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늦봄 어느 날, 강원대학 201강의실에는 국어교육과 1기와 2기 학생들이 자리를 꽉 채웠다. 학회장을 뽑는 자리였다. 서준섭 후보 측 찬조연설자로 내가 나섰다. 서 후보가 차기 학회장이 되어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서 후보는 무난히 당선되었다. , 굳이 내 찬조연설이 아니더라도 그는 가장 유력한 차기 학회장 후보였다. 1기 선배 중 공부를 제일 잘한데다가 (입학시험부터 수석 합격했다는 소문) ‘항상 짙은 푸른색 점퍼를 단정히 입고 캠퍼스를 오가는 모습이어서 국어교육과 학생들한테 호감을 사고 있었던 것이다. 교통도 불편한 그 당시 저 먼 대관령 너머 강릉에서 춘천까지 유학 와 자취하는 학생이 옷을 단정히 입고 다닌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대개의 자취생들은 옷에 밥풀이나 막걸리 흘린 자국을 하고 다니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런 인연으로 서 형()은 몇 달 뒤, 내가 초대회장으로 있는 그리고 문학회에 영입되었다. 시와 소설뿐인 문학회에 서 형의 가입은 평론 분야까지 갖추게 돼, 명실상부한 문학회가 된 것이다. 1971년에 한 작은 지방대학에 시· 소설· 수필 ·평론을 망라한 문학회라니, 대단한 일이 아닌가.

서 형은 이듬해그리고 문학회’ 2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3대 회장은 박기동 시인. 4대 회장은 신승근 시인. 5대 회장은 이흥모 시인)

 

서 형은 나중에 모교인 강원대 국어교육과 교수가 되어 몇 십 년 간 강의하다가 정년퇴직했다. 문학평론가로서도 이미 자리를 잡았다.

 

오늘(2019115) 오랜만에 서 형과 만나 점심식사를 하고 2차로 봉의산 가는 길카페에서 커피도 마셨다.

노후에 들어선 서 형과 나.

카페 창()으로는 소양강이 보인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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