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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평점 :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소설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왜 오바마와 빌 게이츠가 이 책을 추천했는지, 왜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품위, 품격, 재미, 따뜻함 등의 단어를 써가며 입이 마르게 칭찬을 했는지 드디어 알게 되었다.
에이모 토울스(Amor Towles 1964~)에게 전작을 뛰어 넘는 성공을 안겨준 이 책을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년 전 도서관 희망도서로 신청해 읽다가 다 못 읽고 반납한 사연이 있다. 당시 이상하게도 이 멋진 소설이 나를 사로잡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정말 이상한 일이다.
그러다 작가가 2011년 발표해 작가로서 입지를 굳힌<우아한 연인>을 같은 해 먼저 읽게 되었다. 주변 멋진 남성들의 도움으로 승승장구하는 여주인공에게 크게 끌리진 않았지만, 그래도 1930년대 뉴욕, 맨해튼을 배경으로 젊은 남녀의 사랑과 이별을 섬세하면서도 세련되게 묘사한 점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로맨스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참 재밌었고 무엇보다 작가의 세련됨과 우아함에 마음을 빼앗겼다.
<모스크바의 신사>의 주인공은 성 안드레이 훈장 수훈자이자 경마 클럽 회원, 사냥의 명수인 서른세 살의 귀족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이다. 배경은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직후인 1922년, 그는 자신이 묶고 있는 메트로폴 호텔에서 단 한 걸음이라도 나가면 총살형에 처하는 '종신연금형'을 선고받는다. 원래는 구시대의 유물인 귀족들은 총살 당해야 마땅하나 혁명에 공헌을 한 시를 쓴 덕분에 종신연금형으로 감형, 겨우 목숨을 건진 것이다.
"절대 착각하지 마시오. 만약 당신이 한 걸음이라도 메트로폴 호텔 바깥으로 나간다면 당신은 총살될 테니까."
4년 간 머물렀던 스위트룸에서 좁고 허름한 방으로 쫓겨난 백작.
'인간은 자신의 환경을 지배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 환경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는 어린 시절 대공으로부터 들은 말을 기억하며, 그는 자신에게 닥친 새로운 삶을 의연함을 잃지 않은 채 당당한 귀족의 태도로 받아들인다.
이 책은 바로 이런 로스토프 백작이 비록 몸은 호텔이라는 한정된 장소에 갇혀 있지만 좌절하지 않고 신사의 품위를 유지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 나가는 이야기이다.
호텔에서 제일 처음으로 사귄 어린 소녀 니나와는 호텔 구석구석을 탐험하고, 유명 여배우와 은밀한 사랑도 나누며, 공산당 고위 간부의 개인 교사가 되어 비밀 스터디도 하고, 급기야 호텔 식당의 웨이터 주임이 되기까지 한다.
식당 주방장 에밀과 식당 지배인 안드레이는 친구이자 동료로서 우정을 나누고 재봉사 마리나와도 친구가 되어 위기의 순간 도움도 받는 등 호텔이라는 좁은 세상 속에서도 사랑과 우정은 존재함을 시종일관 따뜻하고 섬세한 문장으로 작가는 보여준다.
귀족의 신분으로 마음껏 거리를 누비며 화려하고 안락한 생활을 했을 때는 몰랐던 세상과 사람들을 만나며 백작은 삶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되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다. 작가는 이런 보편적인 주제를 우아하고 섬세한 문체로 보여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눈물과 미소 사이를 왔다갔다 하게 만든다.
["편리함이라는 게 뭔지 얘기해줄게요. 정오까지 잠을 잔 다음에 누군가를 시켜 쟁반에 받친 아침 식사를 가져오도록 하는 것. 약속 시간 직전에 약속을 취소해버리는 것. 한 파티장의 문 앞에 마차를 대기시킴으로써 얘기만 하면 즉시 다른 파티장으로 이동할 수 있게 하는 것. 젊었을 때 결혼을 피하고 아이 갖기를 미루는 것. 이런 것들이야말로 최고의 편리함이에요, 안나. 한때 난 그 모든 걸 누렸었죠. 그런데 결국 나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불편함이었어요." (p.555)]
이 소설의 최고 매력은 단연코 로스토프 백작이라는 인물에게 있다. 훌륭한 귀족이 가져야 할 모든 자질을 갖춘 듯한 백작은 모르는 것이 없다. 역사와 철학, 음악, 문학 등 예술은 물론이고 미식가로서 가진 음식과 와인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그의 품격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모스크바의 신사>는 바뀐 세상으로부터 추방당한 한 구시대 인물의 이야기이자 그 혼란스러운 시기를 함께 살아간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격동의 러시아를 배경으로 그 혹독한 시기를 살아간 소소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너무나 매력적인 주인공, 로스토프 백작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볼셰비키 혁명도 바꾸지 못했던 인간 내면에 자리한 사랑과 우정, 배려의 이야기, 잃어버린 내 안의 품위를 되살리고 싶은 바로 그런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