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아프리카하면 가뭄과 기아를 떠올리게 된다. 언제부터였을까? 아프리카 보도를 처음 접하게된 것은 말이다. 적어도 내가 10대 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로부터 얼마의 세월이 흘렀을까? 아프리카의 기아는 조금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뉴스들은 그것을 보도할 때마다 가뭄 탓을 한다. 그렇다면 아프리카는 정말 신이 버린 땅인지도 모른다. 어쩌자고 그 지역만 비가 오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나라 한반도에도 가뭄이 들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실제로 작년에 북한은 극심한 가뭄으로 가득이나 어려운 식량난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 지역에 비만 오면 기아는 해결이 될까?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읽으므로 이것이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비단 기후나 환경의 문제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선진국 또는 다국적 기업의 횡포에 내전으로 인한 군벌의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얽켜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있는 나라가 없는 나라를 도와주며 사는 것 그것이 사람된 또는 나라된 도리가 아닌가? 실제로 선진국들이 기아로 허덕이는 나라를 도와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것을 그저 아무 조건없이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도와줄리 만무하다. 거기엔 많은 이해관계들이 복잡하게 얽켜있었던 것이다. 역시 부익부 빈익빈의 논리를 피해갈 수 없다. 어디 그뿐인가? 가난한 나라는 가난한 나라대로 한 움큼 밖에 안되는 권력 가지고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거기에 희생당하는 것은 저 굶주림에 허덕이는 어린아이들과 무고한 양민들이다. 어째서 자기 나라의 존망이 달린 문젠데 군벌에 의한 내전만을 거듭하고 있단 말인가? 하다못해 자기나라 기아문제를 무기로 들고 나오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야만도 그런 야만은 없을 듯 하다. 그러니 기아는 그냥 기아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는, 잘 사는 나라와 못 사는 나라의 박빙의 "빼쩨라"식 한판 승부의 장이라고나 해야할까? 결국 문제는 인간의 '탐욕'이다.

나는 결코 두껍지 않은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문득 중간중간, 나라의 균형, 즉 한 국가가 국가로써 존립하기까지 어떠한 균형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지금 아프리카나 기아로 시달리는 여타의 국가에서는 오늘의 한끼를 해결하기 위해 허우적대지만, 만일 그들이 이 밥의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을 때는 장차 어떤 불행한 사태가 일어날런지 아무도 장담 못할 것이다. 지리상으로만 불려지고 있고, 국경에 의한 나라가 과연 나라라고 할 수 있을까? 결국 '국가 경영'이라고 하는 큰 틀에서 자신의 나라가 의식이 깨이지 않으면 결국 부자나라와 다국적 기업의 짓밟힘은 계속될 것이고, 군벌에 의한 우민화 정책 또한 계속 될 것이다. 그리고 부자나라나 다국적 기업 또는 부자에게만 유리한 철학(신자유주의) 역시도 언제까지 그들의 발목을 탄탄히 받혀 줄런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물론 그들이 쉽게 망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오랫동안 억압 받고 고통 당하는 가난한 자의 피맺힌 한을 언제까지고 외면하며 눌러만 놓을 수는 없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가난한 자는 그들의 문제일뿐이라고 언제까지 배만 두드리겠는가?

이 책은,  저자가 그의 아들에게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지 그 이유를 아주 쉬운 문체로 설명한 책이다. 너무 쉬운 문체로 써서 감탄이 다 나올지경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그런데 한가지 흥미로운 건, 학교에서는 '기아'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가르치지 않고 있는가?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했다. 그것을 아는 것이 부끄럽기 때문이라고 한다. 왜 부끄러운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 역시도 이 책을 읽기로 했을 때 그리 편안한 마음으로 첫 페이지를 펼쳐 나가지 못했던 것 같다. '분명 비참할 거야. 내가 이 책을 읽는다고 무엇이 달라지겠어?'하는 마음이었지, 기아에 대해 정말 알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은 아니다(물론 어느 정도 "왜 그럴까?"하는 의문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마음도 아프고, 편치마는 않은 것이 사실이지 않은가?

그런데 돌이켜 보면,  교육이란 게 너무 많은 맹점을 가지고 있다. 성취지향적이고, 양육강식 또는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잘 살아 남을 수 있을까를 가르칠 뿐이지, 정말 '기아'에 대해서 '인권'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는다.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그토록이나 '기아'에 대해서 가르치지 못하겠다면 차라리 인간의 탐욕에 대해서 가르치는 건 어떨까? 조금은 우회하는 방법이지만 무엇이 탐욕인가를 알면 나중에 기아에 대해서도 눈을 뜨지 않을까?

이 책은 아빠와 아들이 함께 대화하는 식으로 씌여진 것으로 보아, 아마도 저자는 이 책을 교육(기아교육)에 목적을 두고 썼던 것 같다. 이것이 부자 나라의 학생들을 위해 썼다고 한다면, 기아에 허덕이는 나라의 아이들도 교육을 받아야 한다. 한끼의 식사도 재대로 할 수 없는 나라에서 무슨 배부른 소리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결국 교육만이 희망이다. 그래야 자주적인 생각을 할 수 있다. 그 나라 아이들이 언제까지 부자나라에 기대어 한끼의 식사를 구걸만 할 것인가?

그런데 생각해 보라. 부자 나라의 아이들이 기아에 대해서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이 문맹을 깨우쳤을 때 부자나라가 자신의 나라를 어떻게 했는지를 알게 된다면, 인간의 역사가 어떻게 쓰일지는 명약관화한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이 책은 분명 인도주의적 사명만을 가지고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인도주의면 어떠냐? 그것도 교육의 한 일환인 것을. 배웠다면 그 배운 것을 인류공영에 이바지 할 인물로 키워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저자와 같은 인물을 존경하고 부러워한다.

저자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석학들(제프리 삭스 같은)도 가난 또는 기아의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기아에 허덕이는 나라를 살리면 이 세계는 좀 더 풍요롭고 안전할 것이다. 그런 거시적 안목을 갖지 못하고, 근시안적으로 당장 나만 잘먹고 잘 살려고 한다면 그런 인간의 '탐욕'에 화살을 꽂고 불을 질러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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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from 風林火山 : 승부사의 이야기 2007-11-18 22:07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갈라파고스 2007년 11월 도서목록에 있는 책으로 2007년 11월 8일 읽은 책이다. 관심분야의 책들 위주로 읽다가 알라딘 리뷰 선발 대회 때문에 선택하게 된 책인데, 이런 책을 읽을 수록 점점 내 관심분야가 달라져감을 느낀다. 총평 물질적 풍요로움이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이기에 이 책에서 언급하는 "기아의 진실"은 가히 충격적이다. 막연하게 못 사..
 
 
2007-04-10 2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07-04-11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육에 관한 부분은 역설이기도 하고, 힘들지만 누군가는 해야되는 일이라고 여겨집니다. 꼼꼼히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하루키와 노르웨이 숲을 걷다 - 무라카미 하루키의 하드보일드 라이프 스토리
임경선 지음 / 뜨인돌 / 2007년 2월
평점 :
절판


하루키를 한 마리 외로운 늑대로 표현했던 사람은, 작가 필립 말로우다. 사실 이 책에 묘사 된 작가 하루키는 친구도 그리 많지 않고, 사람이 많은 것은 질색이며(그랬던 그가 재즈바를 운영 했었다는 사실은 다소 아이러니 하다. 물론 호구지책이었겠지만,) 혼자 있는 것을 좋아 한다고  되어있다.  그리고 이사를 광적으로 좋아해서 어디든 한곳에 오래 머물러 있지 못하고, 2, 3년마다 한 번씩 이사를 하는 별난 취미의 사내로 나와있다. 그리고 인스턴트 식품은 극히 안 좋아해서 웰빙으로만 먹는단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도 이기지 못하는 유혹이 딱 하나 있으니, 미국산 도너츠를 무척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재미있는 아저씨다!

90년 대, 언젠가 모르게 '무라카미 하루키'는 주요한 문학의 코드였다. 그 시절 하루키의 소설 한 두 권쯤 안 읽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켰었고,  그 시절 나 역시도 하루키의 소설을 3권쯤 읽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니 한동안 잊혀졌던 그의 소설 한 두권은 더 읽고 싶은 욕망이 일었다). 무엇이 이토록 하루키에 열광하도록 만들었을까? 하루키는 이 책의 저자와 가진 인터뷰에서, 아마도 자신의 소설이 한국에서 그토록 인기를 끌었던 것은, 이념 논쟁이 한창이던 80년 대를 지나 90년 대는 '나'라고 하는 것이 화두가 되면서 인기를 모았던 것 같다고 조망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소설의 하나 같은 주제는 진정한 '나 다운 것'이 무엇이냐 였다. 이런 개인주의가 하루키 문학과  함께 본격적으로 등장했다는 것.  

하지만 난 80년 대나 90년 대나 변함없이 개인주의자였고, 앞으로 내 삶이 특별히 변화되지 않는 이상 개인주의자적인 삶은 계속 될 것 같다. 그렇다면 90년 대를 거쳐 오면서 내가 '하루키'를 읽었다는 건 어떤 의미였을까? 당연 시류에 영합한 소행이었을 것이다. 도대체 '하루키가 뭔데 난리야? 나도 한번 읽어 봐야 뭔가 이야기 상대가 되지 않을까?' 하는 안 읽으면 이야기 상대에서  '소외'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보단, 호기심이 그의 소설을 읽게 만들었을 뿐이다. 그래도 명색이 책 좀 읽을 줄 안다는 인간이 '하루키'를 모른대서야 말이 안되지 않는가? 그래서 그럴까? 앞에서도 밝혔듯이 언제나  나는 '개인주의'자 였기 때문에 하루키의 소설이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다. 개인주의자가 늘 그렇듯, 그들은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편견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 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내 생각이 잘못되지 않을 수 있는 것처럼, 상대의 생각도 틀리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면 서로의 생각을 존중해 줘야하지 않은가?가 개인주의자들의 사고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말인데, 난 그 시절(하루키가 한창 문명을 떨치던 시절) 일본 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그 편견이 얉아지고 있긴 하지만). 그때 내 친구랑 버스를 타고 가다가 무슨 말 끝에 "일본 소설은 백치미적인 것 같아."라고 말했던 것 같다. 그러자 그 친구는 나와는 달리 일본 소설에 호의적이었던 것 같은데  나의 '백치미'란 표현을 상당히 인상적으로 받아 들였던 것 같다. 내가 '백치미'라고 표현했던 것은 수식은 좋은데 사람의 영혼이나 삶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서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우리 문학은 소위 말하는 '한'이라는 정서가 있고, 수 많은 질곡으로 점철되어 퍼올릴만한 질펀한 삶이 표출되어  있는데, 내가 읽은 일본 소설이란 수동적 삶에서 느껴지는 세미한 파장을 쫓는다고나 할까? 그래서 나와는 좀 맞지 않게 느껴졌다. 어쨌거나 이것은 하나의 개인적 취향이고, 스스로 갖는 느낌을 표현했을 뿐이니 그 친구는 반박이나 논쟁을 하지 않았다. 나 역시도 그랬다면 피했을 것이다. 돌이켜 보건데, 어쩌면 개인주의는 이런 식으로 나타나는 지도 모르겠다.

그 시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루키의 단편엔 꽤나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출판사에서는 '하루키'의 이름을 달고 나온 책들은 장사가 좀 되기 때문에, 여기 저기서 그의 단편을 편집할 때 이 출판사에서 나온 책엔 이런 단편들이 없고, 저 출판사에서 나온 책엔 저런 단편들이 없었기다. 그래서 나는 그의 단편집만 두권을 읽었던 것이다. 중복되는 것과 중복되지 않는 것등을 포함해서 말이다. 그리고 <노르웨이 숲>을 읽었다. 지금은 하도 오래 전에 읽어 기억하는 바는 없지만, 하루키 소설은 일본적인 것에서 상당히 많은 거리감을 두고 있고, 미국풍에 가까운 묘사를 했다는 것이 나의 구미를 당겼다. 미국 소설 역시 좋아하지도 않았으면서 하루키의 소설엔 그 어떤 묘한 매력이 있었다. 나는 '작가는 미국에 상당한 동경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라고 생각했고, 아니나  다를까? 그는 이 책에서 미국 소설을 즐겨 읽었으며 특히 트루먼 카포티에게 경의를 표했으며, 레이몬드 카버와 스티븐 킹을 좋아한다고 밝혔다.  내가 이 부분을 읽었을 때, '그러면 그렇지!' 하며 난 혼자 퀴즈라도 맞힌 것처럼 쾌재를 올렸다.   

처음에 내가 이 책을 발견했을 때, 무라카미 하루키 '평전'인가 했다. 사실 웬만해서 살아있는 사람을 주제 삼아 평전을 쓰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례적으로 움베르토 에코의 평전이 나온만큼 이것도 그런 건 아닐까, 생각했지만 역시 평전이라고 보기엔 가볍다. 그냥 어느 묘령의 작가가 하루키를 너무 좋아해서 그에 대한 자료를 모두 모아놓고, 자기 좋은대로 편집한 것의 결과물이다. 그래서 읽는데 부담이 없고,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에세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읽으면서 하루키의 인간적인 면들을 접할 수가 있어서 나름 쏠쏠한 재미가 있었다. 나의 경우 여느 작가들의 삶이나 글쓰기에 관한 기사나 저작물들을 좋아하는 편이라 이 책 역시 개인적으론 만족감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이 책에서의 특이한 점이라면, 하루키에 대한 글을 쓰면서 저자 자신의 체험이나 어린 시절의 느낌들을 간간히 써 놓고 있다는 것인데, 나 개인적으론 하루키만 알고 싶지 저자에 대해선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않아 오히려 방해물처럼 느껴졌다. 작가는 왜 무모(?)하게 이런 시도를 했을까? 아마도 이것을 일컬어 '개인주의 글쓰기'를 시도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를테면 하루키란 작가가 저자에게 어떤 영향을 줬는가를 말하고 싶었겠지. 하지만 독자를 생각한다면 절제의 미도 보여줘야 했던 것 아닌가? 아니면 그렇게 개인적인 얘기를 하고 싶었다면 좀 더 세련된 뭔가의 기술적 장치를 써서 독자에게도 공감을 줬던가. 그만큼 하루키란 작가가 저자에게 상당한 영향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난 이 점이 별로 납득이 가지 않았다.  나중에 하루키 사후에(아직 인생을 더 살아야할 사람이지만) 누군가는 본격적인 평전을 내지 않을까? 기대 반, 아쉬움 반으로 이 책의 마지막장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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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3-25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오랜만에 반가운 리뷰 추천합니다.^^ 보관함에도 담아가요^^

2007-03-25 2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07-03-25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님/다시 리뷰를 고칠까 하는 생각에 들어왔는데, 벌써 읽으셨네요. 근데 그냥 두기로 했습니다. 막상 고칠려니 번거롭네요. 리뷰는 쓰면 쓸수록 아쉬움이 남아요. 추천 고맙슴다.^^
숨어계신 님/그랬다면 더 솔직하고, 더 개인적이어야하고, 더 세련되야 할 것은데 그러지 못한 것 같더라구요. 리뷰를 쓰면 쓸수록 그냥 안 넘어가는 꼬장스러움이 생기는 것 같아요. 막상 저의 리뷰 다시 보면 부끄러워 못 보겠으면서 말이어요. 흐흐.
암튼 읽어 주셔서 고마워요.^^

2007-03-25 2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07-03-26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나의 이웃님/지적 고맙슴다. 솔직히 내 글을 객관적으로 본다는 게 참 어렵더라구요. 이렇게 지적해 주면 나야 고맙죠. 아, 그러고 보니 이 댓글에도 님이 지적한 게 또 나오는군요. 흐흐. 예전에 나의 은사님은 '왜냐하면'을 지적하셨고, 오래 전나의 '나름대로'란 말을 너무 많이 쓴다고 지적을 받았더랬죠. 이젠 님이 지적한 것과 한판 승부를 버릴 차례군요. 하하. 거미줄에도 걸려 넘어지는 게 저랍니다. 지적해 준 것 늘 상고하고 있겠슴다. 진지하고 성깔 있다는 말 내가 좋아하는 말입니다. 다시한번 감사드려요.^^
 
르네상스의 비밀 우리가 아직 몰랐던 세계의 교양 201
리처드 스템프 지음, 정지인.신소희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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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요즘의 책이라는 게 읽기에도 편해야겠지만 휴대 하기에도 편해야 한다는 게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래야 편하게 누워서도 볼 수 있으며, 가방에도 쏙들어가고 어디서든 편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가끔 그 상식을 뛰어 넘는 책들이 있다. 그것은 사람의 체형이나 구조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네가 볼테면 봐라. 하며 도도하고 럭셔리하게 그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다소곳이 있는 것이다. 마치 황진이 본색마냥.

가격도 만만치 않다. 그런 책들은 아무리 책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보통 그 분야게 관심을 갖지 않는 이상엔 좀처럼 손이 가지 않는다. 관심이 가지 않아서라기 보단 책을 사는 것까지는 좋으나 돈을 지불할 때의 손떨림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보암직도하고 먹음직도 하지만 보지 않으면 먹지도 않게될 금단의 열매 같은 것이다. 바로 이 책이 그런 책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 책이 인터넷에 그 모습을 들어냈을 때 아, 한번쯤 가져봤으면 좋겠다! 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어느 순간 금단의 열매 같은 이 책을 덥썩 잡아 볼 기회를 얻었다. 웬 호사란 말인가? 그런데 쪽수가 200 페이지를 조금 넘는다. '페이지는 얼마 안 되면서 비싸기는......' 딴은 그래서도 선듯 사기를 주저하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막상 받아 본 결과 헉~! 더 두꺼웠으면 클날 뻔했다. 받아 본 그날로부터 매일 정해진 페이지를 읽고 아무대나 던져놓을 수 없어 책꽂이에 세워놓아야 한다. 그거 세워놓은 것도 손목에 힘이 꽤 들어간다.  이 책은 쪽수는 얼마 안 되지만 결코 빨리 읽을 수도, 읽어서도 안될 책이다. 감상이 필수다. 도판에 꽤 신경을 썼다는 소리다.

르네상스라...! 서양의 역사 중 가장 화려하고 무궁무진했던 때가 아닌가. 그런데 나는 학교 졸업과 동시에 르네상스를 잊고 있었다는 걸 이 책을 보면서 새삼 깨달았다. 하기사 나의 학교 때는 역사에 그닥 관심을 갖지 않았던 때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무식의 소치가 들어난다. 나는 르네상스가 인본주의의 부흥기로써 그전까지 신본주의가 팽배했고 그것에 대한 반기로 일어난 줄로 막연하게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을 보니 이때만큼 기독교가 역사적으로나 문화 또는 예술 방면에서 빛을 바랬던 때도 없었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그 시기에 나타나고 활동했던 예술가들 대부분 예수나 성모를 찬양하기 위해 예술활동에 뛰어 들었다. 물론 각 예술가들마나 독특한 기법이 있겠지만, 그들의 하나 같은 테마는 '예수'와 '성모'였다. 하지만 나는 책에 나온 그림을 보면서 르네상스가 과연 서양의 기독교 융성을 위한 것이었겠는가에 물음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 하나, 그림에 나타난 성모와 아기 예수는 하나 같이 혈색이 좋고, 고고하다. 권위마저 느껴진다. 이것은어찌보면 기독교의 실제적 역사와는 조금은 다르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그 시대에 나타난 그림들을 보라. 시쳇말로 럭셔리 하다. 색감도 그렇고, 하나 같이 풍성한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하다못해 예수님 고난을 그린 그림조차 슬프다 못해 처절함이 느껴지기 보다, 어떻게 이렇게 럭셔리 할 수가 있지! 또 다른 면에서 감탄을 자아낸다. 예수 고난상을 나타내는데 있어서 처절함이 느껴지려면 리얼리티어야겠지만, 그 시대는 풍부하고도 고급스런 이미지만을 강조했다는 느낌이 든다. 결국 그것은 그 시대의 예술이라는 것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했다기 보다 있는 사람의 눈높이에서 만들어지고 그들의 감성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한마디로 호사가를 위한 예술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그러니 나는 그 시대의 사람들이 강력한 신심에 의해서 예술 또한 그러했을 거라고 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도 하나 부러움은 있다. 르네상스 예술에 관심있는 여간내기가 아니고서는 요즘 같은 시대에 과연 이 예술이 일반대중에게 먹힐까 싶은 엉뚱한 생각을 했다. 하지만 르네상스는 영원하다. 서양사에 있어서 어느 방면의 역사를 들추더라도(문화사든, 예술사든) 르네상스는 꼭 거쳐가야하는 필수 코스가 되었다. 그것은 어쩌면 엄밀한 의미에서 역사가의 몫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오히려 그 시대의 당대를 풍미했던 호사가들에 의해 전승 발전해 오지 않았을까를 생각해 본다(맞거나 틀리거나.). 어쨌거나 그렇게 보존이 되고 어느 한 나라만을 위한 역사적 유물이 아닌 전 세계적 유물이 되었는데,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고 말은 하면서 과연 우린 우리의 것을 전 세계에 알릴만한 재원이 있는 것일까?

왜 제목을 <르네상스의 비밀>로 했는지 저자에게 묻고 싶긴 한다. 물론 이 책을 통해 분명 내가 몰랐던 것을 새롭게 알게 됐지만 그것이 비밀스럽기 까지는 않아 보인다. 그래도 역시 예술사나 미학에 관한 책들은 좀 어렵다. 요즘은 시대가 좋아져 이 방면의 대중을 위한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 책은 르네상스에 대한 나름 예비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이 책은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뿌듯함을 느끼게 한다. 글쎄, 비싼 책이라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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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03-07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제목이 좀 그랬습니다^^;;;

프레이야 2007-03-07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싼 책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뿌듯~~ 그맘 이해합니다.^^
표지만 봐도 럭셔리 하네요.

은비뫼 2007-03-08 0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제목이 문제입니다. 아무튼 책장에 밀어넣기 힘든 터라 책상에 고이 모셔두고 있습니다. 서평 잘 읽었습니다. ^^

stella.K 2007-03-08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 고맙습니다, 님들. 이렇게 댓글 많이 받아 보기는 정말 오랫만이군요.^^

행인 2012-01-29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리뷰 잘쓰셨네요~!이 책 사려고하는데 고민이 많이되서 리뷰를 찾아봤는데 별로 쓴사람이 없더라구요 ㅋㅋ 그래서 알라딘에 들렸는데 리뷰가 하나같이 다 길어서 도움이 많이됐어요~ 특히 첫단락 비유랑 마지막에 글쎄, 비싼 책이라 그런가?! 가 참 인상깊었네요~
 
엔리케의 여정
소냐 나자리오 지음, 하정임 옮김, 돈 바트레티 사진 / 다른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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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이 책에 실린 사진을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본 적이 있다. 플리처상 보도사진 부분에서 수상했다는 짧은 제목과 함께. 사진엔 문외한이라 어떤 필름을 사용했는지 모르겠지만, 사진은 강렬했고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이 책을 처음 보면, 겉표지의 사진은 제법 서정적이고 낭만적여 보이기도 하다. 물론 지붕위에 앉았으니 불안은 하겠지. 하지만 소년의 돌아앉은 모습에 묘한 황량한 여유로움이 베어있는 듯하다. 과연 이럴 수 있을까? 그래도 소년의 마음은 보는 것과는 사뭇 다를 것이다. 몰래 무임승차 했으니 불안할 것이고, 어서 이 기차가 어머니가 있는 미국으로 데려다 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겠지. 분명 무임승차가 나쁜 것이긴 하지만 여행 하면서 무임승차와 서리의 묘미는 여행의 짜릿한 기쁨을 배가시켜 주기도 하지않던가.  더구나 제목 끝말을 '여정'으로 설정했으니 대뜸 '엄마 찾아 삼만리'를 연상하게도 만든다. 또한 '엔리케'란 리틴스러운 이미지가 주는 느낌도 남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하지만...나머지 사진이나 책의 내용은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비참하다.  살아 보겠다고 쓰레기더미를 뒤지는 아이들과 그 위를 나르는 검은 독수리의 이미지란 스산하다 못해 음산하기까지 하다. 또한 기차의 지붕위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죽을 힘을 다해 붙들고 있는 것을 보면, 사람의 생에 대한 사투는 참으로 모질다는 것을 실감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운이 없어 거기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사지가 절단 나거나 죽기도 한단다.  그런데 이들은 왜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어린 나이에 그런 무모한 도전을 시도하는 것일까? 그것은 남부럽지 않게 자식을 키워 보고자 불법이민자로 미국땅에 발을 디딘 부모를 너무나 그리워한 나머지 그러한 도전을 서슴치 않게 만든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그리워서 죽느니 차라리 어머니를 찾으러 가는 길에 죽겠다'는 필사의 각오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모정을 그리워 하는 마음이란 죽음 조차도 갈라놓지 못하는 것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나는 고백 하건데, 그런류의 보도 사진이나 뉴스 보도물 보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보면 괴롭다.내가 살고 있는 지구 어느 한쪽에서 그런 일이 끊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안타깝다. 그런데 그것 이상으로 뭘 해 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나는 저런 나라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이냐란 말로 본 느낌을 대변한다는 것도 우습지 않은가? 아무튼 그런 보도물을 접한다는 건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좀 더 나를 들여다 보면, '이 생각이 과연 전부 다인가?'가에 진실할 수 없는 나 자신을 발견해 버리고 만다. 눈이 보배라고 사람은 좀 더 나은 것, 화려한 것,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스러운 것에 눈을 두기를 좋아한다. 나 역시도 그것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매스컴은 연일 그것을 쫒기에 바쁘다. 사람의 오감을 만족시켜줘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사람들의 눈과 귀는 점점 더 길들여져 우리 바깥은 세계에 대해선 관심을 두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분야나 그렇듯 속물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가운데도 조그만 불씨하니 지펴내는 사람들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세상은 살아낼 힘을 얻는지도 모르겠다. 세상 모든 것이 썩있다면 저널리즘이라고 예외겠는가? 그래도 소냐 나자리오 같은 저널리스트가 있으니, 저널리즘은 살아있다!고 외칠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참혹한 현실을 펜대에 풀어내기 위해 그녀는 무려 5년이란 세월을 준비했고, 엔리케와의 동행을 서슴치 않았다. 그녀 역시도 가정이 있었고, 동행취재하는 동안 어떤 위험한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이 일을 감행하도록만들었는지 모르겠다. 단순한 기자 정신이라고 하면 설명이 가능할까? 아니다. 인간에 대한 지극한 애정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고로 휴머니즘은 살아있다!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이 책을 읽고 있으려니 남의 이야기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본의 아니게 어떤 개기로 작년부터 우리나라 탈북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 전에 막연하게 짐작만 하고 있는 것에서 조금은 한발 다가선 느낌이고, 알고 있기에 만나는 사람마다 내가 들은 탈북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알고보면 이 책에 펼쳐진 현실이나 탈북자들의 현실이 오버랩되는 부분이 많아 보였다. 탈북자들 역시 북한에 가족 내지는 자녀들을 두고 탈북을 한다. 그리고 중국이나 몽골, 필리핀 등지로 흩어 진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여자들은 매춘 내지는 강간을 당하기도 하고, 어쨌든 가까스로 그렇게도 원하던 한국에 발을 들여놓지만 그땐 이미 몸은 만신창이가 돼 수족 놀리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더구나 북한에 두고 온 자녀를 데려오기 위해 적지않은 돈을 벌어 알선책에게 주지만, 잘못 아이들을 데리고 와 졸지에 그 아이는 고아  신세가 되기도 한단다. 북한에 남겨진 아이들도 엔리케를 비롯한 이 책에 소개된 아이들과 같을 거라는 건 쉽게 짐작이 간다. OECD에도 가입한지 오래고, 유엔사무총장을 배출한 이 나라 대한민국 안에서도 엄연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탈북자 1만명을 돌파 했다고 한다.

가끔 나는...탈북자, 그들에게 묻고 싶었다. 당신들은 행복하냐고? 가족을 두고 이렇게 힘들게 남한 사회에 정착하게 됐는데, 남한은 과연 살만하던가요? 사람들이 잘해 주던가요? 그런데 얼마 전에 안 사실이지만,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역시 남한 사회에 정착하는 건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체제도 다를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네들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좋지 않다고 말한단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같은 민족끼린데도 박한 구석이 있지 않은가? 또한 경제적으로도 너무 안 좋으니 나 살기도 버거운 판에 남 생각을 어떻게 하겠는가?

읽으면서...행복도에서 1순위라고 하던 방글라데시를 생각했다. 없이 살기로야 이 책의 배경이 되고 있는 온두라스나 그 나라나 오십보 백보 아닌가? 그런데도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한다. 아마 모르긴 해도 그 나라는 아직 상업주의의 물결을 덜 타고 있고, 삶의 가치가 돈에 있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물론 그 나라는 국제 경쟁력은 여타의 국가 보다 떨어질지 모르나 가난을 부끄럽지 않게 여길테니 그래서는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우린 어떠한가? 물질적인 부의 가치가 개인으로 하여금 꼭 행복을 가져다 준다는 확신도 없으면서 우린 너무 쉽게 그것을 믿고 있다. 물론 어느 정도의 돈은 나와 내 가족의 안위를 보장해 줄 수 있고, 내 자녀를 좀 더 좋은 환경에서 교육시킬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 치루어야 하는 희생은 자신에게나 가족에게나 너무 가혹하다. 그리고 빈부의 격차가 심사면 심할수록 이것은 더욱 자명해진다.

가족은...어떠한 경우에도 떨어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적어도 그 사람이 독립된 인격과 경제적 자립을 얻을 수 있을 때까지는 말이다. 이것은 가난한 가정이나 부유한 가정이나 똑같이 적용되는 말이다. 자식을 좀 더 나은 환경에서 교육시켜 보겠다고 교육 엑소더스 대열에 밀어 넣은 가족들을 보라. 그중 성공한 케이스도 없진 않지만, 가족해체의 고통을 겪고 있지 않은가? 또한 엔리케를 보라. 엄마와 떨어지고 보니, 버림 받았다는 생각. 모정에 대한 그리움. 탈선. 분노 등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살아 간다. 그러니 없이 살아도, 지금 당장은 좋은 환경에서 공부시키지 못한다 해도 가족만큼은 정말로 소중하다는 것을 깨우칠 필요가 있다. 엔리케의 고통은 엔리케 혼자만의 고통이 아니다. 엔리케는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고 당장 북한에도 존재한다. 또한 아직도 제 3세계 어린 아이들이 엔리케와 똑같은 사연과 경로로 기차 지붕 위에 자신의 생명을 내던지고 있으며, 제2, 제3의 엔리케는 앞으로도 계속 나올 것이다. 그럴 때 국가는 뭘 하고 있단 말인가? 읽으면서 화가 났다.

국가가...개인의 가난을 구제해 줄 수는 없다고 한다. 하지만 적어도 가족이 떨어져서 사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제도적인 보인책은 마련해 주어야 하지 않은가? 언제까지 밀입국자가 가장 많은 나라 내지는 교육 엑소더스가 가장 많이 이루어지는 나라라는 오명을 쓰고 있을 것인가? 국민의 바람은 지극히 소박하고 당연한 것인데 그것을 들어 줄 수 없다면 국가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국가는 가정과 개인의 고통을 언제까지 침묵하려 하는지 모르겠다. 거의 속수무책이 아닌가? 더구나 천신만고의 고생 끝에 엔리케는 어머니와 상봉을 하지만 많은 정서적인 혼란과 고통을 겪게 된다. 그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그런데 이들을 치유하고 상담해 줄만한 마땅한 사회 시설이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봐 그쪽으로 부터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했던 것 같다. 하기사 밀입국자니 어디가서 도움을 받을 수 있겠는가? 병이 나도 의료보험 해택도 받지 못할텐데...미국이 무슨 봉도 아니고.  

이 책은...책이 가지는 문제점은 다소 있어 보인다. 어느 독자의 지적대로 오자나 탈자도 많지만, 동어반복적인 내용이 많아 전달에 있어서 다소는 그 긴장감이 떨어져 보였고, 무슨 문학도 아닌데 여러 사람의 얘기를 다루다 보니 다소는 산만한 느낌이 들었다. 그냥 기자의 싯점을 견지하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또한 이 책이 전 세계에 출판되고, 사진이 전파된 이후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도 언급해 주었으면 좋을텐데 그런 것을 찾아 볼 수 없는 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래도 이 책을 읽는 가치는 충분히 있어 보인다. 나는 제발 우리의 아이들이 인권 교육을 재대로 받으며 살았으면 좋겠고, 거기에 이 책이 나름 공헌할거라고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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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리더를 꿈꾼다면 대학.중용 Easy 고전 3
김예호 지음, 정우열 그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삼성출판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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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리더십에 관심을 갖고 그 분야에 관한 책을 기회있을 때마다 읽고 있다. 지금도 눈독 들이고 있는 책들이 몇권있다. 그런데 편견인지는 모르겠지만, 의외로 사람들은 리더십에 관한 책들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책도 어디까지나 취향의 문제이니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겠지만, 짐작컨대 그렇게 된데는 리더십이라고 하는 분야가 그렇게 가벼운 주제도 아니고, 또 어찌보면 처세술에 가까운 분야라고 생각하는데 기인된 것 같기도 하다. 그뿐만 아니라 정치나 기업하는 사람이 읽을 법한 한정성도 있어 보인다. 그러나 리더십이 어느 특정인만을 위한 것인가?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치인이나 기업인에 대한 안 좋은 편견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사람처럼 정치에 해박한 사람들이 또 있을까? 사람들 모인 자리에서 정치 얘기 안하면 나만 괜히 시대에 뒤떨어지는 사람 같아 보이기도 하고 그래서 열심히 정치인들 또는 그들이 내놓는 정책들에 대해 열심히 비판한다. 그런 사람 있으면 국회로 보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국회에 없다. 또한 그들의 상당 부분은 등 떠밀어줘도 안할 사람이 더 많다. 그들의 하나 같은 공통점은 점잖은 체면에 내가 왜 책임있는 자리에 서서 사람들로부터 욕과 질시를 받느냐는 것이다. 하던 뭐도 멍석 펴 놓으면 못한다더니, 꼭 그짝이다. 그러니 우리나라 사람들 비판은 잘해도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것인데, 그렇다고 한다면 누가 지도자가 되겠으며, 우리나라 지도자의 위치에 선 사람들 과연 그렇게 비판할 자격이 있는가 의문스럽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또 다른 심리는, 내 자식 지도자의 자리에 서게 되길 바란다는 것이다.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을 자식이 이루어주길 바라며, 자식의 입신양명에 대리만족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모순 아닌가? 자식이 어느 한 분야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 그냥 되는 것이 아닌데 노력없이 어떻게 지도자가 되길 바란단 말인가? 자신은 소시민적이면서 자식은 대시민이 되길 바란다는 것인가?  비록 자신은 리더가 못 되거나, 안 될지라도 내 자식이 리더가 되기를 바란다면 자신은 리더가 못될지라도 적어도 리더십에 관한 책은 좀 읽어줘야 하지 않을까?  

나는 지금까지 리더십에 관한 책들을 그리 많이 읽은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서양의 리더십과 동양의 리더십에 관한 저작물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 차이는 뭐랄까? 서양의 그것은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것이라면, 동양의 리더십은 근본적이고 우주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서양은 뭔가 지배와 관리, 관계등에 치중되어 있다면, 동양은 자연과 나를 같은 선상위에 놓고, 도덕적이며 윤리적이고 포괄적인 느낌을 갖게되는 것이다. 내가 본 이 책도 역시 그랬고, 읽으면서 마음이 넓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 책은 그 어렵다던 <대학>과 <중용> 청소년의 눈높이에서 읽기 쉽게 편집이 되있어서, 청소년기를 한참 떠나 온 나 역시도 편안한 마음으로 읽을 수가 있었다. 물론 편집만 쉽게 되었다는 것이지, 이 책은 실제 <대학>과 <중용>의 맛보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읽으면서 문득 드는 생각은, 요즘의 중,고등학교 교과서가 예전에 비해 많이 달라졌을텐데 그게 어느 정도로 달라졌을까 궁금해졌다. 과연 <대학>과 <중용>을 청소년 눈높이에서 만든만큼 그것의 가치를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을까? 200페이지도 채 안되는 얉은 책이지만 거기엔 인간의 도리와 이치에 대해서 구구절절이 옳은 말을 하고 있는데 이것을 과연 교육의 덕몫으로 삼아서 정말 잘 가르치고 있는지 묻고 싶어지는 것이다. 아마도 그럴리 없을 것이다. 이 책 뒤에 보면 부록으로 논술에 도움이 되도록 꾸며 놓은 것을 보면 역시 논술을 위한 책이란 인상을 지울수가 없다. 아, 어딜가나 논술이다. 학생들의 논리적 사고를 키워주기 위해 논술을 채택했겠지만, 논술을 위한 논술로 전락해버린 느낌이고, 이건 아예 복병이 된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논술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데 논술 쪽집게란 말도 안 되는 상술이 판을 치고 있다.  <대학>과 <중용>을 공부한다는 것이 의미가 없어져버리는 것 같다. 책도 아무리 청소년 눈높이에 맞췄다지만 꼭 이렇게 구차하게 논술 어쩌고한 의도를 숨김없이 드러내 놓고 나와야하는 것일까? 어려서부터 독서 교육을 철저하게 시킨다면 우리의 아이들은 논술을 굳이 입에 떠올리지 않아도 논리적 사고로 무장할 것이고 '논술'이라고 하는 의도성을 굳이 드러내지 않더라도 좋을 것이다.  아니할말로 학생의 해방은 이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이런 기획물도 나쁘지는 않아 보인다. 나 같이 어중떼기 독서가가 무턱대고 동양고전에 발을 들여놨다가 큰코 다치느니 이렇게 쉬운 저작물을 통해 아하~그렇구나! 하고 도를 살짝 터 주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문체도 현대적이고 쉽게 썼다. 아무리 청소년 눈높이에 맞춘다고 해도 쉽지 않을텐데 그것을 저자는 무리없이 잘 해낸 것 같다. 그리고 우리의 청소년들 모두가 당장의 실용성만을 따져서 이 책을 보겠는가? 그들 중엔 정말 한국철학을 공부하고 싶은데 마침 이 책을 발견하고 좋아라 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 학생이 분명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읽다가 생각지도 않게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리더의 길에 올라서면 어쩔건가?

우린  그처럼 리더에 대한 불신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짓밟히고 착취 당하고 살아 온 것에 대한 반감 때문일까? 아니면 리더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리더에 대한 공부를 재대로 하지 못하고 리더가 되겠다고 하는 그 모순과 위선을 보았기 때문일까? 어쨌거나 우린 그러한 현실속에서 살지라도 우리의 아이들만큼은 그런 현실속에 내몰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나는 바담풍 해도 너는 바람풍 하라'는 건 또 다른 모순이 아닐까? 나는 어른이든 학생이든 리더십을 필히 공부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반기를 들지 모르겠다. 너도 나도 리더십 공부해서 리더가 되겠다고 하면 팔로우십이나 멤버십은 어찌되겠냐고 눙쳐버리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리더십도 재대로 배우지 못하면서 팔로우십이나 멤버십이 웬말이란 말이냐? 리더십의 부재 그로인한 도덕적 해이를 엄연히 보고 있으면서 그렇게 여유로운 말을 할 때는 아니라고 본다. 리더십은 관리도, 지배도, 책임도 아니다. 리더십의 제 1의 원칙은 '배움'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 맨끝에 나오는 <중용>의 이 말이 좋다.

배우지 않는다면 모를까, 일단 배우기로 했으면 능통하기 전에는 그만두지 않는다. 묻지 않는다면 모를까, 일단 묻기로 했으면 제대로 이해하기 전에는 그만두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는다면 모를까, 일단 생각하기로 했으면 확실히 답을 얻기 전에는 그만두지 않는다. 분별하지 않는다면 모를까, 일단 분별하기로 했으면 분명해지기 전에는 그만두지 않는다. 실천하지 않는다면 모를까, 일단 실천하기로 했으면 독실해지기 전에는 그만두지 않는다. 남이 한 번에 성공하면 나는 백 번을 하고, 남이 열 번에 성공하면 나는 천 번을 한다. 과연 이러한 방법에 능통해진다면,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지혜롭게 되며 아무리 힘없는 사람이라도 강해진다.(10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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