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도살장 (리커버 에디션) 커트 보니것 리커버 컬렉션
커트 보니것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7월
평점 :
품절


커트 보니것(Kurt Vonnegut 1922~2007)이 1969년 발표한 <제5도살장>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드레스덴 폭격을 소재로 한 미국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한다. 

폭격이 일어나기 전 드레스덴은 '엘베 강의 피렌체'라고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도시였다. 1945년 2월 13일부터 15일까지 이 아름다운 도시에 연합군은 3,900톤 이상의 폭탄을 투하, 도시를 불바다로 만든다. 이 폭격으로 도시 40㎢가 파괴되었고, 25,000명 가량의 민간인이 죽었다고 한다. (이 소설에는 약 135,000명이 죽었다고 나와 있으나 실제로는 25,000명 정도라고 한다. 나치 선전장관 괴벨스는 사망자 수를 부풀려 민간인 20만명이 사망했다고 속이기도 했다.)

연합군의 무분별한 폭격은 종전 후 도덕성의 문제를 불러 일으키며 많은 논란에 휩싸였다. 


작가 커트 보니것은 미군에 징집되어 2차 세계대전에 참전,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혀 드레스덴 포로 수용소로 끌려오게 되고 바로 이 드레스덴 폭격을 겪게 된다. 폭격으로 모든 것이 녹아내리는 도시 속에서 작가가 어떻게 살 수 있었는지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소설 속 말을 빌리자면 '우연이 허락'했기에 살 수 있었을 뿐이다. (포로수용소가 드레스덴 외곽에 있어 폭격 목표지점이 아니었기에 살 수 있었다고 하는데 그래도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커트 보니것을 포함 살아남은 포로들은 드레스덴을 수습하는 작업에 참여, 불에 탄 시체를 파내는 일을 했다. 


<제5도살장>의 주인공은 빌리 필그림이다 .그는 전쟁이 일어나자 군종사병으로 2차 세계대전에 참가하게 되고 벌지전투에서 독일 군의 포로가 된다. 그리고 노역에 동원되기 위해 드레스덴으로 끌려 가고, 전쟁 전 고기 저장소로 쓰였던 '제5도살장'에서 시럽 만드는 일을 하게 된다. 

그러다 드레스덴 폭격을 경험하게 되고 극적으로 살아남아 시체를 수습하는 일을 하다 종전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온다. 1945년 빌리는 육군을 명예 제대한 뒤 전쟁 전 다녔던 검안학교에 다시 등록하여 검안사가 되고 부잣집 딸과 결혼도 한다.


근데 이 소설은 매우 특이하다. 이야기는 빌리의 시간과 공간 여행으로 진행된다. 빌리는 과거, 미래를 오가고 '트랄파마도어'라는 행성에 납치되기도 하는 등 이야기가 파편적인 서술로 진행되어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2차 세계대전 전장에서 갑자기 1965년으로 갔다가 1958년, 1961년...다시 전쟁...이런 식으로 종횡무진 시간 여행을 한다. 심지어 자신이 언제 죽을 것인지도 예언하는 등,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모든 이야기가 에피소드처럼 나뉘어서 전개된다. 사건과 사건사이의 어떤 인과관계나 설명은 매우 부족하고 그저 각 시간의 에피소드 나열이 이 소설의 대부분을 구성한다.


100대 영미소설에도 속하고 반전소설로도 유명한 이 소설은 작년에 리커버 에디션이 나와 새 책(!)으로 산건데 이번에 읽으면서 기대했던 그런 반전 소설이 아니라 사실 조금 실망했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 또 하나의 유명한 반전 소설 <캐치-22>를 읽다가 150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포기해 기분이 찝찝했는데(소설 속에 모든 인물이 다 미쳐 있어서 도저히 진도가 안 나갔다), 대신 기대하고 선택한 이 책에도  전쟁과 비행기 사고로 정신이 이상한 남자가 주인공으로 나와 비상식적인 이야기들을 쏟아내니 '아 큰일났다' 싶었다. 그러나 문장이 어렵지 않고 허무맹랑한 이야기 속에 베어있는 유머와 냉소, 무엇보다 작가가 작정하고 이렇게 쓴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왔다갔다하며 수많은 죽음을 목격할 때 마다 빌리는 항상 다음과 같이 말을 한다.


"뭐 그런 거지 (So it goes)"


수천년의 역사 속에서 사람이 서로를 죽이는 일은 늘 있어 왔기 때문에, 그 누구의 죽음도 새로울 것 없다는 이 냉소적인 말은 이 소설에서 106번이 나온다고 한다. 수만 명의 목숨이 불 속에서 타 죽었지만 그 죽음 앞에서 무감각한 인간들을 본 빌리는 이 세상의 모든 죽음을 트랄파마도어 식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죽은 사람을 두고 "뭐 그런 거지"라고 말하는 트랄파마도어인들처럼.


"내가 트랄파마도어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죽는다 해도 죽은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점이다. 여전히 과거에 잘 살아 있으므로 장례식에서 우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짓이다."(p.43)


전쟁을 다룬 수많은 소설과 영화는 전쟁의 참혹함을 보여주면서 반전의식을 심어주지만 <제5도살장>은 일반 소설처럼 전쟁의 비극을 사실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이 소설에는 극적인 사건도 대단한 영웅도 등장하지 않는다. 삶에 무기력한 정신이 온전치 않은 주인공이 시간과 공간을 누비며 왔다갔다 할 뿐이다. 

이 소설의 절정은  드레스덴의 폭격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다. 그리고 그 또한 짧게 스치듯 언급하고 지나갈 뿐이다. 그러나 우리 삶의 아이러니를 그 어떤 작품보다 강렬하게 보여준다. 작가는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비극적인 사건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보여주고, 바로 이런 점에서 많은 독자들이 보니것에게 열광하는 것이지 않나 싶다. 


작가 보니것은 한 인터뷰에서 드레스덴 폭격은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에게도 이익을 가져다 주지 않은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 "바로 접니다. 이 책을 써서 큰 돈을 벌었으니까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책은 이런 커트 보니것의 블랙 유머로 가득 차 있다. 물론 그 뒷맛은 씁쓸하지만...


댓글(15)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감 2021-12-02 13:4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아 구매전에 제 리뷰를 읽으셨다면... 그래도 별4개나 주셨네요ㅎㅎ

coolcat329 2021-12-02 14:07   좋아요 3 | URL
물감님 리뷰 당연히 읽었죠! 근데 이 책 작년에 산거에요.
저도 재미면에선 별3개인데요, 하도 독특해서 4개로 했습니다.

물감 2021-12-02 14:10   좋아요 3 | URL
앗 그럼 할말이 없습니다... 쭈글...ㅎㅎ

Falstaff 2021-12-02 14:2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오,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작품의 해석이나 느낌 같은 건 방죽에 핀 무수한 꽃처럼 만발할 문제작입니다. 당연히 개인적인 호오 역시 극과 극으로 갈릴 것이고요.
전 별 다섯!
아주 아주 아주 작은 소망이 하나 있다면, 다른 이도 이 작품의 번역을 한 번 시도해봤으면.... 하는 겁니다.

coolcat329 2021-12-02 14:12   좋아요 4 | URL
폴스타프님 저는 이런 소설 처음 읽어봅니다. 처음에 앗! 큰일났다 싶을 정도였습니다. ㅎ
근데 두 번째 다시 보니 정말 ‘방죽에 핀 무수한 꽃‘이라는 표현이 딱입니다.
네 다른 번역 나와도 좋겠어요~

coolcat329 2021-12-02 14:15   좋아요 4 | URL
개인적 질문드려요.
제가 캐치-22를 한 150페이지 읽다 포기했는데 이 책 번역이 괜찮으셨나요? 미친 사람들이라 감안을 해도 도통 이해가 안가서요.
근데 모두들 극찬을 하고 제가 반전소설에 욕심이 나서 꼭 읽고 싶은데...읽으면서 진도가 안 나가 괴롭습니다.ㅠ

Falstaff 2021-12-02 14:25   좋아요 4 | URL
옹? 분명히 독후감 올려 놨는데 없어졌네요. 이것도 재작년 폭탄 사건 때문에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캐치 22> 번역한 안정효가 글 하나는 재미나게 쓰는 소설가잖아요. 글 가운데서도 전쟁 소설이 이 양반 주특깁니다. 근데 영어를 정확한 우리말로 바꾼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자신이 얼렁뚱땅, 어쩌면 원서보다 더 재미난 우리말로 옮겨놨을 수 있습니다.
그건 믿으셔도 좋은데 문제가 어쩌면 조지프 헬러, 작가 본인일 지도 모릅니다. 이 책, 틀림없는 반전 소설이고요, 어떻게 해서든지 전쟁 안 하고 집에 가려 일부러 미친 짓을 하는 골통 인간들의 집합인데, 저 지휘관 새끼들은 장병들이 죽거나 말거나, 심지어 대량으로 몰살을 당해도 자기만 한 계급 올라가면 만사 땡인 잡놈들입니다. 완전히 수컷들의 세상입니다. 그래서 여성 독자들이 읽기에 매우 불편할 수 있습니다.
거기다가 안정효가 특기를 발휘해 설레발을 더 쳐버렸으니 재미나게 읽는 분들은 요절복통을 할 것이고, 맞지 않는 분들은 체하기도 하겠지요.
에고. 거 참 유감이네요.
근데, 확실한 죽음이 눈 앞에 있는 전쟁터에서 못할 일이 없는 건 맞는 모양입니다.

coolcat329 2021-12-02 14:29   좋아요 3 | URL
네 다 정상이 아니더라구요.ㅠ
여자로서 불편함은 감수할 마음이 있는데 참 대화가 이해가 안가니 답답해서 제가 속풀이 겸 폴스타프님께 하소연을 했습니다.🥲
답변 감사드리고요~~
다음에 다시 한 번 도전을 해보겠습니다. 😊

미미 2021-12-02 14:3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별5개 주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블랙유머가 최고였죠. 저는 촌철살인에 약합니다ㅎㅎ

coolcat329 2021-12-02 14:37   좋아요 4 | URL
네 미미님 별👋 기억합니다. 제가 편안함과 익숙함에 안주하려는 기질이 강해서 그런지 이렇게 기발하고 독특한 발상 앞에서 당황, 주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비상식적 이야기가 짧고 촌철살인! 이라 읽을 수 있었어요.
장황한 두 권 짜리 였다면 포기했을 거에요. ㅎ

새파랑 2021-12-02 15: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리커버판이네요~! 저는 이책 사놓고 아직 못읽었어요 ㅜㅜ 특이하다고 해서 읽어보고 싶었는데 ㅋ

coolcat329 2021-12-02 16:57   좋아요 2 | URL
새파랑님은 왠지 좋아하실거 같아요~

잠자냥 2021-12-02 15:2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전 최근에 읽은 책에서 커트 보니것이 드레스덴 폭격이 있던 이 시기에 가족에게 보낸 편지와 그의 손 글씨를 봤는데 울컥하더라고요; 그의 손글씨를 보니 제가 상상한 그의 이미지와 비슷해서 좀 더 정감이 가기도 했고 뭐 그랬어요... 그의 손글씨 편지는 조만간 페이퍼에서 공개하겠습니다. ㅎㅎㅎ (제가 요즘 바빠서 슬프답니다....흐흐흑)

coolcat329 2021-12-02 17:02   좋아요 2 | URL
아~~보니것 에세이를 읽으셨나요? 에세이도 참 괜찮다고 하더라구요...
드레스덴 미군 포로 중 7명만 살아남았고 그 중 한 명이 보니것이니 참 어땠을지...미치지 않은게 오히려 신기합니다.
그 상황에서 쓴 편지니...ㅠㅠ

연말이라 바쁘시군요. 페이퍼 기대할게요. 손편지 보고 싶네요.

레삭매냐 2021-12-05 11: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제5도살장>으로 아마
커트 보네거트 샘을 처음 알
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그만의 블랙 유머
에 흠뻑 빠져서 마구 읽던
기억이 나네요.

예전에 나왔다가 절판된
책들도 소개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