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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 대하여 - 작가가 된다는 것에 관한 여섯 번의 강의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박설영 옮김 / 프시케의숲 / 2021년 3월
평점 :
마거릿 애트우드의 책이 블로그에 많이 보여서 검색하다가 만나게 된 책이다. 오랫동안 글을 써왔지만 글쓰기 관련 책을 만나면 늘 설렌다. 더구나 대중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세계적인 문학가이며 부커상을 두 차례나 수상했다는 대작가는 어떤 글쓰기로 자신의 삶을 엮어가는지 궁금했다. 서문을 읽으면서 벌써 노작가의 문장들은 나를 미소짓게 했다. 1960년대 초반에 영문학도였던 저자는 윌리엄 엠프슨이 쓴 ≪모호함의 일곱 가지 유형≫이라는 권위있는 비평서를 읽어야 했고 2000년도에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엠프슨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대략적인 주제는 ‘글쓰기’, 또는 ‘작가가 된다는 것’이었고 청년층과 노년층, 남자와 여자, 문학 전문가와 학생, 일반 독자 등 다양한 관객을 대상으로 한 여섯 번의 강의 내용이 이 책으로 엮어졌다.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지만 숱한 글쓰기 작법을 말하는 책은 아니다. 작가는 이 책에 대해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이 책은 그 강의에서 파생된 것으로, 이것은 글쓰기에 대한 책이다. 하지만 글 쓰는 법에 대한 책도, 나의 저술 활동에 대한 책도, 특정한 사람, 시대, 국가의 글에 대한 책도 아니다. (중략) 작가가 서 있는 위치에 대한 글이다. 그 위치라는 게 언제나 조금씩 달라지긴 하지만, 이 책은 한 40년 동안 글의 광산에서 노동해온 사람이 한밤중에 깨어나 그 긴 세월 동안 자신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고 그다음 날 써볼까 생각해볼 법한 책이다.’(p17)
‘그렇다면 아마도 글쓰기는 어둠, 그리고 욕망이나 충동과 관련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속에 들어가서 운이 좋으면 어둠을 밝히고 빛 속으로 무엇인가를 가지고 나오리라는 욕망 또는 충동 말이다. 이 책은 그런 어둠, 그런 욕망에 대한 책이다.’(p25)
이 책의 내용은 제1장 길찾기 제2장 이중성 제3장 헌신 제4장 유혹 제5장 성찬식 제6장 하강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글쓰기에 대하여’라는 제목과 달리 작가와 독자의 관계나 작가의 삶과 처세, 작가는 무엇을 위해 글을 쓰는가, 에 대한 주제를 단테와 셰익스피어, 에밀리 디킨슨과 에이드리언 리치 등 톨킨과 스티븐 킹에 이르기까지 장대하고 심오한 글쓰기에 대한 사유를 펼치고 있다. 재미있고 때로는 아리송한 질문과 답으로 독자들을 놀라게 한다.
할머니는 교사였고 할아버지는 시골의사, 가족에게 헌신적인 아버지를 둔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덕분인지 글에서 위트와 여유로움이 느껴졌고 작가의 시선으로 인간의 삶을 꿰뚫고 있는 통찰을 엿볼 수 있었다. 이러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면 작가의 길에서 아무런 걸림돌 같은 것도 없을 법한데 시대적 상황에서였을까. 남성 작가들과 달리 불리했던 여성 작가로서의 삶이나, 오직 예술을 좋아하는 것으로 글을 써야 했던 힘듦을 토로한다. 남성 예술가들은 예술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가질 수 있었지만, 여성 예술가에겐 그런 삶이 걸림돌이라고 여겼다. 또 그 시대에는 ‘돈을 위해’ 글을 쓴다거나 그렇다고 생각만 되어도 매춘 행위로 취급받았다고 한다. 베스트셀러로 만들기 위해 마케팅을 하고 여성 작가들이 활약이 두드러지는 지금의 현실과 얼마나 대비되는 이야기인가. 오직 돈을 위해서, 가난에 허덕이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글을 썼던 체호프, 관객에게 먹힐만한 글을 썼던 셰익스피어, 전업으로 글을 썼던 찰스 디킨스, 제인 오스틴과 에밀리 브론테 등을 언급하면서 돈이라는 요소를 놓고 볼 때 누가 더 낫다거나 못하다고 재단할 수 없지 않느냐고 말한다.
많은 책을 섭렵하다 보면 필경 작가로 태어나는 것일까. 열여섯이 될 때까지 폭넓으면서 무차별적이었던 독서 경험-제인 오스틴부터 싸구려 SF와 ≪모비딕≫까지 아울렀지만, 아무도 과장이나 직업으로서의 글쓰기, 일로써 글쓰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환경 속에서 어떻게 작가가 되었을까. 축구장을 가로질러 하교하던 중 머릿속으로 시를 쓴 뒤 종이에 옮겨 적었는데 그때부터 오로지 글을 쓰고 싶었다고 한다. 야구장에서 소설을 써야겠다고 결심하던 하루키가 떠오른다. 이렇듯 작가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부터 대작가의 작품들을 인용하며 글쓰기 강의는 물 흐르듯 이어진다.
‘책을 출간하는 것은 때로 자신이 마음속으로 저지른 것과는 전혀 다른 범죄로 재판에 회부되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종류의 예술가는 총살 집행장에 일렬로 줄을 서 있다”는 악담을 피해갈 수 없다는 점에서 전부 같습니다.
한 권의 책이 나오는 것을 산고(産苦)에 비유하기도 한다. 책 출간으로 재판에 회부되고 총살 집행장에 일렬로 줄을 선 예술가들의 모습으로 표현한 부분을 읽으며 웃음이 났다. 대문학가도 이렇게 예민하구나. 일단 집필이 끝난 작품은 작가의 품을 떠나 독자의 손에 들어간다. 호평도 있지만 따끔한 독설도 있기 마련이다. 어쩌면 작가에게 있어 숙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밖에도 작가의 ‘이중성’에 대한 얘기도 흥미로웠다. 모든 작가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작가’라는 이름은 두 개의 독립체가 형성하는데, 글≪을 쓰고 있지 않을 때의 존재와 글쓰기를 하는 같은 육체를 말한다. 책을 썼던 그 사람은 이미 다른 사람이 되고 없기 때문에 ‘작가는 두 자아가 한 몸을 공유하고 있으며 다른 자아로 변하는 순간을 예측하거나 포착하기 어렵다.’(P71)고 했다. 이 ‘이중성’ 이야기는 “우리 중 누가 이 글을 썼는지 모르겠다.”고 말한 보르헤스의 딜레마를 꺼내고 나아가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에 나오는 탄소 원자 이야기로 나아간다. 또 글을 쓰는 행위는 ≪거울 나라의 앨리스≫가 거울을 통과하는 순간에 벌어진다고. 결국 작가와 독자는 모두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시간을 경험하게 된다고. 이중성 이야기는 왠지 신비스럽게 느껴졌다.
여섯 번의 강의를 모아 놓은 이 책은 순서대로 읽어도 좋지만 끌리는 장을 먼저 읽어도 좋을 것 같다. 글쓰기는 이렇게 해야 한다거나 작가는 꼭 이래야 한다고 말하기보다는 주로 질문형으로 던지기 때문에 생각할 거리를 안겨준다. 책을 읽는 사람은 글쓰기와 작가에 대한 지향점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작가의 얘기는 만족스러운 지적 사유를 선물로 줄 것이다. 생각지 않게 이 책을 오래 걸려 읽고 리뷰를 늦게 쓰는 바람에 처음 느꼈던 감흥의 정도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부분도 있다. 이것은 온전히 내 책임이다. 가끔 들춰 보며 내 글쓰기는 어떻게 나아가고 있는지, 독서의 범위가 편협하지 않은지 점검해 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