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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머리 앤 ㅣ 더디 세계문학 12
루시 모드 몽고메리 지음, 김지혜 옮김 / 더디(더디퍼런스) / 2018년 10월
평점 :
오래 전 열 권짜리로 읽은 책에서는 앤이 길버트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린 이야기도 들어있었던 것 같다. 여기서는 앙숙이었던 앤과 길버트가 겨우 친구로 지내기로 하고 지난 일을 용서하고 화해한 부분까지다. 예전의 기억으로는 정말 재미있어서 몇 번을 반복해서 읽었고, 특히 앤과 길버트의 자존심 싸움, 우정이 사랑으로 바뀌어가는 과정을 보면서 괜히 두근두근 마음 설렜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는 읽으면서 눈물이 마를 새가 없었다. 짠한 마음에 울컥하고 아이 같지 않은 말투에 웃다가 울고. 생각해보니 예전에 읽었을 때는 눈물이 나거나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마도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키워본 엄마로서 측은지심이나 공감대가 확장되어 다른 느낌으로 와 닿는 것 같다. 여전히 앤은 매력적이었다. 매일이 감탄이고 매사가 놀라움이었다.
“초록 지붕 집의 매슈 커스버트 아저씨 되시죠? 만나 뵙게 돼서 정말 반가워요. 데리러 오시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하던 참이었어요. 못 오실 상황이 뭐가 있을까 혼자 온갖 상상을 하고 있었죠. 만약 오시지 않으면 저기 아래 기찻길을 따라 내려가서 길모퉁이에 있는 벚나무 위에 올라가서 밤을 보내려고 했어요. 저는 무서움을 잘 안타거든요. 그리고 흰 꽃들이 흐드러지게 핀 벚나무 위에서 달빛을 받으며 잔다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일이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그리고 대리석으로 된 방에서 머문다고 상상할 수도 있고요. 그렇죠? 게다가 오늘 못 오시면 내일은 꼭 오실 거라고 믿고 있었어요.”(P22)
매슈와 마릴라 남매는 노바스코샤의 한 고아원에서 남자 아이를 데려오기로 하고 브라이트리버 역에 갔는데 남자아이는 보이지 않고... 매슈와 마주친 역장이 어린 여자아이가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듣고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왜 남자아이가 아니냐고 물어봐야 하는 일이 숫기 없고 소심한 매슈에게 힘겨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을 눈치라도 챘을까. 처음 보는 매슈에게 천연덕스럽게 말문을 여는 앤이다. 작고 뼈만 앙상한 아이가 눈망울을 반짝이면서 달콤한 목소리로 재잘대는데 말없고 수줍은 예순의 매슈는 자기도 모르게 연민을 느낀다. 혼자서 수습하기 힘들어서 일단은 데리고 가서 마릴라에게 떠넘겨야겠다면서 초록색 지붕의 집으로 데리고 간다. 아저씨와 가족이 된다니 꿈만 같다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집으로 가는 내내 주위의 경치에 감탄하면서 잠시도 말을 멈추지 않는다.
“저를 원하지 않으시는 거죠! 제가 남자아이가 아니어서 싫으신 거죠! 제가 그 생각을 못했네요. 아무도 저를 원한 적이 없었죠. 영원히 지속되기엔 너무 아름답다는 걸 진작 깨달았어야 했는데. 저를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 아, 저는 이제 어쩌면 좋죠?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아요.”(P39)
황홀한 꿈을 꾸며 집에 왔는데 마릴라의 놀라는 반응에 앤은 눈물범벅이 된다.
“아주머니께서 고아라고 생각해보세요. 집이라고 생각했던 곳에 왔는데 남자아이가 아니라는 이유로 원치 않는다는 소리를 들었고요. 아주머니도 분명 울고 싶을 거예요. 제 인생에 가장 비극적인 일이라고요!”(P40)
“못 먹겠어요. 저는 지금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다고요.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어떻게 음식이 넘어가겠어요?”(P43)
인생에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는데 어떻게 밥을 먹겠느냐고. 외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살아오던 매슈, 마릴라 남매에겐 감정이 풍부하고 꼬박꼬박 할 말 다하는 앤을 보고 참 당황할 만도 하겠다. 하지만 자신의 절박한 심정을 유감없이 표현하는 앤을 보면 안타까우면서도 웃음이 난다. 어쩌면 이렇게 사랑스러운지.
“매슈 아저씨는 좋은 분이세요. 동정심도 많으시고요. 제가 쉴 새 없이 재잘거려도 괜찮다고 하셨어요. 심지어 제 수다를 즐기시는 것 같았는걸요. 저는 아저씨를 보자마자 영혼의 단짝을 만난 기분이었어요.”(p54)
“차마 못 나가겠어요. 여기서 살 것도 아닌데 초록 지붕 집과 사랑에 빠진들 무슨 소용이 있어요. 밖에 나가면 저 나무, 꽃, 과수원, 개울이랑 친해지게 되고, 그러면 저는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단 말이에요. 지금도 충분히 힘들어요. 더 힘들어지면 곤란해요. 다들 절 부르는 것 같아요. ‘앤, 앤, 이리 와, 같이 놀자.’ 이렇게요. 하지만 나가지 않는 게 좋겠어요. 결국 헤어질 거라면 사랑해봤자 아무 의미가 없잖아요. 게다가 사랑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건 얼마나 힘든 일인데요. 여기서 살게 될 거라고 생각했을 때 정말 좋았던 점이 바로 그거예요. 저는 사랑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을 거라 생각했고, 아무도 저를 방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한순간의 꿈이 되어버렸죠. 이제 제 운명을 받아들일 참인데 다시 운명을 거스르고 뛰쳐나갈까봐 두려워요.”(P55)
매슈를 따라 오면서부터 온갖 상상을 하며 꿈을 꾸었건만 다시 고아원으로 돌아가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앤의 상황이 안타깝다. 하지만 결혼도, 아이도 키워보지 않은 앤이 마릴라는 귀찮기만 하다. 다시 고아원에 보내려고 화이트샌즈에 가서 스펜서 부인을 만나러 간다. 앤의 수다에 질려하는 마릴라는 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달라고 한다.
“상상력이 없었더라면 하루하루 버티기 어려웠을 것 같아요. 해먼드 아저씨는 그곳에서 작은 제재소를 운영하셨고, 아주머니는 여덟 명의 아이를 돌보셨죠. 아주머니께서 쌍둥이만 세 차례 낳았거든요. 아이들은 숫자가 적당할 때는 귀엽지만 쌍둥이를 세 번이나 연달아 낳는 건 너무 많잖아요. 저는 막내 쌍둥이들이 태어났을 때 단호하게 말씀드렸어요. 얘들을 돌보느라 제정신이 아닐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거든요.”(P62)
“어…… 본마음은 그러셨을 거예요. 진심이 그러했다면 밖으로는 늘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해요. 그분들은 나름대로 고민거리가 많은 분들이셨어요. 술주정뱅이 남편과 같이 산다는 거나, 쌍둥이를 연달아 세 번이나 낳아 키우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잖아요. 그분들도 본마음은 제게 잘해주고 싶으셨을 거예요.”(P64)
그렇게 엄격하고 냉정한 마릴라도 앤의 지난날 이야기를 듣고는 안타까움에 심경의 변화가 생긴다. 얼마나 굶주리고 궂은일과 가난, 홀대로 지친 삶을 살았던 것일까. 정말이지 상상력이 없었다면 살아갈 수 없었을 것 같다.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앤이기에 견뎌내지 않았을까 싶다. 결국 마릴라는 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렇게 천국과 지옥을 경험한 앤은 마릴라와 매슈와 가족이 되어 온갖 사건이 끊이지 않는 좌충우돌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저 눈물이 나요. 이유는 모르겠어요. 저 지금 너무 기쁜데 말이죠. 아, 기쁘다는 말로는 부족해요. 환희의 새하얀 길과 벚나무를 봤을 때도 기뻤어요. 하지만 그대와 지금은 달라요. 그때보다 훨씬 더한 기쁨이에요. 아, 너무 행복해요. 착한 아이가 되겠어요.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요. 토머스 아주머니는 저더러 매번 꼬마악당 같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노력해볼게요. 그런데 왜 자꾸 눈물이 나는 걸까요?”(P81)
초록 지붕 집에서 살게 된 앤의 꿈이 이루어져 기쁨을 이야기하는 뭉클한 장면이다.
“집이라는 곳이 있고,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건 참 행복한 일 같아요. 전 초록 지붕 집이 참 좋아요. 지금가지 어딘가를 이렇게 좋아해본 적이 없었어요. 집이라고 느낄 만한 곳이 없었거든요. 아, 마릴라 아주머니, 저 정말 행복해요. 지금 당장에라도 기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기도가 하나도 어렵지 않을 것만 같아요.”(P114)
순수하고 감수성 풍부한 앤이 내뱉는 어른스러운 말에 웃음이 난다.
여자아이라면 질색이었던 마릴라는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모성애를 느끼며 마음이 혼란스럽다. 우리는 가끔 잊고 사는 건 아닌지.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가지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사는 건 아닌지 돌아보며 살 일이다. 앤처럼 세상에 대하여 감탄하는 것을 우리는 다시 배워야 하지 않을까.
“아무것도 먹지 못할 것 같아요. 마음이 아파요. 언젠가는 아주머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실 거예요. 제 마음을 찢어 놓으셨으니까요. 하지만 용서해드릴게요. 그때가 오거든, 제가 용서했다는 것을 기억해주세요. 그리고 저더러 뭘 먹으라고 하지는 말아 주셨으면 해요. 특히 삶은 돼지고기와 채소라면 더 더욱이요. 상처받은 사람한테 어울리는 음식은 아닌 것 같아요.”(P146)
“제가 이실직고할 때까지 방에 가둬둔다고 하셨잖아요. 전 소풍을 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뭐라도 고백을 해야 했어요. 그래서 어제 밤새 침대에 누어서 이야기를 만들어냈어요. 가능한 재밌는 이야기를요. 그리고 까먹지 않으려고 연습도 많이 했어요. 그런데 결국 소풍을 못 가게 되었어요. 전부 헛수고였던 거죠.”(P148)
또 하나의 영혼의 단짝 다이애나와 친구가 되고 난생 처음으로 소풍을 가게 되어 들뜬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는데, 마릴라의 브로치가 없어져서 앤은 의심을 받게 된다. 브로치를 만져보기만 한 건데. 용서해 주겠지 싶어서 그토록 가고 싶었던 소풍을 가기 위해 거짓 고백을 했는데... 자신의 숄에 붙어 있는 걸 찾아내고 마릴라는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안타까운 상황과 어이없는 반전에 눈물과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이런 날에 살아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기쁘지 않아?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이 불쌍해. 이런 날을 누려보지 못하잖아. 그 사람들도 언젠가는 좋은 날을 맞겠지 물론. 하지만 이렇게까지 눈부시진 않을 거야. 게다가 학교 가는 길마저 이렇게 사랑스러우니 황홀하지 않아?”(P151)
“단풍나무들은 참 다정해. 항상 바스락거리면서 나한테 속삭이거든.”(P155)
“다이애나 때문이에요. 전 다이애나가 너무 좋아요. 그 얘 없이는 살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런데 우리는 어른이 되면 다이애나는 결혼을 해서 저를 떠나 멀리 가버리겠죠? 아, 저는 그럼 어떡해요. 그 얘 남편이 될 사람이 너무 싫어요. 상상만 해도 너무 싫어요. 그 아이의 결혼이고 뭐고 상상을 했더니 죄다 싫었어요.”(P170)
다이애나와 앤의 우정은 우정을 넘어 사랑하는 연인과 다름없다. 숲을 같이 걸으며 나무와 호수, 다리 등 온갖 것들에게 이름을 붙여준다. 세상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깊은지. 어른 못지않은 삶의 철학이 느껴진다. 학교에 가게 되고 친구를 사귀고 공부에 열중하면서 점점 성장하는 앤을 보는 일은 대견스럽다. 어딜 가나 실수와 사건은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모두 좋은 매듭을 지어가면서 조금씩 성숙해지는 앤이 되어 간다. 상상력과 감수성이 풍부한 앤의 말은 기억하고 싶은 말이 넘친다. 오랜만에 읽었어도 재미와 감동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앞으로도 사랑스런 앤과 자주자주 만나서 이야기도 듣고 살아가는 힘을 얻어야겠다.
“사랑하는 나의 오랜 세상아! 넌 정말 사랑스러워. 내가 네 안에 살고 있다는 게 기뻐.”(P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