시간에 레포트로 내 줄만한 책이요, 난이도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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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
마이클 셔머 지음, 류운 옮김 / 바다출판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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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

  이 책은 왜로 시작하여 왜로 끝나는 책이다.  인가이 살아가면서 가지고 있는 호기심이라는 것은 참 대단하다. 그 왕성한 호기심은 그 어던 종에서도 발견하기 힘들 정도로 특이한 것이다. 인간이 오늘날이 발전을 이룰 수 있고, 문화를 이룰 수 있었던 이유는 호기심일 것이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이야기하는 판도라의 상자는 바로 이 호기심에 관한 이야기이다. 참을 수 없는 호기심에 이끌여서 사람들은 금기를 넘어 왔다. 지금가지 인류의 역사란 호기심의 역사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호기심에서부터 시작하여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호기심은 그냥 호기심이 아니다. 호기심은 단순한 호기심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그 호기심의 저변에는 희망이 깔려 있는 것이다. 마지막가지 뛰쳐나오지 못했던 상자안의 희망이라는 녀석은 아마도 이런 호기심의 가장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 희망임을 말하는 것이리라. 지금갖지 못한 것들에 대하여, 되지 못한 것들에 대하여, 다가올 내일에 대하여 희망을 품기에 우리는 호기심을 가지고 "만약"이라는 단서를 달 수 있는 것이겠지?

  이 책은 여기에 충실하다. 희망을 바탕으로 한 호기심에 충실하다. 그러나 희망을 부질없는 것과 바람직한 것으로 양분한다. 그리고 그 양분하는 기준은 과학이나, 과학적인 검증방법인 실험이다. 실험이나 과학적인 검증방법을 통하여 증명 가능한 것은 바람직한 희망이요, 인류ㅏ 잡아야할 희망이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포기해야할 이상한 믿음들이다.

  그리고 작가는 이 희망을 붙잡는 가장 좋은 방법을 끊임업이 의심하는 방법, 회의주의라고 말했다. 그러나 내가 느기기에 "의심하라. 무엇하나 믿지마라."는 작가의 사유방식은 안티를 위한 안티로 느껴지는 것은 왠 일일까? 혹자들은 기독교인인 나이기에 이미 이러한 사고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고 들어가기 때문이라 말할 것이다. 물론 어느정도 일리 있는 말이다. 조지 오웰식의 사고(서로 모순되는 개념을 받아들이도록 교육받아 그것을 인정하는 사고방식)에 익숙하기 때문이라 말한다. 그런데 그것이 진실일가? 단순히 그것만이 아닐 것이다. 아무것도 믿을 것이 없는 불확실성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생각하고 끊임없이 의심하고 돌다리를 두들겨 보고 건너는 식의 삶의 자세를 유지하라는 그의 말이 너무나 비관적으로 느껴지고, 작가가 그렇게도 피하려고 하는 컬트가 되어버린 느낌이기 때문이다.

  비판에 대하여 열려있다, 비판하려면 비판하라는 작가의 자신감이 하나의 교리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책을 읽고난 이후의 나의 느김일가? 많은 이들이 이 책을 보고 무엇을 말할까? 그의 생각을 받아들여 계속 의심한다면? 아니면 반대로 그가 그렇게도 싫어하고 구원하려는 무지몽매에서 탈출하지 못한다면? 자기들의 방법에 대한 회의마저 용납하면서 계속 회의를 한다면? 왠지의 그의 말이 회의를 위한 회의라고 받아들여진다. 안티를 위한 안티로 받아들여진다. 왠지 그의 이야기가 오메가 포인트 이론을 비판하면서 그 이론의 오류로 지적한 사유 방식과 비슷하게 느겨진다. "저것은 문제가 있다. 저것은 사실이 아닐 것이다.(왜냐? 과학적으로 검증이 안되니까?) 그래서 나는 저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저것이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미신이라 말할 것이다. 모든 자료를 동우너하여 반박할 것이다. 그러다 보니 검증되지 않고 무식한 것들이 너무 많다. 어찌 사람들이 이런 것을 믿지? 이것은 사실이 아니야."라는 식의 결론에서부터 역으로 올라오는 검증방법이 사용되었다 느껴지는데...분명 작가는 아니라고 하겠지만...

  과학이 종교가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과학은 신이고, 인류를 더 좋은 단계로, 진화이 단계로 이글 것이다. 그리고 과학자들은 선지자들이 될 것이다. 그 선지자들 가운데에는 거짓 예언자들도 있다. 이들을 제거하면서 우리는 무지몽매한 대중을 이성의 자리로 끌어 올려야 한다. 그러나 누가 이성이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완전한 요소라 말할 것인가? 기억이 재구성 되어 불완전하듯이, 이성이라는 것 도한 불완전한 것임에도 완전한 것이라 받아들여지고 있는 잘못된 믿음이라면? 그 어던 전제 하나만 어그러져도 "회의"라는 결론은 성립되지 않는다. 이성이란 종종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연구하는 오류를 범하는 모습을 자자 부여 왔기에.

  이성, 물질, 논리, 과학, 눈에 보이는 것들을 믿는 모습, 신앙은 필요없다는 모습들이 우리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오만함뿐이다. 전형적인 과학자들의 오만함이다. 인종 차별이 아니라 직업차별이요, 과학자를 정점으로 하는 진화론의 양태이다.

  저자는 말한다. Cogita tute(스스로 생각하라.) 의심하라. 무엇하나 믿지 마라.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스스로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아직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는 무지몽매한 사람, 그래서 기독교 신앙이라는 잘못된 삶에 빠져있는 사람인가? 한 때 거듭났던 기독교인이었다 주장하는 저자에게 묻는다. 무엇을 근거로 거듭났었다 말하는가? 과학적으로 증명 가능한가? 당신의 이성과 영혼과 육체가 거듭났는가?(아니다 영혼이란 과학적 검증이 불가능하니 논의 대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성은? 뉴런 신경계의 화학작용에 불과할 뿐인 이성은 그리 신뢰할 수 있을까?) 작가는 첨단 과학의 시대를 살고 있는 고대 그리스인인가보다.

  이 책을 읽고난 결론은 이것이다. "사람들은 왜 이상한 책을 읽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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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리 2020-03-02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기나 하셨나요?

saint236 2020-03-02 14:17   좋아요 0 | URL
읽었으니까 썼지요.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 나와 같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지식 e - 시즌 2 가슴으로 읽는 우리 시대의 智識 지식e 2
EBS 지식채널ⓔ 엮음 / 북하우스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책이 더 알차다.

  Sentigo ergo sum! 느낀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인간은 감정의 존재이다. 감정이 있기에, 느끼기에 존재한다. 희노애락이라는 4장의 구분은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준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기뻐하는가? 우리는 무엇때문에 슬퍼하는가? 우리는 무엇때문에 분노하며 무엇때문에 즐거워 하는가? 무엇이 우리로하며금 희노애락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하는가?

  다시한번 인생의 의미에 대하여 곰곰히 생각해 보게 만든 책이다. 단 2일만에 읽어내렸다. 읽으면서 함께 즐거워하고, 함게 기뻐하고, 함게 울고, 함께 분노했다. 우리 시대의 일그러진 역사와 현실이 나를 분노케 했고, 사술에 속아나는 모습이 나를 슬프게 하였다. 사소한 것으로 기뻐하며 사람 가운데에서 희망을 찾았다. 사람들의 절규를 들었고, 사람들의 의지와 희맘을 보았다. 나는 이것들에 대하여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이 사람들의 모습에 대하여 어덯게 응답할 수 있을까? 이 책을 읽는 내내 가지고 있던 의문이다. 나는 무엇으로 살아갈 것인가? 이 책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리라. 당신은 무엇을 느낍니까?

 아직도 이들의 분노와 함성은 끝나지 않았다. 이들은 우리에게 말한다. 자신들의 삶은 이러니 느끼라고. 그리고 행동하라고.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모습이라고. 많은 이들의 음성에 오늘도동참하고 있다. 감정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아니 투쟁하고 있다. 감정이 없는 존재가 아니라 감정을 가지고 세상의 아픔을 느끼면서 살아간다. 그렇기에 아직 세상에는 희망이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내 마음을 움직였고 나를 울게 만들었던 내용을 인용하고자 한다.

#26 하루
그날 아침 
삼촌이 옛날에 사줬다는 구두를 깨끗이 닦고 
이발도 했더라구요 
바바리도 내서 다려 입고 
방에 들어가 보니까 
정돈을 잘해놨어 
너희는 무허가에서 곤란하게 살아도 
양심을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한다 
모든 사람들을 나보다 훌륭하다고 여기고 살아라 
남들이 나만 못하다고 생각하면 안되는 거다 
그래요, 동생들한테 
다같은 인간인데 어찌하여 
빈한 자는 부한 자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까 
왜 가장 청순하고 때묻지 않은 
어린 소녀들이 
때묻고 부유한 자의 
거름이 되어야 합니까 
사회의 현실입니까? 
빈부의 법칙입니까? 

1970년 11월 13일 
208번지 평화시장에서 
전태일이 
근로기준법 책을 들고 
근로기준법을 지키라고 외치면서 
몸에 불을 질렀다고 그래요 

존경하는 대통령 각하 
저의 직장은 
시내 동대문구 평화시장으로 
종업원은 2만여 명입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근로기준법의 혜택을 
조금도 못 받으며 
더구나 종업원의 90% 이상이 
평균 연령 18세의 여성이며 40%를 차지하는 시다공들은
평균연령 15세의 어린이입니다 
노동청에 여러 번 가니까 
개선한다고 곧 개선한다고 
그렇게 말해놓고 
대답이 없어서 또 가니까 
이제 감사 끝났으니까 마음대로 해봐라 
그러더래요 
도저히 자기 힘으로는 어쩔 수 없으니까 
차라리 자기 한 몸 죽으면 
캄캄한 암흑 속에서 밤새도록 일하느라 
눈병이 나고 
폐병이 들고 
앞으로도 사람노릇 못 하게 생긴 사람들 
살릴 수 있지 않겠느냐고 
자기 안 죽고는 해결할 수 없다 
그래서 최선을 다 하려고 하는 거니까 
자기가 죽더라도 섭섭해하거나 
억울하다는 생각은 말고 
언젠가 환하고 좋은 세상이 올 거라 믿고 
싸워주겠느냐고 물어봐요 

내가 뭐라고 대답했겠어요 

금세 대답을 못했지요 

    -故 전태일 어머니 이소선 여사와의 인터뷰 내용 중 발췌 인용 
 
“친구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이소선 여사의 마음이, 전태일씨의 마음이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것 같아서 눈물이 났다. 그가 바란 것은 큰 것이 아니다. 기준법 세워놨으니 기준법 지키라는 것이다. 일요일은 쉬고 싶다는 것이다. 살고 싶다는 것이다. 이는 오늘 많은 사람들의 절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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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e - 시즌 1 가슴으로 읽는 우리 시대의 智識 지식e 1
EBS 지식채널ⓔ 엮음 / 북하우스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가슴으로 읽는 우리 시대의 지식!

  이 타이틀이 맘에 들어서 책을 선택했다. 얼마전 2번째 시즌이 나왔기에 예전에 읽었던 책도 다시한번 읽어 보았다.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들어 있었고 내가 방송에서 보던 것들도 들어 있었다. 확실히 원래부터 방송용으로 제작되었던 것이기 때문에 책으로 읽으면서 그 감동이 줄어들었다. 한편으로는 실망을 하면서 이 책을 굳이 샀어야 했나 실망했던 기억도 난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지식에 관한 제작자들의 새로운 정의는 내 마음을 설레게 만들어싿.

  지금까지 지식이라 함은 외우는 것, 머릿 속에 집어 넣는 의미가 강했다. 인생의 의미나 혜안에 관한 것은 지혜라는 말로 구분지어 사용한 것이 우리들의 모습일진대 이 책에서는 지혜라는 말이 아니라 당당하게 지식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리고 그 지식은 머릿속에 우겨넣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읽는 것이라 정의한다. 가슴으로 읽는 지식!! 참으로 설레는 말일 것이다. 책을 한장식 넘겨 가면서 왜 지식이라는 말을 사용했는지 알 수 있다. 이 책은 우리에게 해석해 주지 않는다. 그냥 있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 그 뒤에 그것과 관련한 이야기들을 붙여 넣는 식이다. 그냥 지식을 전달해 주는 듯한 구성르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의 여백에 담겨 있는 의미들은 결코 지식으로 말할 수 없다. 가슴으로 읽고 해석하고 우리의 마음을 반추하게 만든다. 구분하기, 밀어내기, 기억하기, 돌아보기의 4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많은 지식들을 가르쳐 준다. 그러나 그것은 경제적인 가치로 구분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닐 것이다. 경제적인 가치는 거의 없지만 우리의 인생에 무한한 가치를 던져주는 질문들이요 단편들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눈에 들어오지만 그 중에서 나는 하나의 이야기를 선택하여 이 책의 의미를 이해했다. 다른 모든 것을 버리더라도 이 부분만큼은 기억하자는 나의 주장은 아마 이 책을 만들고 제작한 사람들의 의도요 기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한 가지만을 가지고 이 책을 잘 샀다고 단언하고 싶다.

  "70만 600원"이라는 제목의 글.

  이 글을 읽어가면서 그러려니 했지만 위의 사진을 보는 순간 가슴이 꽉막혔다. 울고 있는 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얼굴. 이 얼굴은 그냥 비정규직 노동자의 얼굴이 아니라 우리의 얼굴이요, 우리 아버지의 얼굴이다. 남자는 세번 운다고 한다. "태어날 때, 나라가 망했을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그러나 이 사람은 이런 이유가 아닌 다른 이유로 울고 있는 것이다. 울수 없어서 울음을 참다가 터지는 울음을 참을 수 없어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흐느끼는 모습은 그 어떤 모습보다 간절하고 슬픔이 묻어난다.

  누구는 잃어비린 10년이라 한다. 누구는 좌파 10년이라 한다. 이제 다시 시작이라 잘살아보자 말한다. 그러나 과연 잘 살 수 있을까? 기업친화 정책, 대처리즘, 신자유주의로, 시장의 논리로 모든 것을 바로 잡을 수 있으며 프레임 이론만으로 모든 것이 가능할까? 분명 아니다. "Absolutely No"이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이들은 이 사람의 모습이 내가 아닐 것이라 말하면서 대처리즘을 바라본다. 박정희 시절을 그리워하며 전두환을 민족의 영웅으로 그린다. 박근혜는 주저없이 자신을 한국의 대처로 비유한다. 대처리즘을 따온 근혜이즘을 주창한다. 그리고 다수의 사람들은 이것을 반긴다.

  우리는 과연 이 사람의 모습에서 무엇을 발견하고 있는가? 우리는 이 사람들의 모습을 가슴으로 읽고 있는가? 대처리즘의 망령이 한국을 뒤덮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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