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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어느 날 신승근 시인이 내게 이런 얘기를 해줬다.

제 고향 정선에는 말입니다, 비행기재라는 고개가 있거든요. 워낙 높고 험한 고개라 가끔씩 차가 굴러 떨어지곤 했지요. 그래서 어릴 때는 동네 애들과 그 고개 아래 계곡으로 가서 자동차 베어링 같은 부속품들을 주우며 놀곤 했답니다.”

서울 어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우리 강원대로 진학한 거로 알고 있는데 고향이 정선이라니 뜻밖이었다. 게다가 비행기재 아래 계곡으로 놀러가 자동차 베어링들을 주우며 놀았다니!

 

교직을 정년퇴직하고 고향 정선에서 자급자족의 농사꾼으로 산다는 신승근 시인이 시집 나무의 목숨을 보내주었다.

반세기 가까운 세월, 저편의 만남이 갑자기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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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자 K는 저녁식사 후 반드시 밤거리를 30분 남짓 걷는다. 소화도 시키고 체력관리도 하는 거라 여긴다.

그런데 요즈음, 인근 중학교의 운동장으로 걷기 장소를 바꿨다. 이유는 한 가지. 코로나 때문이다. 밤거리도 수많은 행인들이 다니며 그 중에는 코로나에 감염된 자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야경을 보며 걷는 밤거리에 비해 학교 운동장은 무척 지루하다. 어두운 데다가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도는 일이므로. 딱히 할 일 없는 퇴직자이니 가능한 것 같다.

오늘 밤도 K는 그 지루한 어둠 속 운동장을 걷기 시작하려다가 뜻밖의 것들에 멈췄다. 하수도관이라도 다시 깔려는지 운동장 한편이 파 헤쳐진 데다가 포클레인까지 한 대 서 있는데 땅속에서 나온 게 분명한 큼지막한 바위 몇 덩이가 그 옆에 놓여있었다!

작은 돌 하나 없는 평탄한 운동장 바닥 아래에, 저런 큼지막한 바위들이 숨겨져 있었을 줄이야.

K는 순간 마냥 순해 보이는 사람들의 마음 밑바닥에 있는 큼지막한 무엇을 목격한 듯싶었다. 살아오는 동안에 순해 보이는 사람들을 함부로 대한 적이 숱하게 있었을 듯싶었다. 저런 큼지막한 무엇이 그 사람들 심저(心底)에 있는 줄도 모르고.

K는 난데없는 두려움에 운동장 걷기를 포기했다. 내일이 되면 모를까 여하튼 오늘 밤은 그 큼지막한 바위들을 견딜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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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문 일이지만, 부모가 제대로 보살피지도 못했는데 자식들이 잘 자라나는 경우가 있다.

 

우리 농장의 몇 그루 밤나무가 풍작을 예고하고 있었다. 아내와 내가 긴 장마에 농장을 제대로 둘러보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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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에, 우리는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의 아름다움을 모르고 있다. 이는 마치 부모님의 은혜를 잊고 사는 것과 같은 느낌이라면 지나친 비유일까.

 

코로나 역병이 기승부리는 어느 날, 나는 공지천 가에 있는 의암공원에 갔다가 그 서늘한 아름다움에 숨이 멎을 것 같았다.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공원길에 늘어선 나무들이 드리우는 그늘이 그 서늘한 아름다움의 주역이었다.

거기에 더해, 따가운 햇살을 가리면서 온 사방의 바람들에게 훤히 열려 있는 목조 그늘막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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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 K는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살폈다. 그러곤 어이가 없었다. 개울 흔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끼 낀 바위들이 널려 있어서, 비가 오면 개울물이 흘렀을 것 같았다. 바위들은 미끄러웠다. 그뿐 아니다. 플라스틱으로 된 막걸리 병과 과자 봉지 같은 것들이 퇴색한 채 바위 들 틈에 박혀 있었다. 누군가가 무더운 여름이면 서늘한 이곳을 찾아, 과자를 안주로 막걸리를 마시며 더위를 피하곤 했던 모양이다. 꾀죄죄하게 때가 낀 물건들의 꼴로 봐서는 근래의 일은 아니었다. 최소한 이삼년 전 일일 것 같았다.

사방 어둑한 숲속에서 사람이 다녀간 흔적을 보니 K는 왠지 안도가 되었다.

개울 흔적을 지나서 다시 10분쯤 나뭇가지와 칡덩굴을 낫으로 치며 나아가자, 갑자기 K의 눈앞이 훤히 트였다. 거짓말처럼 나무 한 그루 없이 잡초들뿐인 넓은 땅이 펼쳐져 있었다.

프랑스 사람이 인적 끊긴 깊은 숲속에 들어갔다가 생각지도 않던 거대한 앙코르와트 유적을 발견했다는데 그 때 놀란 심정이 지금의 내 심정과 같지 않았을까!’

K에게 직감이 왔다. 오래전 누군가 밭농사 지었던 흔적이었다. 세월이 흘렀어도 농사짓던 자국은 쉬 사라지지 않았다. 울창한 나무 숲속에 숨겨져 있는 공간.

누군가가 나무 숲속에서 낯선 침입자 K를 살피고 있는 것 같은 공포감에, K는 손의 낫을 다시금 확인했다. 고요하다기보다 적막함이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여기서 농사짓던 이들이 일하다가 힘들 때 쉬는 곳으로 삼았는지, 가까운 거리에 큰 포도나무 한 그루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거미줄에 얽힌 포도송이들이 여기저기 달려 있는 게 보였으나 K는 다가가지 않았다. 식욕마저 나지 않는 적막한 공간.

초여름의 따가운 햇살이 공간과 K를 한꺼번에 내리쬐었다.

왜 농사를 중단하고 사라졌을까?’

만나본 적 없지만 어느 한 때 땀 흘려 경작하다가 무슨 사연인지 다 포기하고서 떠나버린 그들’. 공간의 넓이로 봐 결코 혼자 농사지을 수 없을 거란 판단에 K그들이라고 복수(複數)를 생각했다. 마치 K네 부부처럼.

K가 퇴직금으로 외진 골짜기 땅을 사서 아내와 밭농사 짓기 여러 해. ‘그들부부도 K네 부부처럼 이 공간을 사서 밭농사 지었던 듯싶다. 하지만 무슨 사연인지 다 포기하고 떠나버렸다. 문득 며칠 전 아내가 K에게 한 말이 떠올랐다.

여보. 잡초들 김매다가 지쳐 죽겠어. 이 돌투성이 밭을 팔아치우고 편히 삽시다. 다 늙어서 이게 무슨 고생이야.’

그 말에 K는 대꾸하지 않았다. 기껏 비싼 포클레인까지 불러들여 경지정리하고 컨테이너 농막까지 사다 놓고는 농장을 시작했는데 그만 둔다니 될 말인가. 그렇기도 하고 적적한 노후를 집에서 날마다 TV나 보며 보낼 거야?

K는 돌아섰다. 숲속에 숨어있는 농사짓다가 떠나면서 황폐하게 남은 밭을 더 지켜보기 힘들었다. 마음이 몹시 무거워졌다. K는 다시 낫을 들어 앞을 가로막는 나뭇가지와 여기저기 뱀처럼 널려 있는 칡덩굴들을 쳐내며 무겁게 한 걸음 한 걸음 농장을 찾아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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