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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제전 - 세계대전과 현대의 탄생 ㅣ 걸작 논픽션 23
모드리스 엑스타인스 지음, 최파일 옮김 / 글항아리 / 2022년 3월
평점 :
1913년 5월 29일 밤,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러시아 발레단의「봄의 제전」초연이 무대에 펼쳐졌다. 세르게이 댜길레프가 기획하고 이고르 스트라빈스키가 음악을, 바슬라프 니진스키가 안무를 맡았다. 봄의 신을 예찬하기 위해 살아있는 처녀를 제물로 바치는 의식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스트라빈스키가 처음에 붙인 제목은 '제물(Victim)'이었다.
이 날 공연장은 충격과 놀라움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멜로디가 없는 음악은 '폭력성과 불협화음'으로 귀에 거슬렸고, '모든 기교가 제거'된 안무는 쿵쿵거리는 걸음과 왜곡된 동작으로 가득했다. 테마,의상,안무,음악 모두가 기존의 상식을 뒤엎는 그야말로 파격 그 자체였다.
라트비아 출신의 캐나다 역사학자 모드리스 엑스타인스(Modris Eksteins 1943~)가 1989년 발표한 <봄의 제전>은 현대 예술의 출발을 알리는 혁명적인 발레「봄의 제전」의 소개로 시작한다. 제물로 선택된 처녀는 '그 자신이 의미하는 다산성과 생명이라는 특징들을 기리기 위해' 죽을 때까지 춤을 추다 쓰러진다. 이것은 '죽음을 통한 삶에 대한 찬가'(p.79)로서 슬픔이 아닌 성스러운 죽음이다. 저자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쟁이라는 명분 아래 죽어간 이름 없는 병사들을 '스트라빈스키의 제물'이라 말한다.
이 책의 부제는 '세계대전과 현대의 탄생'으로 저자는 서문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의의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안에 얽힌 관심사와 감정을 함께 다루어야 한다'(p.10)고 밝히면서 예술, 문화, 도덕, 관습으로 나타나는 한 시대의 정신을 분석한다. 그 과정을 통해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된 원인과 전쟁 속 끔찍한 참호전의 모습, 전쟁이 현대 사회를 어떻게 바꿔놓았는지를 보여준다.
다시 말해 <봄의 제전>은 '20세기 전반기에 우리의 현대적 의식, 해방에 대한 우리의 강박감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출현했는지'(p.9), 또 그러한 의식과 제1차 세계대전이 어떠한 관계를 갖는지 탐구함으로써 현대의 탄생 과정을 살피는 책이다.
<봄의 제전>은 3막 1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파리와 베를린에서 일어난 문화 예술의 변화, 이러한 변화 속에서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의 참담한 모습과 진행 과정을 보여주고 종전 후 전쟁이 유럽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다루면서 왜 제1차 세계대전이 '현대세계가 전환되는 축'(p.401)이 되었는지 파헤친다.
또한 1929년 세계 대공황을 겪고 서서히 광기를 드러내던 나치즘의 흥망도 다루면서 1차 세계대전이 히틀러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도 살펴본다. 저자는 '나치즘은 이성이나 객관적 세계가 아니라 주관적 자아, 감정, 경험을 자신의 출발점으로 삼았다'(p.520)고 하면서 나치즘이 모더니즘을 바탕으로 성장했고, 그 결과 폭력과 살인이 미학적으로 승화되기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전략과 무기, 정치인, 군인의 활약으로 바라 본 일반적인 전쟁사가 아닌 문화,예술, 가치관과 같이 한 시대의 정신을 통해 바라본 색다른 전쟁사로서 독자에게 큰 즐거움을 주는 책이다. 출판사 홍보 문구 중 "기존의 전쟁사와 격이 다르다"라는 글이 눈에 띄었는데, 정말 수백 번 동감한다. 예술과 전쟁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소재를 엮어 유려한 문체로 설득력 있게 풀어간 저자의 작가로서의 능력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작년에 읽은 <피에 젖은 땅>과 이번에 읽은 <봄의 제전>으로 글항아리 출판사의 '걸작 논픽션' 시리즈에 관심과 호감을 갖게 되었다. 이 책은 특별히 두 번을 읽으려고 다시 읽는 중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왜 현대는 이러한 모습이 되었는지 알려주는 '격이 다른' 전쟁과 예술에 관한 멋진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