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당신의 별자리는 무엇인가요 - a love letter to my city, my soul, my base
유현준 지음 / 와이즈베리 / 2019년 2월
평점 :
품절
‘우리의 도시는 부서진 장난감 더미와도 같다. 곳곳에 쓸모없는 공간들, 버려진 공간들, 쓰레기 같은 건축물들뿐이지만 그 와중에도 새로운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공간들이 있다. 건축가의 눈으로 보면 도시에는 재활용할 수 있는 공간이 많다. 우리가 프랑스어를 배우면 샹송이 들리듯이, 공간에 나만의 가치를 부여하는 방식을 배운다면 이 도시는 새롭게 재창조될 수 있다.'(P16)-플롤로그 中
책 제목이 꽤 낭만적으로 다가왔었다. 유년시절, 청년시절의 추억이 담긴 공간 외에도 보물찾기 같은 의미를 부여하며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많은 도시 공간을 알려준다. 특별함을 주었던 공간, 연인을 위한 도시의 시공간, 혼자 있기 좋은 도시의 시공간, 일하는 도시의 시공간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늘 우리가 접할 수 있는 흔한 공간임에도 관심을 두지 않으면 그저 스쳐지나가는 곳과 일생 동안 한 번도 가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장소까지 쉴 새 없이 우리를 안내한다. 건축가라는 저자에게는 공간의 의미가 각별한 의미를 가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의 글은 내 유년시절 추억 속의 공간들을 불러내기도 했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뭉클해지기도 했다.
‘나를 만든 공간’들은 유년 시절의 장소와 청년 시절 공부했던 곳과 여행지의 장소들을 보여준다. 유년 시절의 골목길 등 학교 계단, 운동장 등의 공간은 평화로움이 느껴졌다. 다정했던 형과 마당에서 놀던 모습의 사진 등 가족 이야기를 통해서 여유 있고 다복하게 살아가는 서울 사람들의 가정은 이런 분위기였구나 싶었다. 그렇게 행복한 공간에서 함께 시간을 보낸 것에 큰 자부심이 느껴졌고 부럽기도 했다. 시골에서 자란 나의 어린 시절은 무엇이든 결핍의 일상이었다. 학용품도, 비오는 날 쓰던 우산도. 초등학교 시절 몹시도 바람 불고 비 오던 등교 길에 파란 비닐우산이 뒤집혀 부끄럽던 기억도 떠올랐다. 집에서 제일 먼저 나서야만 제대로 된 우산을 갖고 갈 수 있었던 시절. 지금은 웃을 수 있는 아련한 추억이지만. 그는 그동안 지내온 좋아하는 공간들을 추억하면서 글을 쓰는 동안에도 무척 행복했을 것 같았다. 역시 글을 쓰는 과정을 통해 자신을 더 들여다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자신이 지냈던 공간은 어떤 모습으로든 한 사람의 평생 동안에 각인 된 이미지로 남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P156. 한남대교 다리 밑 공간.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다리 밑 공간이 아닌가. 한남대교 아래에는 거대한 콘크리트 기둥이 1킬로미터 넘게 줄을 서 있는데 저자는 이 모습이 이집트 신전 기둥보다 멋진 모습이라는 찬사를 보낸다.
<사진> 두무개길(P168)옥수동, 금호동 한강변에 있다는 두무개길.
‘건축에서 ’아치arch‘는 특별하다. 다른 예술과 달리 건축만의 아름다움이라고 한다면 중력을 이기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런데 아치는 중력을 이기는 모습이 우아하면서도 긴장감 있는 곡선으로 드러나 보이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 위대한 건축가 루이스 칸은 이런 이야기로 아치를 설명하기도 했다. “벽돌은 아치가 되고 싶었다. 그러자 건축가가 아치는 비싸서 안 된다고 말했다. 그 말에 벽돌은 슬퍼졌다.” 그만큼 아치는 만들기 어려운 건축양식이기도 하다.’(P166)
이렇게 아름다운 건축 양식임에도 비싸고 만들기 어려운 특성 때문에 아치 구조를 찾아보기 힘든 가운데 서울에 이런 건축물이 존재한다니 정말 신기하고 반가웠다. 반원형의 아치 사이로 들어오는 빛의 풍경을 보는 일은 색다른 경험일 것 같다. 저자는 마치 르네상스 시대 빌라에서 아치 창문으로 서울 풍경을 보는 듯한 느낌이라고 했다. 공사비를 절약한다는 착상으로 건축되었지만, 채광과 통풍은 물론 보기에도 아름다운 아치 구조를 갖게 되었으니 그 아이디어도 대단하다.
서초동 경부고속도로 옆. <사진>P287.
‘건축에서 벽이 얼마나 위대한 건축 요소인가를 느끼게 해주는 공간이다. 벽은 이러한 반전의 공간을 만든다. 벽은 단순히 소통을 막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안 좋은 요소를 차단함으로써 새로운 공간을 만들기도 한다.’(P287)
방음벽을 사이에 두고 가장 빠른 경부고속도로와 나무가 울창한 산책로가 펼쳐진 가장 느린 공간이 하나의 장소에 공존할 수 있는 이유를 알려준다. 벽이란 대개 부정적인 이미지로 그려지지 않았나 싶다. ‘벽창호’가 그렇고 살면서 수없이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히기도 하고. 벽은 그렇게 걸림돌을 제거하고 반전의 공간을 만드는 존재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삶에 대한 깊이를 더 느끼려면 죽음은 그림자처럼 따라야 한다. 삶이 빛이라면 죽음은 그림자다. 그림자는 빛을 느끼게 해준다. 가끔씩 죽음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을 찾아가보는 것도 의미있는 삶을 위해 좋을 것이다.’(P340) -현충원
어렸을 적 고모네 집에서 돌아가신 고모부의 신주를 모시는 공간을 보았고 마을에는 사당이 있었다. 자주 볼 수 없었지만 어쩌다 그런 곳에 들어가면 왠지 쭈뼛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때만 해도 죽은 사람들과 함께 한 공간에 있었구나 싶었다. 지금 우리 현실은 많이 달라졌고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기 쉬운 환경에서 살고 있다. 가끔은 죽음을 떠올리면서 현재의 삶을 돌아보고 가꾸어야 한다는 뜻으로 들린다.
‘인생은 차선(次善)이 모여서 최선(最先)이 되는 것이다.
원래 최선들이 모여서 최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온갖 멋진 옷과 고가의 액세서리를 다 하고 나면 완전 촌스러워질 수 있다. 모자라는 듯한 것들이 모여 조화를 이룰 때 아름답다. 그러니 내가 원했던 길이 막힌다고 해서 속상해하지 말라. 때로는 그게 빨간 신호등처럼 조금만 기다려도 파란불로 열리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옆길로 가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다. 지금 열린 길이 최선이 아닌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렇지만 결국에는 그런 길들이 모여 예상치 못한 멋진 곳으로 인도해주기도 하는 것이 인생이다.’(P403)-남산 순환도로
우리는 누구나 인생이 고속도로에 직선도로이기를 갈망한다. 하지만 뜻대로 진행되지 않는 것이 삶 아닌가. 길을 가면서 그 길의 끝이 보이지 않더라도 좋은 것을 상상하면서 희망을 거는 일, 그것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인지도 모른다. 구불구불 돌아가지만 경치 좋은 남산순환도를 애용한다는 저자는 지금 우리가 돌아가는 길이 남산순환도로 일지도 모른다면서 일단 길이 열리는 데로 걸음을 떼라고 말한다.
‘인생을 살면서 모든 순간이 아름다울 순 없다. 순간순간이 아주 가끔 아름다울 뿐이다. 우린 그 순간들을 이어서 별자리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 삶이 모두 대낮처럼 밝을 수 없고 약간의 별빛만 있다면 우리는 그 별빛들로 별자리를 만들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 삶을 아름답게 만들려면 희미하지만 검은 하늘에서 빛나는 별들을 찾고, 잇고, 이야기를 만드는 ‘시간’을 들여야 한다.(P411)
밝고 찬란한 빛은 아닐지라도 희미한 불빛 같은 희망으로도 우리는 살 수 있다. 그 희미한 ‘별빛’을 이어서 우리만의 ‘별자리’를 만들고 이야기를 만드는 시간을 갖자고 한다. 그것은 지치고 힘든 현실에서 우리에게 위안을 주고 다시 나아가는 삶의 메시지가 될지도 모른다.
소박하고 인정미 넘치는 ‘재래시장’의 냄새부터 미술관의 세련된 공간 등 수많은 도시의 시공간들을 눈앞에 소환시켜 닫혀 있던 우리의 감각을 깨운다. 건축가의 글이 이렇게 감성적이어도 되는 것일까. 마치 건축을 하듯 세밀한 언어를 짓는 듯 소박함과 세련미가 느껴지는 공간에 대한 통찰에 감탄했다. 사진가 양해철이 촬영한 공간들의 멋진 시각적 이미지와 더불어 이 책을 빛나게 하는 것 같다. 이제 우리도 지금 머무는 공간, 앞으로 마주 할 공간을 그냥 지나치지 말고 나만의 의미를 부여하며 다른 눈으로 바라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