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정체성을 정면에서 파악하려고 애쓴다. 부정, 신성 모독, 아이러니가 경건한 신앙의 태도를 대신한다. 그는 정의의 형태들을 모방한다. 성경 구절들은 왜곡되고 전도되어 구절들끼리 서로 모순을 일으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첼란은 절망의 근원, 모든 사물에 깃든 부재에 다가간다. 첼란의 <부정의 신학>에 대해 많은 말이 있어 왔다. 그것은 시편Psalm」의 첫 연에 잘 표현되어 있다.

아무도 다시는 흙과 진흙으로 우리를 빚지 않는다.
아무도 우리의 먼지를 논하지 않는다.
아무도,

우리는 그대를 찬미한다. 아무도 아닌 자여그대를 위해 우리는활짝 피어나려 한다.
그대를향하여. - P95

아무것도 아닌 것,
우리는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활짝 피어나며아무것도 아닌 것,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 - P96

 결국 첼란의 절망은 너무커져서 감당할 수 없는 것이 되었고, 그리하여 세상은 첼란에게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으므로 더는 할 말이 없게 되었다.


당신은 나의 죽음,
모든 것이 나로부터 떨어져 나갈 때
나는 당신을 붙들 수 있으리라.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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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시는 이미 알려진 세상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그러한 글쓰기 행위는 첼란에게 있어개인적 모험을 요구한다. 첼란은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정립하고 이 세상에 우뚝 서기 위해 시를 썼다고 할수 있다. 바로 이런 절박한 필요의 느낌이 독자들에게 강하게호소한다. 첼란 시는 문학적 유물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다.
- P90

첼란의 시들은 직접적인 해설을 거부한다. 그의 시는 A에서B로 움직이거나 단어에서 단어로 건너뛰는 직선적 진행을 하지 않는다. 그의 시는 조밀한 의미로 짜인 복잡한 그물망으로서 모습을 드러낸다. 여러 언어로 이루어진 말장난, 간접적인신상 발언, 의도적으로 잘못한 인용, 괴상한 신조어, 이런 것들이 첼란 시를 묶어 주는 힘줄이다. 그의 시를 순서대로 따라간다거나 모든 단계의 국면전환을 그대로 읽어 내기란 불가능하다. 그의 시를 읽을 때는 텍스트를 꼼꼼히 읽기보다 시 전체의 어조나 의도를 따라가는 편이 낫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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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마감 - 일본 유명 작가들의 마감분투기 작가 시리즈 1
다자이 오사무 외 지음, 안은미 옮김 / 정은문고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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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명 작가들의 마감 분투기다. 무엇보다 나쓰메 소세키라는 이름이 반가워서 구입한 책이다. 어쩌다 보니 몇 달이나 걸려 읽었다. 작가들의 습관, 성격 등 내밀한 이야기나 에피소드를 흥미롭게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다자이 오사무, 나쓰메 소세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다니자키 준이치로 등 유명한 작가는 물론 처음 알게 된 작가들도 수두룩하다. 이야기는 1장 쓸 수 없다 2장 그래도 써야 한다 3장 이렇게 글 쓰며 산다. 4장 편집자는 괴로워4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소제목만 보아도 글을 써서 먹고사는 작가들의 고뇌가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듯하다. 그리고 부러움 약간과 위로까지도.

 



글을 쓰다 보면, 그것이 서평이든 원고든 술술 써질 때도 있지만 막힐 때도 있다. 유명 작가들은 어떨까. 보통 독자가 생각하기에는 아무런 고민 없이 술술 쓸 것 같은 작가들도 그런 고뇌가 있다는 것에 묘한 재미와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다. 홀로 있는 시간이 많고 혼자 써야 하는 것이 글이다. 여러 감정에 둘러싸여 마치 날씨처럼 변화무쌍한 하루하루를 견디며 어떻게 글쓰는 삶을 살아가는 걸까.

 



빗소리를 들으면 이상하게 마음은 쓸쓸해도 생각을 정리하는 데는 제법 도움이 된다. 비가 많이 내리는 곳에서 태어난 탓인지 나는 비라는 녀석이 좋아서 미치겠다. 여름비, 겨울비, 봄비, 어느 계절에 내리는 비라도 저마다의 정취가 마치 포근한 솜처럼 기분 좋게 머리를 에워싼다. 그래서 비가 오는 날에는 보통 때보다 두 배 정도 글이 잘 써진다. 아니, 뭔가 쓰지 않고는 못 배긴다.’(p31, 호조 다미오의 <쓰지 못한 원고 중>)

 



그래도 잘 써지고 쓰지 않고는 못 배기는 그런 날이 있다는 건 작가에게도 행복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항상 그런 날만 있겠는가.

 



쓸 수 없는 날에는 아무리 해도 글이 써지지 않는다. 나는 집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화장실 안이다. 아니, 볼일도 없는데 여긴 뭐 하러 들어왔지. 밖으로 나오다 이번에는 격자문에 머리를 내리친다. “으음, 으음소리가 절로 나온다. 이따위 글을 써봤자 뭐가 된단 말인가. 그저 노동의 기록에 지나지 않는 것을(p43, 요코리쓰 리이치의 <쓸 수 없는 원고> )

 



그럼에도 써야 하는 것이 작가의 삶이겠지. 기쿠치 간은 신문소설을 쓰던 중의 고통에 대해서 말한다. 그는 신문소설만큼 뼈가 휘도록 힘겨운 일은 없다면서 작가 지옥 중 신문소설 지옥이 가장 괴롭다며 푸념을 늘어놓는다.

 



나는 아침에만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신문소설은 한 회당 원고지 네 매면 충분하니 금세 쓸 듯해도 펜을 들기 전에 이미 두세 시간 허비한다. 다 쓰고 나면 일이 고된 만큼 두세 시간 넋이 나간다. 결국 하루에 활동하는 시간을 전부 신문소설에 뺏겨버리니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특히 펜이 막다른 벽에 부딪혔을 때의 괴로움이란, 뼈를 깎아내는 것처럼 견디기 힘들다.‘(p121)

 



작가들이 이럴진대. 묘한 위로가 되지 않는가. 벽에 부딪혀보고 결국엔 샘솟는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그렇게 환희를 느끼며 글쓰기도 이어가는 것이 아닐까. 그런 시간을 견디고 즐기다 보면 글쓰기는 늘게 되어있다. 그럴 거라는 희망을 가져 보자.

 



나쓰메 소세키 또한 신문소설을 연재하며 데뷔했으니 할 말이 많을 듯하다. 역시나 신문소설을 쓰는 동안은 바빠서 책을 읽지 못한다고 하소연을 했다.

 



정말이지

하루에 책을 읽을

시간이 얼마 안 된다.”(p122)

 



소세키는 문인의 생활을 언급하기도 했다. 당대 유명한 스타 작가였으니 막대한 부를 쌓았다느니 굉장한 저택을 지었다느니 온갖 소문이 떠돌았다고 한다. 엄청난 재산을 모았다면 이렇게 더러운 집에 살 턱이 있겠느냐, 이 집도 내 집이 아니라 셋집이다, 라면서 소세키는 반박을 한다. 그러면서 더 밝은 집이 좋다며 속내를 털어놓는다.

 



햇빛 쏟아지는 미닫이창 아래서 쓰면 가장 좋지만, 이 집에는 그런 장소가 없으므로 종종 양지바른 툇마루에 책상을 꺼내 놓고 머리에 햇빛을 흠뻑 받으며 펜을 든다. 너무 더우면 밀짚모자를 쓰기도 한다. 이렇게 하면 글이 잘 써진다. 결국 밝은 곳이 제일이다.‘(p151)

 



평생 독서를 하고 원고와 씨름하는 작가들의 눈은 피로를 넘어 혹사당할 것 같다. 밝은 곳을 선호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지 싶다. 원고 쓰기에 몰두하며 툇마루에 앉아있는 소세키의 모습이 그려진다.

 



오늘날과 달리 옛날에는 모든 물자가 귀하던 시절에 직접 원고지에 손으로 써야 하는 수고도 상당했을 것 같다. 작가들의 삶의 배경을 보면 가난 속에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작가들이 대부분이다. 밥벌이로서의 글쓰기는 어떤 중압감이 항상 따라다녔을 것 같다. 행간에 그들의 무거운 마음이 오롯이 전해져왔다.

 



맨 나중 이야기는 편집자로서 고뇌를 얘기하는 작가들이 나온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부터 다니자키 준이치의 글을 싣고 있다. 이 중 편집자와 밀당을 했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이야기는 웃음을 자아냈다.

 



하지만 도저히 쓸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하는데도 편집자는 거절당할 것을 각오하고 찾아왔는지 좀처럼 뜻을 굽히지 않았다. 가령 원고지 세 장이든 다섯 장이든 좋으니 써달라고 매달렸다. 전혀 물러날 기색이 아니었다. 아쿠타가와가 세 장 쓸 정도면 열 장 쓰겠지만 지금 재료도 없고 시간도 없어서 아무리 해도 쓸 수 없다고 거절하자 편집자는 그럼 한 장이든 두 장이든 좋으니 써달라고 애원했다. 이에 아쿠타가와가 원고지 두 장으로는 소설이 되지 않는다고 대답하자 편집자는 원래 당신 소설은 짧으니 두 장이라도 제법 괜찮은 소설이 된다. 오히려 재미있는 소설이 나올지도 모른다며 포기하지 않았다.‘(p233, 무로 사이세의 <아쿠타가와의 원고> )

 



어느 쪽도 양보하지 않는다.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 줄다리기를 보는 듯하다.

이 밀당을 지켜보았던 무로 사이세이의 말은 폭소를 자아내게 했다.

 



얼핏 작가가 윗사람으로 보이지만,

작가가 무서워하는 사람 가운데

한 명이 편집자다.”

-무로 사이세이-(p237)

 



그런가 하면 편집자가 되어 자부심을 갖고 열심히 일하겠다는 각오와 기쁨으로 충만한 <편집 여담>을 얘기하는 마키노 신이치도 있다. 짧은 편지글 형식의 글인데 그 일부를 소개해 보겠다.

 



7월에 입사하여 잡지 소녀』『소년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제 마음은 지금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그건 독자라는 많은 친구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정원에 핀 꽃들이 미소 짓는 것처럼 보일 만큼 싱그러운 마음으로 재미있게 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일이 그렇게 술술 풀릴 리가 없지요. (중략) 다만 언젠가는 노력의 결과가 진주가 되어 여러분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날이 꼭 오리라고 굳게 믿을 따름입니다. 미래는 깁니다. 편집자로 활동하며 예술을 쌓아 올릴 작정입니다.’(p251, <입사의 변> )

 



정원에 핀 꽃들이 미소 짓는 것처럼여겨질 만큼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고 결국엔 예술로 승화시키겠다는 각오에 흐뭇한 미소가 떠오른다. 결국, 글쓰기는 좋아서 하든 해야 해서 하든 작가는 작품으로 만들어 낸다. 독자는 그것을 즐길 뿐이다. 작품 너머의 내밀한 작가들을 엿볼 수 있는 것이 이 책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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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12-02 12: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나리자님도 작가의 대열에 합류하셔서 이 책이 더 의미가 있으신거 같아요 ^^

좋아하는 글쓰기도 직업이 되면 힘들거같아요 ㅋ

모나리자 2022-12-04 17:44   좋아요 3 | URL
네, 지금보다는 더 열악한 시절에 작가들의 분투하는 모습에 더욱 열정을 느낄 수 있었지요. 언제나 작가들과 편집자의 관계, 분위기는 흥미로운 것 같아요.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게 되면 어떤 일이든 부담감이 있는 건 사실인가봐요.
그래서 즐기는 자세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요즘 많이 춥지요. 건강에 유의하시고 따뜻한 12월 보내세요. 새파랑님.^^

2023-01-06 16: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1-06 2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23-01-06 23: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따뜻한 주말 보내세요.^^

모나리자 2023-01-06 23:57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
평안하고 따뜻한 주말 보내세요.^^

thkang1001 2023-01-07 11: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모나리자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항상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모나리자 2023-01-10 07:28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thkang1001님.^^
새해도 하루하루가 금세 지나가네요.
올해도 건강하시고 좋은 일 가득하시길 바랄게요. 감사합니다.^^

thkang1001 2023-01-10 10: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모나리자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달팽이 식당
오가와 이토 지음, 권남희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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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츠바키 문구점으로 오가와 이토를 처음 만났다. 아메미야 하토코가 할머니의 서도를 배우고 가업을 물려받고 편지를 대신 써주며 누군가의 간절한 마음을 전해주는 뭉클한 기적을 이야기한다. 이 작품 달팽이 식당』이 힐링 소설의 원조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음식 소재의 이야기로 달라졌지만, 대필 의뢰자의 편에 서서 철저하게 맞춤 서비스를 한다는 점에서 달팽이 식당이 손님을 맞이하는 방식도 정말 닮았다. 사전 면담이나 편지를 통해 좋아하는 음식이나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에 맞는 음식을 준비한다. 손님은 하루에 딱 한 팀. 특별한 날은 두 팀이 되기도 하지만, 한 팀이라는 원칙을 지킨다. 요리를 위한 재료를 준비하는 과정도 만만치 않다. 이웃이나 지인의 소개로 최상품을 조달하고 여기에 드는 품이나 시간, 정성이 대단하다. 그렇게 해서 과연 타산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정성을 아끼지 않는다. 이런 요리사가 만든 음식을 먹는다면 어떤 힘든 상황이라도 술술 풀릴 것 같다.

 



화자인 링고(린코)가 어느 날 아르바이트에서 돌아와 보니 집안이 텅 비어 있다. 3년을 함께 살았던 인도인 남자친구가 전 재산과 할머니가 남긴 가재도구는 물론 애지중지 사 모으던 요리기구를 몽땅 털어 도망을 친 것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아연실색하고 찾으러 다니느라 야단법석을 쳤을 텐데 링고는 체념한다. 그 충격은 대단했는지 그때부터 목소리를 잃었다. 할 수 없이 중학교 때 가출하고 10년 만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유일하게 남긴 할머니의 겨된장 항아리를 보물단지처럼 안고 말이다.

 



오랜만에 찾은 고향은 풍족한 자연으로 둘러싸인 곳으로 링고가 너무나 사랑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왜 고향을 떠났을까. 보통 사람들은 사랑할 수 있었지만, 엄마에게만은 그럴 수 없었다. 무슨 사연이 있었던 걸까 궁금한 마음으로 읽어나갔다. 콘크리트 회사 사장이라는 네오콘이라는 남자가 엄마에게 집적거리는 것은 어렸을 때 이후 여전했으며 짙은 화장에 교태를 부리며 손님을 맞는 엄마의 가게 아무르에는 단골고객들로 항상 떠들썩했다. 남자친구에게 버림을 당하고 모든 전 재산을 잃었으니 여기 말고는 갈 곳이 없던 링고는 엄마의 창고를 빌려 식당을 열기로 한다. 몇 초 만에 식당 이름 달팽이를 떠올리면서.

 



그 작은 공간을 책가방처럼 등에 메고, 나는 지금부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나와 식당은 일심동체.

일단 껍데기 속에 들어가 버리면 그곳은 내게 안주(安住)의 땅이다.(P75~76)

 



이렇게 요리에 진심이었던 링고는 달팽이 식당에서 손님을 맞이하기 시작한다. 어렸을 때 학교에서 우는 링고를 동면 쥐로 달래주었던 구마씨가 가게를 꾸미는 일부터 음식 재료를 구하는 일까지 자기 일처럼 발 벗고 나서주었다. 링고는 개업준비를 위해 수고해준 구마씨를 위해 먹고 싶다는 카레를 만들어준다. 이어서 맞이한 손님은 몇십 년이나 상복 차림으로 살아왔던 할머니다. 링고는 이 할머니를 위해 메뉴를 생각하고 세상과 담을 쌓고 지내온 닫혀버린 마음의 눈을 떠주기 바라는 마음으로 정성을 들인다. 아직까지도 목소리를 되찾지 못해서 필담 카드로 의사소통을 한다. 준비한 식사를 드시도록 하고 주방으로 들어가 기다리는 링고의 마음은 어떨까. 식당을 열고 첫 손님, 그것도 마음의 문을 꼭 닫고 상복차림으로 십년을 넘게 살아온 할머니다. 그 많은 양의 음식을 할머니 혼자서 드시는 것도 놀랍고 자신이 만든 음식을 먹어주는 손님이 있다는 것, 오랜 세월 품어왔던 꿈이 이루어진 것에 스스로 감격스러워한다. 며칠 후 구마씨에 이어 할머니에게까지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다. 몇십 년 동안 벗지 못한 상복을 벗어버리고 외출도 하고 지팡이도 없이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구마씨는 링고의 음식을 먹고 할머니가 무척 행복해했다고 전해주었고 이 식당의 요리를 먹으면 사랑과 소망이 이루어진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연이어 거식증에 걸린 토끼를 구하려는 소녀 고즈에, 비밀스러운 사랑의 도피처를 찾아온 커플 등 다양한 손님들을 맞이한다. 모두 사람에게 필요한 요리를 만들건만 먹기를 거부하는 토끼를 위해 요리를 하는 부분은 정말 감동이었다. 학교에 가야 하는 고즈에를 위해 딱 하루만 맡아보기로 했는데 토끼는 전혀 음식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링고는 버려진 토끼의 입장을 헤아리며 마음을 읽으려고 애쓴다. 또한 자신을 믿은 고즈에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고심하더니 세상에, 먹기를 거부하던 토끼가 비스킷을 남김없이 먹었던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을 위한 요리든 동물에게 줄 음식을 그들의 마음 구석까지 헤아리며 음식을 만드는 아름다운 마음이 깃든 요리사가 어디 있을까. 달팽이 식당에서 요리를 하면서 링고는 엄마에 대한 몰랐던 것을 알고 놀라기도 하고 가까이 갈 수 없었던 닫힌 마음이 열리기도 한다. 냉정한 것 같았던 엄마가 누구보다도 링고를 사랑했었다는 것, 첫사랑 슈 선배와의 결혼 피로연에서, 애정을 다해 키웠던 돼지 엘메스는 많은 손님들의 맛있는 요리가 되어 행복감을 선사한다. 마치 눈앞에서 시연하는 셰프의 요리를 보는 듯했다.

 



결국, 작가는 이 얘기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진심으로 좋아하는 일이 한 가지라도 있다면 거친 세상을 헤쳐나가면서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을까. 나아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도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까. 딸 루리코(링고 엄마)에게 쏟지 못한 애정을 할머니는 링고와 음식을 만드는 과정을 함께 하면서 요리의 길로 인도했다.



초조해하거나 슬픈 마음으로 만든 요리는 꼭 맛고 모양에 나타난단다. 음식을 만들 때는 항상 좋은 생각만 하면서, 밝고 평온한 마음으로 부엌에 서야 해.”(P205)

 


내게 요리란 기도 그 자체다.

엄마와 슈이치 씨의 영원한 사랑을 비는 기도이고, 몸을 바친 엘메스에게 감사의 기도이고, 요리를 만드는 행복을 베풀어 준 요리의 신에게 올리는 기도이기도 했다.’(P246)

 



링고에게 요리는 기도였다. 남자친구에게 배신을 당하고 목소리를 잃었다. 자신이 만든 요리로 다양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행복하게 해 주었지만 자신도 치유하지 않았을까. 특히 링고에게는 사람의 얼굴이나 몸짓을 보고 그 사람이 어떤 차를 좋아하는지 판단하는 재주가 있었다. 참으로 신기하고 절묘한 촉을 가지지 않았는가. 진실로 자신의 일을 사랑하면 그만의 촉이 발달하는 걸까. 생각지 못한 반전을 적재적소에 삽입하여 읽는 재미를 더해 주었다. 무엇보다 링고가 잘못 알고 있던 엄마에 대해 알고 나서는 모녀의 관계도 좋아진다. 묵은 감정도 해소되고 다시 만난 모녀가 좀 더 함께 행복하게 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우리 앞에 놓인 삶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아쉬운 마음을 다시 확인시켜주었다. 이 작품은 힐링소설이라고 하듯이 마음의 치유나 다양한 독자의 관점에서 읽을 수 있는 흥미로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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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반구의 7,8월, 뜨거운 에어컨, 무너지는 빙하・・・・・…. 무엇인가꼭 해야 하는 이들을 제외하고, 이 계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살길이다. 여름 세 끼, 하는 것도 먹는 것도 고역이다. 30도 날씨에 생계 노동은 말할 것도 없고 잠드는 것조차 힘에 부친다. 개인의 기력만이 문제가 아니다. 지구가 망가지고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아무것도 하지 말자. 레닌 동지도 동의할 것이다. - P212

<선악을 넘어서>(1886년)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다음으로 니체 사상 전반을 보여주는 주요 저작이다. 내가 읽은 판본은 영어권 최고의 니체 해석자월터 카우프만(Walter Kaufman)의편역본(1965년)을 청하출판사가 기획, 번역(1982년)한 것이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자신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대가 오랜 동안 심연을 들여다볼 때 심연 역시 그대를 들여다본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자신의 욕망이지 욕망의대상이 아니다."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유명한 글귀의 출처가 바로 이 책이다. - P214

역사적 경험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진상‘과 ‘왜곡‘은 타자의 역사를 말살하는 행위다. 어떤 사람에겐 성폭력이 술김에 저지른 실수일 수 있지만, 어떤 이에겐 성별화된 역사의 구조적 법칙이다. 어떤 사람에겐 고문과 도청이 업무상 착오지만, 국가의 본질로인식하고 비판하는 이도 있다. 너의 경험은 사건, 나의 경험은 역사? 역사는 누군가의 에피소드일 뿐 보편적이지 않다. 사건과 역사의 구분은 폭력이다. ‘시맨틱‘한 용어로는 편집증(paranoid)이다. - P224

혼성성은 역사를 기원이 아니라 흔적으로 본다. 순수성이나 (순수성이 여러 개인) 다양성은 같은 차원의 관념일 뿐, 현실로서 존재할 수 없다. 바바는 지구화를 다문화주의나 이국성이 아니라 혼성성으로 개념화한다.
우리는 백제가 일본에준영향은 그토록 강조하면서도 왜 우리는 무균 상태이길 바라는가. ‘하이브리드 자동차‘는 사용하면서,
불가피한 한자 병기가 그렇게 문제인가. 한글전용을 존중한다. 다만, 생각하는 것이다. 삶의 잡종성을. - P227

내가 아는 한 우울증에 관해 정치적, 학문적, 미학적, 윤리적으로 《한낮의 우울》보다 잘 쓴 책은 없다.(다만, 성별과 우울증 부분은다소 빈약하다.) 하나의 문장을 고를 수 없는 책이다. 우울증의 직간접 체험자나 이 분야에 관심 있는 이들은 한 문장만으로도 독후감이 흘러넘칠 것이다. - P259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라는 말처럼 근거 없는 말도 없다. 우울도 감기도 가벼운 병이 아니며, 질병으로서 우울증과 감기의 작동방식은 매우 다르다. 굳이 비유한다면 에이즈와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둘 다 완치 개념을 적용하기 힘든 질병이다. 잠복성, 만성 질환,
치명성, 외로움, 사회적 낙인………….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심각한면역력 저하다. 신체가 외부 자극에 대처할 수 없는 상태. 면역성이사라지면서 부드러운 미풍조차 사포로 미는 듯한 통증을 느끼는우울증 환자의 증상은 인생의 본질이 순간에 있음을 깨닫게 한다.
- P259

둘째, 공부를 포함해서 세상의 모든 노동은 다 힘들다. 쉬운 일은 없다. 어떤 노동이든 지루하고 고된 과정이다. 쉽게 돈 버는 일은 딸바보 부자 아빠가 주는 용돈? 아니면, 합법적 횡령이나 투기?
대형 마트에서 피자 팔기?
문제는 세상 모든 일이 힘든데, 입시 공부류가 유독 사회적 보상이 크다는 것이다. 정신 노동과 육체 노동, 성별 분업, 이주노동자가 주로 하는 일.....… 다양한 노동 분업 체계는 착취와 위계, 특정분야에 과도한 부와 명예가 편중되는 것을 정당화한다. 이런 의미에서는 공부가 가장 쉽다. 사회주의 사회는 이 문제를 바로잡으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 P277

몇 해 전에 성별을 기준으로 하여 10대에서 70대까지 열네 개 그룹으로 나누어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 무엇인가라는 설문결과를 본 적이 있다. 놀랍게도(?) 거의 모든 연령과 성별에서, "다시 태어난다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싶다."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내 대답 역시 그렇다. 여기서 ‘공부‘는 10대를 억압하는 입시 공부가 아닌 뭔가 ‘의미 있는 인생‘을 원한다는 뜻일 것이다. 의미 있는 삶이란 무엇일까. 내가 필요한 존재였다는 것, 무엇인가를 추구했다는 것, 나만의 세계가 있었다는 것 등으로 다양할 것이다.
60대 친구가 몇 있다. 돈과 학벌을 따지는 ‘속물‘이 득실거리는 우리 사회에서 남들 보기에도 비교적 ‘성공한‘ 인생들이다. 그들 역시공부 이야기를 제일많이한다. 자신은 이룬 것이 없다며 가진 것이없는 내게 말한다. "그래도 너는 책을 썼잖니. 나는 한 것이 없다."
- P289

다른 측면에서 글쓰기는 조금 더 ‘평등‘하다. 운동, 음악, 미술분야에 비해 장비가 간단하고 독학 가능성이 있다. 거칠게 말해, - P291

연필 한 자루면 된다. 나는 글이 ‘투자 대비 생산성‘이 가장 큰 콘텐츠라고 생각한다.
경기든 연주는 모든 몸의 플레이어들은 심리적인 요인으로 인한부상과 실수가 있기 마련이다. 연습은 정신력으로 몸을 통제하는것이 아니라 연습된 몸으로 정신적 실수)을 없애는 방식이다. 언습, 연습, 연습, 그런 경지의 노력은 명예와 금전적 보상만으로 불가능하다. 삶을 사랑하지 않으면 해낼 수 없다.
작가는 엄청난 양의 독서, 습작, 조사를 해야 하는 데다 삶의 매순간이 연습이다. 좋은 글을 빨리 쓰는 사람이 있다. 비결은 연습치열한 삶)이다. 글 쓰는 시간은 연습을 타자로 옮기는 시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 P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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