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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쾌변 - 생계형 변호사의 서초동 활극 에세이
박준형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6월
평점 :
이 책을 처음 접하고 제목과 표지 그림부터 흥미롭게 다가왔었다. 처음엔 ‘쾌변’이란 말이 화장실의 그 ‘쾌변’인가 했는데 말로 시원하게 쏟아내는 ‘쾌변’이었다. 중의적 표현이 재치 만점이다. 배설을 시원하게 해야 독소가 쌓이지 않듯이 할 말도 하고 살아야 앙금이 남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세상이 어디 할 말 다하고 살 수 있을 만큼 만만하기나 한가. 온갖 사연을 안고 찾아오는 사람을 만나야 하는 변호사라는 직업도 아무나 하는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변호사라는 직업인으로서 일상을 살면서 회의가 밀려올 때마다 그것을 분출할 수 있는 출구가 필요했다 한다. 우연히 브런치를 발견하고 잡담처럼 써내려간 이 이야기가 브런치북 7회 대상을 수상하고 책으로 나온 것이다. 여기에는 법률과 사법제도나 법률가의 심오한 개똥철학 같은 것은 나오지 않으니 기대하지 말라고 한다. 아프기만 한 청춘들을 보듬어 줄 수 있는 희망의 메시지도 없고 오히려 자기가 더 아픈 것 같다는 말에 웃음이 빵 터졌다.
흔히 변호사라는 직업군은 엘리트 집단이며 수많은 사람들의 억울한 사연들을 들어주고 대변해주는 정의감으로 똘똘 뭉친 든든한 원군처럼 여기지 않은가.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 고상함과 무거움을 확 벗어버리고 가볍고 아주 신랄하게 자신의 일터 풍경을 털어놓는다. 부제도 ‘생계형 변호사의 서초동 활극 에세이’라고 되어 있듯이 톡톡 튀듯 살아있는 생생함이 전해졌다. 예전에도 법정 드라마를 꽤 좋아했고 2년 전에 언제나 승승장구하는 괴짜 변호사의 이야기를 담은 일드 <리갈 하이>를 엄청 재미있게 보았는데 이 책을 보니 역시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었다. 저자는 현실과 괴리가 있는 변호사에 대한 해묵은 오해와 편견이 해소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을 썼다 한다. 보통 사람들이 소름 돋을 만큼 똑같은 일상을 견디며 살아가는 것과 같이 변호사의 삶도 다를 게 없다는 것을 가감 없이 보여주었다.
저마다 사연을 갖고 변호사를 찾아오는 의뢰인들을 보면서 우리 사회의 모습이 보였다. 억울한 사연을 들고 변호사를 만나러 왔을 때는 어떻게든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찾아오겠지만 어떻게 항상 이길 수 있겠는가. 수임료를 지불했는데 패소한 것에 불만을 품고 찾아오는 의뢰인들을 마주하는 일이 참 난감하고 괴로운 일이겠다 싶었다. 억울한 사연이라는 건 거의가 돈 문제가 걸리지 않은 게 없었다. 재산 싸움, 못 받은 돈을 받아내는 사건, 사기에 휘말려 돈을 되찾는 사건 등 사람 사는 삶의 냄새가 폴폴 났다. 열심히 이리 뛰고 저리 뛰어 사건을 마무리한 후에 변호인으로서 수고한 대가인 성공 보수금을 주지 않으려는 의뢰인에 대한 이야기 등 일터의 이야기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보통 사람들의 고정된 월급도 아니기 때문에 싸워서 받아야 하는 불편함이라니.
이 땅에 2만 7,880명 이상의 변호사가 있다는데 의뢰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변호사는 ‘변호사 놈’ 아니면 ‘변호사님’ 딱 두 종류로 불린다는 이야기는 정말 웃기고도 씁쓸했다. 승패에 따라 호칭이 달라지는 거였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이 재판도 승자와 패자가 있기 마련일 텐데. 1등만 알아주는 세상은 어느 분야에나 속속들이 파고들어 있었다. 사건이란 생물과도 같아서 어디로 튈지 알 수 없고 멀쩡히 잘 살아 있다가도 하루아침에 죽어버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신이 아닌 이상 어떻게 그걸 마음대로 할 수 있단 말인가. 승률을 따지는 것은 스포츠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변호사 생활 3년 만에 급성 골수성 백혈병으로 사망한 남편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찾아온 의뢰인을 만난다. 개인이 회사를 상대로 싸운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기사를 통해 들은 적 있다. 새로운 사건을 만날 때마다 어떤 법리가 적용하는지 공부해야만 한단다. 이런 상황에서 일에 대한 경험이나 사명감이 크지 않을 때이니 어떻게든 회피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겠다. 이런 사건은 승산이 높지 않다, 어려운 싸움이 될 것 같다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의뢰인의 적극적인 행동에 어쩔 수 없이 사건 해결에 힘을 모아 승소하게 되고 저자는 뼛속까지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한다. 어렵고 힘든 일을 기피하려는 우리 보통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삶이 일이고 그 속에서 배우면서 반성하고 좀 더 성숙한 직업인이 되어 가는 건 아닐까. 부끄러운 이야기를 털어놓는 용기에 진솔한 감동이 묻어났다.
오래전에 <한 지붕 세 가족>이라는 드라마를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로펌 이야기다. 변호사 군단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곳은 거의 전투장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사건을 수임하고 성과를 내기 위해 중무장한 변호사들 집단이 아닌가. 간혹 의뢰인들은 변호사들이 많이 모여 있는 로펌에 오면 그 숫자만큼 능력도 클 것이라는 오해를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한 지붕에 각각의 1인 기업이 밀집되어 있는 공간일 뿐이라는 것이다. ‘로펌의 이익 극대화’라는 공통된 목표가 있을 수 없고 오직 구성원 ‘개인의 이익 극대화’라는 개별적인 목표만 있을 뿐이다. 심지어 사무 집기에 대한 비용을 분담하는 문제로 변호사끼리 다투어서 법인이 깨지는 일도 있다는 말에 너무 웃음이 났다. 점잖고 고상해 보이는 변호사 분들도 손해를 보고 싶지 않은 보통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었다.
'한 지붕 밑에 있지만 죄다 남의 식구들이라, 알고 보면 우리는 우리가 아니라 그렇다.'(P144)
웃기고도 슬픈 이 문장. 그냥 모여서 각자 일할 뿐이라는 것. 이런 이야기를 털어내는데 꽤 눈치가 보이지 않았을까. 만만한 막내라서 복 대리를 섰다가 판사에게 핀잔을 듣고 왠지 호구가 된 것 같아 씩씩거린다. 주먹이 부들부들 떨려서 변호사를 때려치울까 하다가도 대출금 메시지에 다시 꼬리를 감춘다. 아참, 너무 솔직해서 공감하게 되고 위로가 된다. 다 그렇게 사는구나 싶다. 실무 실습하러 온 새내기들에게 남의 돈 계산 잘해야 하니 엑셀을 잘 익혀두면 편하다는 말을 했다가 찬물 끼얹은 분위기를 만들기도 하고, 직업병으로 인해 10년 만에 상담을 요청한 친구에게 맞춤법을 트집 잡다가 바가지로 욕을 얻어먹기도 한다. 생생한 일터의 이야기가 이상하게도 응원의 메시지 같이 느껴졌다.
‘아등바등 간신히 오늘을 보내봤자 오늘을 쏙 빼닮은 내일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어쩐지 이번 생애는 갑갑한 현실이 획기적으로 바뀌지 않을 것 같고, 사실 다음 생이라고 이보다 나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생업으로 심신을 하얗게 태운 보통 직장인이 하루를 반추한 결과가 고작 이 모양일 때, 어느덧 ‘나만 이렇게 사나’ 싶은 짜증과 불만이 밀려올 때, 똑같은 소릴 읊조리며 옆에 쪼그려 투덜거리는 생면부지의 동병상련이 되고 싶다. ‘그래도 오늘까지 별 탈 없이 수습해서 다행이야’를 되뇌며 마법 같은 정신 승리로 한 줌의 안도감을 얻고 싶다.'(P258)
다른 직업의 세계가 좋아 보여도 실상 안을 들여다보면 다 비슷비슷한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것 같다. 꿈에 그린 직업이 아니라 ‘어쩌다’ 변호사가 되었단다. 살아가는 것은 거의 비슷하지 않을까. 이 땅에 직업인으로 살면서 자신의 일에 긍지와 사명감으로 충만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오늘 간신히 일을 해결하고 나면 또 어제와 똑같은 하루를 맞이하게 된다. 고상해 보이는 변호사의 세계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느꼈다. 용가리도 아니고 통뼈도 아닌, 생계를 위해 일하는 변호사도 똑같이 아프고 늙는 사람이라는 말에 깊은 공감이 갔다. 오늘도 열심히 삽질하며 하루 일과가 무사히 끝나기를 기도하는 보통 사람들이 읽고 힘을 얻었으면 좋겠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