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한 이야기 창비세계문학 53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석영중 옮김 / 창비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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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읽은 윌리엄 트레버의 단편이 너무 좋았었기에, 트레버가 영향을 받았다는 체호프(1860~1904)의 단편도 읽고 싶어졌다. 

<<지루한 이야기>>는 체호프의 중단편선으로 중편 <지루한 이야기>,<검은 옷의 수도사>와 단편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총 3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지루한 이야기>는 부제가 '어느 노인의 수기'로 죽음을 앞둔 한 저명한 교수의 삶과 그 의미를 다룬 작품이다. 주인공 니꼴라이는 러시아는 물론 해외에서도 유명한 학자이자 의과대학 교수이다. 그러나 현재 62세인 그는 병에 걸려 누가 봐도 '저 양반 곧 죽겠구나' 생각이 들 정도로 쇠약해진 상태로 살 날이 6개월도 남지 않았다. 육체적인 고통 외에도 경제적 어려움으로 가족과의 관계도 소원한 상태이며 아내와 딸은 그의 고통에 무심하다. 

한때 찬란한 명성을 누리던 그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 느끼는 외로움, 허무함은 그의 고통을 더욱 무겁게 짓누른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고인이 된 동료 의사의 딸인 까쨔이다. 까쨔는 그에게 금전적인 도움을 줄 테니 치료를 받으라고 하지만 그는 거절한다.

그는 '아름다운 예술품'과 같던 자신의 삶을 '용감하고 평화로운 영혼'의 상태에서 맞이하고 싶지만 지금 자신의 모습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꼴이다. 그가 평생 믿었던 과학에 대한 믿음마저도 사라진 상태이다. 


"과학에 대한 나의 애착, 더 살고 싶다는 나의 소망, 낯선 침대에 앉아 스스로를 알려고 하는 시도, 이 모든 생각과 감정, 그리고 내가 삼라만상과 관련하여 정립하는 개념들에는 모든 것을 하나의 전체로 엮어주는 공통적인 무언가가 빠져 있다. (...) 만일 그것이 없다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 (p.102,103)


그는 자신의 삶에 중요한 뭔가가 결여되어 있음을 깨달으나 그것이 무엇인지 끝내 찾지 못한다. 마지막 자신을 찾아와 "저는 더이상 이렇게 살 수 없어요! 제발, 지금 당장 말씀해주세요. 어떻게 해야 하지요?"(p.105) 라고 간절히 묻는 까쨔의 물음에 그는 "나도 모른다" 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다. 


그는 자신의 앞에서 우는 까쨔를 보며 생각한다.


'그녀를 바라보는 동안 내가 그녀보다 행복하다는 사실 때문에 부끄러워진다. 동료 철학자들이 공통이념이라 부르는 것이 내 안에 없다는 걸 나는 인생의 황혼에, 죽음을 목전에 둔 최근에 와서야 알아차렸다. 그런데 이 가엾은 녀석의 영혼은 이제까지도 안식이란 걸 몰랐지만 앞으로도 평생, 한평생 모를 것이다!' (p.106)


이 소설은 아무런 극적인 반전없이 이대로 끝난다. 체호프는 인생이란 무엇이며 그 의미는 어디에 있는지 답을 주지 않는다. 역자의 설명대로 '29세의 의사이자 작가인 체호프는 삶과 죽음에 관해, 인생의 의미에 관해, 허무에 관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이 먹는다는 것에 관해 자기 식으로 의학적으로 문제를 제기'(p.225 작품해설)할 뿐이다. 


체호프가 34세에 발표한<검은 옷의 수도사>는 성공한 박사, 꼬브린이 심각한 신경쇠약에 걸려 망상 속에서 검은 옷을 입은 수도사를 만나면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파멸해가는 이야기이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이 이야기는 기존의 체호프의 소설과는 다르게 기괴하면서도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꼬브린은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원예가 뻬소쯔끼의 후견하에서 그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하여 학자로서 성공한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인가 검은 옷의 수도사를 보기 시작하고 그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듣게 된다. 


"자네는 인류를 수천년 빨리 영원한 진리의 왕국으로 인도할 걸세. 바로 여기에 자네의 소명이 있는 거지" (p.138)


꼬브린은 자신이 신에게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수도사의 말에 희열을 느끼며, 행복에 겨워 뻬소쯔끼의 딸 따냐와 결혼까지 한다. 그러나 결혼 후에도 그의 망상은 더 심해지고 아내는 그런 꼬브린에게 치료를 권유, 꼬브린은 아내의 말대로 치료를 받지만 그는 더 이상 행복하지 않다. 과대망상증이 있었을 때는 행복했지만 지금은 그저 보통 사람이 되었다며 아내를 원망하고 증오한다. 

체호프는 이 소설에서 환각에 사로잡혀 그 안에서만 행복을 느끼는 정신이상자의 모습을 매우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1899년 발표한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은 체호프의 대표작으로 당시 그가 머물었던 얄따를 배경으로 한다. 워낙에 유명한 작품으로 예전에 몇 번 읽었지만, 오랜만에 읽으니 처음 읽는 것처럼 새로웠고 내가 생각했던 체호프 스타일의 작품이라 앞의 두 작품에 비해 편한 마음으로 읽었다. 

이 작품은 한 마디로 여행지에 만난 유부남, 유뷰녀의 사랑 이야기이다. 은행원 구로프는 여자들을 "열등한 족속!"이라고 무시하지만, '그 열등한 족속이 없으면 단 이틀도 살 수 없'는 남자이다.

이런 그가 휴양차 머물고 있는 얄타에서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인 안나를 보게 되고, 역시나 바람둥이답게 의도적으로 접근, 둘은 사랑을 나누게 된다. 안나는 남편의 편지로 예정보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게 되고 두 사람은 그렇게 헤어지지만, 어찌된 일인지 구로프는 몇 달이 지나도 그녀를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트레버의 <그 시절의 연인들>을 떠올렸는데, 이 소설도 불륜의 사랑을 소재로 하고 있으며 두 남녀의 설정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레버는 그 아슬아슬한 사랑이 어떻게 진행되고 어떻게 끝나는지 보여준 반면, 체호프는 그들의 불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점에서 그 어떤 결말도 보여주지 않고, '가장 어렵고 복잡한 일은 이제 방금 막 시작되었을 뿐이라는' 모호한 말로 이야기를 끝낸다.


역자 석영중 교수는 작품해설에서 체호프는 '삶을 객관적이고 냉정한 의사의 눈으로 바라보았고 강인한 의지와 열정으로 삶을 살았으며 작가의 언어로 그것을 풀어놓았다'(p.246)고 말한다.

체호프의 소설은 그야말로 있는 그대로의 삶의 모습이며, 그 모습은 나에게 하나의 질문으로 다가온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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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11-27 20: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지루한 이야기>는 정말 지루하지 않은 이야기인것 같아요~! 이 책에 실린 단편 세편 모두 완전 좋다는~! 이 책 읽고 제가 창비세계문학시리즈를 검색하기 시작했습니다 ^^

coolcat329 2021-12-02 14:43   좋아요 2 | URL
창비세계문학 저도 참 좋더라구요. 예전 그 빈티지한 표지가요. 어떤 분은 걸레같다 하셨던가...ㅠ 그래서 지금의 매끈한 표지로 바꿨나도 싶구요

페크pek0501 2021-12-02 14: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지루한 이야기, 를 빼고 두 편은 읽었어요.
체호프는 제가 좋아하는 작가죠. ^^

coolcat329 2021-12-02 14:45   좋아요 2 | URL
아 그러셨군요. 체호프 희곡도 읽어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