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으로의 긴 여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9
유진 오닐 지음, 민승남 옮김 / 민음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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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으로의 긴 여로>는 유진 오닐(Eugene Gladstone O'Neill 1888~1953)이 사망하고 3년 후인 1956년 발표되어, 다음 해 그에게 네 번째 퓰리처상을 안겨준 작품이다. 

유진 오닐은 이 작품을 열두 번째 결혼 기념일에 아내에게 바치면서 "내 묵은 슬픔을 눈물로, 피로 쓴 이 극의 원고를 당신에게 바치오"라고 고백했다. 

오닐은 이 작품을 '사후 이십오 년 동안 발표하지 말고 그 이후에도 절대 무대에 올리지 말라'고 아내에게 당부했지만, 아내 칼로타는 고인의 뜻을 따르지 않고 1956년 이 작품을 발표했다. 

아내에게 바친 헌사에서 알 수 있듯이 <밤으로의 긴 여로>는 작가 오닐의 아픈 가족사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작품은 1912년 8월, 티론 가족이 여름 휴가 차 방문한 그들의 유일한 집인 별장에서 벌어지는 하루 동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가난한 아일랜드계 이민자 출신으로 고생 끝에 연극배우로 성공하지만 돈에 대한 집착으로 가족과 배우로서의 자신의 인생도 망치는 아버지 제임스 티론, 에드먼드를 낳고 몸의 통증을 없애기 위해 의사가 놔 준 모르핀에 중독이 된 어머니 메리, 술과 여자에 빠져 방탕한 인생을 사는 장남 제이미, 배를 타고 떠돌며 방황하다 폐병에 걸린 둘째 아들 에드먼드가 그들이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거실에 모인 이들은 농담을 주고 받으며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대화가 진행될수록 묘한 긴장과 불안이 안개처럼 깔리기 시작한다. 이들은 서로를 탓하며 원망하고 분노하다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체념하기를 자정까지 반복한다.


[티론 _ 어디서 그런 헛소리들을 지껄여대! 그 더러운 입으로 시골뜨기니, 습지니, 오두막이니 하면서 아일랜드를 비웃다니! 에드먼드의 병 얘기는 안 하는 게 양심에 덜 찔릴 거다. 누구보다도 네 책임이 크니까! (p.39)


메리 _ 난 여기가 내 집이라고 느껴본 적이 없어. 처음부터 잘못되었으니까. 순 싸구려로 지은 집이야. 네 아버지는 집을 제대로 꾸미는 데 돈을 쓴 적이 없어. 여기에 친구가 없는 게 차라리 다행이야. 손님을 초대하기도 부끄러운 집이니까.(p.51)


에드먼드 _ 폐병 걸린 아들 일인데 온 동네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돈이 아까워서 벌벌 떠는 노랭이 짓을 해야겠어요? (...)아버지 땅 살 돈 아껴주려고 주립 요양소 같은 데 들어갈 줄 아냐고요! 이 지독한 노랭이 영감......! (p.179)


제이미 _ 네가 태어나서 어머니가 마약을 시작한 거야. 네 탓이 아니란 건 알지만 그래도, 빌어먹을, 너에 대한 증오를 억누를 수가......! (p.207)]


이렇게 티론의 가족은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상처를 주며 괴로워한다. 그러다 다시 마음이 약해져 서로를 이해하는 듯 하다가 또다시 싸우는 일을 반복, 그들의 갈등은 끝이 없어 보인다. 서로 사랑하면서도 그 소중함을 잊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비난하며 상처를 주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왜 유진 오닐이 이 작품을 '눈물로, 피로 쓴 작품'이라고 했는지 알 듯도 했다. 


유진 오닐은 왜 자신의 슬픈 가족사를 이렇게 작품으로 만들었을까? 오래되어 곪은 상처를 터트려 치유하고 싶었던 것일까? 비록 고름을 터트리는 그 과정이 아프고 힘들어도 그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던 것일까? 그러기 위해서 가족의 상처를 외면하지 않고 직접 그 안으로 들어가 그 고통을 자세히 들여다 본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상처주는 사람들. 잘못의 경중은 있겠지만 서로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또 위로가 되는 게 가족이다. 티론 가족도 각자 저마다 잘못이 있고 누구 잘못이 더 큰지를 따지는 건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미래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잘잘못을 따지기 보다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그 아픔의 의미를 깨닫는 게 우선이 아닐까... 그리고 난 후 서로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다 보면 치유의 길이 열리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유진 오닐은 이 작품을 쓸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싶다.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먼 존재, 가족. 이 작품은 우리에게 '당신의 가족은 어떤가요?' 라고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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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5-26 12: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의 발표에 저런 배경이 있었군요. 가족이 가장 가까워야하는데 어떨때는 또 멀게 느껴지기도 하드라구요. 가족이든 친구든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게 중요한거 같아요~!!

coolcat329 2022-05-26 16:21   좋아요 2 | URL
대부분의 가족은 이렇게 싸우기 보다는 서로 피하고 외면하는 경우가 더 많을 거 같아요. 모든 관계는 다 어렵습니다. ㅠㅠ

미미 2022-05-26 1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족들이 어떤 식으로든 상처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 25년이란 기간을 둔 것일까요? 안그래도 읽고 싶던 책인데 궁금해요^^*

coolcat329 2022-05-26 16:22   좋아요 1 | URL
그런거 같습니다. 작가가 자신을 위로하기 하기 위해 쓴 작품같아요.

잠자냥 2022-05-26 14: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유진 오닐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아....

coolcat329 2022-05-26 16:26   좋아요 2 | URL
네~~잠자냥님 애나 크리스티 리뷰 읽고 자극받아 드뎌! 읽었습니다. 오랜만에 희곡읽으니 좋았습니다😁

페넬로페 2022-05-27 0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밤으로의 긴 여로에 대한 배경에 이런 사연들이 있었군요.
작가 사후에 발표되고 퓰리처상까지 받다니 대단한 작품이네요~~
가족이 정말 그래요.
제일 가까우면서도 젤 먼 존재들
공감합니다.
그 누구보다 더 노력해야 할 관계 같아요^^

coolcat329 2022-05-27 12:42   좋아요 1 | URL
저도 최근에 알았는데 유진 오닐이 퓰리처상을 네 번이나 받았더라구요. 대단한 작가의 작품입니다😁

scott 2022-05-27 00: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닐 작품 좋아 합니다

연극 관람 강추!ㅎㅎ
오닐이 그린 가족들의 삶은 슬프고도 먹먹함이 ㅠ.ㅠ

coolcat329 2022-05-27 12:45   좋아요 1 | URL
연극 꼭 보고 싶어요. 유툽에서 찾아보니 제시카 랭, 제레미 아이언스가 나오더라구요.
연극으로 하면 보러가야 겠습니다.

레삭매냐 2022-05-31 17: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퓰리처상은 고인이 된 작가
에게도 주는가 보네요.

작가에게는 모든 이야기들
이 소재가 되지 않나 조심
스레 추정해 봅니다.

coolcat329 2022-05-31 19:40   좋아요 0 | URL
네~ <바보들의 결탁> 작가도 사후 수년이 흐른 후 퓰리처상 받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