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인 소녀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6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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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사립탐정 '사와자키'를 주인공으로 하는 일본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이다. 작가는 재즈 피아니스트로 활동하기도 한 규슈 사가현 출신의 하라 료(1946~)이다. 하드보일드 소설하면 레이먼드 챈들러나 대쉴 해미트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우연히 '필립 말로'와 비견된다는 탐정 사와자키를 알게 되었고 도서관에 신청해 이번에 읽게 되었다.(책을 꽂을 데가 없어 책 구매를 극도로 자제하는 중)


<내가 죽인 소녀>는 사와자키 시리즈 두 번째로 1989년 발표되었다. 작가는 이 작품으로 102회 나오키상을 수상하고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에 오르면서 일본 하드보일드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하였다. 특히 하라 료의 나오키상 수상은 미스터리 소설이 장르에만 국한되지 않고 대중 문학상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초여름 어느 날, 가족이 실종되었다며 집으로 방문해 달라는 한 통의 전화를 받고 의뢰인을 찾아가는 탐정 사와자키. 그러나 의뢰인은 6천만 엔이 든 돈 가방을 건네며 납치한 딸을 돌려달라고 부탁한다. 이에 사와자키는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감을 느끼지만 잠복해 있던 형사들에게 납치범으로 몰려 붙잡히고 경찰서로 끌려가게 된다. 사와자키는 조사 끝에 유괴범이라는 의심은 벗지만, 진짜 유괴범에게 몸값을 전달하는 일을 맡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유괴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사와자키는 유괴범들의 요구에 따라 돈가방을 가지고 여러 장소를 전전하지만 도중에 불량배들에게 습격을 당해 기절하고 돈가방은 사라진다. 유괴범은 지정한 시간과 장소에 몸값이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든 교섭을 중단하고 종적을 감춘다.

돈은 사라지고 유괴된 소녀의 행방은 모르는 가운데 사와자키는 소녀의 외삼촌으로부터 사건과 관련된 의뢰를 받게 되고 이야기는 사와자키의 동선을 따라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급박하게 전개된다. 


33년 전에 발표된 소설이지만 지금 읽어도 전혀 촌스럽지 않다. 탐정이 의뢰인의 전화를 받고 찾아간 곳에서 얼결에 유괴범으로 몰리게 되는 설정부터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블루버드를 타고 다니며 필터 없는 담배를 피운다는 점 외에는 사와자키에 대한 정보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사와자키라는 성 외에는 이름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소녀가 자기 때문에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으로 '유일하게 기억하는 여자의 전화번호'를 돌리는 모습은 인간 사와자키에 대해 독자가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장면이다. 

비정한 도시 뒷골목을 누비며 다니는 쓸쓸한 탐정은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다만 행동으로만 보여줄 뿐. 그렇기에 독자는 비정하고 거친 세상 속, 고독한 탐정의 모습에 알 수 없는 슬픈 매력을 느끼고 빠져들게 된다. 

과작인 탓에 하라 료의 작품은 국내에 총 6권이 나와 있는데, 천천히 다 읽어 보기로 했다.


서양에 필립 말로가 있다면 동양엔 사와자키가 있다. 이왕이면 도쿄의 신주쿠가 아닌 한국의 종로3가나 서울역 근처를 누비고 다니는 탐정이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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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4 1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oolcat329 2022-07-04 11:52   좋아요 2 | URL
아날로그적 풍경! 맞네요. 휴대폰 없어서 공중전화에서 기다리고~
저도 좋았습니다😁

레삭매냐 2022-07-04 15: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이 새로 나왔나 보네요.

왠지 제목이 익숙해서 기록
을 뒤적여 보니 13년 전에 읽
은 책이네요. 기억은...

왠지 올디스 굿디스가 마음
에 듭니다.

coolcat329 2022-07-04 16:38   좋아요 3 | URL
아 예전에 읽으셨군요. 13년 만에 개정판이 나온거라네요. 미공개 단편도 하나 수록해서요.

새파랑 2022-07-04 21: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필립 말로 어디서 들어본거 같은데... 이 책 표지는 언제봐도 섬뜩합니다 ㅋ
역시 명작은 세월이 흘러도 촌스럽지 않나 봅니다~!!

잠자냥 2022-07-04 22:05   좋아요 1 | URL
아니 새파랑! 프로필은 샛누리끼리!

새파랑 2022-07-04 22:18   좋아요 1 | URL
닉네임을 바꿔야 할까요? ㅋ 오아시스 노래 듣다가 요 표지가 노르망디 같아서 바꿨습니다 ㅋ (근데 노르망디는 프랑스인데? ㅎㅎ)
 
토니와 수잔 버티고 시리즈
오스틴 라이트 지음, 박산호 옮김 / 오픈하우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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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와 수잔>은 40년 동안 신시내티 대학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한 오스틴 라이트(Austin Wright 1922~2003)가 1993년 출간한 소설로, 2016년 디자이너 출신 톰 포드 감독이 만든 영화 <녹터널 애니멀스>의 원작 소설이다. 이 영화는 2016년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 2017년 국내 개봉과 함께 원작 소설도 번역되어 나왔다. 


나는 영화보다는 책을 먼저 알게 되었는데, 어디서 알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지만, '반드시 읽어 보리라' 다짐한 책 중 하나였고, 이제야 읽게 되었다. 이번에 책을 읽으며 놀란 사실은 이 책이 출간된지 거의 30년이나 지났다는 사실이다. 2016년 영화로 만들어 졌기에 그렇게 오랜된 소설이라고 생각을 못했던 거 같다. 20년을 넘게 버티다 영화 개봉과 함께 다시 재조명을 받은 작품이니 '작가가 살아있을 때 영화로 나왔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토니와 수잔>의 주인공 수잔 모로는 어느 날 25년 전 이혼한 전 남편 에드워드로부터 한 편의 소설 원고를 받는다. 소설의 제목은 <녹터널 애니멀스>로 에드워드는 수잔에게 자신의 소설을 읽고 무엇이든 말해달라고 부탁한다. 과거 부부였던 시절 수잔은 영문학도로서 에드워드 작품을 가혹하게 비평했는데, 수잔과 에드워드가 이혼한 가장 큰 이유는 에드워드가 학업을 중단하고 글쓰기에만 매달려 부부 생활에 불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수잔은 몇 개월 읽기를 미루다 크리스마스 연휴 남편이 출장을 간 사이 에드워드가 보낸 소설을 읽기 시작한다.


<녹터널 애니멀스>는 메인에 있는 별장으로 휴가를 떠나던 평범한 한 가정이 고속도로 심야 운전 중 질 나쁜 깡패들과 시비가 붙고 급기야 아내와 딸이 납치당하는 비극적인 사건으로 시작한다. 주인공 토니는 아내와 딸을 찾기 위해 주 경찰관 바비와 함께 사건을 추적해 나가지만 상황은 점점 더 나락으로 떨어지고 토니의 삶은 그야말로 파멸로 치닫는다.


끔찍한 범죄로 인해 고통받는 토니를 보며 '토니가 이 소설을 나에게 보낸 이유가 무엇일까?' 를 생각하며 소설을 읽던 수잔 역시 고통을 느끼고 애써 외면해 왔던 현실 속 자신의 불안한 삶을 바라보게 된다. 수잔은 소설 속 토니가 겪는 비극을 자신의 삶에 투영함으로서 자신의 안락한 삶 아래 도사리고 있는 불안과 위험을 인식한다. 


<토니와 수잔>은 소설 속 주인공 '토니'와 그 소설을 읽는 '수잔' 두 사람의 이야기가 번갈아 가면서 전개된다. 폭력적인 스릴러 소설 <녹터널 애니멀스>와 그것을 읽는 독자인 '수잔'의 심리가 묘하게 겹쳐지면서 전개되는 이야기는 그들의 이야기를 읽는 또 다른 독자인 나도 불안하게 만든다. 참으로 알 수 없는 묘한 매력을 지닌 소설이다. 


책을 다 읽고 영화 <녹터널 애니멀스>도 봤는데, 원작과 다른 설정이었지만 톰 포드가 영화라는 매체에 맞게 잘 각색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에이미 아담스의 표정 연기가 매우 인상적이었고 제이크 질렌할은 토니와 에드워드 1인 2역을 했는데, 굿 캐스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보면 영화도 보고 싶고, 영화를 보면 책이 보고 싶은, 뭘 보든지 일단은 끝을 봐야 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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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6-25 08:4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책을 보면 영화가 보고싶고 영화를 보면 책이 보고 싶어지는 책이군요. 소설속 토니와 현실속 수잔의 특이한 구성이 재미있을거 같아요~!!

coolcat329 2022-06-25 11:00   좋아요 4 | URL
이 책은 읽는 사람도 불안하게 만들어 재미를 떠나 일단 시작하면 안 읽을 수가 없는 책입니다. 😅

미미 2022-06-25 11:0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는 영화를 먼저 봤거든요(책은 최근에 사두었음요)두 배우 모두
인상적이었고 줄거리도 강렬해서 좋았는데 원작 소설이 있다는 걸 알고 얼마나 기쁘던지...
영화와 소설이 풀어가는 느낌이 다른것 같아 기대됩니다*^^*

coolcat329 2022-06-25 13:04   좋아요 2 | URL
영화 보셨군요~^^ 초반 엄청 놀랐어요 ㅎ 주제 면에서 소설이 더욱 풍부하지만 영화도 참 좋았습니다. 토니의 고통이 더 확실히 느껴진 점과 수잔 역의 에이미 아담스 연기가 참 좋더라구요.

페넬로페 2022-06-25 11:1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무조건 책을 읽고 영화보기가 좋다고 생각하는데 어떨때는 책만 읽었으면 더 좋았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처음 들은 작가의 작품이네요
흥미로워요^^
이렇게 써 놓고 보니 이 책에 ‘읽고 싶어요‘가 되어 있어요 ㅎㅎ

coolcat329 2022-06-25 13:07   좋아요 3 | URL
저도 무조건 책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는데 거의 대부분 영화는 실망을 하게 되더라구요. 소설의 다양한 내용을 영화가 다 담기 힘들기에 그런거 같아요. 근데 이 영화는 참 각색을 잘 한거 같아요. 찜해 두신 책이니 여름 휴가 때 즐기시면 되겠습니다 😎

mini74 2022-06-25 11:1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야기 속에 또 이야기가 있군요 저도 남편이 어느날 소설을 보내면 뒤에 숨은 의미가 무엇일지 고민할 거 같아요. ~ 궁금해지네요

coolcat329 2022-06-25 13:09   좋아요 3 | URL
네~액자 소설이에요. 가까운 지인이 소설을 썼다? 혹여 나와 비슷한 캐릭터가 나올까 긴장하며 읽을거같아요.
주변에 소설가 없는게 맘편할거같네요.😅

바람돌이 2022-06-25 23: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보통 소설이 원작이거나 소설을 본 경우 영화는 안보거든요. 특히 소설이 좋았을수록. 반대로 영화를 먼저 본 경우 소설을 안봅니다. 뭔가 김빠질거 같은 느낌이랄까? 그래서 제인 오스틴 책을 한권도 못봤다는.....

coolcat329 2022-06-28 06:49   좋아요 2 | URL
아 그러시군요. 김빠지는 느낌 잘 압니다. ㅋㅋ
저는 제인 오스틴 영화 하나도 안봐서 책 읽어도 되는데 <오만과 편견> 하나 읽고 제인 오스틴은 이거면 됐다...생각을 했는데 <설득>이 또 평이 좋더군요. ㅋㅋ

프레이야 2022-06-27 21:5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둘 다 봐야겠어요. 내용도 그렇고 제이크 질렌할이 일인이역까지요. 소개 고맙습니다. 소설은 소설대로 영화는 영화대로 다른 장르라 둘 다 보는 거 좋아합니다. ^^

coolcat329 2022-06-28 06:52   좋아요 1 | URL
프레이야님 반갑습니다. 소설을 읽고 영화가 시시한 경우가 많았는데, 두 장르를 따로 생각하니 영화도 다시 보게 되더라구요.
이 작품도 물론 소설이 주제면에서 훨씬 풍부하지만 영화가 톰 포드 스타일로 각색을 잘해서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레삭매냐 2022-06-28 01: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고 나서 언급해
주신 <녹터널 애니멀즈>도
찾아서 본 것 같습니다.

오래되다 보니 참 -

묘한 매력을 지닌 소설이라
는 점에도 저도 격렬하게 동
의합니다.

coolcat329 2022-06-28 06:54   좋아요 2 | URL
그렇잖아도 레삭매냐님 별5 리뷰 잘 읽었습니다.😊
격렬하게 동의! 반갑습니다!

scott 2022-06-28 23: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 영화로 봤는데

서스펜스 스릴러 장르는 여름이 최적의 계절인 것 같습니다 !^^

coolcat329 2022-07-04 08:34   좋아요 0 | URL
영화 참 재밌죠? 여름엔. 책보다 영화인거 같아요. ㅎㅎ
 
토니오 크뢰거 / 트리스탄 /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
토마스 만 지음, 안삼환 외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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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갑자기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1955)의 단편집(이라기 보다는 중단편집)을 읽게 된 이유는 얼마 전에 읽은 책 <봄의 제전>의 프롤로그에서 그의 유명한 소설 <베니스에서의 죽음>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이다. 

한 시대의 미학이 어떻게 전쟁과 연관되는지를 다룬 <봄의 제전>에서 저자는 토마스 만과 발레 '봄의 제전'의 기획자인 댜길레프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만의 소설 <베니스에서의 죽음>의 주인공인 구스타프 아셴바하와 댜길레프가 묘하게 겹치는 부분이 많음을 지적한다.

저자는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 이유가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미학적 경험, 예를 들면 베니스와 바그너와 같은 영향력이 이 두 사람에게도 작용했기에 이런 우연의 일치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토마스 만은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 그 어떤 것도 지어낸 것은 없다고 하면서, 1911년 구스타프 말러의 서거 소식을 듣고 주인공의 이름을 그의 이름에서 따 왔다고 밝혔다.

이야기가 살짝 삼천포로 빠졌는데, 요점은 <봄의 제전>을 읽다가 독일이라는 나라에 강한 호기심이 생겼고, 따라서 '20세기 초 독일의 가장 위대한 작가'인 토마스 만의 작품을 읽게 됐다는 것.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번, 토마스 만 단편선에는 총 8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토니오 크뢰거>와 <베니스에서의 죽음>은 100페이지가 넘는 중편이고 나머지도 대부분 40~50페이지로 단편치고는 긴 편이다.

8편의 작품들이 모두 인상적이고 독특하지만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는 시민성과 예술성 사이에서 고뇌하는 인간이다. 


이런 두 세계의 대립은 그의 삶에서도 나타난다. 아버지는 독일 북부 뤼벡의 부유한 상인이자 시의 참사위원으로 부와 명예, 권력을 모두 가진 전형적인 독일인이었고, 어머니는 독일인과 브라질인의 혼혈로 자유로운 예술가 기질을 지니고 있었다. 

토마스 만은 아버지로부터는 시민의 냉철함과 도덕성을, 어머니로부터는 예술적인 기질을 물려받음으로써 자기 안에 '시민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갖게 된다. 시민 사회에서 태어나 교육받고 자라서 예술의 세계에 발을 담근 토마스 만은 늘 이 두 세계 사이에서 갈등하며 그 어느 곳에서도 안주할 수 없었고, 그의 소설들은 크고 작게 자신의 이런 체험을 토대로 삼고 있다. 


1903년 발간된 <토니오 크뢰거>는 바로 이런 토마스 만의 입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자기 고백적인 작품이다. 토마스 만은 주인공 토니오 크뢰거를 통해 시민 사회에서 아웃사이더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한 예술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소년 토니오는 금발에 파란 눈을 지닌 친구 한스의 건강한 삶을 동경하고, 금발의 잉에를 사랑하지만 자신이 그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인식한다. 


[너처럼 되고 싶구나! 다시 한번 시작하여, 너처럼 올바르고 즐겁고 순박하게, 규칙과 질서에 맞게, 하느님과 세계의 동의를 얻으면서 자라나서, 악의없고 행복한 사람들한테 사랑을 받으면서, 잉에보르크 홀름, 너를 아내로 삼고, 한스 한젠, 너와 같은 아들을 두고 싶구나! 인식해야 하고 창작하는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저주로부터 벗어나 평범한 행복 속에서 살고 사랑하고 찬미하고 싶구나! (p.98,99)]


이국적인 느낌의 '토니오'라는 이름과 독일적인 성 '크뢰거'로 나타나듯이 시민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지닌 토니오 크뢰거는 자연스러운 시민 사회의 삶을 동경하지만 자신은 그런 그들과 어울릴 수도 없고 자신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을 견디기 힘들다. 

일반 사람들에게 예술가는 '그 무엇인가 낯선, 이상한 느낌을 주는 별난 존재'(p.48)이며, 토니오는 예술가라는 직업은 '운명으로 정해진 저주받은 직업'(p.47)이라고 말한다. 일반인들의 삶을 동경하지만 그 안에서 살아갈 수 없어 늘 멀리서 바라보며 괴로워해야 하는 토니오는 고백한다. 자신은 삶을 사랑한다고... 


그렇다면 예술 세계는 어떤가? 오직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며 '인간을 경멸하는 오만한' 예술가들은 '시민적 양심'(p.106)을 지닌 그를 '동경이 없다'(p.107)며 자신들의 세계에 받아들이지 않는다. 애인이자 화가인 리자베타는 이런 토니오를 '길 잃은 시민'이라고 정의 내린다. 그러나 토니오는 '모든 예술성 속에서, 모든 비상한 것과 모든 천재성 속에서 무엇인가 매우 모호한 것, 매우 불명예스러운 것, 매우 의심스러운 것'이 있으며 이것을 알아차리도록 해주는 것은 '바로 이 시민적 양심'(p.106) 이라고 말한다. 예술의 절대성을 의심하는 토니오를 자만심으로 가득 찬 '미의 숭배자들'이 받아들일 리가 없다. 토니오는 이 두 세계 사이에서 안주할 곳이 없다. 그는 외롭다.


[나는 두 세계 사이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세계에도 안주할 수 없습니다. 그 결과 약간 견디기가 어렵지요. 당신들 예술가들은 저를 시민이라 부르고, 또 시민들은 나를 체포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p.106)]


토니오는 여행을 떠나 리자베타에게 자신의 예술관을 피력하는 편지를 쓴다. 그는 일상의 삶과 동떨어진 예술을 거부하기로 한다. 토니오는 예술가를 진정한 예술가로 만들어 주는 것은 '인간적인 것, 생동하는 것, 일상적인 것에 대한 나의 이러한 시민적 사랑'(p.107)이라고 말한다. 이런 사랑을 기반으로 자신은 더 나은 것을 만들어보겠다고 작가로서 새로운 각오를 밝힌다.


인간의 속된 삶을 사랑하는 예술가로서 다시 태어난 토니오 크뢰거는 초기 토마스 만이 추구한 예술가 상이며 그 어떤 소설보다도 토마스 만의 작가로서의 소명과 진실함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인간을 경멸하는 오만한 예술가가 아닌 '시민적 사랑'을 간직한 예술가가 되리라는 토니오 크뢰거의 말은 잔잔한 여운을 남긴다.


이렇듯 토마스 만은 그의 초기 중단편 소설들에서 일반적인 시민 사회에 섞이지 못하고 따로 떨어져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예술가 또는 소외된 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시민성과 예술성, 이성과 감성, 정신과 육체, 건강과 병 등, 두 세계의 갈등과 조화를 주로 그리고 있다. 


토마스 만이 1894년 발표한 첫 단편 <타락>은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한 젊은이의 여배우를 향한 순수한 사랑과 그 파멸을 다룬 작품으로 액자소설의 형식은 소설의 주제를 다각도로 해석할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한다. 


<마리오와 마술사>는 토마스 만이 1929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다음 해인 1930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파시즘의 본성을 예술에 빚대어 폭로한 작품으로서 파시즘 독재자를 일종의 예술가인 마술사로 표현한 점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이는 <봄의 제전>에서 저자가 나치즘을 정당이 아닌 이벤트라고 단정하며, 히틀러를 나치즘이라는 예술의 '뛰어난 배우'라고 한 점과 겹쳐져 작품을 이해하기가 수월했다. 


<행복에의 의지>는 1895년 발표한 소설로 이 작품으로 토마스 만은 문단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이 소설에서도 역시 토니오 크뢰거처럼 부모로부터 상이한 기질을 물려받은 병약한 예술가가 주인공으로 나오는데, 인간의 삶과 의지의 문제를 다룬 작품으로 젊은 시절의 토마스 만의 체험이 바탕에 깔려 있다. 


<키 작은 프리데만 씨>는 1898년 발표한 작품으로 예술가의 또 다른 변형인 한 불구자를 주인공으로 다루고 있다. 사회에서 소외당하는 한 불구자의 슬픈 내면 묘사가 인상적인 작품으로, 당시 독일 시민사회가 얼마나 위선적이고 사회 약자들에게 잔인했는지를 보여준다. 


1897년 발표한 <어릿광대>는 삶과 예술 사이에서 홀로 떨어져 사는 한 딜레탕트적 인간을 주인공으로 한다. 역시 토마스 만의 실제 체험이 많이 녹아 있는 작품으로 작가가 자신의 예술가 기질을 지나치게 희화해 놓았다는 평가를 받으며, 토마스 만도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트리스탄>은 <토니오 크뢰거>와 비슷한 시기의 작품으로 역시 병적인 예술가 정신과 건강하고 활력이 넘치는 시민적 삶의 대립을 그린 작품이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20세기 초의 바그너 숭배를 패러디하고 슈피넬이라는 작가를 우스꽝스럽게 묘사함으로써 무조건적인 예술주의를 희화화한다.


마지막 작품은 1971년 루치노 비스콘티 감독에 의해 영화로도 제작되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베니스에서의 죽음>이다. 1912년 발표된 작품으로 역시나 독일 시민의 전형인 아버지와 보헤미안적 기질을 지닌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시민의 성실성과 예술가의 열정을 내면에 지닌 작가, 구스타프 아센바하를 주인공으로 한다. 

'끝까지 견뎌라!'(p.427)라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고 예술을 위하여 자신의 감각적인 기질을 억눌러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작가로 성공한 그는 휴가 차 떠난 베니스에서 타치오라는 미소년을 만나 그 완벽한 아름다움에 도취되고 결국엔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존경받는 작가로서 가식적인 삶을 살았던 한 예술가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자신의 삶과 예술을 되돌아보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센바하는 자신이 그동안 쓴 글에서 '엿보이는 대가다운 태도는 허위이고, 어릿광대의 짓'(p.525)임을 인정한다. 예술을 통해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은 금지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예술가들은 '천성적으로 타락의 심연으로 빠져드는 경향이 있고, 그 경향을 어떻게 달리 개선시켜 볼 수도 없'(p.525)기 때문이다. 

아센바하가 이런 깨달음에 도달하도록 이끈 것은 아름다운 타치오의 모습이다. 타치오는 에로스가 현실 인물로 나타난 것으로, 그동안 아센바하 내면에서 억눌려 왔던 감성을 되살려 지적인 세계에만 머물러 있던 그를 감각적인 세계로 넘어오게 하는 역할을 한다. 

눈 앞에 나타난 아름다움 앞에서 너무나 허무하게 무너진 아센바하의 철옹성 같던 삶과 예술의 세계.

예술가의 본성을 억누르고 가식적으로 쌓아올린 예술의 생명력은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깨닫게 된다. 

'열정이 곧 우리의 정신을 고양시켜 주는 것이며 우리의 동경은 반드시 사랑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안'(p.525)된다는 아센바하의 마지막 고백은 사랑과 열정이 없는 지적인 능력만 있는 예술가는 껍데기일 뿐임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토마스 만은 선뜻 책을 집어 들기엔 조금은 부담스러운 작가였다. 그러나 이번에 처음으로 8편의 중단편들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작품 속에 빠져 있는 나를 발견했다. 토마스 만의 품위가 느껴지는 <토니오 크뢰거>를 시작으로 너무나도 매혹적인 <베니스에서의 죽음>까지 그야말로 토마스 만에게 반하고 빠져든 시간이었다. 독일 문학의 특징답게 인물의 내면에 초점을 맞춰 '예술이란 무엇이고, 예술가는 어떤 존재이며, 이 사회 속에서 예술가는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확립해야 하는지...' 를 다룸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나의 삶도 되돌아보게 하는 힘을 가진 작품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읽으며 한시도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아센바하가 '신적인 아름다움'이라고 칭송하던 타치오 역의 비요른 안데르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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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2-06-16 20:1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여기서 ‘토니오 크뢰거‘만 읽었는데 자신이 가는 길에 대한 고뇌와 함께 외로움을 느꼈어요. 우리가 당면한 현실같기도 해서 공감을 했어요.
다른 단편도 좋을 것 같네요^^
책을 읽고 그 책과 연관된 독서를 하는 것 또한 책읽기의 즐거움 같아요**

coolcat329 2022-06-16 20:45   좋아요 4 | URL
네 중단편이라 비교적 수월하게 읽었는데, 장편이 이런 식이면 좀 골이 아프겠다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첫 이야기 토니오 크뢰거부터 푹 빠져서 읽었습니다. 독일 문학의 거장이라는 말 실감했습니다.

그레이스 2022-06-16 22: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봄의 제전> 때문에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읽었어요. 인상적이었던 작품이었죠. 하나만 읽고 다시꽂아놓았는데 언젠가 기회를 봐서 읽어야겠어요.

coolcat329 2022-06-17 06:37   좋아요 2 | URL
그러셨군요. 프롤로그 베네치아 이야기가 참 강렬했죠. 책 속으로 확 잡아당기는 그런 느낌이었어요. 😊

새파랑 2022-06-17 08:0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토니오 크뢰거> 읽고 나서 요 책을 샀는데 아직 못읽었어요. 특유의 독일 느낌? 이 많이 느껴지던데 쉽게 손이 안가더라구요 ㅎㅎ 쿨캣님이 극찬하시니 다시 시도해봐야 겠습니다~!!

coolcat329 2022-06-17 09:17   좋아요 2 | URL
독일을 좀 느껴보고 싶어서 읽었는데 묘하게 빠져들더라구요~

바람돌이 2022-06-17 16: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베니스의 죽음 영화에 나오는 저 소년. 진짜 아름다워요. 예전에 영화보면서 진짜 미모에 빠져들수밖에 없었던.... 이제 쿨캣님 덕분에 토마스 만도 읽고 싶은 작가로 올려야겠네요.

coolcat329 2022-06-17 23:10   좋아요 0 | URL
그쵸? 정말 토마스 만 묘사가 과장이 아닌 바로 그 아름다움이에요. 바람돌이님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

mini74 2022-06-17 19: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책이 책을 부르는군요. 리뷰 읽으니 새롭습니다 ~ 소년 묘하게 성을 뛰어넘는 미모가 느껴져요.

coolcat329 2022-06-17 23:15   좋아요 2 | URL
꼬리에 꼬리를 무는 책! 입니다. 😊
성을 뛰어넘는 외모 맞아요.
근데 저 미모가 삶을 불행하게 만들었다고 하네요.
사람들은 예쁜 걸 가만놔두질 않습니다.ㅠ 미니님도 즐거운 주말되세요😚

scott 2022-06-19 00: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베네치아에 나온 배우
현재 멋지게 늙었습니다 ㅎㅎㅎ



토마스 만은 중편도 훌륭한데

장편 도전을 사알 짝 추천 합니다 ^^

coolcat329 2022-06-20 19:14   좋아요 2 | URL
네~장편도 도전해 보겠습니다😉

레삭매냐 2022-06-20 10:4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맨 끝 사진은 <베니스에서 죽다>
에 나온 배우 사진이 아니었던가요.

그 영화 보다가 지루해서 죽을 뻔
했답니다 ㅋㅋㅋ

명작이라고 하는데 재미는 없더라
구요.

coolcat329 2022-06-20 19:16   좋아요 3 | URL
네 맞습니다. 저는 유툽에서 조금만 봤는데 풀영상은 지루할듯도 하네요. ㅎ

mini74 2022-07-08 18:4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잘생김이 떠오르는 리뷰군요 ㅎㅎ 축하드립니다 *^^*

coolcat329 2022-07-08 19:01   좋아요 3 | URL
미니님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되세요~☺️

그레이스 2022-07-08 18: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쿨캣님~♡

coolcat329 2022-07-08 19:01   좋아요 3 | URL
그레이스님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되시길요~☺️

새파랑 2022-07-08 19: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독서 천재 쿨캣님 축하드려요. 토마스 만은 어렵지만 쿨캣님 리뷰는 너무 좋습니다~!!
 
봄의 제전 - 세계대전과 현대의 탄생 걸작 논픽션 23
모드리스 엑스타인스 지음, 최파일 옮김 / 글항아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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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5월 29일 밤,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러시아 발레단의「봄의 제전」초연이 무대에 펼쳐졌다. 세르게이 댜길레프가 기획하고 이고르 스트라빈스키가 음악을, 바슬라프 니진스키가 안무를 맡았다. 봄의 신을 예찬하기 위해 살아있는 처녀를 제물로 바치는 의식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스트라빈스키가 처음에 붙인 제목은 '제물(Victim)'이었다. 

이 날 공연장은 충격과 놀라움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멜로디가 없는 음악은 '폭력성과 불협화음'으로 귀에 거슬렸고, '모든 기교가 제거'된 안무는 쿵쿵거리는 걸음과 왜곡된 동작으로 가득했다. 테마,의상,안무,음악 모두가 기존의 상식을 뒤엎는 그야말로 파격 그 자체였다.


라트비아 출신의 캐나다 역사학자 모드리스 엑스타인스(Modris Eksteins 1943~)가 1989년 발표한 <봄의 제전>은 현대 예술의 출발을 알리는 혁명적인 발레「봄의 제전」의 소개로 시작한다. 제물로 선택된 처녀는 '그 자신이 의미하는 다산성과 생명이라는 특징들을 기리기 위해' 죽을 때까지 춤을 추다 쓰러진다. 이것은 '죽음을 통한 삶에 대한 찬가'(p.79)로서 슬픔이 아닌 성스러운 죽음이다. 저자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쟁이라는 명분 아래 죽어간 이름 없는 병사들을 '스트라빈스키의 제물'이라 말한다. 


이 책의 부제는 '세계대전과 현대의 탄생'으로 저자는 서문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의의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안에 얽힌 관심사와 감정을 함께 다루어야 한다'(p.10)고 밝히면서 예술, 문화, 도덕, 관습으로 나타나는 한 시대의 정신을 분석한다. 그 과정을 통해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된 원인과 전쟁 속 끔찍한 참호전의 모습, 전쟁이 현대 사회를 어떻게 바꿔놓았는지를 보여준다.

다시 말해 <봄의 제전>은 '20세기 전반기에 우리의 현대적 의식, 해방에 대한 우리의 강박감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출현했는지'(p.9), 또 그러한 의식과 제1차 세계대전이 어떠한 관계를 갖는지 탐구함으로써 현대의 탄생 과정을 살피는 책이다. 


<봄의 제전>은 3막 1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파리와 베를린에서 일어난 문화 예술의 변화, 이러한 변화 속에서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의 참담한 모습과 진행 과정을 보여주고 종전 후 전쟁이 유럽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다루면서 왜 제1차 세계대전이 '현대세계가 전환되는 축'(p.401)이 되었는지 파헤친다.

또한 1929년 세계 대공황을 겪고 서서히 광기를 드러내던 나치즘의 흥망도 다루면서 1차 세계대전이 히틀러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도 살펴본다. 저자는 '나치즘은 이성이나 객관적 세계가 아니라 주관적 자아, 감정, 경험을 자신의 출발점으로 삼았다'(p.520)고 하면서 나치즘이 모더니즘을 바탕으로 성장했고, 그 결과 폭력과 살인이 미학적으로 승화되기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전략과 무기, 정치인, 군인의 활약으로 바라 본 일반적인 전쟁사가 아닌 문화,예술, 가치관과 같이 한 시대의 정신을 통해 바라본 색다른 전쟁사로서 독자에게 큰 즐거움을 주는 책이다. 출판사 홍보 문구 중 "기존의 전쟁사와 격이 다르다"라는 글이 눈에 띄었는데, 정말 수백 번 동감한다. 예술과 전쟁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소재를 엮어 유려한 문체로 설득력 있게 풀어간 저자의 작가로서의 능력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작년에 읽은 <피에 젖은 땅>과 이번에 읽은 <봄의 제전>으로 글항아리 출판사의 '걸작 논픽션' 시리즈에 관심과 호감을 갖게 되었다. 이 책은 특별히 두 번을 읽으려고 다시 읽는 중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왜 현대는 이러한 모습이 되었는지 알려주는 '격이 다른' 전쟁과 예술에 관한 멋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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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2-06-14 00:1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걸작 논픽션 시리즈 정말 탐나는 거 많죠!

coolcat329 2022-06-14 08:54   좋아요 2 | URL
네~앞으로 눈여겨 봐야 겠습니다.😊

새파랑 2022-06-14 06: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이 핵심이군요~!! 저는 이런 장르? 의 책을 잘 안읽었는데 이 책 좋다는 분들이 많으셔서 읽어보고 싶네요~!!

coolcat329 2022-06-14 08:56   좋아요 3 | URL
이 책에 1929 전쟁 붐 설명하면서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 가 대표 사례로 나오는데 새파랑님 관심 가실거 같네요~^^

바람돌이 2022-06-14 22: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이책도 진짜 읽어야 되는 책이었네요. 왜 이렇게 좋은 책이 많은 것이야 원망이 막.... 좋은 리뷰덕분에 읽을까말까 망설이던 책을 확 찜하게 됩니다.

coolcat329 2022-06-15 16:30   좋아요 0 | URL
이 책 후회 안 하실 거에요. 정말 좋은 책이 너무 많죠? 😭

scott 2022-06-15 00:2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소설 보다 더 빠른 속도로 완독하게 만드는 이 책!

쿨켓님 리뷰도 👍👍👍👍

coolcat329 2022-06-15 16:33   좋아요 1 | URL
사실 저는 기본 지식이 없어서 빨리 읽지는 못했습니다. ㅠㅠ 근데 내용이 너무 참신해 재미있게 읽었네요. 감사합니다 ~^^

그레이스 2022-06-15 09: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시간내서 재독하려고 합니다.

coolcat329 2022-06-15 16:37   좋아요 1 | URL
끝까지 읽고 처음부터 다시 읽으니 확실히 이해가 더 잘 되네요. 그레이스님도 이 책 좋아하시니 기분이 좋네요😁

페넬로페 2022-06-15 13: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역사를 문화와 음악에 버무려 표현한 책이군요.
걸작 논픽션 시리즈 좋은데 자꾸 미뤄지는 것 같아요 ㅠ

coolcat329 2022-06-15 16:42   좋아요 2 | URL
아무래도 내용과 두께가 있어 부담이 가죠? ㅎ 그래도 이 책은 참으로 추천하고 싶습니다.
 
밤으로의 긴 여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9
유진 오닐 지음, 민승남 옮김 / 민음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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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으로의 긴 여로>는 유진 오닐(Eugene Gladstone O'Neill 1888~1953)이 사망하고 3년 후인 1956년 발표되어, 다음 해 그에게 네 번째 퓰리처상을 안겨준 작품이다. 

유진 오닐은 이 작품을 열두 번째 결혼 기념일에 아내에게 바치면서 "내 묵은 슬픔을 눈물로, 피로 쓴 이 극의 원고를 당신에게 바치오"라고 고백했다. 

오닐은 이 작품을 '사후 이십오 년 동안 발표하지 말고 그 이후에도 절대 무대에 올리지 말라'고 아내에게 당부했지만, 아내 칼로타는 고인의 뜻을 따르지 않고 1956년 이 작품을 발표했다. 

아내에게 바친 헌사에서 알 수 있듯이 <밤으로의 긴 여로>는 작가 오닐의 아픈 가족사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작품은 1912년 8월, 티론 가족이 여름 휴가 차 방문한 그들의 유일한 집인 별장에서 벌어지는 하루 동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가난한 아일랜드계 이민자 출신으로 고생 끝에 연극배우로 성공하지만 돈에 대한 집착으로 가족과 배우로서의 자신의 인생도 망치는 아버지 제임스 티론, 에드먼드를 낳고 몸의 통증을 없애기 위해 의사가 놔 준 모르핀에 중독이 된 어머니 메리, 술과 여자에 빠져 방탕한 인생을 사는 장남 제이미, 배를 타고 떠돌며 방황하다 폐병에 걸린 둘째 아들 에드먼드가 그들이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거실에 모인 이들은 농담을 주고 받으며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대화가 진행될수록 묘한 긴장과 불안이 안개처럼 깔리기 시작한다. 이들은 서로를 탓하며 원망하고 분노하다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체념하기를 자정까지 반복한다.


[티론 _ 어디서 그런 헛소리들을 지껄여대! 그 더러운 입으로 시골뜨기니, 습지니, 오두막이니 하면서 아일랜드를 비웃다니! 에드먼드의 병 얘기는 안 하는 게 양심에 덜 찔릴 거다. 누구보다도 네 책임이 크니까! (p.39)


메리 _ 난 여기가 내 집이라고 느껴본 적이 없어. 처음부터 잘못되었으니까. 순 싸구려로 지은 집이야. 네 아버지는 집을 제대로 꾸미는 데 돈을 쓴 적이 없어. 여기에 친구가 없는 게 차라리 다행이야. 손님을 초대하기도 부끄러운 집이니까.(p.51)


에드먼드 _ 폐병 걸린 아들 일인데 온 동네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돈이 아까워서 벌벌 떠는 노랭이 짓을 해야겠어요? (...)아버지 땅 살 돈 아껴주려고 주립 요양소 같은 데 들어갈 줄 아냐고요! 이 지독한 노랭이 영감......! (p.179)


제이미 _ 네가 태어나서 어머니가 마약을 시작한 거야. 네 탓이 아니란 건 알지만 그래도, 빌어먹을, 너에 대한 증오를 억누를 수가......! (p.207)]


이렇게 티론의 가족은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상처를 주며 괴로워한다. 그러다 다시 마음이 약해져 서로를 이해하는 듯 하다가 또다시 싸우는 일을 반복, 그들의 갈등은 끝이 없어 보인다. 서로 사랑하면서도 그 소중함을 잊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비난하며 상처를 주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왜 유진 오닐이 이 작품을 '눈물로, 피로 쓴 작품'이라고 했는지 알 듯도 했다. 


유진 오닐은 왜 자신의 슬픈 가족사를 이렇게 작품으로 만들었을까? 오래되어 곪은 상처를 터트려 치유하고 싶었던 것일까? 비록 고름을 터트리는 그 과정이 아프고 힘들어도 그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던 것일까? 그러기 위해서 가족의 상처를 외면하지 않고 직접 그 안으로 들어가 그 고통을 자세히 들여다 본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상처주는 사람들. 잘못의 경중은 있겠지만 서로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또 위로가 되는 게 가족이다. 티론 가족도 각자 저마다 잘못이 있고 누구 잘못이 더 큰지를 따지는 건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미래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잘잘못을 따지기 보다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그 아픔의 의미를 깨닫는 게 우선이 아닐까... 그리고 난 후 서로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다 보면 치유의 길이 열리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유진 오닐은 이 작품을 쓸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싶다.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먼 존재, 가족. 이 작품은 우리에게 '당신의 가족은 어떤가요?' 라고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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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5-26 12: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의 발표에 저런 배경이 있었군요. 가족이 가장 가까워야하는데 어떨때는 또 멀게 느껴지기도 하드라구요. 가족이든 친구든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게 중요한거 같아요~!!

coolcat329 2022-05-26 16:21   좋아요 2 | URL
대부분의 가족은 이렇게 싸우기 보다는 서로 피하고 외면하는 경우가 더 많을 거 같아요. 모든 관계는 다 어렵습니다. ㅠㅠ

미미 2022-05-26 1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족들이 어떤 식으로든 상처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 25년이란 기간을 둔 것일까요? 안그래도 읽고 싶던 책인데 궁금해요^^*

coolcat329 2022-05-26 16:22   좋아요 1 | URL
그런거 같습니다. 작가가 자신을 위로하기 하기 위해 쓴 작품같아요.

잠자냥 2022-05-26 14: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유진 오닐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아....

coolcat329 2022-05-26 16:26   좋아요 2 | URL
네~~잠자냥님 애나 크리스티 리뷰 읽고 자극받아 드뎌! 읽었습니다. 오랜만에 희곡읽으니 좋았습니다😁

페넬로페 2022-05-27 0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밤으로의 긴 여로에 대한 배경에 이런 사연들이 있었군요.
작가 사후에 발표되고 퓰리처상까지 받다니 대단한 작품이네요~~
가족이 정말 그래요.
제일 가까우면서도 젤 먼 존재들
공감합니다.
그 누구보다 더 노력해야 할 관계 같아요^^

coolcat329 2022-05-27 12:42   좋아요 1 | URL
저도 최근에 알았는데 유진 오닐이 퓰리처상을 네 번이나 받았더라구요. 대단한 작가의 작품입니다😁

scott 2022-05-27 00: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닐 작품 좋아 합니다

연극 관람 강추!ㅎㅎ
오닐이 그린 가족들의 삶은 슬프고도 먹먹함이 ㅠ.ㅠ

coolcat329 2022-05-27 12:45   좋아요 1 | URL
연극 꼭 보고 싶어요. 유툽에서 찾아보니 제시카 랭, 제레미 아이언스가 나오더라구요.
연극으로 하면 보러가야 겠습니다.

레삭매냐 2022-05-31 17: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퓰리처상은 고인이 된 작가
에게도 주는가 보네요.

작가에게는 모든 이야기들
이 소재가 되지 않나 조심
스레 추정해 봅니다.

coolcat329 2022-05-31 19:40   좋아요 0 | URL
네~ <바보들의 결탁> 작가도 사후 수년이 흐른 후 퓰리처상 받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