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전 한국을 걷다 - 을사조약 전야 대한제국 여행기
아손 그렙스트 지음, 김상열 옮김 / 책과함께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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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드라마의 영향 때문일까? 드라마를 그닥 즐겨보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주말이면 '서울1945'란 드라마 만큼은 챙겨보고 있다. 그 드라마를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해방 전후를 배경으로 당시 걸출한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자주 거론되고 있는 이른바 팩션 드라마다.   

사실 그 드라마를 보고 있노라면 이 이이야기가 얼마나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는가 궁금해지기도 하는데, 특별히 그 시대 건축이나 사람들의 의상. 또는 물건 하나 하나가 그 시대와 얼마나 부합되게 그렸을까가 나에겐 스토리만큼이나 궁금증을 자아낸다. 그래도 드라마니 철저한 고증 보다는 디자인에도 신경을 썼을 것이다. 이를테면 세트를 그 시대의 것을 고증하되 보기에 부담스럽지 않고 촌티나지 않게 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숨어있겠지 싶다. 그러니 세트는 퓨전이라고 해야하지 않을까?

내가 왜 이 책에 대한 리뷰를 바로 쓰지 않고 저런 허접한 말을 구구하게 늘어놓느냐면, 결국 나는 그런 것에 관심을 두다보니 그 시대의 문화가 궁금해졌다란 말을 하고 싶어서이기도 하고,  그런 관심이 없었더라면 오래전에 이 책을 받아 놓고도 언제 완독을 하게될럴지 모르는 일이 앞당겨졌더란 말을 하기 위함이다. 그러고 보면 TV의 위력은 대단다. 

아, 그렇다고 이 책의 배경이 앞서말한 해방전후의 문화사를 다룬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구한말, 그것도 을사조약 즈음을 다루고 있고 그 시대의 사람들, 풍속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제 막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문화사쪽에 관심을 폴폴 피우기 시작한 나의 관심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막상 이 책을 읽어 나가면서 솔직히 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좀 더 일찍 읽어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다. 책을 많이 읽으면 일단 무지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상대적으로 내가 모르는 분야엔 좀체로 관심을 갖지 못하니 역시 무지을 피할 길이 없다.

사실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의 우리나라를 연구할 때 고증이 필요할텐데 거기에 못지않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사람들은 역시 선교사일 것이다. 파란 눈의 외국인 선교사들 눈에 비쳤을 당시의 한국은 어땠을까? 하지만 혹자는 그들이 보는 우리나라에 대한 인상이 객관적이지마는 않을거라고 비판의 소리를 가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다분히 선교의 관점에서 우리나라를 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럴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 시대의 선교사들이 객관적인 시야가 결여된 것은 아니리라.

나도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선교사가 썼을 막연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웬걸, 다시 자세히 보니 '기자'라고 하지 않는가. 기자라고 하면 같은 서양 사람이라고 해도 선교사의 관점 보단 좀 더 객관적이리라. 그렇다면 스웨덴 기자 아손은 누구인가? 1904년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영국인 무역상으로 위장하고 우리나라에 밀입국 했다고 한다. 사실 그는 처음부터 우리나라에 들어 올 생각이 없었나 보다. 그것도 모국의 어느 한 장교의 권유를 받고 이곳에 올 생각을 했다니 말이다.  당연 그 장교의 말은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악취와 페스트가 창궐하고, 미신과 남존여비와 보수적인 미풍양속이 팽만해 있었음에도 그는 통역을 맡은 윤산갈을 앞세워 우리나라 곳곳을 능청스럽게 잘도 헤집고 다녔다. 사실 내가 앞서 말한 기자가 선교사 보다 객관적일 수 있다는 것은 책 어느 곳인가를 펼치면(몇 페이지인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우리나라 기생을 취재한 부분이 나온다. 당시 윤산갈이란 영어를 만만하게 잘하는(아손이 윤산갈의 영어실력을 높이 사지는 않았던 것 같다) 통역을 앞세워 기생을 취재하려고 했으나 윤산갈은 기독교인이었으므로 그 보수성 때문에 기생을 취재하지 못할뻔한 사건이 나온다. 만약 아손이 선교사였다면 이 부분은 당연 언급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호기심이 많은 기자다. 통역을 맡은 윤산갈에 의해 기생을 취재하려는 그의 의지는 쉽게 꺽이지 않았다. 그의 취재의 공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바라 볼 때 자국인이 역사를 평가하는 것도 좋긴 하겠지만 가끔은 제3의 눈이 필요하다. 그것은 자국민이 자국의 역사를 평가할 때 편향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 3 세계인이 우리나라를 보는 것 역시 다 옳은 것마는 아니다. 그 사람도 그가 의식하든 안하든 자기 나라의 사고 방식과 틀이 있기 때문에 당연 그 잣대로 남의 나라를 판단할 수 밖에 없다.  하물며 이 책은 여행기가 아닌가.  

이를테면 저자는 이 책에서 우리나라의 한의학을 폄훼하는 부분이 나오기도 하는데 그건 저자가 우리나라의 의약 부분을 몰라서인 것 같다. 그리고 몇몇 아손 기자가 잘못 오인한 부분도 나오는데 그런 부분은 이 책을 옮긴 역자가 꼼꼼하게 주석을 달아 놓았으니 읽는데 특별히 문제될 것은 없다.

옮긴이는 아손이 곤경에 처할 때마다 아주 능청스럽고 임시변통에 능하며 체험욕이 강하다고 했다. 그래서 일까? 책은 참 흥미롭게 잘 썼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이 사람에게 새삼 고마움을 느낀다. 이 사람이 아니었으면 100년 후 역사에 문외한인 내가 이만큼 흥미롭게 읽어냈을까? 냄새나고 질퍽거렸을 100년 전 이 나라에 흥미와 애정을 갖기란 쉽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꼼꼼히 써 주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으랴. 

책 중간중간에 저자가 한컷 한컷 귀하게 찍은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이 책은 참 소장가치가 충분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의 원고를 읽고 당장 번역에 착수했다던 번역자에게도 고마운 마음이 든다.  

이 책을 덮는 순간 역사를 알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든다. 나도 나이를 먹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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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4-26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웨덴이 러시아와 영토싸움을 했으니 스웨덴으로서는 중요한 전쟁이었을 겁니다. 이 책은 안읽었지만 다른 책에서 이 사람의 쓴걸 언급한걸 봤지요..저도 요즘 근대관련책들 열심히 읽고 있어요.

stella.K 2006-04-26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요. 기회되면 한번 꼭 읽어보세요.^^
 
인생의 동반자들 - 곤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새 삶을 선사하는 동반견들 이야기
제인 비더 지음, 박웅희 옮김, 니나 본다렌코 그림 / 바움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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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우연히 TV에서 개가 장애자의 생활을 돕는 것을 본적이 있었다. 맹인 안내견이나 청각장애를 돕는 개들이 있다는 것은 알았는데, 개가 이토록 장애자들을 세심하게 돕고 있다는 것을 알고 찬탄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수 개월 후 이 동반견들에 대한 수기 12편이 한 권의 책으로 묶여져 얼마 전 내 손에 쥐어졌다. 그 개들은 장애인을 돕도록 특수한 훈련을 받았고 그들은 하나 같이 훌륭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주인이 미쳐 다 말하지 않아도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고 척척해내는 것을 보면 신기할 정도였다. 그러고 보면 녀석들에겐 사람 보다 더한 예리한 촉수가 있는가 보다.

그 촉수가 뭐일까를 생각해 본다. 녀석들에겐 주인에게 사랑 받기 위해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는 뭔가의 신경 하나가 더 발달되 있는 듯 하다. 그렇게도 사랑받고 싶은 것일까? 그래서 '개'하면 떠오르는 것이 '충성심'이 아니던가?

맹인 안내견이나 동반견들을 보면 그들의 수고로움은 인간이 하는 간호의 그것을 훨씬 뛰어넘어 보이기까지 한다. '긴 병에 효자없다'는 말이 있듯이 인간도 병수발을 오래하면 지친다. 하지만 그렇게 훈련 받은 개들은 오직 충성심 하나로 지치는 법이 없다. 또한 그 개가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 주는 생의 자신감이란 가히 상상을 불허한다. 한 주먹꺼리도 안 되는 녀석이 그렇게 엄청난 의미를 가지고 있다니!

그러고 보면 하나님이 인간만 만들지 않으시고 개도 만드셨다는 것에 감사드리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이 책을 읽다보면 사람에게 인생이라는 것이 있듯이 개에게도 견생이라는 것이 있을진대, 너무 인간 편에서 개를 개조시키려고만 하는 것은 아닐까? 묘한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물론 이것이 동반견이 (아직은)필요없는 제 3자적 시각이라는 것을 안다. 그 제 3자가 단 하루라도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은 상태에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되는 입장이라면 그 입장에서도 과연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개를 더 많이 사랑해 줘야 한다. 장애인이건 비장애인이건 간에 말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는 특권을 허락해 주셨다. 그것은 이기적인 동기에서 다스리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그것을 교묘하게 이용을 한다. 그래서 언제든 잡아 먹어도 좋고, 유기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명백히 잘못된 행위이다.

어찌보면 '공생'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다스리는 특권'의 의미와 부합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런 관점에서라고 한다면 개를 훈련시켜 인간을 돕도록 하는 것은 맞는 것이 될 것이다. 개는 인간에게 봉사하므로 사랑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이 책에서 공감이 가는 말은, 사람들이 개를 선택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개가 주인을 선택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건 정말 맞는 말인 것 같다. 자신이 섬길 사람이 저 사람이다 싶으면 그 개는 끝까지 따르고 도와준다. 하지만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니 인간이 개의 주인이란 오만한 생각은 버리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우리집만 해도 그렇다. 우리집은 개를 키운 역사가 꽤 되는데, 나는 한때 나와 잘못된 인연으로 그 개가 다른 집으로 갈 때까지 나와 잘 지내지 못했던 개가 있었던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그 개를 좀 심하게 구박했었다. 내깐엔 주인의 권위를 내세운다는 것이었는데, 녀석에게는 미운털이 박혀 내내 좋은 관계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나더러 어쩌라고...

내가 이 책을 읽으며 느꼈던 것은, 우리나라에도 이런 동반견을 훈련하는 센터가 만들어져야겠다는 생각이 었다. 또 그러기 전에 시설이나 물건을 디자인할 때도 장애인을 고려하고, 무엇보다도 앞으로 동반견이나 맹인안내견이 자유롭게 식당이나 공공기관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요즘엔 그 비율이 예전보다 좀 줄었다고는 하는데, 아직도 우리나라에선 맹인 안내견을 차에 태우지 않으려는 택시기사들도 있어 애를 먹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래도 화낼 줄 모르는 개가 있다는 것이 한켠 마음을 찡하게 만든다. 이 책을 보면, 영국은 동반견이 주인 따라 대학 강의실에도 들어 올 수 있다고 하는데 장애자들을 실질적으로 도울 수 없다면 그런 배려 정도는 비장애인들도 충분히 할 수 있지 않을까?

덧붙이자면, 이 책은 동반견들에 대해 소개를 하는 것으로선 좋은 책이긴 하지만 반복되는 느낌이 있어 다소 지루한 면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감안한다면, 동반견에 대한 가능성을 모색하고 우리나라 장애자 복지정책이 어떠해야 할까를 생각하게 하는데 좋은 책이란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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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르바나 2006-04-18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좋은 책 리뷰에 댓글이 하나도 없다니 죄송스런 마음입니다.
글 잘쓰시는 분들이 쓰시면 으레 그려러니 하고 만성이 되어 보게 되잖아요.
오랜만에 스텔라님 리뷰에 댓글을 적으면서 드는 생각이었습니다.^^

stella.K 2006-04-18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별로 잘 쓴 리뷰는 아니어요. 읽는데 좀 지루했거든요. 그래도 리뷰에 댓글이 없으면 좀 그런데 니르바나님이 이렇게 멋지게 달아주시니 감사할다름이죠.^^

푸하 2006-04-21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읽으니 제가 어릴 때 키우던 '메리'가 생각나네요. 집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동네를 돌아다니는 개였거든요. "메리야!...."이렇게 부르고 놀았는데.... 참 순한 개였어요. 그리고 얼마전 '에너지대안센터'안에서 큼지막한 개를 본적이 있는데 녀석이 모르는 사람을 얼마나 잘 따르는지. 놀랄정도였어요. 제가 아는 상식으로 개는 본능적으로 자기의 영역이 있고, 그것을 침범하는 자에 대해 적대한다고 알고 있었거든요. 제가 궁금해서 어느 분에게 물어보니 그 개는 어렸을 때 부터 드나드는 사람들의 따뜻한 관심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되었어요. 그래서 영역에 대한 본능보다도 사람들의 관심에 더 많은 반응을 하는 것 같았구요. 사람의 내부엔 악의 특성과 천사의 특성이 공존하는 것 같은데, 개 또한 그럴 것 같다는 사례로서 저에게 다가왔어요. 유전자적 특성이 성향을 결정하는 것이 아닌 내부의 여러 가지 가능성이 외부의 여러 조건과 상호작용해서 성향(행위)이(가) 결정되는 것이 '생명체'의 가능성인 것 같다는 생각이....(헉... 점점 수습할 수 없는 상황에 빠져요...ㅠㅜ 제가 문득 진화론에 대해서 공부하고 싶어져서요...)

stella.K 2006-04-21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에 대한 깊은 통찰을 하고 계시는군요.^^
 
루시퍼 - 악의 역사 3, 중세의 악마
제프리 버튼 러셀 지음, 김영범 옮김 / 르네상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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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제프리 버튼 러셀의 악의 역사 4부작 중 중세에 해당하는 것으로써 3권에 이른다.  저자는 고대로부터 시작해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악마가 그 시대 시대마다 어떻게 영향을 미쳐왔는가를 신학, 역사, 문학사등 다양한 방면에서 고찰한다.

나는 기독교인이고 기독교에서는 사탄을 실재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성경은 사탄의 존재와 그가 하는 일에 있어서 구체적으로 언급한 대목들이 많이 나온다. 이를테면 구약의 욥기서를 보면 사탄이 하나님과 대화하는 장면이 나오고, 신약에도 보면 예수님이 광야 시험을 당하셨을 때도 역시 사탄과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그가 하는 일은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이며 공중권세 잡은 자로 언급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것들이 인간의 역사와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걸까? 무신론자들이 인정을 하던지 안하던지간에 인간의 역사는 신(神)과의 역사고 동시에 악마하고의 역사다. 신 또는 신앙은 인간을 절대의 세계로 인도하려고 하지만 사탄은 그것을 끊임없이 전복시키려고 한다. 그 사이에 낀 인간은 늘 갈등하고 번민하며 고통하고 괴로워 한다.

사실 동양은 어떨지 몰라도 서양은 악마를 지칭하는 이름도 다양하다. 데블이라고도 했으며, 사탄이라고도 하고, 루시퍼, 메피스토텔레스까지. 또 부여한 이름이 있는가? 3권은 '루시퍼'에 해당하는 것이니 그 이름을 살펴보자. 루시퍼란 그 이름엔 위대한 왕, 새벽 별, 자신의 자만심 때문에 하늘에서 떨어진 헬렐 벤 샤하르와 창조된 날로부터 죄악을 저지를 때까지 나름대로 완벽했던 [에제키엘서] 28장의 거룹, 이 세상의 왕이며 하나님 왕국의 방해자인 사탄의 연합으로 생겨났다.(8p)

이것이 중세에 미쳤던 저자의 작업은 실로 방대해서 나의 조그만 머리가 감당하기에는 버거웠다. 그래도 내가 이 책을 감히 읽을 생각을 했던 건 기독교인 때문마는 아니다. 오히려 오래도록 글 쓰는 일에 관심을 갖다보니 악마가 이야기를 만드는데 얼마나 유용하게 쓰이는 도구(?)인가를 나름대로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중세>라고 하는 이 매력적인 시기에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문예부흥기이라고 하는 르네상스에도 불구하고 중세 때 악마는 그다지 멋있는 존재로 비쳐지지는 않아 보였다. 

악마는 '결핍'이라고 하는 치명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카리스마는 아직도 유용하고 너무 매력적인 존재인지도 모른다. 유사 이래로 역대 많은 이야기꾼들이 악마를 다룸에 있어서 자기의 이야기를 완성시키는데 악마를 데려다 쓰는 것을 서슴치 않았고 '메타포'란 왕관을 그의 머리에 씌워 주었다.(11장)  그것이 오늘 날에도 유용하여 영화에서도 환타지 소설에서도, 권선징악을 말할 때도 악마는 실제적인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물질계가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영계(靈界)를 얘기할 때 그것이 인간의 상상력과 정신이 빚어낸 산물이냐? 아니면 원래 영계(靈界)는 존재하는데 인간이 그것을 캐내어 알게된 발견의 산물이냐가 궁금하다.

물질이야 인간이 필요해서 만들고 이용하고 손에 잡히는 거지만 신이나 영혼 또는 악마나 천사까지도 인간의 오감만으로는 말해질 수 없는 그 이상의 것이 아닌가? 그것을 증명해 내려는 것은 어찌보면 프로메테우스적 도전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모험을 기꺼이 나선 사람들이 있고, 그것을 도용해서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도 했다. (이를테면 9장에서, 중세 때 각 시대마다 사탄이 연극에서 어떤 비중으로 그려졌는가를 보는 것은 좀 흥미로웠다.) 

악마라고 하는 이 하나의 역사만을 추적하는 것도 상당히 방대한 작업인데 11장에 가서 악마는 '메타포'(은유)라고 결론지으니 다소 맥이 빠져보인다. 물론 뭐에 대한 메타포냐를 추적하기 위해 이 책을 읽는다면 그것도 꽤 의미있는 일이 되긴 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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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4-10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쓰셨군요~

라주미힌 2006-04-10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쓰셨네요 ^^;

stella.K 2006-04-10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을 뻔했습니다. 근데 고쳐쓰고 있는 사이 오셨군요. 추천은 캄샤합니다.^^

Mephistopheles 2006-04-10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고 많으셨습니다 스텔라님..

stella.K 2006-04-11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푸하 2006-04-21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악마(영계)가 인간의 상상력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수용한다면 아마도 악마는 모든 인간의 모든 '혐오'를 집약시킨 관념의 덩어리가 아닐지 생각해봅니다. 한 가지 더, 악마와 신성이 연결되는 지점은 인간의 행위를 초월하는 더 높은 차원이라는 것 같아요. 영계의 존재를 인간이 알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천착하시면 두 가지 경로를 밟으실 것 같아요. 한 가지는 회의론(신이 없음을 확신하는 무신론과는 다른)자가 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신앙인(더 높은 차원의 존재에 자신을 맡기는...)이 되시는 것 같아요. (아차... 앞에 기독교인이라고 밝히셨군요...^^;) 또 다른 한 가지가 가능하겠네요. 인간의 지성이 무척이나 높아져서 '모르는 것이 없는 상태'의 경우가 가능하니깐요.

푸하 2006-04-21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저자의 다른 책(악마의 문화사)을 보고 보편적인 '악'의 존재를 상정에 두고 세상을 보는 것이 참 신선했거든요. 좀 삐딱하게 세상을 보면 살육과 학살과 같은 보편적인 괴로움이 만연한 것 같거든요. 이러한 것들을 '악의 역사', 악이라는 개념은 어떻게 역사적으로 변화했는가? 하는 물음과 그것을 풀려는 저자의 노력(제가 좀 왜곡하는 것일지도 몰라요...ㅠㅜ)은 참 의미있는 것 같아요.....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stella.K 2006-04-21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여기에 미처 못 쓴 말이 있는데 푸하님 이리 쓰시니 이제야 말하자면, 예전에 폭력영화에 대한 폐해를 다룬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어요.
고만고만한 남자 녀석(들)이 음란물을 보고 마침 비슷한 또래의 여자 아이를 성폭력했다는 겁니다. 그 아이가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을까요? 그건 단순히 폭력영화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그 이면에 숨겨있는 뭔가를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사탄은 문화를 선택했다는 누군가의 말이 생각났어요. 문화는 가치중립적인 요소가 있는데 사탄은 바로 이런 걸 이용한다는 거죠.

2006-04-21 18: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길에서 만난 세상 - 대한민국 인권의 현주소를 찾아
국가인권위원회 기획, 박영희 외 지음, 김윤섭 사진 / 우리교육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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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를 그다지 즐겨보는 편이 못되서 우리나라에 대표 문학잡지 외에 어떤 잡지가 있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인권>이란 잡지가 있다고 한다. 그것도 내가 이 책을 펼쳤을 때야 비로소 알게된 사실이었다. 이런 잡지 문외한이 또 있을까?

이 책은 바로 <인권>이란 잡지에 '길에서 만난 세상'이란 꼭지 중 17편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있다. 그 중 내가 가슴 아프게 읽었던 몇편을 꼽아 보자면,

이 책이 첫번째로 다루고 있는, '노동은 있으나 노동자가 아닌 사람들'에서는 우리나라에 아직도 해결의 실마리를 보이지 못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분명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그처럼 차이나는 근로조건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은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다를 줄은 미처 몰랐고, 이건 명백한 차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또 되물었다. 비정규직이란 이유만으로 그렇게 차별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업주들 그들의 심리기저엔 무엇이 작용하고 있는걸까? 하는 의문. 사회 생물학적 관점에서나 이해가 가능할까? 벼라별 생각이 다 들었다.

또한 세번째의 '어린 엄마들'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미혼모 실태에 대해서 취재한 것인데, 이들의 문제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 보다 심각하다. 상대남쪽의 부모가 절대 인정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들은 교육의 기회 조차 박탈되고 있었다. 임신 사실이 알려지면 학교 이미지가 안 좋아진다고 무조건 퇴학 당한다고 한다. 그러면 그들은 검정고시 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한다.

'십 대를 보는 세상의 눈, 학생인가 아닌가 '는 세상이 10대를을 학생인가 아닌가의 편협한 잣대로만 보지 그들에게도 다양한 삶이 존재할 수 있고, 선택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 받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고 있어 안타까웠다.

또한 '무슬림도 평화를 원한다'  지난 2004년도였나? 김선일 씨가 피살 당했을 때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아시아계 무슬림들이 한국 사람들로부터 당했던 핍박에 관해 말하고 있다. 무슬림들은 '한손엔 꾸란을 또 한손엔 총(또는 검)'이란 표어 때문에 과격무장 단체쯤으로 알고 있는데, 무슬림들 중엔 평화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그런 사람들은 무슬림에서 조차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죽이지도 않은 김선일 씨를 단지 무슬림의 과격단체가 죽였다는 이유만으로 싸잡아 못된 사람으로 매도 하는 것은 억울하다고 항변하고 있다. 아랍=이슬람교=이주 노동자=테러리스트라는 등식으로 보는 것은 아주 잘못된 사고라고 지적해 읽는 나로 하여금 뜨끔한 느낌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고충 수업, 타율 학습'은 우리나라 고등학생의 학교 수업실태를 고등학생의 입을 빌어 얘기하고 있는데 솔직히 나는 좀 분노가 일었다. 왜 이리도 우리나라 교육은 학생 중심적이지가 못하고 천편일률적이며 아이들을 억합하고 있는 것인지. 그놈의 대학이란게 뭔지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어른들이다. 특히 교육계를 주름잡고 계신 높은 어른들. 그들의 생각이 변화되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은 자율을 배우지 못하고 창조성이 말살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나도 그 시절 학교 공부가 고통스러워 죽을 맛이었는데 학교를 떠나온지 20년이 훨씬 넘은 지금 조금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고 있지를 않으니, 과연 우리나라가 민주주의 국가가 맞으며, OECD 가입국이 맞고, 1인당 국민소득 얼마를 자랑하는(부자로 잘 살아 본적이 없어서 일까, 얼만지도 정확히 모르겠다.) 나라가 맞는지 의심스럽다.

그밖에 이채로운 제목 하나가 눈에 띄는데 그것은 바로 책 거의 말미에 있는 <민족주의의 또 다른 얼굴 '일본인 처'>라는 제목이다. 이것은 특이하게도 해방 전후로 한국인과 결혼한 일본인 노파의 삶을 취재했는데 그 할머니들의 얘기가 울림이 있다.

우리는 수탈의 역사를 지나오면서 우리가 일본에게 당한 얼울함과 아품만을 생각한채 일본X은 제 배 불리며 잘 살았을 거란 환상에 젖어있다. 하지만 그 가운데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제국주의 영광에 가려 힘 없는 삶을 연명한 가련한 일본 여자들도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들이 젊은 시절 한국인 남편에게 어떠한 박대를 당하고 그것도 부족해 자식들에게 까지 멸시를 당했는지 그러고도 자신의 고향은 일본이 아니라 내 남편 내 자식의 나라 한국임을 당당하게 말하는 일본인 할머니들이 오히려 고맙고 연민의 정을 자아내게끔 한다.

17편 저마다 처해진 상황들은 달랐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한 목소리를 낸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고.

이 책은 작가 출신의 박영희, 오수연, 전성태 씨가 쓴 글이다. 한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누가 어느 글을 몇년 몇월에 썼는지가 나와있지 않아 아쉬움이 남는다. 예를들어, 버스비 600원이란 단서가 글 가운데 나오는데 그때라면 4년전쯤에 씌여진 글인가 짐작만 하게 한다. 그리고 현재진행형의 문구가 눈에 띄는데 그렇다면 언제부터 였으며 지금은 어떠한 건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글 쓰는 사람에게 있어서 시제를 명확히 해 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아무리 잡지의 글을 그대로 옮겼다고는 해도 편집은 필요한 것이니.

그런 것만 제외 한다면 나는 이 책은 많은 사람에게 널리 읽혀져야 한다고 본다. 우리나라 인권의 실태에 대해서 문외한이라고 말하는 사람일수록. 나만 부당한 삶을 살고 있고, 우물안에 개구리의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일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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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03-29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까지도 소외된 사람들은 많나 봅니다..에이구....

stella.K 2006-03-29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비로그인 2006-03-29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이책이요. 인권에 관한 내용을 전혀 접한 적 없는, 이제 막 고1이 된 청소년이 소화해낼 수 있을까요???? 알려주셔요..;;

stella.K 2006-03-29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숍님, 추천을 안 하셨군요. 안 가르쳐 드릴꼬예요.ㅜ.ㅜ


하려다가...에잇, 인심 썼다!
고1 학년된 학생이 보기에 어렵지 않다고 봅니다. 제가 리뷰에는 미처 못 썼는데요, 중간 중간에 사진도 들어가 있어요. 잘 찍었더라구요.
청소년들에게 인권교육 시켜야죠. 꼭 보라고 하세요.^^

비로그인 2006-04-01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알겠습니다. 그리고 감사해요^^
그리고... 추천은 기본이거늘... 이런 실수를... 스텔라님, 늦게라도...;;;;;;;
 
한국 현대 대표 희극선
정진수 엮음 / 연극과인간 / 2004년 11월
평점 :
품절


오래 전 로드무비님으로부터 이 책을 선물로 받았을 때, 난 이 책의 제목이 '희곡선'인 줄만 알았다. 그도그럴 것이 우리나라 여타의 잘 알려진 희곡 작가들의 작품을 하나로 묶었으니 희곡집이 맞지 않은가? 그런데 다시 자세히 보니 이것은 '희곡집'이 아니라 '희극집'이었다.

희극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재밌고, 웃기고, 풍자와 해학이 있는 뭐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피상적인 것 말고 그것을 연극으로 형상화 했을 때 어떤 느낌으로 와 닿을까를 생각해 볼 때 이 책을 읽으면서 참 여러가지 느낌으로 와 닿았다. 7편을 담았으니 일곱색깔 무지개라고나 할까? 어떤 것은 풍자로, 어떤 것은 희극 같은데 비극을, 어떤 것은 묵직한 주제를 각각 말하고 있었다.

먼저 이근삼의 <국물 있사옵니다>를 보면 우리나라의 출세지향적인 사고가 주인공 김상범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이끌어 가고 있는가를 현실적이고 설득력 있게 여러가지의 것을 복선으로 깔면서 관객(또는 그의 글을 읽는 독자)에게 어필하고 있다. 제목에서 암시하듯 자신의 노력으로 성공하기 보단 여타 주변의 것 이를테면 양심과 도덕을 묻어두고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출세를 지향해 가는 모습은 우리 사회에 나타난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또한 <토끼와 포수>는 재혼의 문제를 경쾌한 필치로 재치있게 그려내고 있는데 1965년도에 초연됐으니만큼 그 시대의 재혼에 대한 사람들의 사고방식들이 잘 표현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로부터 40년이 지났으니 당시엔 역작으로 인정 받았을지라도 지금은 뭔가 새롭게 씌여져야할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차범석의 <바람분다, 문 열어라>는 그의 명성 못지않게 커리어의 강점을 잘 살린 작품이 아닐까도 싶다. 그는 방송국의 제작부장과 편성국 국장을 지녔다고 하니 방송국의 생리를 좀 잘 알까. 그래서 등장인물 오영숙의 캐릭터가 교양프로의 MC가 아니었을까. 이 작품은 페미니즘적 요소와 민주화의 암울한 시대를 살아왔던 사람이 이 세상을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설득력있게 보여주기도 하지만 더불어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나름대로 잘 녹아든 작품이 아닐까 싶다.

윤대성의 <출세기>는 무너져 내린 광산에서 극적으로 구조돼 매스컴을 타고 유명인사가 돼나가 어떻게 몰락의 길을 걷게 되는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것을 읽으면서 성경의 탕자의 비유가 자꾸 오버랩되었다. 하지만 매스컴의 단발성과 그것에 이끌려가는 인간 군상을 다루는 점에서 이 작품은 그저 재미만을 추구해서 볼것도 아니란 생각이 든다.

또한 이강백의 <마르고 닳도록>은 내가 7편의 작품 중 가장 애착을 가지고 읽었던 작품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강백은 내가 속한 드라마팀과 인연이 깊어 그의 작품 <셋>을 팀원들이 연기한 경험이 있다. 그때 그 연극을 보면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 이 작품도 전작에 못지 않은 강한 흡인력이 있는데 우리나라 애국가를 싸고 50년이란 시공간을 아우르며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이토록 풍자적으로 잘 다룰수 있을까 가히 혀를 내두를 정도였고, 작가의 작품에 경의를 표하고 싶을 정도였다.

이만희의 <개띠 위에 용띠>는 정말 재미있다. 연극의 성패에 있어 배우의 연기력, 연출의 연출력도 무시못하지만 내가 희곡을 써 봐서 일까? 등장인물이 어떤 캐릭터를 가지고 어떤 말을 구사할 것이냐는 것은 항상 피해갈 수 없는 고민거리다. 등장인물의 말맛을 느껴보고 싶다면 이 작품을 읽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작가의 말맛은 한마디로 시원하게 끊여낸 북어국맛이라고나 할까?

끝으로 장진의 <아름다운 사인>은 작가로, 연출가로, 영화감독겸 제작자로 그가 얼마나 다재다능하며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고 있는지를 짐작하게 만드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6명의 자살에 대한 장진 그만의 재치가 잘 녹아든 작품이다.

이렇게 나는 7편의 작품을 읽어 가면서, 우리나라에 희극이란 분야가 그다지 많이 발전되지 않았음을 새롭게 알았다. 해설을 맡은 연극평론가 김미도씨는 그것을 사회의 암울한 배경을 간과하지 않고 있는데, 옛날 우리 광대패들은 삶이 어렵고 척박 할수록 웃음으로 그것을 풀어내기도 했지만, 70년대의 독재와 80년대의 민주화 과정에서 가장 정의를 많이 부르짖었던 분야가 있다면 문학 및 예술 방면이 이니었나 싶다.

그것이 아니었으면 타는 듯한 가슴을 삯혀낼 수 없었겠지. 그러다 보니 자연 작품은 어둡고 경직되었던 것 같다. 90년 문화의 시대가 꽃을 피우면서 문화, 예술 방면에 다양한 컨텐츠와 시도들이 돋보이기 시작했고 오늘 날 그것의 발전과 시도들은 가히 눈이 부실 정도다. 그 가운데 웃음이 문화의 한 코드로 자리잡은지는 당근 오래고.

아마도 연극에서 희극적 요소들은 앞으로도 계속 발전해 갈 것이다. 그것을 지켜 보는 것도 즐거운 기대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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