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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인 소녀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6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22년 5월
평점 :
중년의 사립탐정 '사와자키'를 주인공으로 하는 일본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이다. 작가는 재즈 피아니스트로 활동하기도 한 규슈 사가현 출신의 하라 료(1946~)이다. 하드보일드 소설하면 레이먼드 챈들러나 대쉴 해미트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우연히 '필립 말로'와 비견된다는 탐정 사와자키를 알게 되었고 도서관에 신청해 이번에 읽게 되었다.(책을 꽂을 데가 없어 책 구매를 극도로 자제하는 중)
<내가 죽인 소녀>는 사와자키 시리즈 두 번째로 1989년 발표되었다. 작가는 이 작품으로 102회 나오키상을 수상하고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에 오르면서 일본 하드보일드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하였다. 특히 하라 료의 나오키상 수상은 미스터리 소설이 장르에만 국한되지 않고 대중 문학상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초여름 어느 날, 가족이 실종되었다며 집으로 방문해 달라는 한 통의 전화를 받고 의뢰인을 찾아가는 탐정 사와자키. 그러나 의뢰인은 6천만 엔이 든 돈 가방을 건네며 납치한 딸을 돌려달라고 부탁한다. 이에 사와자키는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감을 느끼지만 잠복해 있던 형사들에게 납치범으로 몰려 붙잡히고 경찰서로 끌려가게 된다. 사와자키는 조사 끝에 유괴범이라는 의심은 벗지만, 진짜 유괴범에게 몸값을 전달하는 일을 맡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유괴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사와자키는 유괴범들의 요구에 따라 돈가방을 가지고 여러 장소를 전전하지만 도중에 불량배들에게 습격을 당해 기절하고 돈가방은 사라진다. 유괴범은 지정한 시간과 장소에 몸값이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든 교섭을 중단하고 종적을 감춘다.
돈은 사라지고 유괴된 소녀의 행방은 모르는 가운데 사와자키는 소녀의 외삼촌으로부터 사건과 관련된 의뢰를 받게 되고 이야기는 사와자키의 동선을 따라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급박하게 전개된다.
33년 전에 발표된 소설이지만 지금 읽어도 전혀 촌스럽지 않다. 탐정이 의뢰인의 전화를 받고 찾아간 곳에서 얼결에 유괴범으로 몰리게 되는 설정부터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블루버드를 타고 다니며 필터 없는 담배를 피운다는 점 외에는 사와자키에 대한 정보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사와자키라는 성 외에는 이름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소녀가 자기 때문에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으로 '유일하게 기억하는 여자의 전화번호'를 돌리는 모습은 인간 사와자키에 대해 독자가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장면이다.
비정한 도시 뒷골목을 누비며 다니는 쓸쓸한 탐정은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다만 행동으로만 보여줄 뿐. 그렇기에 독자는 비정하고 거친 세상 속, 고독한 탐정의 모습에 알 수 없는 슬픈 매력을 느끼고 빠져들게 된다.
과작인 탓에 하라 료의 작품은 국내에 총 6권이 나와 있는데, 천천히 다 읽어 보기로 했다.
서양에 필립 말로가 있다면 동양엔 사와자키가 있다. 이왕이면 도쿄의 신주쿠가 아닌 한국의 종로3가나 서울역 근처를 누비고 다니는 탐정이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