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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율리 체 지음, 이기숙 옮김 / 그러나 / 2019년 12월
평점 :
2022년 새해를 앞두고 휴양지 별장 그림이 그려진 예쁜 표지의 <새해>를 읽었다. 독일 작가 율리 체(Juli Zeh 1974~)가 2018년 발표한 <새해>는 슈피겔 종합 1위, 16개월간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킨 작품이다.
작가 율리 체에 대해 살짝 소개하자면, 그녀는 독일 본(Bonn)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유럽법과 국제법을 전공,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1년 첫 장편 <독수리와 천사>로 큰 성공을 거두고 이후 발표하는 작품마다 각종 문학상을 휩쓸며 독일 문단에서 높은 평가를 받음과 동시에 자신의 전공을 살려 법조인으로도 활동하는 뛰어난 능력의 작가이다. 사진을 보니 외모도 범상치않다.
'다리가 아프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한 남자가 자전거를 타고 가파른 언덕을 힘겹게 올라가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가족과 함께 찾은 휴양지 란사로테 섬(스페인에 속하는 섬으로 북대서양 카나리아 제도에 동쪽 끝에 있는 섬)에서 주인공 헤닝은 1월 1일 새해 아침 이렇게 힘겹게 자전거를 타고 있다. 마실 물도 없는 상태에서 자전거 페달을 밟을 때마다 '1월 1일, 1월 1일'을 읊조리며 세찬 바람을 뚫고 올라간다.
그 가운데 머리속에서는 끊임없이 생각이 떠오른다.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들, 아내와 아이들,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늘어가는 육아와 직장생활, 아내와의 육아 분담, 새해에는 달라져야 한다는 각오, 각별한 여동생 루나, 홀로 남매를 키우느라 고생한 어머니 등 생각의 파편들이 계속 떠오른다. 겉보기에는 안정적이고 평범해 보이는 그의 삶이지만 '헤닝은 자신의 인생이 뭔가 아귀가 안 맞는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2년 전 둘째, 딸 비비가 태어나고 나서 처음 나타난 '그것', 악령처럼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공황발작은 그의 삶을 고통스럽게 한다.
[헤닝은 노이로제로 가족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다. 상대가 사랑할 만한 남자가 되고 싶다. 더 많이 웃고, 장난도 치고, 일상의 자잘한 슬픔에서 해학을 발견하고 싶다. 테레자를 더 많이 안아 주고, 아이들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지 않고, 자주 밖에 나가 친구들을 만나고 싶다.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다. 어쨌든 바람을 안고 경사도 20도의 비탈길을 빌린 자전거로 오르는 것보다는 어렵지 않다. (p.78)]
이 소설은 처음부터 이렇게 숨이차고 힘이 든다.
헤닝은 왜 휴가지로 란사로테 섬을 선택했으며 왜 산 정상을 올라가며 이런 다짐을 하는 것일까? 왜 그에게 2년 전부터 공황발작이 일어났을까? 그가 산 정상에서 맞닥뜨리게 될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이런 많은 궁금증을 자아내는 이 소설의 내용은 더이상 말하지 않는게 좋을 듯 싶다.
낑낑거리며 정상을 향해 무거운 자전거를 타고 올라가는 헤닝의 모습과 번갈아가며 나타나는 그의 머리속 상념들, 그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그것'의 원인과 정체는 독자인 나도 힘겹게 오르막길을 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게 했다.
그러다 정상에 도착하고 갑자기 어떤 기억과 만나면서 이야기는 롤러코스터처럼 속도가 붙는데, 공포 소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에 못지 않은 긴장과 고통을 느꼈다. 한 상황을 어쩌면 그토록 치밀하고도 사실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지, 소설 속 인물의 고통, 답답함, 공포가 내 마음에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천천히 힘겹게 올라간 산 정상에서 마음속에 가둬 놓은 기억이 되살아나고 그 진실과 대면하게 되면서 변화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자 사실 진짜 아픈 데는 다리가 아니었음을 알게 되는 이야기.
건조하면서도 가벼운 문장의 두껍지 않은 책이지만 다루는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은 소설이다.
이런게 독일 소설의 매력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