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율리 체 지음, 이기숙 옮김 / 그러나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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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새해를 앞두고 휴양지 별장 그림이 그려진 예쁜 표지의 <새해>를 읽었다. 독일 작가 율리 체(Juli Zeh 1974~)가 2018년 발표한 <새해>는 슈피겔 종합 1위, 16개월간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킨 작품이다. 

작가 율리 체에 대해 살짝 소개하자면, 그녀는 독일 본(Bonn)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유럽법과 국제법을 전공,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1년 첫 장편 <독수리와 천사>로 큰 성공을 거두고 이후 발표하는 작품마다 각종 문학상을 휩쓸며 독일 문단에서 높은 평가를 받음과 동시에 자신의 전공을 살려 법조인으로도 활동하는 뛰어난 능력의 작가이다. 사진을 보니 외모도 범상치않다.


'다리가 아프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한 남자가 자전거를 타고 가파른 언덕을 힘겹게 올라가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가족과 함께 찾은 휴양지 란사로테 섬(스페인에 속하는 섬으로 북대서양 카나리아 제도에 동쪽 끝에 있는 섬)에서 주인공 헤닝은 1월 1일 새해 아침 이렇게 힘겹게 자전거를 타고 있다. 마실 물도 없는 상태에서 자전거 페달을 밟을 때마다 '1월 1일, 1월 1일'을 읊조리며 세찬 바람을 뚫고 올라간다. 

그 가운데 머리속에서는 끊임없이 생각이 떠오른다.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들, 아내와 아이들,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늘어가는 육아와 직장생활, 아내와의 육아 분담, 새해에는 달라져야 한다는 각오, 각별한 여동생 루나, 홀로 남매를 키우느라 고생한 어머니 등 생각의 파편들이 계속 떠오른다. 겉보기에는 안정적이고 평범해 보이는 그의 삶이지만 '헤닝은 자신의 인생이 뭔가 아귀가 안 맞는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2년 전 둘째, 딸 비비가 태어나고 나서 처음 나타난 '그것', 악령처럼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공황발작은 그의 삶을 고통스럽게 한다. 


[헤닝은 노이로제로 가족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다. 상대가 사랑할 만한 남자가 되고 싶다. 더 많이 웃고, 장난도 치고, 일상의 자잘한 슬픔에서 해학을 발견하고 싶다. 테레자를 더 많이 안아 주고, 아이들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지 않고, 자주 밖에 나가 친구들을 만나고 싶다.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다. 어쨌든 바람을 안고 경사도 20도의 비탈길을 빌린 자전거로 오르는 것보다는 어렵지 않다. (p.78)]


이 소설은 처음부터 이렇게 숨이차고 힘이 든다. 

헤닝은 왜 휴가지로 란사로테 섬을 선택했으며 왜 산 정상을 올라가며 이런 다짐을 하는 것일까? 왜 그에게 2년 전부터 공황발작이 일어났을까? 그가 산 정상에서 맞닥뜨리게 될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이런 많은 궁금증을 자아내는 이 소설의 내용은 더이상 말하지 않는게 좋을 듯 싶다. 


낑낑거리며 정상을 향해 무거운 자전거를 타고 올라가는 헤닝의 모습과 번갈아가며 나타나는 그의 머리속 상념들, 그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그것'의 원인과 정체는 독자인 나도 힘겹게 오르막길을 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게 했다. 

그러다 정상에 도착하고 갑자기 어떤 기억과 만나면서 이야기는 롤러코스터처럼 속도가 붙는데, 공포 소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에 못지 않은 긴장과 고통을 느꼈다. 한 상황을 어쩌면 그토록 치밀하고도 사실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지, 소설 속 인물의 고통, 답답함, 공포가 내 마음에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천천히 힘겹게 올라간 산 정상에서 마음속에 가둬 놓은 기억이 되살아나고 그 진실과 대면하게 되면서 변화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자 사실 진짜 아픈 데는 다리가 아니었음을 알게 되는 이야기.

건조하면서도 가벼운 문장의 두껍지 않은 책이지만 다루는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은 소설이다. 

이런게 독일 소설의 매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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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12-15 15:4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독서괭님 별 다섯개 ! 그리고 무엇보다 다리 말고 어디가 진짜 아픈건지 궁금해져서 읽고싶어지는 리뷰네요 ~

coolcat329 2021-12-15 16:57   좋아요 1 | URL
이 책은 처음부터 궁금증을 유발시켜요~^^

Falstaff 2021-12-15 16:0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쉽게 페이지가 넘어가지는 않는데, 그렇다고 덮을 수도 없는 참 징~헌 책입지요. ㅋㅋㅋ

coolcat329 2021-12-15 16:58   좋아요 3 | URL
폴스타프님 덕분에 율리 체라는 멋진 작가를 알게 됐어요. ☺

미미 2021-12-15 16:2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읽으면서 <희박한 공기 속으로>가 떠올랐어요ㅋㅋㅋㅋ그 작품도 숨차요ㅋ 주인공이 고통받는게 저는 좋더라구요.(가학적인 면이 있는지..);;책으로가 아님 경험해볼 수 없을것 같아서. 저도 찜!

coolcat329 2021-12-15 18:37   좋아요 3 | URL
<희박한...>찾아보니 처음 보는 책인데 내용이 엄청난거 같아요. 이 책 미미님 좋아하실거 같아요~

새파랑 2021-12-15 16: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사실 아픈건 다리가 아니라 마음이었군요. 저도 가끔 생각하면서 걷다보면 몸이 피곤한지도 모른채 어느새 상당히 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ㅋ 멍떼리고 걷기 ㅎㅎ
왠지 재미있을거 같아요 ^^

coolcat329 2021-12-15 18:39   좋아요 3 | URL
저도 멍때리고 한 번 걸어볼까봐요 ㅋ 저는 걷다보면 생각이 너무 많아져서요. 😁

페넬로페 2021-12-15 19:3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독일소설은 그 나름의 매력이 있는데 이 작가의 이름도 처음 들어봐요~~
그런 의미에서 북플에서는 항상 새해를 맞는 것 같아요 ㅎㅎ
폴스타프님의 표현대로라면 이런 책이 읽고 나면 뿌듯하더라고요^^

coolcat329 2021-12-15 19:50   좋아요 2 | URL
맞아요~북플은 항상 새해같아요~☺ 여운이 많이 남는 책이었어요~

scott 2021-12-16 15: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쿨켓님 2021년 서재의 달인 추카 합니다 ^ㅅ^

mini74 2021-12-16 15: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쿨캣님 저도 축하드려요 *^^*

쎄인트saint 2021-12-16 16: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2021 ‘서재의 달인’ 축하드립니다~!!

얄라알라 2021-12-16 17: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coolcat님, 저는 왠지 coolcat님을 요렇게 영어로 써야 이름 입에 착착 붙어서^^ 축하드립니다!

thkang1001 2021-12-16 18: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coolcat329님! 2021서재의 달인! 진심으로축하드립니다.

새파랑 2021-12-16 18: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쿨캣님 달인 축하드려요 ^^ 내년에도 쿨캣님 별다섯개 책은 보관함으로 쓱~!!

coolcat329 2021-12-16 18: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모두들 감사드립니다.
저 처음이라 너무 감격스럽습니다.😭

새파랑 2021-12-16 18:48   좋아요 3 | URL
쿨캣님이 처음이시라니 놀랍네요 😆 저는 쿨캣님 10번은 하셨을줄 알았어요 ^^

coolcat329 2021-12-16 18:46   좋아요 2 | URL
알라딘 회원은 오래됐으나 이렇게 북플님들하고 소통하며 독후감상문 쓴 건 2년도 안되는거 같아요. 그리고 저는 달인 이런거 전혀 생각, 기대도 안하고 그저 님들 책 이야기만으로도 즐거웠는데 이렇게 상 받으니 참 기쁩니다! 감사해요☺

scott 2021-12-24 11: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쿨켓님 행복가득!
🎄 ℳ𝒶𝓇𝓇𝓎 𝒞𝓇𝒾𝓈𝓉𝓂𝒶𝓈 🎅🏻
。゚゚・。・゚゚。
゚。  。゚
 ゚・。・゚
⠀()_/)
⠀(。ˆ꒳ˆ)⠀
ଫ/⌒づ🎁
 
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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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소설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왜 오바마와 빌 게이츠가 이 책을 추천했는지, 왜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품위, 품격, 재미, 따뜻함 등의 단어를 써가며 입이 마르게 칭찬을 했는지 드디어 알게 되었다.


에이모 토울스(Amor Towles 1964~)에게 전작을 뛰어 넘는 성공을 안겨준 이 책을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년 전 도서관 희망도서로 신청해 읽다가 다 못 읽고 반납한 사연이 있다. 당시 이상하게도 이 멋진 소설이 나를 사로잡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정말 이상한 일이다. 

그러다 작가가 2011년 발표해 작가로서 입지를 굳힌<우아한 연인>을 같은 해 먼저 읽게 되었다. 주변 멋진 남성들의 도움으로 승승장구하는 여주인공에게 크게 끌리진 않았지만, 그래도 1930년대 뉴욕, 맨해튼을 배경으로 젊은 남녀의 사랑과 이별을 섬세하면서도 세련되게 묘사한 점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로맨스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참 재밌었고 무엇보다 작가의 세련됨과 우아함에 마음을 빼앗겼다. 


<모스크바의 신사>의 주인공은 성 안드레이 훈장 수훈자이자 경마 클럽 회원, 사냥의 명수인 서른세 살의 귀족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이다. 배경은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직후인 1922년, 그는 자신이 묶고 있는 메트로폴 호텔에서 단 한 걸음이라도 나가면 총살형에 처하는 '종신연금형'을 선고받는다. 원래는 구시대의 유물인 귀족들은 총살 당해야 마땅하나 혁명에 공헌을 한 시를 쓴 덕분에 종신연금형으로 감형, 겨우 목숨을 건진 것이다. 


"절대 착각하지 마시오. 만약 당신이 한 걸음이라도 메트로폴 호텔 바깥으로 나간다면 당신은 총살될 테니까."


4년 간 머물렀던 스위트룸에서 좁고 허름한 방으로 쫓겨난 백작.

'인간은 자신의 환경을 지배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 환경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는 어린 시절 대공으로부터 들은 말을 기억하며, 그는 자신에게 닥친 새로운 삶을 의연함을 잃지 않은 채 당당한 귀족의 태도로 받아들인다. 

이 책은 바로 이런 로스토프 백작이 비록 몸은 호텔이라는 한정된 장소에 갇혀 있지만 좌절하지 않고 신사의 품위를 유지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 나가는 이야기이다. 


호텔에서 제일 처음으로 사귄 어린 소녀 니나와는 호텔 구석구석을 탐험하고, 유명 여배우와 은밀한 사랑도 나누며, 공산당 고위 간부의 개인 교사가 되어 비밀 스터디도 하고, 급기야 호텔 식당의 웨이터 주임이 되기까지 한다. 

식당 주방장 에밀과 식당 지배인 안드레이는 친구이자 동료로서 우정을 나누고 재봉사 마리나와도 친구가 되어 위기의 순간 도움도 받는 등 호텔이라는 좁은 세상 속에서도 사랑과 우정은 존재함을 시종일관 따뜻하고 섬세한 문장으로 작가는 보여준다. 


귀족의 신분으로 마음껏 거리를 누비며 화려하고 안락한 생활을 했을 때는 몰랐던 세상과 사람들을 만나며 백작은 삶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되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다. 작가는 이런 보편적인 주제를 우아하고 섬세한 문체로 보여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눈물과 미소 사이를 왔다갔다 하게 만든다.


["편리함이라는 게 뭔지 얘기해줄게요. 정오까지 잠을 잔 다음에 누군가를 시켜 쟁반에 받친 아침 식사를 가져오도록 하는 것. 약속 시간 직전에 약속을 취소해버리는 것. 한 파티장의 문 앞에 마차를 대기시킴으로써 얘기만 하면 즉시 다른 파티장으로 이동할 수 있게 하는 것. 젊었을 때 결혼을 피하고 아이 갖기를 미루는 것. 이런 것들이야말로 최고의 편리함이에요, 안나. 한때 난 그 모든 걸 누렸었죠. 그런데 결국 나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불편함이었어요." (p.555)]


이 소설의 최고 매력은 단연코 로스토프 백작이라는 인물에게 있다. 훌륭한 귀족이 가져야 할 모든 자질을 갖춘 듯한 백작은 모르는 것이 없다. 역사와 철학, 음악, 문학 등 예술은 물론이고 미식가로서 가진 음식과 와인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그의 품격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모스크바의 신사>는 바뀐 세상으로부터 추방당한 한 구시대 인물의 이야기이자 그 혼란스러운 시기를 함께 살아간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격동의 러시아를 배경으로 그 혹독한 시기를 살아간 소소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너무나 매력적인 주인공, 로스토프 백작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볼셰비키 혁명도 바꾸지 못했던 인간 내면에 자리한 사랑과 우정, 배려의 이야기, 잃어버린 내 안의 품위를 되살리고 싶은 바로 그런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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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1-12-11 15:2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에서 이 책 빌리려다 책의 두께에 잠시 고민하다 일단 갖다 놓은 책부터 읽자고 했는데
로스토프 백작의 매력에 빠져야 할것 같은데요^^

coolcat329 2021-12-11 18:06   좋아요 4 | URL
700페이지 좀 넘는데 전혀 상관없어요. 재미있고 치밀하고 우아하고 재치있고~~😍

페크pek0501 2021-12-11 15: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329 님. 맘에 드는 소설을 만나신 것 축하드려요.
게다가 7백 쪽이 넘는 책이니 뿌듯한 독서가 될 것 같네요.
검색해 볼게요.^^

coolcat329 2021-12-11 18:07   좋아요 3 | URL
즐거운 독서였어요~^^ 올해 신간발표 한 걸로 알고 있는데 기대됩니다.

mini74 2021-12-11 16:0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넘 재미있죠. 저 이 책 읽고 책상 다리들 눈여겨 보고 다닙니다 ㅎㅎㅎ 쿨캣님 글 넘 재미있게 읽었어요. ~~

coolcat329 2021-12-11 18:08   좋아요 2 | URL
정말 재미있게 읽었어요~^^저는요 어찌나 와인이 마시고 싶던지요. 🍷

Jeremy 2021-12-11 16: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역시 인상 깊게 읽었거나 좋아하게 되는 구절은 책을 읽은 사람,
그 누구에게나 비슷한 것 같습니다.

“If a man does not master his circumstances
then he is bound to be mastered by them.”

“I’ll tell you what is convenient,” he said after a moment.
“To sleep until noon and have someone bring you your breakfast on a tray.
To cancel an appointment at the very last minute.
To keep a carriage waiting at the door of one party,
so that on a moment’s notice it can whisk you away to another.
To sidestep marriage in your youth and put off having children altogether.
These are the greatest of conveniences,
Anushka—and at one time, I had them all.
But in the end, it has been the inconveniences
that have mattered to me most.”

두꺼운 책 내내 마치 눈 앞에 보여주듯이 우아한 글솜씨로 그려내는
30-year saga of the Count Alexander Ilyich Rostov.

coolcat329 2021-12-11 18:19   좋아요 4 | URL
제레미님도 이 구절 좋으셨군요. 원어로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Falstaff 2021-12-11 19:0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도 별점 만점 주고 아주 아주 재미나게 읽었는데요,
이 작품은 읽고 난 다음에 시간이 가면 갈수록 작품 속 로스토프 백작의 언행에 과하게 버터 향이 나서, 평가가 줄어들고 있답니다. 지금은 이 책을 권하지 않는 수준까지 말입니다.
에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제 불민, 무지, 오해이면 좋겠습니다.

잠자냥 2021-12-11 20:35   좋아요 3 | URL
앗 저도 똑같은 이유로 그런데! 그래서 이 작가 책도 더 손이 안 가더라고요!

coolcat329 2021-12-11 21:26   좋아요 2 | URL
앗! 두 분 의견이 같으시네요 ㅠ
네~그 버터향이 무엇인지는 저도 알거같네요.😚 그래두 저는 신간 <링컨 하이웨이> 도 꼭 읽고 싶어요. 이 작품은 편집자가 말하길 상업적 성공으로 이어지기 힘들거 같다했다고 스콧님 글에서 읽은 기억이 나네요. 대중성을 덜 의식한 작품이라니 더 기대가 갑니다.

미미 2021-12-11 19:1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어보고 싶어요! 호텔에 갇혀지내는 설정은 <폰의 체스>가 떠오르네요. 게다가 읽다만 책의 재발견이었다니.😄

coolcat329 2021-12-11 21:29   좋아요 1 | URL
그때는 뭐랄까요. 큰 사건없이 호텔안에서 자잘하게 흘러가는 이야기가 좀 지루하게 다가왔던거 같아요. 근데 작가 성격이 굉장히 꼼꼼함을 이번에 읽으면서 느꼈어요. 그 점이 참 신뢰가 가더라구요.

새파랑 2021-12-11 20:3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로스토프 백작하면 <전쟁과 평화> 아닌가요? 😅 저도 이책 재미있다고 해서 구매했는데 쿨캣님이 ‘정말 매력적‘이라고 하시는데 빨리 읽어야 겠어요 ㅜㅜ

왜이리 읽고싶은 책이 많은지 😅

Falstaff 2021-12-11 20:29   좋아요 4 | URL
ㅎㅎ 러시아 사람들 이름이 비슷해서 헷갈리신 듯.
안드레이 볼콘스키.... 생각하신 거 맞요? 걔네들 이름에 스키...가 넘 많아서, ^^;;

새파랑 2021-12-11 20:36   좋아요 4 | URL
앗 나름 유머를 한다고 한건데 ㅋ 로스토프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어디서 나왔더라 😅

coolcat329 2021-12-11 21:31   좋아요 2 | URL
로마노프랑도 헷갈리죠. ㅋ
저는 이젠 소설에서 이름이 나오면 가정부 이름까지도 다 적어둡니다. ㅎㅎ

새파랑 2022-01-07 17: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쿨캣님 축하드려요. 저도 곧 이 책을 만나보겠습니다~!!

mini74 2022-01-07 18: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쿨캣님 축하드립니다 ~~

coolcat329 2022-01-07 19: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오늘이 그날! 이군요.
지금 들어와 보니 축제분위기네요. 감사합니다 ~~

물감 2022-01-07 2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쿨캣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이 책 읽기 안어렵나요? 뭔가 레벨이 높아보여서 ㅎㅎ

coolcat329 2022-01-07 21:43   좋아요 1 | URL
아~감사합니다 😁
물감님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물감님의 생각 꼭 듣고 싶습니다.
 
제5도살장 (리커버 에디션) 커트 보니것 리커버 컬렉션
커트 보니것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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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커트 보니것(Kurt Vonnegut 1922~2007)이 1969년 발표한 <제5도살장>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드레스덴 폭격을 소재로 한 미국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한다. 

폭격이 일어나기 전 드레스덴은 '엘베 강의 피렌체'라고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도시였다. 1945년 2월 13일부터 15일까지 이 아름다운 도시에 연합군은 3,900톤 이상의 폭탄을 투하, 도시를 불바다로 만든다. 이 폭격으로 도시 40㎢가 파괴되었고, 25,000명 가량의 민간인이 죽었다고 한다. (이 소설에는 약 135,000명이 죽었다고 나와 있으나 실제로는 25,000명 정도라고 한다. 나치 선전장관 괴벨스는 사망자 수를 부풀려 민간인 20만명이 사망했다고 속이기도 했다.)

연합군의 무분별한 폭격은 종전 후 도덕성의 문제를 불러 일으키며 많은 논란에 휩싸였다. 


작가 커트 보니것은 미군에 징집되어 2차 세계대전에 참전,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혀 드레스덴 포로 수용소로 끌려오게 되고 바로 이 드레스덴 폭격을 겪게 된다. 폭격으로 모든 것이 녹아내리는 도시 속에서 작가가 어떻게 살 수 있었는지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소설 속 말을 빌리자면 '우연이 허락'했기에 살 수 있었을 뿐이다. (포로수용소가 드레스덴 외곽에 있어 폭격 목표지점이 아니었기에 살 수 있었다고 하는데 그래도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커트 보니것을 포함 살아남은 포로들은 드레스덴을 수습하는 작업에 참여, 불에 탄 시체를 파내는 일을 했다. 


<제5도살장>의 주인공은 빌리 필그림이다 .그는 전쟁이 일어나자 군종사병으로 2차 세계대전에 참가하게 되고 벌지전투에서 독일 군의 포로가 된다. 그리고 노역에 동원되기 위해 드레스덴으로 끌려 가고, 전쟁 전 고기 저장소로 쓰였던 '제5도살장'에서 시럽 만드는 일을 하게 된다. 

그러다 드레스덴 폭격을 경험하게 되고 극적으로 살아남아 시체를 수습하는 일을 하다 종전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온다. 1945년 빌리는 육군을 명예 제대한 뒤 전쟁 전 다녔던 검안학교에 다시 등록하여 검안사가 되고 부잣집 딸과 결혼도 한다.


근데 이 소설은 매우 특이하다. 이야기는 빌리의 시간과 공간 여행으로 진행된다. 빌리는 과거, 미래를 오가고 '트랄파마도어'라는 행성에 납치되기도 하는 등 이야기가 파편적인 서술로 진행되어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2차 세계대전 전장에서 갑자기 1965년으로 갔다가 1958년, 1961년...다시 전쟁...이런 식으로 종횡무진 시간 여행을 한다. 심지어 자신이 언제 죽을 것인지도 예언하는 등,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모든 이야기가 에피소드처럼 나뉘어서 전개된다. 사건과 사건사이의 어떤 인과관계나 설명은 매우 부족하고 그저 각 시간의 에피소드 나열이 이 소설의 대부분을 구성한다.


100대 영미소설에도 속하고 반전소설로도 유명한 이 소설은 작년에 리커버 에디션이 나와 새 책(!)으로 산건데 이번에 읽으면서 기대했던 그런 반전 소설이 아니라 사실 조금 실망했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 또 하나의 유명한 반전 소설 <캐치-22>를 읽다가 150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포기해 기분이 찝찝했는데(소설 속에 모든 인물이 다 미쳐 있어서 도저히 진도가 안 나갔다), 대신 기대하고 선택한 이 책에도  전쟁과 비행기 사고로 정신이 이상한 남자가 주인공으로 나와 비상식적인 이야기들을 쏟아내니 '아 큰일났다' 싶었다. 그러나 문장이 어렵지 않고 허무맹랑한 이야기 속에 베어있는 유머와 냉소, 무엇보다 작가가 작정하고 이렇게 쓴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왔다갔다하며 수많은 죽음을 목격할 때 마다 빌리는 항상 다음과 같이 말을 한다.


"뭐 그런 거지 (So it goes)"


수천년의 역사 속에서 사람이 서로를 죽이는 일은 늘 있어 왔기 때문에, 그 누구의 죽음도 새로울 것 없다는 이 냉소적인 말은 이 소설에서 106번이 나온다고 한다. 수만 명의 목숨이 불 속에서 타 죽었지만 그 죽음 앞에서 무감각한 인간들을 본 빌리는 이 세상의 모든 죽음을 트랄파마도어 식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죽은 사람을 두고 "뭐 그런 거지"라고 말하는 트랄파마도어인들처럼.


"내가 트랄파마도어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죽는다 해도 죽은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점이다. 여전히 과거에 잘 살아 있으므로 장례식에서 우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짓이다."(p.43)


전쟁을 다룬 수많은 소설과 영화는 전쟁의 참혹함을 보여주면서 반전의식을 심어주지만 <제5도살장>은 일반 소설처럼 전쟁의 비극을 사실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이 소설에는 극적인 사건도 대단한 영웅도 등장하지 않는다. 삶에 무기력한 정신이 온전치 않은 주인공이 시간과 공간을 누비며 왔다갔다 할 뿐이다. 

이 소설의 절정은  드레스덴의 폭격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다. 그리고 그 또한 짧게 스치듯 언급하고 지나갈 뿐이다. 그러나 우리 삶의 아이러니를 그 어떤 작품보다 강렬하게 보여준다. 작가는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비극적인 사건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보여주고, 바로 이런 점에서 많은 독자들이 보니것에게 열광하는 것이지 않나 싶다. 


작가 보니것은 한 인터뷰에서 드레스덴 폭격은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에게도 이익을 가져다 주지 않은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 "바로 접니다. 이 책을 써서 큰 돈을 벌었으니까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책은 이런 커트 보니것의 블랙 유머로 가득 차 있다. 물론 그 뒷맛은 씁쓸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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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1-12-02 13:4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아 구매전에 제 리뷰를 읽으셨다면... 그래도 별4개나 주셨네요ㅎㅎ

coolcat329 2021-12-02 14:07   좋아요 3 | URL
물감님 리뷰 당연히 읽었죠! 근데 이 책 작년에 산거에요.
저도 재미면에선 별3개인데요, 하도 독특해서 4개로 했습니다.

물감 2021-12-02 14:10   좋아요 3 | URL
앗 그럼 할말이 없습니다... 쭈글...ㅎㅎ

Falstaff 2021-12-02 14:2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오,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작품의 해석이나 느낌 같은 건 방죽에 핀 무수한 꽃처럼 만발할 문제작입니다. 당연히 개인적인 호오 역시 극과 극으로 갈릴 것이고요.
전 별 다섯!
아주 아주 아주 작은 소망이 하나 있다면, 다른 이도 이 작품의 번역을 한 번 시도해봤으면.... 하는 겁니다.

coolcat329 2021-12-02 14:12   좋아요 4 | URL
폴스타프님 저는 이런 소설 처음 읽어봅니다. 처음에 앗! 큰일났다 싶을 정도였습니다. ㅎ
근데 두 번째 다시 보니 정말 ‘방죽에 핀 무수한 꽃‘이라는 표현이 딱입니다.
네 다른 번역 나와도 좋겠어요~

coolcat329 2021-12-02 14:15   좋아요 4 | URL
개인적 질문드려요.
제가 캐치-22를 한 150페이지 읽다 포기했는데 이 책 번역이 괜찮으셨나요? 미친 사람들이라 감안을 해도 도통 이해가 안가서요.
근데 모두들 극찬을 하고 제가 반전소설에 욕심이 나서 꼭 읽고 싶은데...읽으면서 진도가 안 나가 괴롭습니다.ㅠ

Falstaff 2021-12-02 14:25   좋아요 4 | URL
옹? 분명히 독후감 올려 놨는데 없어졌네요. 이것도 재작년 폭탄 사건 때문에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캐치 22> 번역한 안정효가 글 하나는 재미나게 쓰는 소설가잖아요. 글 가운데서도 전쟁 소설이 이 양반 주특깁니다. 근데 영어를 정확한 우리말로 바꾼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자신이 얼렁뚱땅, 어쩌면 원서보다 더 재미난 우리말로 옮겨놨을 수 있습니다.
그건 믿으셔도 좋은데 문제가 어쩌면 조지프 헬러, 작가 본인일 지도 모릅니다. 이 책, 틀림없는 반전 소설이고요, 어떻게 해서든지 전쟁 안 하고 집에 가려 일부러 미친 짓을 하는 골통 인간들의 집합인데, 저 지휘관 새끼들은 장병들이 죽거나 말거나, 심지어 대량으로 몰살을 당해도 자기만 한 계급 올라가면 만사 땡인 잡놈들입니다. 완전히 수컷들의 세상입니다. 그래서 여성 독자들이 읽기에 매우 불편할 수 있습니다.
거기다가 안정효가 특기를 발휘해 설레발을 더 쳐버렸으니 재미나게 읽는 분들은 요절복통을 할 것이고, 맞지 않는 분들은 체하기도 하겠지요.
에고. 거 참 유감이네요.
근데, 확실한 죽음이 눈 앞에 있는 전쟁터에서 못할 일이 없는 건 맞는 모양입니다.

coolcat329 2021-12-02 14:29   좋아요 3 | URL
네 다 정상이 아니더라구요.ㅠ
여자로서 불편함은 감수할 마음이 있는데 참 대화가 이해가 안가니 답답해서 제가 속풀이 겸 폴스타프님께 하소연을 했습니다.🥲
답변 감사드리고요~~
다음에 다시 한 번 도전을 해보겠습니다. 😊

미미 2021-12-02 14:3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별5개 주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블랙유머가 최고였죠. 저는 촌철살인에 약합니다ㅎㅎ

coolcat329 2021-12-02 14:37   좋아요 4 | URL
네 미미님 별👋 기억합니다. 제가 편안함과 익숙함에 안주하려는 기질이 강해서 그런지 이렇게 기발하고 독특한 발상 앞에서 당황, 주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비상식적 이야기가 짧고 촌철살인! 이라 읽을 수 있었어요.
장황한 두 권 짜리 였다면 포기했을 거에요. ㅎ

새파랑 2021-12-02 15: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리커버판이네요~! 저는 이책 사놓고 아직 못읽었어요 ㅜㅜ 특이하다고 해서 읽어보고 싶었는데 ㅋ

coolcat329 2021-12-02 16:57   좋아요 2 | URL
새파랑님은 왠지 좋아하실거 같아요~

잠자냥 2021-12-02 15:2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전 최근에 읽은 책에서 커트 보니것이 드레스덴 폭격이 있던 이 시기에 가족에게 보낸 편지와 그의 손 글씨를 봤는데 울컥하더라고요; 그의 손글씨를 보니 제가 상상한 그의 이미지와 비슷해서 좀 더 정감이 가기도 했고 뭐 그랬어요... 그의 손글씨 편지는 조만간 페이퍼에서 공개하겠습니다. ㅎㅎㅎ (제가 요즘 바빠서 슬프답니다....흐흐흑)

coolcat329 2021-12-02 17:02   좋아요 2 | URL
아~~보니것 에세이를 읽으셨나요? 에세이도 참 괜찮다고 하더라구요...
드레스덴 미군 포로 중 7명만 살아남았고 그 중 한 명이 보니것이니 참 어땠을지...미치지 않은게 오히려 신기합니다.
그 상황에서 쓴 편지니...ㅠㅠ

연말이라 바쁘시군요. 페이퍼 기대할게요. 손편지 보고 싶네요.

레삭매냐 2021-12-05 11: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제5도살장>으로 아마
커트 보네거트 샘을 처음 알
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그만의 블랙 유머
에 흠뻑 빠져서 마구 읽던
기억이 나네요.

예전에 나왔다가 절판된
책들도 소개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지루한 이야기 창비세계문학 53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석영중 옮김 / 창비 / 2016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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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읽은 윌리엄 트레버의 단편이 너무 좋았었기에, 트레버가 영향을 받았다는 체호프(1860~1904)의 단편도 읽고 싶어졌다. 

<<지루한 이야기>>는 체호프의 중단편선으로 중편 <지루한 이야기>,<검은 옷의 수도사>와 단편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총 3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지루한 이야기>는 부제가 '어느 노인의 수기'로 죽음을 앞둔 한 저명한 교수의 삶과 그 의미를 다룬 작품이다. 주인공 니꼴라이는 러시아는 물론 해외에서도 유명한 학자이자 의과대학 교수이다. 그러나 현재 62세인 그는 병에 걸려 누가 봐도 '저 양반 곧 죽겠구나' 생각이 들 정도로 쇠약해진 상태로 살 날이 6개월도 남지 않았다. 육체적인 고통 외에도 경제적 어려움으로 가족과의 관계도 소원한 상태이며 아내와 딸은 그의 고통에 무심하다. 

한때 찬란한 명성을 누리던 그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 느끼는 외로움, 허무함은 그의 고통을 더욱 무겁게 짓누른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고인이 된 동료 의사의 딸인 까쨔이다. 까쨔는 그에게 금전적인 도움을 줄 테니 치료를 받으라고 하지만 그는 거절한다.

그는 '아름다운 예술품'과 같던 자신의 삶을 '용감하고 평화로운 영혼'의 상태에서 맞이하고 싶지만 지금 자신의 모습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꼴이다. 그가 평생 믿었던 과학에 대한 믿음마저도 사라진 상태이다. 


"과학에 대한 나의 애착, 더 살고 싶다는 나의 소망, 낯선 침대에 앉아 스스로를 알려고 하는 시도, 이 모든 생각과 감정, 그리고 내가 삼라만상과 관련하여 정립하는 개념들에는 모든 것을 하나의 전체로 엮어주는 공통적인 무언가가 빠져 있다. (...) 만일 그것이 없다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 (p.102,103)


그는 자신의 삶에 중요한 뭔가가 결여되어 있음을 깨달으나 그것이 무엇인지 끝내 찾지 못한다. 마지막 자신을 찾아와 "저는 더이상 이렇게 살 수 없어요! 제발, 지금 당장 말씀해주세요. 어떻게 해야 하지요?"(p.105) 라고 간절히 묻는 까쨔의 물음에 그는 "나도 모른다" 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다. 


그는 자신의 앞에서 우는 까쨔를 보며 생각한다.


'그녀를 바라보는 동안 내가 그녀보다 행복하다는 사실 때문에 부끄러워진다. 동료 철학자들이 공통이념이라 부르는 것이 내 안에 없다는 걸 나는 인생의 황혼에, 죽음을 목전에 둔 최근에 와서야 알아차렸다. 그런데 이 가엾은 녀석의 영혼은 이제까지도 안식이란 걸 몰랐지만 앞으로도 평생, 한평생 모를 것이다!' (p.106)


이 소설은 아무런 극적인 반전없이 이대로 끝난다. 체호프는 인생이란 무엇이며 그 의미는 어디에 있는지 답을 주지 않는다. 역자의 설명대로 '29세의 의사이자 작가인 체호프는 삶과 죽음에 관해, 인생의 의미에 관해, 허무에 관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이 먹는다는 것에 관해 자기 식으로 의학적으로 문제를 제기'(p.225 작품해설)할 뿐이다. 


체호프가 34세에 발표한<검은 옷의 수도사>는 성공한 박사, 꼬브린이 심각한 신경쇠약에 걸려 망상 속에서 검은 옷을 입은 수도사를 만나면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파멸해가는 이야기이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이 이야기는 기존의 체호프의 소설과는 다르게 기괴하면서도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꼬브린은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원예가 뻬소쯔끼의 후견하에서 그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하여 학자로서 성공한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인가 검은 옷의 수도사를 보기 시작하고 그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듣게 된다. 


"자네는 인류를 수천년 빨리 영원한 진리의 왕국으로 인도할 걸세. 바로 여기에 자네의 소명이 있는 거지" (p.138)


꼬브린은 자신이 신에게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수도사의 말에 희열을 느끼며, 행복에 겨워 뻬소쯔끼의 딸 따냐와 결혼까지 한다. 그러나 결혼 후에도 그의 망상은 더 심해지고 아내는 그런 꼬브린에게 치료를 권유, 꼬브린은 아내의 말대로 치료를 받지만 그는 더 이상 행복하지 않다. 과대망상증이 있었을 때는 행복했지만 지금은 그저 보통 사람이 되었다며 아내를 원망하고 증오한다. 

체호프는 이 소설에서 환각에 사로잡혀 그 안에서만 행복을 느끼는 정신이상자의 모습을 매우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1899년 발표한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은 체호프의 대표작으로 당시 그가 머물었던 얄따를 배경으로 한다. 워낙에 유명한 작품으로 예전에 몇 번 읽었지만, 오랜만에 읽으니 처음 읽는 것처럼 새로웠고 내가 생각했던 체호프 스타일의 작품이라 앞의 두 작품에 비해 편한 마음으로 읽었다. 

이 작품은 한 마디로 여행지에 만난 유부남, 유뷰녀의 사랑 이야기이다. 은행원 구로프는 여자들을 "열등한 족속!"이라고 무시하지만, '그 열등한 족속이 없으면 단 이틀도 살 수 없'는 남자이다.

이런 그가 휴양차 머물고 있는 얄타에서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인 안나를 보게 되고, 역시나 바람둥이답게 의도적으로 접근, 둘은 사랑을 나누게 된다. 안나는 남편의 편지로 예정보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게 되고 두 사람은 그렇게 헤어지지만, 어찌된 일인지 구로프는 몇 달이 지나도 그녀를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트레버의 <그 시절의 연인들>을 떠올렸는데, 이 소설도 불륜의 사랑을 소재로 하고 있으며 두 남녀의 설정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레버는 그 아슬아슬한 사랑이 어떻게 진행되고 어떻게 끝나는지 보여준 반면, 체호프는 그들의 불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점에서 그 어떤 결말도 보여주지 않고, '가장 어렵고 복잡한 일은 이제 방금 막 시작되었을 뿐이라는' 모호한 말로 이야기를 끝낸다.


역자 석영중 교수는 작품해설에서 체호프는 '삶을 객관적이고 냉정한 의사의 눈으로 바라보았고 강인한 의지와 열정으로 삶을 살았으며 작가의 언어로 그것을 풀어놓았다'(p.246)고 말한다.

체호프의 소설은 그야말로 있는 그대로의 삶의 모습이며, 그 모습은 나에게 하나의 질문으로 다가온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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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11-27 20: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지루한 이야기>는 정말 지루하지 않은 이야기인것 같아요~! 이 책에 실린 단편 세편 모두 완전 좋다는~! 이 책 읽고 제가 창비세계문학시리즈를 검색하기 시작했습니다 ^^

coolcat329 2021-12-02 14:43   좋아요 2 | URL
창비세계문학 저도 참 좋더라구요. 예전 그 빈티지한 표지가요. 어떤 분은 걸레같다 하셨던가...ㅠ 그래서 지금의 매끈한 표지로 바꿨나도 싶구요

페크pek0501 2021-12-02 14: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지루한 이야기, 를 빼고 두 편은 읽었어요.
체호프는 제가 좋아하는 작가죠. ^^

coolcat329 2021-12-02 14:45   좋아요 2 | URL
아 그러셨군요. 체호프 희곡도 읽어보고 싶어요~
 
나이트
엘리 위젤 지음, 김하락 옮김 / 예담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내 삶이 일곱 겹으로 봉해진 하나의 긴 밤으로 되어버린 그날 밤,

수용소에서 맞은 첫날밤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그 연기를 결코 잊지 않으리라.

몸뚱이가 고요한 하늘 아래 연기로 화해버린 어린이들의 얼굴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내 믿음을 영원히 불살라버린 그 불꽃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살고자 하는 마음을 영원히 앗아간 밤의 침묵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하나님과 나의 영혼을 살해하고 내 꿈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린 그때,

그 순간들을 나는 결코 잊지 않으리라.

하나님만큼 오래 산다 하더라도 이것들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결코 잊지 않으리라.

<나이트>는 1986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루마니아 태생의 유대계 미국 작가 엘리 위젤(1928~2016)의 자전 소설이다. 위젤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로 15세 때 가족과 함께 나치 수용소로 끌려가 아우슈비츠, 부나 모노비츠 , 부헨발트 수용소를 전전하며 겪은 참상을 이 작품에서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는 수용소에 맞이한 첫날 밤 '살고자 하는 마음을 영원히 앗아간 밤의 침묵'(p.77) 에 절망하고, 수용자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기 위해 13살 어린 소년을 교수대에 매다는 장면을 보면서,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 물으며 신의 침묵에 분노한다. 


아우슈비츠에 도착하자마자 어머니와 여동생은 바로 가스실로 끌려갔고, 위젤은 아버지와 함께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인 부나 수용소로 이송된다. 

1945년 1월 27일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해방되기 이전 위젤은 '죽음의 행군'을 하여 부헨발트 수용소로 이송되는데 이곳에서 아버지마저 잃게 된다. 


종전 후, 혼자 살아남은 위젤은 프랑스 고아원으로 보내진 뒤 소르본 대학에서 공부, 1958년 증언 문학인 <나이트>를 출간한다. 그 후 미국으로 이주, 시민권을 취득한 후 보스턴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세계 인권 증진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 나갔고 이런 모든 공로로 198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다. 위젤은 노벨상 수락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립은 가해자만 도울 뿐 희생자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침묵은 결국 괴롭히는 사람 편에 서는 것입니다. 인간의 목숨이, 인간의 존엄성이 위협받을 때는 소극적인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엘리 위젤은 이 책을 통해 나치의 잔혹한 만행과 수용소의 참상을 고발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침묵하는 것도 범죄임을,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증언하는 용기를 가져야 함을 말한다. 


대표적인 홀로코스트 문학인 <나이트>, 스콧님의 추천으로 읽은 책인데, 다른 홀로코스트 문학에 비해 쉽게 읽혀 청소년들에게 특히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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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1-26 15:5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제가 중딩 시절때 크리스마스 선물로 부모님에게 받은 책 중 한권으로
이런 저런 명작 동화 영어 세트 완독 기념으로 부모님이 이 책을 원서로 헤세의 싯다르타(외삼촌이 사줌) 원서 이렇게 받아서 위젤의 나이트만 완독한 뿌듯했던 추억이 담긴 책입니다 ㅎㅎ
영문 문장도 명료해서 당시 감동적으로 읽었던 기억이 ,,,


홀로코스트 문학 중에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 >사알짝 추천 합니다 ^ㅎ^

coolcat329 2021-11-26 16:50   좋아요 5 | URL
네 이 책은 증언문학 입문용으로 청소년이 읽으면 좋을 책이란 생각이 들어요.

<운명>은 읽었습니다~!
그러고보니 임레 케르테스와 위젤 두 분다 15살에 아우슈비츠로 끌려갔네요.ㅠ
두 분이 돌아가신 해도 2016년으로 같고 태어난 해도 1년 차로 비슷한 점이 있네요.

새파랑 2021-11-26 17:2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우슈비츠 관련된 책들은 다 슬픈거 같아요 ㅜㅜ 맞습니다. 침묵하는것도 범죄같아요. 저도 그런면에서 좀 찔리긴 하는데 한번 반성해 봐야 겠습니다~!!

역시 스콧님의 추천작~!!

coolcat329 2021-11-26 17:54   좋아요 3 | URL
네 저도 반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