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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오 크뢰거 / 트리스탄 /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
토마스 만 지음, 안삼환 외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평점 :
내가 갑자기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1955)의 단편집(이라기 보다는 중단편집)을 읽게 된 이유는 얼마 전에 읽은 책 <봄의 제전>의 프롤로그에서 그의 유명한 소설 <베니스에서의 죽음>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이다.
한 시대의 미학이 어떻게 전쟁과 연관되는지를 다룬 <봄의 제전>에서 저자는 토마스 만과 발레 '봄의 제전'의 기획자인 댜길레프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만의 소설 <베니스에서의 죽음>의 주인공인 구스타프 아셴바하와 댜길레프가 묘하게 겹치는 부분이 많음을 지적한다.
저자는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 이유가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미학적 경험, 예를 들면 베니스와 바그너와 같은 영향력이 이 두 사람에게도 작용했기에 이런 우연의 일치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토마스 만은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 그 어떤 것도 지어낸 것은 없다고 하면서, 1911년 구스타프 말러의 서거 소식을 듣고 주인공의 이름을 그의 이름에서 따 왔다고 밝혔다.
이야기가 살짝 삼천포로 빠졌는데, 요점은 <봄의 제전>을 읽다가 독일이라는 나라에 강한 호기심이 생겼고, 따라서 '20세기 초 독일의 가장 위대한 작가'인 토마스 만의 작품을 읽게 됐다는 것.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번, 토마스 만 단편선에는 총 8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토니오 크뢰거>와 <베니스에서의 죽음>은 100페이지가 넘는 중편이고 나머지도 대부분 40~50페이지로 단편치고는 긴 편이다.
8편의 작품들이 모두 인상적이고 독특하지만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는 시민성과 예술성 사이에서 고뇌하는 인간이다.
이런 두 세계의 대립은 그의 삶에서도 나타난다. 아버지는 독일 북부 뤼벡의 부유한 상인이자 시의 참사위원으로 부와 명예, 권력을 모두 가진 전형적인 독일인이었고, 어머니는 독일인과 브라질인의 혼혈로 자유로운 예술가 기질을 지니고 있었다.
토마스 만은 아버지로부터는 시민의 냉철함과 도덕성을, 어머니로부터는 예술적인 기질을 물려받음으로써 자기 안에 '시민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갖게 된다. 시민 사회에서 태어나 교육받고 자라서 예술의 세계에 발을 담근 토마스 만은 늘 이 두 세계 사이에서 갈등하며 그 어느 곳에서도 안주할 수 없었고, 그의 소설들은 크고 작게 자신의 이런 체험을 토대로 삼고 있다.
1903년 발간된 <토니오 크뢰거>는 바로 이런 토마스 만의 입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자기 고백적인 작품이다. 토마스 만은 주인공 토니오 크뢰거를 통해 시민 사회에서 아웃사이더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한 예술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소년 토니오는 금발에 파란 눈을 지닌 친구 한스의 건강한 삶을 동경하고, 금발의 잉에를 사랑하지만 자신이 그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인식한다.
[너처럼 되고 싶구나! 다시 한번 시작하여, 너처럼 올바르고 즐겁고 순박하게, 규칙과 질서에 맞게, 하느님과 세계의 동의를 얻으면서 자라나서, 악의없고 행복한 사람들한테 사랑을 받으면서, 잉에보르크 홀름, 너를 아내로 삼고, 한스 한젠, 너와 같은 아들을 두고 싶구나! 인식해야 하고 창작하는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저주로부터 벗어나 평범한 행복 속에서 살고 사랑하고 찬미하고 싶구나! (p.98,99)]
이국적인 느낌의 '토니오'라는 이름과 독일적인 성 '크뢰거'로 나타나듯이 시민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지닌 토니오 크뢰거는 자연스러운 시민 사회의 삶을 동경하지만 자신은 그런 그들과 어울릴 수도 없고 자신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을 견디기 힘들다.
일반 사람들에게 예술가는 '그 무엇인가 낯선, 이상한 느낌을 주는 별난 존재'(p.48)이며, 토니오는 예술가라는 직업은 '운명으로 정해진 저주받은 직업'(p.47)이라고 말한다. 일반인들의 삶을 동경하지만 그 안에서 살아갈 수 없어 늘 멀리서 바라보며 괴로워해야 하는 토니오는 고백한다. 자신은 삶을 사랑한다고...
그렇다면 예술 세계는 어떤가? 오직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며 '인간을 경멸하는 오만한' 예술가들은 '시민적 양심'(p.106)을 지닌 그를 '동경이 없다'(p.107)며 자신들의 세계에 받아들이지 않는다. 애인이자 화가인 리자베타는 이런 토니오를 '길 잃은 시민'이라고 정의 내린다. 그러나 토니오는 '모든 예술성 속에서, 모든 비상한 것과 모든 천재성 속에서 무엇인가 매우 모호한 것, 매우 불명예스러운 것, 매우 의심스러운 것'이 있으며 이것을 알아차리도록 해주는 것은 '바로 이 시민적 양심'(p.106) 이라고 말한다. 예술의 절대성을 의심하는 토니오를 자만심으로 가득 찬 '미의 숭배자들'이 받아들일 리가 없다. 토니오는 이 두 세계 사이에서 안주할 곳이 없다. 그는 외롭다.
[나는 두 세계 사이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세계에도 안주할 수 없습니다. 그 결과 약간 견디기가 어렵지요. 당신들 예술가들은 저를 시민이라 부르고, 또 시민들은 나를 체포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p.106)]
토니오는 여행을 떠나 리자베타에게 자신의 예술관을 피력하는 편지를 쓴다. 그는 일상의 삶과 동떨어진 예술을 거부하기로 한다. 토니오는 예술가를 진정한 예술가로 만들어 주는 것은 '인간적인 것, 생동하는 것, 일상적인 것에 대한 나의 이러한 시민적 사랑'(p.107)이라고 말한다. 이런 사랑을 기반으로 자신은 더 나은 것을 만들어보겠다고 작가로서 새로운 각오를 밝힌다.
인간의 속된 삶을 사랑하는 예술가로서 다시 태어난 토니오 크뢰거는 초기 토마스 만이 추구한 예술가 상이며 그 어떤 소설보다도 토마스 만의 작가로서의 소명과 진실함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인간을 경멸하는 오만한 예술가가 아닌 '시민적 사랑'을 간직한 예술가가 되리라는 토니오 크뢰거의 말은 잔잔한 여운을 남긴다.
이렇듯 토마스 만은 그의 초기 중단편 소설들에서 일반적인 시민 사회에 섞이지 못하고 따로 떨어져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예술가 또는 소외된 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시민성과 예술성, 이성과 감성, 정신과 육체, 건강과 병 등, 두 세계의 갈등과 조화를 주로 그리고 있다.
토마스 만이 1894년 발표한 첫 단편 <타락>은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한 젊은이의 여배우를 향한 순수한 사랑과 그 파멸을 다룬 작품으로 액자소설의 형식은 소설의 주제를 다각도로 해석할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한다.
<마리오와 마술사>는 토마스 만이 1929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다음 해인 1930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파시즘의 본성을 예술에 빚대어 폭로한 작품으로서 파시즘 독재자를 일종의 예술가인 마술사로 표현한 점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이는 <봄의 제전>에서 저자가 나치즘을 정당이 아닌 이벤트라고 단정하며, 히틀러를 나치즘이라는 예술의 '뛰어난 배우'라고 한 점과 겹쳐져 작품을 이해하기가 수월했다.
<행복에의 의지>는 1895년 발표한 소설로 이 작품으로 토마스 만은 문단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이 소설에서도 역시 토니오 크뢰거처럼 부모로부터 상이한 기질을 물려받은 병약한 예술가가 주인공으로 나오는데, 인간의 삶과 의지의 문제를 다룬 작품으로 젊은 시절의 토마스 만의 체험이 바탕에 깔려 있다.
<키 작은 프리데만 씨>는 1898년 발표한 작품으로 예술가의 또 다른 변형인 한 불구자를 주인공으로 다루고 있다. 사회에서 소외당하는 한 불구자의 슬픈 내면 묘사가 인상적인 작품으로, 당시 독일 시민사회가 얼마나 위선적이고 사회 약자들에게 잔인했는지를 보여준다.
1897년 발표한 <어릿광대>는 삶과 예술 사이에서 홀로 떨어져 사는 한 딜레탕트적 인간을 주인공으로 한다. 역시 토마스 만의 실제 체험이 많이 녹아 있는 작품으로 작가가 자신의 예술가 기질을 지나치게 희화해 놓았다는 평가를 받으며, 토마스 만도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트리스탄>은 <토니오 크뢰거>와 비슷한 시기의 작품으로 역시 병적인 예술가 정신과 건강하고 활력이 넘치는 시민적 삶의 대립을 그린 작품이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20세기 초의 바그너 숭배를 패러디하고 슈피넬이라는 작가를 우스꽝스럽게 묘사함으로써 무조건적인 예술주의를 희화화한다.
마지막 작품은 1971년 루치노 비스콘티 감독에 의해 영화로도 제작되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베니스에서의 죽음>이다. 1912년 발표된 작품으로 역시나 독일 시민의 전형인 아버지와 보헤미안적 기질을 지닌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시민의 성실성과 예술가의 열정을 내면에 지닌 작가, 구스타프 아센바하를 주인공으로 한다.
'끝까지 견뎌라!'(p.427)라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고 예술을 위하여 자신의 감각적인 기질을 억눌러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작가로 성공한 그는 휴가 차 떠난 베니스에서 타치오라는 미소년을 만나 그 완벽한 아름다움에 도취되고 결국엔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존경받는 작가로서 가식적인 삶을 살았던 한 예술가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자신의 삶과 예술을 되돌아보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센바하는 자신이 그동안 쓴 글에서 '엿보이는 대가다운 태도는 허위이고, 어릿광대의 짓'(p.525)임을 인정한다. 예술을 통해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은 금지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예술가들은 '천성적으로 타락의 심연으로 빠져드는 경향이 있고, 그 경향을 어떻게 달리 개선시켜 볼 수도 없'(p.525)기 때문이다.
아센바하가 이런 깨달음에 도달하도록 이끈 것은 아름다운 타치오의 모습이다. 타치오는 에로스가 현실 인물로 나타난 것으로, 그동안 아센바하 내면에서 억눌려 왔던 감성을 되살려 지적인 세계에만 머물러 있던 그를 감각적인 세계로 넘어오게 하는 역할을 한다.
눈 앞에 나타난 아름다움 앞에서 너무나 허무하게 무너진 아센바하의 철옹성 같던 삶과 예술의 세계.
예술가의 본성을 억누르고 가식적으로 쌓아올린 예술의 생명력은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깨닫게 된다.
'열정이 곧 우리의 정신을 고양시켜 주는 것이며 우리의 동경은 반드시 사랑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안'(p.525)된다는 아센바하의 마지막 고백은 사랑과 열정이 없는 지적인 능력만 있는 예술가는 껍데기일 뿐임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토마스 만은 선뜻 책을 집어 들기엔 조금은 부담스러운 작가였다. 그러나 이번에 처음으로 8편의 중단편들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작품 속에 빠져 있는 나를 발견했다. 토마스 만의 품위가 느껴지는 <토니오 크뢰거>를 시작으로 너무나도 매혹적인 <베니스에서의 죽음>까지 그야말로 토마스 만에게 반하고 빠져든 시간이었다. 독일 문학의 특징답게 인물의 내면에 초점을 맞춰 '예술이란 무엇이고, 예술가는 어떤 존재이며, 이 사회 속에서 예술가는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확립해야 하는지...' 를 다룸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나의 삶도 되돌아보게 하는 힘을 가진 작품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읽으며 한시도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아센바하가 '신적인 아름다움'이라고 칭송하던 타치오 역의 비요른 안데르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