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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 - 시드니 ㅣ 걸어본다 7
박연준.장석주 지음 / 난다 / 2015년 12월
평점 :
주말이면 신랑과 가까운 산을 다녀오곤 하는데 그날은 문경새재를 걷게 되었다. 화사한 봄날이었고 나무들은 초록색 잎사귀와 짙은 녹색 잎사귀들이 마치 물감을 뿌려 대비시켜 놓은 것처럼 멋드러졌다. 가지 끝마다 예쁜 꽃이 활짝 피어있기도 했지만, 미처 피지못하고 머금고 있는 모습이 멋져보이기도 했다.
' 오빠 이거봐봐. 어떻게 이 나무는 뿌리가 바깥으로 나와서 기울어졌는데도 살 수 있지?'
' 오빠 이거봐봐. 이 가지 끝마다 달린 꽃봉오리들을! 봄이 왔다고 누가 알려주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해마다 예쁜 꽃봉오리를 내밀 수 있는 거냐고!"
' 오빠아 이거봐봐. 이 바위 좀 봐봐. 어떻게 떨어지지 않고 저 언덕 위에 붙어 있을 수 있는거야?'
봐도봐도 질리지않고 신기한 자연현상 앞에서 내 호기심은 끝도없이 생겨났다. 그럴때마다 신랑의 대답이라는 것은 이랬다.
' 이거 잣나무 보이지? 나 군대에 있었을때 말야 배가 너무 고파서 이런 잣나무가 보이면 일단 올라가서 막 따다 먹고 그랬어'
'야 이 돌 밭 보이지. 나 군대에 있었을때 이런 곳에서 야영을 하고 잠을 자는데 밤이되면 온통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질 않아요. 춥기는 얼마나 추운데. 너 그럴때 화장실이 가고 싶으면 얼마나 곤욕인지 알아?'
' 나 군대에 있을때 말야. 이런 산길을 행군 했는데 그때 40킬로짜리 군장을 메고 행군을 했다고. 너 40킬로 멜 수 있겠어? 군화는 딱딱해서 발바닥이 아프다 못해 짓물이 생기고....'
남자와 여자가 기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안 것은 김미경 원장님의 책 < 꿈이 있는 아내는 늙지 않는다>를 읽은 후부터다. 좌뇌가 발달한 남성과 우뇌가 발달한 여성이 하루 소비하는 언어의 수는 남자는 7천 단어를 여자는 2만 단어이기 때문에 남녀사이의 말다툼이 어렵다고 한다. 아직까지 연구 중인 분야이긴 하지만 나는 남녀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부부의 연을 맺고도 한 공간에서 각기 다른 것을 바라보고 이야기하는 우리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내게 된 것은 박연준 저자와 장석주 저자의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를 읽으며 그때의 일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인의 도움으로 두 달동안 시드니에 지내면서 겪었던 이야기들을 담은 책인데, 앞 부분에는 박연준 저자가 뒷 부분에는 장석주 저자의 글이 담겨있다. 그런데 한 공간 안에서 두 사람의 시선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먼저 박연준 저자의 글엔 시드니가 담뿍 담겨있는 일상이 있다. 여행을 떠난다는 설레임. 낯설지만 낯설지않은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타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환과 이니셜 JJ라고 부르는 장석주 저자와의 일상의 이야기까지 너무 마음에 드는 글들이 넘쳐나 포스트잇이 늘어만 갔다.
■삶은 현재형이다. 과거도 미래도 수면 아래 있다. 오직 현재만이 ‘사실적으로’ 작동한다. 잘사는 것에 대해서라면 관심이 없다. 다만 많은 것들을 충분히, 고루 느끼고 싶다. 상처는 두렵지 않다. 후회가 두렵다. 오라, 갖가지 경험들. 내가 느낄 감정들, 인생을 좌지우지할 천 가지 얼굴들이여! 나쁜 경험이란 없다. 겪지 말았더라면, 생각했던 일들도 지나고 나면 괜찮았다. 누군가 내 삶을 세탁해 입어보라고, ‘처음’ 선물한 것 같다. 입어볼까? 오래된 처음처럼, 꼭 맞기를. (p19)
■ 시드니에 도착하고 6일 동안, 좀 심심했다. 시드니 외곽에 자리한 글레노리, 올드 노던 로드에서 벗어나지 않고 줄곧 머물렀다. 여독을 풀며 글레노리를 둘러보자는 계획도 있었고, 초반에 해야 할 일들(원고들!)을 처리하고 후반에 느긋하게 즐기겠다는 JJ의 고집 때문이기도 했다. JJ는 ‘인간 타자기’처럼 무언가를 쓰고 고치고 쓰기를 반복했다. 나는 가끔 떠오르는 생각들을 종이에 끼적였고, 청탁받은 월간지에 보낼 시 두 편을 쓴일 외에는 딱히 한 일이 없었다. 도착한 다음날, 침실 책꽂이에서 발견한 책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을 천천히 읽었고, 집에서 가져온 제임스 설터의 신작 『올 댓 이즈』를 여러 날에 걸쳐 읽었다. 3개월 전 타계한 제임스 설터의 마지막 작품이라 더 애틋했다. 여든이 넘은 제임스 설터가 이 두꺼운 책을 쓰고, 고치고, 쓰고, 고치고, 쓰고, 고치고, 비로소 탈고하기까지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원래 내 독서 습관은 대단히 느리고, 또 사색적인 편인데 이 책을 읽을 때는 더욱 사색적이 되었다. 사색적이란 말은 잡생각을 많이 한다는 뜻이다. ( p24~25)
■ 어리다는 것은 소위 좀 파닥일 줄 안다는 것이다. 파닥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생동이다. 살아 있다는 신호이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겠다는 선언이며, 지금 상태로 머물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가만히’,‘잠자코’ 있는 것은 어른들의 특기이다(세월호 사태 때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한 유일한 말은 가만히 있으라는 거였다. 나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만 좀 덜해도 아이들의 창의력이 지금보다 훨씬 발전할 거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어릴 때 가장 많이 들었떤 말 중 하나가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었다. 대관절, 살아 있는 것들이, 그것도 태어나서 얼마 안 돼 ‘호기심’으로 파닥이는 존재들이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어른들은 한곳에 잠자코 앉아 신문이나 책을 읽을 수 있고, 여러 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고 수다를 떨 수 있지만 아이들은 그럴 수 없다. 아이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팔과 다리를 지느러미처럼 사용해 파닥이고 싶어한다. 얼마나 경이로운 움직임인지 오랫동안 봐도 질리지 않는다. ( 파닥이는 인류 중에서 p60)
■우리는 자리를 잡고 앉아 스튜와 빵, 샐러드와 베이컨 등 음식을 잔뜩 시켰다. 롱블랙도 두 잔 시켰다. 롱블랙은 에스프레소에 따뜻한 물을 섞어 마시는 것인데 우리나라의 아메리카노와 비슷하다. 처음엔 이름이 근사해서 감탄했다. 내 멋대로 ‘긴 긴 밤’이라고 의역도 해봤다. 긴 긴 밤 한 잔이요! 얼마나 멋진가? 밤을 한 잔 마시는 시간이라니. 커피 속에서 기다란 검정도, 기다란 기차도, 기다란 밤도 넣어보며 홀짝였다. 이름이 중요한 법이다. 무엇이든 호명하고, 불러주고, 사랑해주는 순간 빛나게 된다. 완전히 달라진다. (P70)
내게도 막히던 숨이 그녀에게도 똑같다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더욱이 나와 같은 나이인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인지라 더 좋았는지도 모른다. 매일같이 낡아가는 인생이지만 그 똑같지 않은 일상에 '처음'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처음같은 하루를 선물 받는 기분으로 살아간다던 그녀. 그렇기때문에 같은 것을 바라봐도 새롭게 신기하고 더 풍부하게 느낄 수 있는게 아닐까. 아이들의 재잘거림에 함께 즐거워하고 그런 아이들에게 얼마 만큼 행복한지 묻는 시드니의 사람들에게서 묻어오는 평온함에서 우리네와는 다른 일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곤 했다.
그런데 장석주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큭큭거리며 읽게 되었다. 그 특유의 남자들의 습성(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주관적인 생각이므로 오해하지 마시기를!)으로 그 천혜의 자연인 시드니의 경관 앞에서 걷기예찬을 늘어놓는 모습이라니! 어쩌면 그렇게 달라도 너무 다르냐고 궁시렁거리기도 했다. 걷기라면 서울에서도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지 않냐며, 굳이 그곳 시드니까지 가서 걷기예찬을 늘어놓는 저자에게 부디 이니셜 P라 불리우는 박연준 저자처럼 본 그대로를 느끼고 생각할 수 없느냐고 묻고 싶었다.
■" 발바닥은 항상 옳다. 발바닥이 옳은 것이라면 발바닥을 써서 걷는 일도 옳은 일일 테다. 네발로 걷는 소나 당나귀나 낙타가 비도덕적으로 엇나간 경우를 보지 못했다. 게으름을 피운 적은 있어도 수뢰나 비리 따위에 연루된 적이 없다. 그들은 풀을 먹는다. 초식에 길들여진 이 정직한 식성은 항상 순결하고 옳다. 두발로 걷는 사람들도 그렇다. 시드니를 한 달 동안 걸어보기로 했다. 느리게, 해찰하며 천천히 걸어보기. 두 팔을 흔들고 두 발을 움직이며 전진하는 이 단순한 행위, 바람과 햇빛을 맞으며 육감적 복잡성 속으로 자신을 밀고 들어가기, 상상만 해도 가슴이 뛴다. P와 나는 그 옳은 일을 해보기로, 도덕적으로 흠결이 없는 고결한 선택을 한것이다."(P 120)
니체, 알베르 카뮈, 로버트 그루딘등 온통 옳고도 옳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끄집어와서 눈 앞에 펼쳐진 현상을 굳이 해석하려드는 장석주저자의 모습이 우리 신랑의 모습과 오버랩되는건 우연만은 아닐꺼라 굳은 확신을 하게된다. 그래서 더 말해주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부디, 철학적인 해석일랑 거둬주시고 그곳, 그 시간, 그 자리가 아니면 볼 수 없는 풍경에 사람들에 시간에 더 깊이 빠져보면 안되겠는냐고 말이다.
봄이 아니고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을 두고 군대 이야기만 꺼내는 신랑이나, 시드니의 멋진 풍경을 눈앞에 두고서 걷는 즐거움을 이야기하느라 수 많은 책들과 철학자들을 끄집어내며 시드니를 잠시 망각한 장석주 저자의 이야기나 왠지 둘의 모습이 같아보이는건 나의 착각인가 싶은 생각이 들지만, 이렇게 같은 공간에서 다른 것을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남녀 동상이몽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