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그 여자네 국숫집’에는 60편 가까운 시들이 수록돼 있다.

나는 시집을 증정 받은 그 이튿날 아침 거실 소파에 앉아 두 시간여 만에 수록된 시들을 다 맛봤다. 시들이 맛있었다. 부담 없이 읽혔다. 그래서 페이스 북에서 장은숙 시인을 찾아 우선 간단히 몇 줄 소감을 남겼다. 다음은 소감 중 일부이다.

“… 쉽게 읽히면서 삶의 그 무엇을 뒤돌아보거나 깨닫게 하는 시들이었습니다. 현대시의 강점이자 난점인 난해성 문제를 단번에 극복한 시들이어서, 좋았습니다. … 작품 ‘그 여자네 국숫집’이 압권이었습니다. 시집의 제목으로 삼을 만했습니다.”


국수.

그만큼 편하고 대중적이고‘발음까지 입에 잘 붙는’ 음식이 있을까? ‘국’의 ㅜ, ‘수’의 ㅜ 로써 모음 ㅜ의 이어지는 발음만으로도 친숙하다. 그래서일까, 경조사 현장에서 가장 잘 쓰이는 음식이 국수다.

장 시인의 대표작 ‘그 여자네 국숫집’의 첫 행이 ‘간판은 없다’이다.

우리는 이 한 마디로 헐하게 음식을 파는 식당임을 눈치 챌 수 있을뿐더러‘식당 주인의 열린 마음’ 또한 직감할 수 있다. 한 편으로는 굳이 간판을 달지 않아도 손님들이 찾아오는, 국수를 맛있게 끓여내는 맛집임도 알 수 있다. 나아가서는 삶을 여유 있게 가꿔나가자는 시인의 어조까지 깨달을 수 있다.

내가 대표작으로 꼽는 이 시에는 ‘지나가는 말처럼 했으되 예리함을 잃지 않은 표현들’이 곳곳에 자리했다.

 

‘겨울에는 눈발이 고봉으로 쌓이는 집’이란 표현에서, 실제로 눈발이 높이 쌓이는 지붕 낮은 식당의 이미지와 함께 그만큼 푸근하게 국수를 손님한테 대접한다는 암시까지 나는 받았다.

‘비법의 육수도 없다’와 ‘날씨 따라 계절 따라 간이 흔들리기도 하겠다’란 표현에서는 요즈음 TV에서 경쟁적으로 다루는 먹방 속 맛집과는 다른 차원의 맛을 깨닫게 했다. 즉 인정(人情)의 맛이다. 특별한 육수라거나 정해진 간… 은 인위적일 수밖에 없다. 결코 인위가 아닌 넉넉한 마음으로 공급하는 국수임을 화자는 말한다.

‘마음이 마른 면같이 부숴지는 날은 / 주인장 노을 보러 갑니다 써 붙이고/ 저녁 장사 접는 날도 있다.’이란 구절에서는 그 선한 저녁노을이 내 눈앞에 떠오르며 삶이 이윤(利潤)이 아닌 노을 보기 같은 여유에 있음을 깨닫게 했다. 나는 이 구절이 이 작품의 절정이라는 생각이다. 교과서적인 수사법의 활용으로 본다면 직유 (마음이 마른 면같이 부숴지는 날)는 물론 은유 및 상징(노을 보러 갑니다: 삶의 여유 )이 다 쓰인 구절이면서 주는 감흥이 대단하다. 어디 누가 ‘마음’을 국수의 ‘마른 면’에 빗댈 생각을 했을까.

고(故) 김동명 시인의 시‘내 마음’에서 마음을 정감 어린 사물들(호수, 촛불, 나그네, 낙엽 )에 빗대던 경우와 비교해본다면 장 시인의 비유법 활용은 놀랍다.

이 비교되는, 은유의 사용을 정리해 봤다.

............................................................

김동명의 ‘내 마음’

마음 = 호수, 촛불, 나그네, 낙엽 ( 고요하며 외롭다)

장은숙의 ‘그 여자네 국숫집’

마음 = 국수의 마른 면 (음식의 재료로써 잘 부숴진다)

............................................................

삶에 대한 장 시인의 건강한 어조는 작품 곳곳에서 눈에 뜨인다.

작품 ‘전기포트’에서 ‘그 사이 우리는 어느 열선이 끊겨’라는 구절은 애정이 예전만 못하게 된 부부사이를 갈파하면서도 동시에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미소 짓게 한다. 전기포트라는 사물과 부부간의 애정을 이렇듯 비유로써 이을 줄이야 그 누가 알았으랴.

 

‘초등 입학 첫날/ 아들과 책가방을 같이 학교에 보냈는데/아들만 집으로 돌아왔다/ 조심스레 책가방의 행방을 묻는 말에/의기양양하게 글쎄! 한다’라고 시작되는 작품‘짱돌’.

대개의 어머니라면 책가방을 입학 첫 날 잃고 귀가한 아이를 단단히 야단쳤을 게다. 다시는 그런 방심과 실수가 없도록.

하지만 이 작품에서 화자는 그러는 대신 화통한 마음을 드러낸다.

‘앞으로 어깨를 무던히 짓누를 책가방을 향해 /선빵을 날리고 돌아온 아들// 그래 지지 마라!’

이 얼마나 화통한 학부모인가.

 

장은숙 시인의 첫 시집 ‘그 여자네 국숫집’에는 그 외에도, 가슴 저린 사연을 읊은 작품들도 여럿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만 언급한다. 장 시인의 문운을 빈다.

 

 

<덧붙임>

11월 27일 저녁에 8호 광장 가까운 어느 설렁탕집에서 장은숙 시인을 처음 만났다. 장 시인을 보자마자 내가 물었다.

“국숫집을 합니까?”

장 시인이 고개 저으며 웃었다. 나는 농담이 아니라 시인이 정말 국숫집을 운영하며 그 시를 쓴 줄 알았다.

 

그 날 그 설렁탕집에서 여러 젊은 예술가들을 만났다. 서현종 화백, 조현정 시인, 장은숙 시인, 류기택 시인. 만남이 파할 무렵에 다른 일로 늦게 나타난 최삼경 시인까지.

그 날의 만남은 유쾌했다. 뜻 깊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 날의 만남을 글로 써 보고 싶다.

 

*그 날 시집 ‘짱돌’을 선사한, 유쾌한 미소의 류기택 시인.‘짱돌’에 수록된 시들에 대해서도 나중에 그 소감을 써서 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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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이던 시절을 학창 시절 (學窓時節)이라 한다. 의문이 생겼다. 왜 하필()’이란 글자가 쓰였을까?

우선 떠오르는 생각이배우는 장소의 밝기를 위한 창의 중요성이었다. 예나 제나 배우는 장소(서당이건 학교이건)는 책을 보며 공부하는 곳이므로 절대 밝아야 했다. 따라서 밝은 햇빛이 들어오는 창은 아주 중요한 시설일 수밖에. 그 때문에 학생 시절을 달리는 학창 시절이라 부르게 되지 않았을까.

 

옛날 사람들이 밤에도 책 보며 공부해야 하는데 너무 가난해서 등 하나 밝힐 형편이 못 되면여름에는 반딧불이를 잡아서, 겨울에는 하얀 눈빛에 비쳐서밝기문제를 해결했다니 (螢雪之功을 말하는 건데 사실인지는 의문이다.) 낮에 창은 얼마나 소중한 시설이었을까.

 

내 학창 시절을 떠올리면 선생님은 교단에서 가르치는데 정작 나는 창밖 풍경을 보며 잡념에 잠겨 있기일쑤였다.

교실 창밖으로 보이던 계절의 풍경들. 가을날이면, 교정에 한 잎 두 잎 떨어지던 낙엽들. 겨울날이면, 눈 내릴 듯 잔뜩 찌푸린 하늘. 봄날에는 하늘과 교정을 모조리 뒤덮는 황사. 여름날에는 푸르른 나뭇잎들. 그런 창밖 풍경을 보다보면 어느 새 수업이 끝났다.

 

그렇다.

그 때문에 나는 학창 시절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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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선배님이 별세한 지 열흘인데 나는 아직도 실감 못한다. 왜 그럴까 생각해 봤다. 그럴 만했다. 최 선배님과는 안 지는 꽤 오래지만 정작 만나게 된 것은 근년의 일이라는 사실을.

꼭 짚어서 말한다면 3년 전인 20168월 어느 날 박계순 선배님의 출판기념회(장편소설 발간 기념이다.) , 몇 십 년만에 만나게 된 것이다. 그 때 마침 나도 난생처음으로 첫 작품집숨죽이는 갈대밭을 냈을 때였으므로 최 선배님한테도 한 권 드렸다.

 

그 일이 계기가 돼 최 선배님은 나를 같은 춘천의 후배 소설가로서 인지했다. 이듬해인 2017년 선배님이 작품집 단둥역을 발간하면서 내게 직접 한 권 선사했으니.

내가 사정이 생겨서 선배님의 단둥역출판기념회에 참석 못했는데 황공스럽게도 따로 시간을 내 그 책을 증정한 것이다.

그 일이 있은 후 그 이듬해인 2018년 말에 내가‘K의 고개를 두 번째 작품집으로 내면서 선배님께 한 권 드렸다. 선배님이 나중에 어떤 모임에서 나를 만났을 때 소감을 말했다.

단번에 다 읽었지. 재미있었어.”

 

올해 들어서는 모 단체의 산문 심사위원으로서 선배님과 함께했다. 모처럼의 기회를 나는 놓치지 않았다.

선배님, 저하고 사진 한 장 찍어요.”

그래서 찍은 사진(김금분 시인이 수고했다.)을 내 블로그에 간단한 글과 함께 올렸다. (참고: 무심이병욱의 문학산책 중 최종남 선배님’. 8월 게시)

나중에 선배님이 내 블로그에 들어와 그 사진과 글을 보고는 그리도 재미있어할 줄이야. 내게 전화까지 하며 즐거워했다. 솔직히 나는 선배님이 별로 말이 없는 분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으므로, 조금은 놀랐다.

그 두 달 후 김유정 문학촌 행사장에서 다시 선배님을 보게 됐다. 그런데 안색이 아주 안 좋았다. 창백했다. 그런 중에도 후배인 내가 앉을 자리를 마련해주려고 애썼다. 초대받은 손님들이 많은 탓에 자리가 부족했던 것이다. 지금도 기억난다. 선배님이 겨우 내는 목소리로 이리 말했다.

, 앉아.”

나는 다른 분과 인사하느라 선배님의 그 자리에 앉지 못했다.  

그 후 얼마 안 돼 이도행 선배님을 따라 강대 병원 중환자실에서, 아픈 몸으로 누워 있는 선배님을 보게 됐다. 산소호흡기 줄까지 꽂은 선배님이 나를 보고는,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가까이 다가간 내게 힘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너무 늦게 만난 것 같아.”

한 달 후 돌아가셨고 나는 이도행 선배님과 장례식장을 다녀왔다.

 

최종남 선배님.

실제 만남이 얼마 되지 않아서일까 아직도 나는 선배님의 별세를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다. 조금씩 실감하고 있다. 어제 밤에 찬 비 내리는 길을 걷다가 문득다시는 최종남 선배님을 만날 수 없구나!’ 깨달았다. 별세(別世) 사는 세상을 달리하니까.

 

선배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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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의 올훼(오르페우스이야기를 나는 좋아한다저승에 간 아내를 이승으로 데려오기 위해 갖은 고생을 다한 올훼감복한 저승 신들이 그의 원을 들어주기로 하는데 단서를 단다.

저승을 벗어날 때까지 뒤돌아봐서는 안 되며 만일 이를 어긴다면 그대의 아내는 돌로 변할 것이다.”

올훼는 저승을 막 벗어나는 찰라 깜빡 잊고 뒤돌아봤다. 그 순간 아내는 돌이 되었다.

 

이루지 못한가슴 맺힘을 우리는()’이라 불렀다올훼의 한만 있지 않았다아주 흡사한 한의 이야기가 이 땅에도 있었다태백의 황지 못 전설이 그것이다.

… 노승은 황(부자(富者)의 며느리에게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며느리가 통리로 해서 도계 구사리 산등을 넘어가고 있을 때 갑자기 자기 집 쪽에서 뇌성벽력이 치는 소리가 났다놀란 며느리가 뒤돌아본 순간 모든 게 돌로 변했을 뿐만 아니라 집까지 물에 잠겨서 땅속으로 가라앉아 연못이 되었다

 

사실두 이야기 속의 단서나 당부는 애당초 지켜지기 힘든 게 아닐까우리 인간의 못 말리는 궁금증 때문이다만일 그 단서나 당부를 준수하는 자()라면 이미 인간이 아니다궁금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목석에 불과하다목석이 오래 잘 살면 뭐하나오래 살아도 목석인데.

구약성경의 실낙원 얘기 또한 우리 인간의 못 말리는 궁금증을 잘 보여준다.

… 선악과를 따먹어서는 안 된다는 하느님의 당부를 이브가 어김으로써 낙원을 쫓겨나게 되었다

애당초 신은 우리 인간이단서나 당부를 어길 줄 알았다정말 잔인한 장난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우리 인간에게 채워지지 않는 한이 생겨났고 그래서 목석처럼 살지 않는 삶인 것을.

.

가슴 아프지만 소중한 그 무엇이다.


사진제공=http://english.visitkore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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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늦봄 어느 날, 강원대학 201강의실에는 국어교육과 1기와 2기 학생들이 자리를 꽉 채웠다. 학회장을 뽑는 자리였다. 서준섭 후보 측 찬조연설자로 내가 나섰다. 서 후보가 차기 학회장이 되어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서 후보는 무난히 당선되었다. , 굳이 내 찬조연설이 아니더라도 그는 가장 유력한 차기 학회장 후보였다. 1기 선배 중 공부를 제일 잘한데다가 (입학시험부터 수석 합격했다는 소문) ‘항상 짙은 푸른색 점퍼를 단정히 입고 캠퍼스를 오가는 모습이어서 국어교육과 학생들한테 호감을 사고 있었던 것이다. 교통도 불편한 그 당시 저 먼 대관령 너머 강릉에서 춘천까지 유학 와 자취하는 학생이 옷을 단정히 입고 다닌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대개의 자취생들은 옷에 밥풀이나 막걸리 흘린 자국을 하고 다니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런 인연으로 서 형()은 몇 달 뒤, 내가 초대회장으로 있는 그리고 문학회에 영입되었다. 시와 소설뿐인 문학회에 서 형의 가입은 평론 분야까지 갖추게 돼, 명실상부한 문학회가 된 것이다. 1971년에 한 작은 지방대학에 시· 소설· 수필 ·평론을 망라한 문학회라니, 대단한 일이 아닌가.

서 형은 이듬해그리고 문학회’ 2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3대 회장은 박기동 시인. 4대 회장은 신승근 시인. 5대 회장은 이흥모 시인)

 

서 형은 나중에 모교인 강원대 국어교육과 교수가 되어 몇 십 년 간 강의하다가 정년퇴직했다. 문학평론가로서도 이미 자리를 잡았다.

 

오늘(2019115) 오랜만에 서 형과 만나 점심식사를 하고 2차로 봉의산 가는 길카페에서 커피도 마셨다.

노후에 들어선 서 형과 나.

카페 창()으로는 소양강이 보인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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