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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 ㅣ 정희진의 글쓰기 3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1년 4월
평점 :
여성학자 정희진을 김진애의 『여자의 독서』 읽은 덕분에 만나게 되었다. 그 책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정희진의 정절과 절개는 그 자체로 너무도 순수하고 또 강력하다. 이때의 열녀란 소신에 따라 끊임없이 자신을 단련하는 여자 인간이고, 그의 정절이란 자신의 소신과 철학이고, 그의 절개는 자기 자신에게조차 확실하게 들이대는 양심의 잣대다.”
-김진애의 『여자의 독서』(P225)
이렇게 멋진 찬사를 받는 작가라면 한번 알아봐야겠다는 마음에 『정희진처럼 읽기』로 처음 만났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서 생각한 건 정희진 저자가 김진애가 예찬한 ’정절과 절개‘로 비유되는 ’열녀‘라는 단어를 과연 좋아할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다시 이 책으로 만난 저자에 대한 느낌은 ’열녀‘의 이미지보다는 은장도를 찬 아주 씩씩하고 거침없는 언변의 여장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보통사람이라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두루뭉술 넘어가는 무관심한 사안에도 여성학자 특유의 예리한 시선으로 끄집어내어 우리 눈앞에 던져 놓는다. 그리하여 살살 우리의 촉수를 움직이게 하고 후련한 웃음을 웃게 하고 공감하게 만든다.
다시 앞의 책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그 책에는 놀라움을 주는 말이 많았지만, ‘독서는 몸이 책을 통과하는 것이다.’는 말에 나는 홀딱 반했다. 얼마나 강력한 인상을 주었던지. 그러므로 독후감은 자기에 대한 서사가 들어가지 않으면 의미가 없으며 내용 요약으로 절반을 채우는 식의 쓰기는 지양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저자의 책을 읽고 쓰는 서평이기에 어느 때보다 긴장된다. 저자는 원래 ’전압이 높은‘ 책, 남들이 잘 안 읽는 불편한 책을 읽는다고 했다. 여기 나오는 스물일곱 편의 책도 그렇다. 하나같이 소수자, 약자, 여성, 흑인, 폭력, 여성차별 등이 주제인 책들이다. 각 장에서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 하나씩만 소개해 보려고 한다.
1장 아픔에게 말 걸기는 ‘몸으로 견디며 쓴다’는 부제가 달려있고 주로 통증과 불안, 고통을 주제로 한 8권의 책이 들어있다.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는 메이 외 공저로 질병, 돌봄, 노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아직은 몸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꼈다. 고통에 대한 소통이 불가능한 이유를 말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아픈 사람은 건강한 이들을 이해해야 한다’는 말을 접했다. 건강한 사람이 아픈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처음엔 의아했다. 그런데 저자는 인간의 ‘몸의 개별성’을 이야기하면서 누구의 삶을 대신 살 수 없고 대신 아플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몸의 단절은 인간의 고유성이기 때문에 몸의 통증은 소통 불가능하다는 말에 금세 수긍하게 된다. 이 얘기는 뒤에 나오는 엄기호의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의 내용에서도 부분적으로 연결이 되는데, ‘인간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각자의 몸’이기에, ‘몸의 통약’이 불가능하므로 오히려 ‘안 아픈 사람을 배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주문처럼 ‘감사합니다’를 반복하며 소리를 냄으로써 몸속의 고통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소박한 일상에 감사하듯이 아픈 몸을 치유하는데도 감사하는 마음이 기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p60~61)
고통에 대한 연구는 결국 글쓰기의 문제로 귀결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철학자 김영민의 "생각은 공부가 아니다"는 말에 덧붙여 공부는 쓰기 혹은 쓰기의 방법일 수 있다고 말한다.
2장 우리에겐 불편한 언어가 필요하다는 ‘통념을 부수는 글쓰기’라는 부제에 9권의 책이 들어있다.
이 장에서 재미있게 읽은 부분은 저메인 그리어의 ≪여성, 거세당하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정희진은 페미니즘 책 읽기와 쓰기를 계속하는 가장 큰 이유는 쾌락 때문이라고 했다. 그것은 여성주의만이 주는 즐거움이 있는데, ‘여성스러운’ 행복감이 아니라 ‘남성적인 쾌감’이라고 했다. 지적이고 깨닫는 쾌락, 분노와 분열과 고통이 주는 쾌락, ‘나쁜 사람’을 골탕 먹이는 쾌락, ‘대세’에 휩쓸리지 않고 비웃으며 무시할 수 있는 그런 힘의 느낌이라고 했다. 페미니즘에서 그런 쾌락을 느낄 수 있다니.
이 책의 내용은 성별, 남자, 여자, 인간, 자연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전복시키며 정확히 바로잡는 매우 지적이고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는 좋은 ‘교과서’ 역할을 한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리고 이 책이 널리 읽혀서 성별, 가족, 섹슈얼리티에 대해 우리 사회가 좀 더 ‘상식적이고 과학적인 집단’이 되는 것이 희망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세상이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나 아직도 우리 사회는 외모나 나이 비하, 지역주의, 학벌주의 등으로 인한 차별이 만연해 있다고 생각한다. 양성 모두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서로 영역의 행동 특성이나 심리에 대해 공부할 수 있다면, 어린 학생 때부터 공부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스테퍼니 스탈의 ≪빨래하는 페미니즘≫
'페미니즘을 '하나'로 사고하는 것 자체가 성차별이다. 나는 평소 숱한 사람이 사상가들을 언급할 때 마르크스, 프로이트, 푸코, 루소……그리고 페미니스트 식으로 나열하는데 분노한다. 남성들은 '개인'으로 호명되는데, 어째서 페미니즘은 한 덩어리로 간주되는가? 이는 마르크스 한 사람과 모든 여성이라는 식의 발상이다.'(p150)(왼쪽 페이지)
'여성으로서 겪는 공통의 경험은 '적다'. 그러나 한 개인이 여성으로 간주되는 상황 탓에 겪게 되는 고통, 분노, 무기력, 희열, 깨달음, 욕망은 여기 다 적을 수 없는, 그야말로 인류의 역사 그 자체로서 혼돈에 가까운 복잡성을 지닌다. 흔히 말하는 '여성 문제(women's question)'는 실상 사회와 남성의 문제이고 이것이 '여성 문제'의 본질이다.'(P151)(오른쪽 페이지)
3장 몸의 평화가 깨지는 순간 ‘질문하고 해체하는 글쓰기’라는 부제가 달린 10권의 책이 들어있다.
애그니스 스메들리의 ≪대지의 딸≫에 대한 서평은 슬픔, 복수(複數)의 젠더(multiple gender), 애그니스 스메들리와 우리의 신여성 허정숙과 김활란, 시몬 드 보부아르까지 세 가지의 키워드로 비교하며 얘기를 풀어놓는다. 저널리스트였던 애그니스 스메들리가 가난, 성차별, 가족의 죽음, 죄책감, 분노, 상처를 안고 조국이었던 미국을 떠난 당시(1920년~1930년)가 배경인 자전소설이라고 한다. 이 얘기를 통해서 여성으로서 받는 성차별은 세상 어딜 가나 똑같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생각해보면 누구나의 여동생, 누이, 이모, 어머니일 텐데 왜 조화롭게 어울려 지내지 못하는 걸까. 여기서도 정희진은 좋은 독후감에 대한 언급을 강조하고 있다. 독후감은 언제나 자신에게로 회귀해야 하며 성찰적이어야 한다고. 그리고 서평을 쓴 사람은 한 사람의 독자일 뿐이지 모든 독자를 대변하는 길잡이가 아니라고.
이전 책을 읽고 나서도 그랬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도 그동안의 나의 독서를 돌아보게 했다. 너무나 읽기 편한 책만 읽지는 않았는지. 물론 개인마다 관심 분야가 다르기 때문에 어쩌면 모든 독자는 편협하다고 했고, 그 말에 위로를 받았었다. 나름 다양한 독서를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페미니즘을 비롯한 사회문제를 다룬 책들, 그녀가 말하는 소위 ’전압이 높은 책‘은 일부러 찾아 읽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어쩌면 불편함을 피하고 싶어서 나도 모르게 멀리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점을 반성한다. 그래서 여기 나와 있는 책을 다는 읽지 못하지만 적어도 한 권은 꼭 읽어보려고 한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과 더불어 찬사와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는 베티 프리던의 『여성성의 신화』이다. 이 책은 이론 자체로 내파와 여진 확장과 변태(變態)를 거듭하고 있는 자유주의 사상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영원한 필독서라고 한다. 자신과 사회,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남녀 불문하고 읽어야 할 책이라고 강조한다.
이 책은 ’정희진의 글쓰기‘ 시리즈 중 세 번째 책이다.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독자에게 인기 있는 저자로 기억된다. 또 저자가 읽고 쓴 27편을 모은 서평집 이기도 하지만 독자에 대해서는 좋은 글쓰기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기도 하다. 평범한 글쓰기에서 벗어나 사유하는 글쓰기, 좀 더 성장하고 싶은 글쓰기를 배우고 싶은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