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별다방 미쓰리의 첫 구절이 이렇다.

바다가 보이지 않는 바닷가

바닷가라면 당연히 바다가 보여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한 곳에 위치한 별다방. 분명히 임대료도 싼, 그늘진 자리에 잡은 다방의 미쓰리이므로 그녀 앞날은 밝아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어려운 처지는 자기 잘못이 아니라 가난한 기억 너머의 잘못, 즉 시대의 구조적인 문제라고 화자(話者)는 진단한다. 결국까만 바닷가/ 홀로 반짝이는 별이 되어가는/ 내 사랑 미쓰리라고 매듭지음으로써 주인공 미쓰리한테 애틋한 마음을 전하고 만다.

 

작품폐선, 강가에 놓인 낡은 배를 노래했으되 그 노래에 담긴 감성은 그토록 풍성할 수가 없었다.

매 구절 묻어나는 슬픈 감성. 예로써 한 구절만 봐도 여실하다.

늦 코스모스 져 가는 강 언저리에 서면을 보면제 철에 핀 코스모스가 아닌 늦게 핀 코스모스며, 피는 게 아닌 지는 상황이며, 걷기 편한 강가가 아닌 강 언저리이며, 화자가 걷지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준다. 쓰인 시어 하나하나에 담긴 한 맺힌 슬픔에 나는 박재삼의 대표 시 울음이 타는 강을 다시 보는 듯싶었다.

초저녁 노을빛 아련하기만 한 나의 사랑은/ 저기 떠나는 자의 모습으로 서 있더라라는 구절을 본다. 여기서저기 떠나는 자란 표현 또한 내 눈길을 잡았다. 가슴 아픈 상처를 주고 떠나는 이를 이리도 냉정히 표현할 수 있을까. ‘이나그대라 부를 만도 한데 굳이()’라 부른 것은 그만큼 화자가 냉정한 자세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만큼화자는 속으로 절규하는 것일러니.

반은 물속에 반은 물 밖에 걸린 채/ 온몸에 돋은 수초를 쓰다듬으며/ 시간아 가거라 어서 거거라

할 때 나는 주인마저 잃고 방치된 호숫가의 폐선을 바로 눈앞에서 본 듯싶었다. 사진기로 폐선을 촬영한들 이처럼 적나라하게 나타낼 수 있을까.

조 시인은 처절한 폐선의 모습에서 오히려 행복을 느끼는 역설(逆說)을 노래한다.

이제 그대의 시절 속에 함께할 수 없으니/ 더는 떠나보낼 수 없어 행복하더라.’

더 이상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딱한 존재로 전락한 그대. 그 때문에 나는 비로소 그대와 마음 편하게 함께할 수 있다는 얘기이다. 마치 고려가요가시리의 한 대목을 보는 듯했다. 별리를 감내하며 돌아올 그 날을 기다리는 이 땅의 정한(情恨).

 

작품 그 저녁의 눈물은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날의 가슴 아픔이다.

오지 말아야 할 저녁이 오고 말았다.’며 첫 구절부터 참담하다. 작품 곳곳에 아무 죄 없는 아이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나타나 있다.

사랑한다, 더 이상 수신되지 않는 그 말나처럼 밤이 무서워 늘 형광등을 켜고 자던 아이도 있었다./ , 정말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런 비극적인 날에도 저녁 식사들을 별 일 없는 듯 하는 현실. 이에 화자는 절망한다. 결국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저절로 눈물이 떨어지는 저녁이 있었다.’는 말로써 세월호 사건의 가슴 아픔이 평생 갈 것임을 암시한다.

 

첨언: 시집 별다방 미쓰리를 읽어보면서 내 첫마디가 이랬다.

참 맛깔나게 시를 쓰는구나!”

이제 그 까닭을 스스로 헤아려 본다.

비유하자면, 특정 음식을 즐기는 편식이 아니라 갖가지 음식을 골고루 맛보듯이 갖가지 소재를 다 시로 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낡은 폐선, 세월호 침몰로 희생된 아이들, 가장을 잃은 어느 상갓집, 바닷가의 한 초라한 다방, 한국 시어머니한테 구박받는 베트남 며느리, 직장생활 하는 여성의 고달픔, 아파트에서 연실 콩콩 뛰는 아이들, 개집, 악어가죽 가방, 포도나무, 병실 . 딱히 소재의 가림이 없이 파노라마처럼 전개되어서 나도 모르게 맛깔스럽다(delicious)고 표현한 게 아닐까?

 

이 가을에 맛깔스런 시들을 선사한 조현정 시인. 문운(文運)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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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가 말했다.

성격이 운명이다.”

사람의 운명은 하늘이 부여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 성격이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나는 셰익스피어의 이 말을 아주 좋아한다.

 

반 년 가까이 매달려 쓴 장편의 초고. 아직 이름도 붙이지 않았지만 여하튼 퇴고에 들어갔다. 물론 퇴고는 초고에 비해 마음이 여유롭다. 비유하자면 한 채의 집을 짓는 데 기둥이니 지붕이니 벽채니 다 해놓았고 이제는 미장하는 단계라 할까.

 

물론 그렇다 해도 쉬운 일은 아니다.

구체적인 예를 든다면 초고 속 인물들이 이미 성격을 갖춘 존재들이라서, 작가인 나 자신도 함부로 건드리거나 수정하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춘향전에서 춘향이를 탐하는 변학도가 느닷없이사실 나는 향단이가 더 좋다!’고 선언한다면 그 순간부터 이야기는 엉망이 되고 말 것이다. 이는 춘향전 이야기를 지어낸 작가(물론 미상이지만)도 철칙처럼 준수해야 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나는 초고에서란 인물에 매력을 느낀다. ‘는 실종인 찾기 전문인이다. 의뢰 받은 실종인을 찾아주고는 보수 받아 살아간다. 매는 시력이 3.0이라서 200미터 앞에 있는 구슬을 본다. 매는 냄새 잘 맡는 개 한 마리를 끌고 다닌다. 매는 내몽골인이다.

매는 그의 본명이 아닌 별명이다. 별명으로 살아간다.

 

매가 등장하기는 소설의 전개 후반부이다. 어떻게 해야 매를 더 실감나게 독자들한테 보여줄 수 있을까? 그 점이 퇴고의 관건이다. 요즈음 그런 행복한 고민 속에고생고생하며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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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의 행운이었다. 20평쯤 되는 공간에서, 신촌블루스의 객원 가수로도 활동한 실력파 여 가수 이은근 님의 라이브 노래를 듣게 되다니!

혼을 빼앗듯 강렬한 노래도 노래이지만 나는 노래 중간의 멘트에 온몸의 전율을 느꼈다. 이은근 님은 이런 멘트를 했다.

제가 영화 흑인 올훼ost로 나온 카니발의 아침에서 주인공이 한 대사에 감명을 받았지요. 이런 대사였습니다. ‘내가 이 기타로 저 태양을 뜨게 하겠다.’ ”

 

사실 태양은 아침이면 당연히 동녘에 뜨는 것이다. 자연현상이니까. 그런데 자기가 기타를 쳐야만 새벽의 어둠이 걷히고 태양이 뜰 수 있다는 그 믿음.

그런 믿음이야말로 모든 예술의 출발점이 아닐까. 인류의 예술은이 밤을 춤추고 노래 부르며 을 달래야만 다음 날 아침 태양이 뜰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발라드 댄스 )

 

카니발의 아침

우울한 곡처럼 들리지만 사실 사랑을 찬미하는 내용이란다. 프랑크 시나트라, 루치아노 파바로티, 훌리오 이글레시아스, 조수미 등 수많은 세계적인 가수들이 노래 불렀다.

이제 춘천의 이은근 가수가 그들의 뒤를 이어 노래 부르고 있다.

여기는 가을이 깊어가는 화천 감성마을, 휴관한 날(2019.10.15.) 오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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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집 ‘K의 고개’(2018년 발간)에 수록된 작품 7편마다 삽화를 넣었다. 서현종 화백의 귀한 그림들 중에서 작품 내용에 맞게 7점을 받아 삽화로 활용한 것이다.

 

매 작품 작가로서 친 자식 같은 정을 갖고 있는데 그 중 ‘이발 유정’에 대한 정은 남다르다.

사양길에 들어선 재래식 이발관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느라 작가로서 심혈을 기울였으며 삽화 그림 선정에도 공을 들였다. 그 결과 ‘어느 뒷골목 동네 풍경’을 담은 삽화가 선정된 것이다.

정확히는 서현종 화백이 이메일로 보내 준 ‘어느 뒷골목 동네 풍경’ image이다. 내가 컴퓨터에 능하지 못해 아내가 나서서 그 image를 출판사에 다시 메일로 보내는 고생을 감수했다.

 

참 놀라운 세상이다. 저 70년대만 해도 책에 그림을 실으려면 반드시 원본 그림을 출판사에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원본 소지와는 상관없이 image를 메일로 보내면 되는 세상!

 

얼마 전 최돈선 선배님의 미소 짓는 그림을 내 블로그에 실은 적이 있다. 그 때도 서 화백의 image를 활용한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서 화백이 원본을 최 선배님께 전하는 과정에서… 전달을 맡은 이의 실수로 그 원본이 행방불명되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원본 없이 image가 살아남은 채 서 화백 블로그에서 내 블로그로 옮겨진 것이다. 원본은 없는데 image는 존재하는 기막힌 세상.

 

그렇기에 이번에 서현종 화백한테서 ‘이발 유정’ 그림 원본을 선사받은 것은, 여러 모로 뜻 깊고 감사하다.

 

작품 ‘이발 유정’에서 노인네(이발사)가 근근이 꾸려나가는 이발관 모습이 나온다. 그 이발관을 무시하듯 동네 사람들이 제멋대로 이발관 입구에 주차하는 짓을 감행한다.

바로 그러한 행태가 벌어질법한, 좁은 골목에 제멋대로 주차한 원본 그림이다.

 

 

아내가 원본 그림을 보자마자 감탄했다.

“그림 참 곱네!”

흑백 삽화로 책에 실렸는데 이제 유채색 원본을 보니 감탄을 금하지 못하는 것이다. 단순한 유채색이 아니다. 무채색처럼 착각을 일으키는 잔잔한 색칠이다.

볼수록 잔잔한 감흥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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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10-15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그림이군요 감회가 남다르시겠습니다^^

무심이병욱 2019-10-16 1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렇습니다. 원본 그림이 유채색으로 그려졌음에도 무채색 그림 같지요. 화려하지 않은 잔잔한 감흥이 있습니다

무심이병욱 2019-10-16 11: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실제 원본 그림 크기가 2호에 불과해서 처음에는 놀랐습니다 ㅎ ㅎ ㅎ
 

 

내가 5살 무렵(1955년경) 우리 집은 지금의 춘천교대부설국교 바로 앞 동네에 있었다. 집 마당에서 놀다가 남쪽을 바라보면 아주 멀리서 전동차가 지나가곤 했다. 달랑 한 양()이라서 기차라기보다 장난감차 한 대가 가는 것 같았다. 1955년경만 해도 춘천 서울 간을 오가는 경춘선 기차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극소수였다는 뜻이다. 그 전동차마저, 하루에 두 번 정도 아침저녁으로 느릿느릿 오갔을 뿐이다. 믿기지 않겠지만 시속 30km?

이 기억에서 또 한 가지를 깨달아야 한다. 지금의 교대부설국교 바로 앞 동네에서 전동차가 지나가는 남춘천까지, 시야를 가로막는 사물이라고는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다. 집 한 채 없이 너른 벌판()과 하천(공지천 상류?)뿐이었다.

당시 교대부설국교는 죽림동 성당 아래에 있었고 2년 뒤 부모님이 그 먼 학교로 나를 입학시키는 바람에 어린 나이에 10리는 될 거리를 가방 메고 걸어 다니느라 참 힘들었다.

 

21살 무렵(1971년경)에 나는 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학생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강원대학교 부근에는 외지에서 온, 자취나 하숙생들이 많았다. 나는 툭하면 친구 하숙방에 놀러가곤 했다.

하숙방에서 얘기 나누다 보면 밤이 되었고 그러면 밤바람 쐬러 그 동네 산봉우리에 올랐다. 말이 산봉우리이지 작은 야산의 꼭대기에 불과했다. 지금의 병무청 뒷산 꼭대기다. 해발 150m(춘천의 진산 봉의산이 해발 300m쯤 된다.) 될 그곳에 서 있노라면 갑자기 서치라이트처럼 강한 불빛 한 줄기가 우리를 엄습했다가 사라져버리곤 했다. 서울에서 내려오는 경춘선 기차의 전조등 불빛이었다. 그 불빛이 남춘천 부근에서부터 병무청 뒤 야산 위까지 오는 동안 중간에 가로막는 건물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어릴 때와 달리 너른 벌판에 집들이 들어섰지만 나지막한 단층집들뿐이었으니.

물론 기차는 이미 전동차가 아닌 긴 열차로 바뀌어 있었다.

그로부터 반세기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경춘선이 복선 전철화 된 지도 10년이다.

며칠 전 강대병원에 갔다가 귀가하던 길에 퍼뜩 내가 지금, 오래 전의 그 야산 꼭대기 부근을 차 몰고 지나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를 도로 변 공터에 세웠다. 느닷없는 감회에 차 운전 하기가 어려웠다.

보도에 서서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온통 원룸 건물들 빽빽한 주택가로 변해서 과연 내가 그 옛날의 야산 꼭대기쯤에 와있는 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밤바람에 흩날리던 야산의 잡초들 대신 시멘트와 아스팔트뿐. 4차선 차도에, 생맥주 집에, 카페에, 세탁소에, 노래방에.

이젠 고층건물들에 가려 남춘천 쪽은 보이지도 않았다.

세월 무상, 인생무상이었다.


사진= 80년대 남춘천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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