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진짜 축구다 - 끝나지 않은 축구전쟁의 역사
SHO'w 지음 / 살림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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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공은 둥글다'고 말한 사람은 옛 서독의 축구 감독 제프 헤르베르거였다고 한다. 그후 이 지극히 당연한 말이 축구에 관해 언급하는 가장 흔한 표현이 되었고, 한국의 축구 아나운서와 해설가들 입에 가장 흔하게 오르내리는 말이 되었다고 한다.

도대체 이 둥근 축구공 하나가 무엇이기에 보는 이로 하여금 애간장을 태우고, 이 둥근공 하나를 골문에 밀어넣고, 못 밀어넣고에 따라 그처럼 희비가 엇갈리고, 천국과 지옥을 몇번씩 왔다갔다 하는 것일까? 

지난 우리나라 대표팀과 스위스 전은 너무나 아쉬운 경기였다. 이것 때문에 경기종료 휘슬이 불리자 이천수는 땅바닥에 주저 앉아 울었고, 우리도 울어야 했다.

무엇보다 아쉬운 건, 이제 더 이상 12번째 선수라고 하는 붉은 악마의 함성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이고, 16강에만이라도 진출해서 여전히 우리를 흥분시켜 줘야할 대표팀을 더 이상 독일의 그리운드에서 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 안타까움을 위로하듯 읽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펼쳐든 순간 축구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술술 쏟아진다. 읽는 내내, "어머나, 이런 일이 있었다니..."하며 자꾸 다음 페이지를 넘기게 만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축구만큼 사람의 마음을 졸이게 만드는 스포츠가 또 있을까? 될듯 될듯하면서도 안 되는 천금 같은 골을 기어이 골대 안으로 집어 넣었을 때의 그 기쁨과 감격이 좋아 누구는 축구를 좋아할지 모르지만, 나의 경우 그 마음 졸이는 안타까움이 싫어 지난 2002년 우리나라에서 치뤄진 월드컵도 처음부터 보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이러고 있는 사이에도 축구는 각 나라의 역사와 함께 했고, 그 나라의 이미지를 살리기도 했고, 죽이기도 했다. 이 책은 바로 축구가 그 나라에서 어떻게 토착화 했으며,  어떻게 그 나라의 역사와 함께하고, 발전해 가는지를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놀랍지 않은가? 그라운드에서 두 팀이 그냥 무조건 공을 따라가고, 넘겨 주고, 골대로 밀어 넣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나라마다 축구공을 모는 스타일이 다르고, 개성이 다르고, 기술이 다르다니 말이다. 또한 축구가 한 나라를 위로 하기도 한다.

아르헨티나의 대표팀 같은 경우 2002 한일 월드컵에 국비 지원을 받을 수가 없어 자비로 원정에 나섬으로 헝그리 정신을 보여 주기도 했고, 그러면서 그들은 "실의에 빠진 국민들에게 조그마한 희망이라도 만들어주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건 비단 아르헨티나만 해당되는 말은 아니었다. 얼마전 신문을 보니 16강에 진출한 가나는 돌아가 학교와 병원을 짓겠다고 했고, 우리와 한차례 경기를 가졌던 토고의 선수도 저 비슷한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2002년도에 그처럼 우리를 흥분케 했던 것은, 경기침체로 웃을 일 없었던 우리에게 태극전사들의 승전보는 희망을 줬고, 우리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주었다. 그러니 조그만 공 하나의 위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느니만큼 월드컵의 명암도 뚜렷해, 지는 경기를 하는 경우 훌리건들의 난동은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선수들이 욕을 먹는 것은 차라리 약과다. 잘못해서 선수들이 암살을 당하는 경우도 있으니 축구가 반드시 사람들에게 희망만을 주지는 않는다.

이 책의 미덕은 이미 말한바있지만, 축구가 그 나라의 역사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으며 발전해 가는가를 개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새롭게 안 사실은, 훌리건이 잉글랜드에서부터 나왔는데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역사적 배경이 흥미로 왔고, 초기 축구는 공이 아니라 덴마크 왕자의 잘려나간 머리통으로 차기 시작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또한 각 나라 월드컵 대표팀의 선수와 감독의 면면을 읽는 것도 쏠쏠한 재미를 느끼게 해줬다. 특히 히딩크의 영향으로 우리나라도 네덜란드의 토털풋볼을 구사하기 시작하고 있는데, 축구 감독들의 리더십이나 전술이란 어떠한 것일까 궁금해졌다. 이쉽게도 이 책에서는 그다지 많이 할애 하지는 못했다.

이 책을 읽고나니, 예전엔 우리나라팀과의 경기만 주로 보았던 나의 시야의 좁음이 다소는 넓어진 느낌이다. 그래서 다른 나라는 어떻게 싸우는가 지켜 볼 마음이 생겼다.

일각에서는 월드컵의 상업성, FIFA의 관료주의를 비판하기도 하는데 그래도 그것은 명실공히 세계인의 축제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바라기는 세계가 너무 월드컵에만 치중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 책도 보면 월드컵을 겨냥해 나왔고, 내용도 거진 98% 이상이 각 나라 대표팀들이 월드컵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가에만 초점을 맞췄다. 그러니 횟수를 거듭할수록 월드컵이 도도해지는 수 밖에. 좋은 경기란 게 꼭 월드컵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아니면 제목을 월드컵에 맞추던가 했어야 하지 않을까?

축구를 하나의 스포츠로 즐길 줄 알아야 그 스포츠가 건강해 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너무 하나에 치중해서 거기에 온 사활을 다 걸고 안되면 허탈해 하는 것은 건강한 모습은 아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우리나라 국민들이 즐길 때 확끈하게 즐기고, 졌을 때 태극전사들에게 애정어린 박수를 보내고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다는 것이 정말 좋아 보였다.

우리는 분명 승리에 목마르다. 우리팀은 아쉽게도 이번 월드컵에서 별로 빛을 바라지 못했지만 2010년 월드컵에서는 다시 한번 저력을 보여줄 것이라고 확신한다. 아, 앞으로 4년을 어떻게 기다린담? 그 4년 동안 다른 경기에도 관심을 가져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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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DNA를 가지고 대체 뭘 하려는 거지? - 너무나 도발적인, 그러나 너무나 인간적인 천재 과학자 7인의 이야기
데이비드 E. 던컨 지음, 김소정 옮김 / 황금부엉이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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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작년 말부터부터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 생명윤리 세미나에 참여하고 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윤리' 라는 과목이 그리 신나고 재미있는 공부는 아니기에, 이 세미나가 과연 얼마나 나에게 즐거움과 재미를 줄 것인지 의문인채로 그곳에 발을 내딛게 됐다.

그러나 즐거움이나 재미만을 생각했다면 내가 그것을 왜 듣고 있었던 것일까? 마침 그 무렵이 '황우석 파동'이 있었던 때였고 그전부터 황우석 박사가 집중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었을 때, 나는 뭔가 모를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원래 과학 분야을 좋아했던 것도 아니면서 왜 의문을 가졌던 걸까? 결국 이런 의문이 재미와 상관없이 나를 그곳으로 인도했던 것 같다.

그러고 내가 이 책을 다 읽을 때 즈음 번역자의 말에서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굿스타인 박사의 인용구를 발견했다. 그는,  왜 과학자들이 거짓으로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가에 대해 크게 세 가지로 설명했다고 한다.  

첫째는, 성과에 대한 압박이 심하기 때문이고 둘째로, 스스로 올바른 결과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마지막으로 개별 실험들이 다른 곳에서 정밀하게 재현되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가지 도전이 생긴다. 그렇다면 우리가 과학이란 분야에 대해서 잘 알던 모르던 무작정 그들의 연구를 지지하던가, 내 전공 분야가 아니니까 알아서 잘하고 있겠지 하며 방관해도 된단 말인가?

우린 과학이 인류를 위해 공헌만 하고 있다고 착각 속에 빠져 사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당장의 눈 앞의 이익만을 보다가 나중에 더 큰 것을 잃을 위험에 처할지도 모르는데도? 실제로 우린 그런 재앙들을 보고 있지 않다. 그런데도 누군가가 과학 분야에서 새로운 연구를 하면 일단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 볼 수 밖엔 없는 것이다.

이 책은 유명한 과학자들의 삶과 연구 분야를 소개하면서 특별히 그것이 사회, 윤리적 관점에서 어떠한 의의를 갖게 될런지를 조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솔직히 과학 분야에 대해선 문외한이라고 할 수 있는 내가 읽기엔 다소 버겁고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책 자체도 그다지 쉽게 씌여지지 못한 데다가, 워낙에 생명윤리라고 하는 분야가 광범위 하고 아직 체계를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이 분야에 대한 논의와 성과는 좀 더 시간이 흘러봐야 알 일이라고 감히 조심스럽게 말하고 싶다. 그것은 이제 (기독교적 관점에서) 생명윤리를 8개월 여 접해 본 나의 좁은 소신이기에 이렇게 얘기 하는 것 뿐이다.

이 책이 좀 어렵긴 하지만 흥미로운 것도 없진 않았다. 예를들면 이 책의 두번째 장에 나오는 <이브: 신시아 케년> 같은 경우 '예쁜꼬마선충'을 소개하면서 이것이 노화의 비밀을 풀어 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늙지 않고 400살까지 살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거기에 대해 회의적인 견해도 없진 않지만, 오늘 날의 눈부신 과학의 발전을 볼 때 불가능 하지는 않아 보인다.

그러나 내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하건데, 난 늙지만 안는다면 그리고 죽을 때 고통없이 자연사 할 수만 있다면 현재의 인간 수명에 만족한다. 그러므로 신시아 케년이 400살 까지 살 수 있다는 것에 그냥 미소만 지었을 뿐이다.

왜냐하면 앞으로의 인간의 삶은 어떻게 하면 오래 살 것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잘 살고 복된 죽음을 맞이할 것이냐에 초점이 맞혀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니 내가 그녀를 보면서 미소를 지은 건 그냥 치기 어린 과학자다운 면모를 보는 것 같아서 였다. 물론 그녀가 알면 화낼지도 모르는 일이겠지만 말이다. 

다음으로는 3장에 나오는 <바울: 프랜시스 콜린스>와 4장에 나오는 <파우스트: 크레이그 벤터>다. 이 둘은 명확히 대비된다. 콜린스는 기독교인이고, 벤터는 무신론자이다.  기독교가 과학의 발전에 있어서 늘 반대적 입장에 서 왔느냐 아니냐는 이 책에서 처음 다루어진 것도 아니고, 어제 오늘의 일은 더욱 아니다.

그런데도 기독교는 과학의 발전에 발목을 붙잡는다고 보는 견해는 만만치 않아 보인다. 불행한 것은 나는 기독교인이지만 과학자는 아니기에 이 문제에 대해 기독교인과 무신론자가 충돌하고 불화하는 것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과학자들 중엔 기독교인이 있고, 그들은 오늘 날의 과학 분야의 발전에 발목을 잡는 사람마는 아님을 알아줬으면 한다. 무신론 과학자들은 기독교인들이 고리타분인 교리에 매여 사람이 그냥 죽어가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다고 반박 할지 모르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인만큼 혹시 이것이 하나님의 계율에 위배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갖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러기에 과학의 발전에 민감하다고도 볼 수 있고 그 발전 이면에 올지도 모르는 인간 사회의 윤리적 문제와 인류의 재앙에 대해 대처 하려는 자세가 더 많다는 것을 알아 줬으면 한다. 

물론 기독교 진영에서건 무신론적 관점이건 딜레마는 어느 관점에서 건 존재할 것이다. 그러므로 콜린스에 대한 벤터의 반박은 깊이 들어가 보면 그럴 수 밖에 없는 뭔가가 있겠지만, 결국 신념의 문제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인다.

 어쨌거나 이 책은 과학자들이 연구실에만 붙박혀 연구만 하는 기계가 아니라 때로는 인간적인 면모와 함께 과학이 윤리나 정치에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가도 그들의 입술을 통해 들을 수 있어 나름대로 유익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이 쓰여진 성과적인 측면에선 앞에서 말했던대로 윤리적 측면을 다뤘다고 보기엔 초보적 단계란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도 이 분야에 대한 저작물은 앞으로 좀 더 많이 나와야 하고, 좀 더 대중적이어야 한다고 본다. 굿스타인 박사의 말을 상기시켜 본다면 말이다.

저자는 특별히 미국의 과학자들 7명을 다뤘는데도 이 정도의 성과라면, 전세계에 흩어진 석학들을 다뤘다고 볼 때 그 작업은 또 얼마나 방대하고 산만해질 것인가를 생각해서 미국 과학자들만을 다뤘다는 것에 관대해져 보기로 했다.  윤리에 대한 범세계적인 보편적 가치가 있을 수 있겠지만, 윤리에 대한 잣대가 나라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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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 발상에서 좋은 문장까지
이승우 지음 / 마음산책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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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오래전에 신경숙 씨가 한 인터뷰에서 그런 말을 했다. 작가는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천형(天刑)으로 끊임없이 책상에 앉아 글을 써야하는 운명을 지녔다고. 그 말은 오래전에 읽었는데도 나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작가를 꿈 꿔왔고 지금도 여전히 작가로 살게되길 꿈꾸면서도 또 여전히 글을 쓰지 못한다. 왜일까? 왜 나는 작가를 꿈꿨을까? 정말 나는 남이 보지 못하는 걸 보는 것 같긴하다.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말해주고 싶고, 남들이 벌거벗은 임금님한테, 임금님이 입으신 옷은 너무 멋져요.라고 외칠 때 "임금님은 벌거벗었어!"라고 외치는 소년이 나 이기를 바랬다.

그만큼 인간의 허위의식을 가감없이 까발리는 작가이길 바랬고, 진실을, 진리를 말하는 작가이길 또한 바랬다. 하지만 그러기는 또 얼마나 어려운가? 매일 머릿속에서는 몇 가지의 이야기가 헝클어져 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 많은 실타래 중 하나를 뽑아 글로 옮기려고 하면 쓰는 과정에서 뭉개져버린다.

이 책의 저자는 이 책에서 말한다. 한가지 발상이 떠올랐다고 해서 무작정 쓰기부터 하지 말고 꼼꼼히 세밀하게 메모부터 하라고. 그래도 나를 포함한 많은 작가지망생들은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의 늙은 작가의 말처럼 영감이 떠올라줘서 신들린 것처럼 쓰게되길 바라고 있지. 하지만 저자는 그런 천재가 없으란 법은 없지만 동시에 그런 사람은 웬만해서 있지도 않다고 잘라 말한다.

누구나 자신의 기구한 삶을 말할 때 내 얘기는 열 권의 책으로 써도 다 못 쓴다고 말하곤 한다. 그런데 왜 한 권도 못 쓰는 걸까? 저자는 그랬다. 작가는 보는 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쓰는 거라고. 보는 것을 쓰는 건 기자의 몫일 것이다. 작가는 그 보는 것을 해석한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작가는 어려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해석 되어진 것을 가지고 독자를 설득하려니 어려울 수 밖에. 그래서 아무리 인간이 하는 일이 어려워도 작가질 보다 쉬울거라고 하다가도 여전히 책상 앞에서 그 천형(天刑)을 온전히 받고 있는 것이다.

나는 올해 들어서 본의 아니게 글쓰기에 관한 책을 접할 기회가 많아졌다.  아주 오래 전 소설작법에 관한 책을 펼쳐 들었다 낭패를 본적이 있었다. 소설을 어렵게 쓰지 말라는 얘기는 그 보다 오래 전에 들어서 알고 있는데 작법에 관한 책이 소설 보다 어려우니 이런 모순이 어디있나 싶어 3분의 1도 채 못 읽고 때려치웠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나서 글 쓰는 풍토가 좀 바뀌어서일까? 비교적 읽기 편하고 이론적이기 보단 실제적인 지침을 주는 글쓰기에 관한 책들이 많이 나왔다. 바람직하다고 본다.

지금까지 읽어 본 창작에 관한 책 중 가장 재밌게 읽은 책은 스티븐 킹의 <글쓰기의 즐거움>이 였던 것 같다. 그런데 작가 이승우의 이 책은 스티븐 킹의 책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질펀하지도 않고 우회하지도 않으며 군더더기가 없다. 깔끔하다.

현장에서 직접 뛰는 작가로서 소설쓰기의 실제적인 지침이 될만한 작은 책이다. 그러나 작다고 얕볼 것이 아니다. 정말 알멩이만 추려서 일목요연하게 썼다. 특히 에필로그에 '소설창작 교육에 관한 몇가지 오해'는 곱씹어 볼만한 글로써, 우리나라의 창작 풍토에 관해 일침을 가하는 작가 특유의 통찰이 보여 몇번이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특히 홍수 중의 가뭄이라고, 학교며 사설기관, 백화점 문화강좌에 이르기까지 창작을 가르쳐 주겠다는 곳은 많고 그 이상으로 어딜가나 배우는 학생은 넘쳐나는데 정작 종합 베스트셀로 순위에서 소설이 차지하는 비중은 몇 권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소설을 쓰겠다던 그 많은 사람은 뭘하고 있는 것일까?

소설 쓰기란 단시간 내에 마스터 할 수 있는 무슨 기술이 아니라 인문학적 바탕위에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흘러넘쳐 나오기 까지 내면에 축척된 뭔가가 있어야 한다고 한다. 나는 저자의 말에 동의한다. 그렇다면 늘 쓸 것은 가득한데 가슴 속에 고여만 있고 뿜어내지 못하는 나는 그런 소양이 부족해서일까? 그런 것 같긴하다. 

저자는 또한 글쓰기를 너무 쉽게 보는 오늘 날의 창작풍토를 개탄했다. 거기엔 인터넷 글쓰기에 대한 비판도 간과하지 않는다. 앞으로 블로그에 글을 쓰는 것도 잘 해야할 것 같다.

 그런데 나에게 있어서 더 문제는 글이 뭉개져 버린다고 속상해 하고 소설작법에 관한 좋은 책들이 많이 나온다고 해서 이런 책만 탐독하게 될까봐 걱정이다.

작가 이윤기 씨가 동인 문학상을 받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지,

 "앞으로 미인이 지나간다고거울이 개선되는 것은 아니다. 뒤에다 수운을 칠해야 거울은 개선된다. 그러니까 떠들지 말고 써라" 라고

그렇다면 내가 취할 자세도 자명해 진다. 소설작법에 관한 책을 읽느니 인문학에 더욱 정진할 것이요, 안 그러면 잔말 말고 쓰는 것이다.  

 이 책은 가끔 글 쓰다 막히면 한번씩 훝어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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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05-23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이책 저도 열심히 보고 있어요 느리게 읽기 중 베껴쓰기 할 것도 찾고 있고요

stella.K 2006-05-24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좋더라구요. 저는 김훈의 <개>를 베껴쓰기 할까 하는데 마음만 그렇습니다. 흐흐.
 
의미있게 산다는 것
알렉스 파타코스 지음, 노혜숙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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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나는 회의주의자(?)였다. 내 친구들은 주어진 환경에서 열심히 공부하느라 여념이 없었는데 난 도무지 열심히 공부할 마음도 없었고 그 어떤 것에도 뚜렷하게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늘 이것을 하면 뭐하는데? 그것의 의미는 뭐지? 하며 살았던 것. 커서는 그래도 조금은 내멋에 취해서 살기도 했으니 어렸을 때보다 조금은 나은 것 같지만 그래도 그런 회의적 사고방식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내멋에 취해서 사는 것이 취하지 않고 사는 것 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무엇이든 간에 말이다. 이 사회가 허락한 범위 안에서는. 

대학시절부터 전공은 뒤로 하고 심리학에 심취해 틈나는 대로 책을 읽고 있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접하게 된게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였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 책은, 인간은 어떠한 극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주요 골자이다.

프랭클은 정신과 의사였고 유대인으로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 갔었고, 거기서 여러 많은 인간군상을 보았고 본인 스스로도 체험했던 것을 토대로  후에 '의미에의 의지' 즉 '로고 데라피'라는 새로운 상담기법을  완성한다. 그때 내가 그의 이론에 매료되 공공연히 나는 실존주의자라고 떠들고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나는 얼마나 나 자신의 선택을 믿으며 자유를 구가하며 살아왔을까? 얼마전 나름대로 그럭저럭 잘 굴러가 주리라 믿었던 나의 일들이 뜻대로 되지 않아 답보상태에 있다. 아마도 조만간 내 나름의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 같은데 결정을 내리려 하다보니 지금까지 내가 어떤 일이나 문제를 대하는 태도가 어땠는가를 알아 보기위해 이 책을 붙들었다.

이 책을 붙들었을 때 나는 그동안 잊고 있었던 빅터 프랭클의 저 유명한 '의미에의 의지'를 다시 접할 수 있었고, 저자가 빅터 프랭클의 이론을 참 잘 계승하였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저자는 빅터 프랭클의 신봉자로서 그가 써놓은 말들은 단순히 자기계발을 어떻게 하라는 단순한 방법을 제시보단 아폴리즘에 가까운 구절들이 많이 나온다.

사실 우리나라와 같이 고용이 불안정하고 경기가 바닥을 치고 있는 이때에 어떻게 하면 안정되게 잘 살 수 있을 것이냐에 온통 촛점이 맞추어지고 있다. 그래서 재테크에 그토록 열을 올리고 어떻게 하면 편안한 노후를 맞이할 것이냐에만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데 이것은 인간에겐 안전에 대한 욕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안전의 욕구가 채워졌다고 해서 생을 만족되게 사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 다음 뭔가의 욕구가 채워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우울해 하거나 좌절을 느끼게 된다. 이처럼 사람은 자꾸만 의미를 찾게되어있는 존재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가끔 주위에서도 보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만족을 못하거나 자신을 뛰어넘지 못해 좌절하는 사람을 많이 본다. 그리고 이것은 어려우니 차선을 최선에 놓는 사람도 보는데 그러고도 만족한 삶을 누리며 살지 의문이다.

 이미 아는 사실이지만 고도화된 사회일수록 자살, 우울증과 같은 정신병, 충동적인 범죄로는 사회문제로 대두된지 오래고 그 문제는 아직도 해결의 실마리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것을 상담학자나 정신병리학자들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생기는 병이라고 진단하기도 한다. 어떻게 하면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영화<타이타닉>을 생각했다. 거기서 보면 배가 침몰직전 보여주는 인간군상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어떤 사람은 구명보트에 자기 한몸 더 실어보겠다고 안간힘을 쓰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은 죽어도 좋으니 그것을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고, 어떤 사람은 어차피 죽는 것 고상하게 죽고 싶다하여 이층 침대에서 조용히 잠을 청하는가 하면, 실내악단 연주가들은 잔잔한 음악을 연주해 줌으로 자신의 임무를 죽는 순간까지 다하려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렇게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이 사람마다 다른 것은 무엇 때문일까? 삶의 의미와 가치가 사람 저마다 다르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안전에의 욕구를 들어 돈을 모으려고 한다. 돈을 모으면 그 다음엔 무엇을 할 것인가? 여행하며 살고 싶다고 한다. 여행을 하고 살면 어떻게 살건데 하고 물으면, 편안한 노후를 위해 살지. 편안한 노후를 위해 살면 어떻게 살건데...? 이렇게 질문에 꼬리에 꼬리를 달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에 대한 답이 그리 만족하지마는 않는 것 같다. 그냥 웬만치 좋은 직장에, 괜찮은 배우자와 결혼하고, 토끼 같은 자녀 낳고 한 세상 사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이 책 129p를 보면 추도사란이 나온다.

우리는 오늘 ________에게 작별을 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세상은 ______과 같은 사람을 절실히 필요로 했고 ________은 바로 그 자리를 채워주었습니다. ... ...

로 시작도는 추도사다. 저기 빈칸에 자신의 이름을 채워넣어 보라. 조금은 나의 삶을 되돌아 보게 되고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통계에 의하면 아기를 양육하고 산 사람이 그렇지 않고 독신으로 사는 사람 보다 정신병에 걸리지 않을 확률이 더 높다고 한다. 그것은 주는 삶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독신으로 사는 사람들은 오직 나에게만 모든 촛점을 맞쳐있기 때문에 우울증이나 편집증에 걸릴 확률이 높다고 한다.

결국 이것이 말하는 것은 독신과 기혼을 가르려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주는 삶이 그렇지 않는 삶 보다 복되고 만족스러우냐를 얘기하려는 것일 것이다. 독신이라고 해서 반드시 나에게만 관심이 쏠려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오히려 기혼의 삶이 주는 삶을 방해 한다고 하여서 일부러 독신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이를테면 카톨릭 신부가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이 책에 의하면 빅터 프랭클은 97세의 일기로 타계했다고 한다. 그 수 많은 고난을 이기고 '로고 테라피'를 창안하여 많은 사람들의 삶을 치료하는데 그의 남은 생애가 씌여졌을 거라고 볼 때 그의 삶은 얼마나 보람되었을까? 결국 그의 장수의 비결도 그것 때문은 아니었을까?

이 책은 자기계발을 목적으로 해서 쓰여지긴 했지만 이해 하는데 그리 쉽지 많은 않아 보인다. 그것은 이 책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그만큼 삶의 의미를 탐구 한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의미있는 일이기에 그 의미를 찾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빅터 프랭클은 말한다.

성공을 목표로 하지 마라 성공을 목표로 겨냥할수록 빗나갈 가능성이 커진다.

성공은 행복과 마찬가지로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니다.

행복은 우리 자신보다 더 큰 대의에 헌신할 때나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할 때 뜻밖의 부산물로 따라오는 것이다.

행복은 저절로 오고 성공도 마찬가지다. 성공에 매달리지 말고 저절로 따라오게 해야한다.

그렇다면 나의 답보상태에 있다는 문제도 어느만치는 해답을 얻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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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5-15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한방 누르고 갑니다.

stella.K 2006-05-15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고맙습니다.^^
 
부흥 예배자 - 하늘의 마음을 노래하는 사람
고형원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2006년 4월
평점 :
품절


내가 벌써 이 예배를 다닌지 얼마나 됐을까? 크리스챤이라면 주일예배는 기본이고 또 한번의 예배를 더 드리라면 나는 이 예배를 다닌다. 목요일마다 드려지는 '부흥한국'팀의 목요찬양 예배.

나는 이 모임을 올 1월부터 본격적으로 다니기 시작했다. 매주 목요일마다 교회에 가면 고형원 전도사를 만날 수가 있다. 더벅머리에 수수한 옷차림의 그에게선 조금도 가식의 냄새라곤 맡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가  좋다.

사실 그가 이끄는 '부흥한국'팀이 2년 전부터 우리 교회의 목요 찬양집회를 이끈다는 건 처음엔 알지 못했다. 가끔 우리 교회 주보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하곤 했는데 내가 알고 있는 그 이름이 혹시 동명이인이였나 의심도 했다. 사실 그는 유명한 복음성가 작사자겸 자곡가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었으니까.

한 5,6년 전부터 그가 작곡한 찬양을 안 부르는 교회가 없을 정도로 그의 곡들은 실로 영감이 넘치고 그래서 유명하다. 그가 만든 '부흥'이나 '그날' 같은 곡들은 만들어진지 한참되었는데도 지금도 여전히 예배 때마다 불려지고 있다.

지난 주 목요일은 뜻깊은 날이었다. 바로 우리 교회에서 이 '부흥한국'팀이 찬양집회를 한지 두 돌이 되었고, 고형원 전도사의 '부흥2006'이 나왔으며, 그의 에세이겸 간증집인 이 책이 출간되었으니 말이다. 덕분에 기념으로 떡 한조각도 먹을 수가 있었고, CD랑 책도 시중가 보다 조금 싸게 살 수가 있었다. 그리고 다른 읽어야할 책도 많은데 결국 그것들을 잠시 미뤄두고 이 책부터 읽었다.

남의 살아 온 이야기를 듣거나 읽는 것은 쏠쏠한 재미와 많은 도전을 준다. 이 책 역시 그랬다. 특히 나 같이 인생에 특별한 굴곡없고 너무 잔잔하다 못해 온탕속의 개구리처럼 사는 사람에겐 많은 것을 돌아 보게 했다. 고형원 전도사는 인생의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는 고1 때 친구 따라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면서라고 한다.  시는 좋아했지만 자신이 찬양 사역자가 될거라고는 생각 못했다고 한다.

자기같이 못나고 부족한 사람이 과연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을까를 늘 회의하며 사역에 발을 늘여 놓기 시작했고 그는 한걸음 한걸음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확신을 얻기 시작했고 찬양곡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는 그저 그의 찬양이 좋아 예배 때나 또는 개인적으로 아무 때나 흥얼거리기도 하지만 그가 한곡의 찬양을 만들기까지 얼마나 많은 기도와 노력을 아끼지 않는지 잘 모른다. 이 책에서 비로소 그의 숨은 발자취를 느껴 볼 수가 있었고 정말 많은 노력과 한 순간도 놓치지 않는 영감의 순간을 기록해 놓는 순발력이 있었기에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작업 과정을 읽어내는 것도 유익하긴 했지만 그가 부흥 예배자로써 얼마나 이 땅의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온전하고 거룩해지기를 소망하는가 또한 읽어내지 않으면 안된다.

그는 어떤 계기에 찬양 인도자로 세움을 받기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찬양을 인도하면서 어떻게 하면 청중들이 찬양에 이끌려 올 것인가를 안다고 했다. 이를테면 비법을 터득한 것이겠지. 하지만 그것은 거짓된 것으로서 감정에 이끌리는 것을 굉장히 위험한 것으로 조심한다고 한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성령의 운행하심에 민감해지는 것이다. 그 보다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부흥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참된 예배인가에 초점을 맞춘다.

또한 그는 북한선교를 꿈꾼다. 그것은 하나님이 오래전부터 그에게 주신 소망으로 죽어가고 있는 북한의 현실상과 1907년 평양부흥 100주년을 사모하며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꼭 그에게만 허락하신 것마는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비전을 함께 나누고 있고, 나 역시도 이전엔 막연하게 북한을 위해 기도했다면 매주  목요일마다 이 예배에 나오면서 조금이나마 구체적이고 뜨겁게 기도하게 되었다.

사실 북한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심각하고 동시에 뭔가의 조짐과 강한 태동이 느껴진다. 하지만 북한선교가 재대로 이루어지기까지 우리 남한 교회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들이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어쨌든 이 책을 읽고 있는 요 며칠 동안은 정말 행복했고 많은 도전을 받았다. 찬양 한 곡을 완성하기 위해서 무려 9개월을 붙들고 씨름했다고 하는 저자의 말을 읽었을 때 요즘 한 자의 작업도 하지 않고 지구력이 떨어진 나 자신 부끄러웠고, 찬양 사역만이 사역의 전부는 아닐텐데 교회에서 거의 예배만 드리고 돌아오는 나는 앞으로 무엇에 헌신하면 좋을까 고민스러워진다. 분명 하나님이 할 일이 없으셔서 나에게 일을 맡기시지 않는 것이 아닐텐데 말이다.

지금 고형원 전도사와 부흥한국팀은 오늘부터 미국과 캐나다 투어에 들어갔다. 부디 그와 그팀에 좋은 열매들이 있게되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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