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짜기이지만 넓이가 800평 되는 밭이다 보니 잡초 김매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밭두둑에는 비닐 멀칭을, 밭고랑에는 잡초방지매트를 깔아서 기본적인 대처를 했지만 문제는 밭 가장자리와 농로와 농막 주변이다. 비닐 멀칭이나 방지매트를 깔 수 없어 잡초들이 기승이다. 그대로 방치했다가는 이내 무성하게 자라서 뱀이 스며들까 두려울 정도다. 그렇기도 하고 깔끔 떠는 아내가 성격상 견디지 못한다. 밭에 가기만 하면 그것들을 김매는 일부터 매달린다.

나는 나대로 예초기까지 동원해 최소한 나흘에 한 번은 쳐낸다. 우리 밭의 김매기는 이를테면 국지전과 전면전을 병행하는 격이다. 아내는 하나하나 김매는 국지전이고 나는 전반적으로 김매는 전면전인 거다.

웃기는 일화가 있다. 내가 작물에 물 주느라 바빠서 나흘이 됐는데도 예초기를 못 돌리고 그냥 귀가하던 차 안에서 아내가 이렇게 물었다.

, 벌써 나흘이 된 것 같은데 당신 언제 털을 깎을 거야?”

로 잘못 말하는 바람에 나는 어이없는 웃음을 허허허 웃고 만 거다. 그러고 보면 내가 면도하는 주기도 나흘이었다. 나흘을 그냥 지나가면 금세 수염이 덥수룩한 게으른 사내 인상이 되고 만다. 몸의이나 밭의이나 나흘째 방치하면 무성해진다. 이 이상한 동류감(同類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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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접시 하나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산산조각 나버렸다.

K는 이상하게도그 소리가 편하게 들리던 것이다물론 멀쩡한 접시 하나를 잃었다는 손실감과산산조각 난 것들을 어서 방비로 쓸어 담아서 쓰레기통에 넣어야 한다는 수고로움은 일단 배제하고서 하는 말이다.

사기접시가 산산조각 날 때 소리가 마냥 편하게 들리던 이상한 심적 상황을 K는 곰곰이 헤아려보았다.

아아 그건 사기접시가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소리로 들렸기 때문인 것 같다사기접시의 원래상태― 찰흙 한 줌으로 환원되는 그 편안함!

인간은 삶을 다할 때태어나서 이뤘던 그 동안의 모든 것(가족재산친구사이증오와 사랑등등)을 손놓아버리질 않던가바로 그런 편한 운명(殞命)의 모습을 사기그릇이 깨지는 소리들로 전해주었다.

사기접시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 버렸다자신을 빚어준 자연으로 편히 돌아갔다. K는 아내가 놀라서 여보뭘 깨뜨렸나?’외치는 소리도 귓전으로 넘긴 채 깊은 상념에 잠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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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삼경 시인이 소주잔을 쥐고 생각에 잠겨 있는 사진이다. 이 사진을 본 순간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우선 그의 머리가 지구처럼 23.5로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각도기로 재 보지는 않았지만 나는 23.5도라고 직감했다. 왜 그런 직감을 했는지 까닭은 모르겠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기운 그의 머리 쪽 방향에 놓인 빈 병들. 거나하게 취한 최 시인의 불안한 기울기를 떠받쳐주는 역할처럼 보인다. 소주잔을 든, 취한 사내 모습 사진으로 이처럼 구도(構圖)가 잘 잡힌 사진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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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식에 10분 이상 늦었다. 별나게 도로에 차들이 붐벼 늦은 것이다. 한 달 만에 보는 친구들. 내 자리를 만들어주면서 악수를 청한다. 이런 말들도 하면서 말이다. “늦는 사람이 아닌데 늦다니 오늘 웬일인가 했지.” “학창시절에도 결석은 해도 지각은 안하는 친구가 늦으니 이상하다 했어. 하하하.” “아무래도, 이번 모임 날을 주말로 잡은 게 무리였나 보이. 잊지 말고 다음번에는 평일로 잡아야 해. 퇴직한 놈들이 굳이 주말에 만날 일이 있나? 안 그래? 하하하.” 어지럽게 오가는 술잔들. 남들이 보면 점잖은 할아버지들이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청소년들처럼 새끼를 입에 달고 환담이 오간다. “야이 새끼야, 어서 술잔 비워.”“원 새끼도. 성급하긴!”

결코 싸우는 소리가 아니다. 너무 정겹다 보니 그러는 거다.

바로 한 달 전 모임의 장면이다. 아아, 그런 일상(日常)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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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박효규 또한 이정규처럼 나와 같은 초중고를 다녔다. 그에 관한 기억은 초등학교(교대부속초등학교) 3학년 때 어느 날이 첫 번째다. 햇빛 화창한 날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귀갓길에 그의 집에 들르게 됐는데 놀랍게도 작은 아코디언을 꺼내 내 앞에서 연주해 보이는 게 아닌가!

1960년이던 그 시절 음악교과서의 사진으로나 보던 귀한 악기 아코디언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연주까지 하다니, 나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어릴 적 친구 얘기를 쓸 때마다 놀랐다!’는 표현을 나도 모르게 한다. 하긴 어릴 적 눈앞의 사물이나 사건은 경이로울 수밖에 없지 않나?)

 

그런 일이 있더니 세월이 흘러 친구는 음악선생으로, 나는 국어 선생으로 한 학교에서 만났다. 모 고등학교에서, 1994년이다. 우리는 어언 마흔 살 넘은 중견교사였다. 특유의 우렁찬 음성으로 재미난 얘기하기를 즐기는 친구, 50명 넘는 교직원들의 차 중 친구의 차가 가장 낡은 차였다. 웬만한 사람 같았으면 새 차로 바꿀 만한데 오히려 그 고물차를 자랑스레 끌고 다녔다. 그뿐 아니다. 어느 날은 뒤 범퍼를 새로 간 모습으로 나타나 동료교사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면서 하는 친구의 말이 너무 재미가 있어 오랜 세월이 지난 이제도 나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저께 어디 다녀오다가, 뒤로 오던 어떤 사람의 차가 내 차 뒤를 받았지 뭐야. 그래서 내 차 뒤를 자기 돈 들여 새로 갈아주었다니까? 이제 내 차는 앞부분만 누가 받아주면 돼. 그러면 내 고물차가 돈 한 푼 안 들이고 새 차로 탄생하는 게 아니겠어? 하하하.”

그러더니 이듬해 여름방학 때 미국으로 이민 가 버렸다.

 

그 박효규 친구 역시 미국에서 내가 올리는 페북의 글을 재미나게 보고 있다는 얘기를, 어제 모 행사장에서 만난 후배한테 전해 들었다. 정말 놀라운 세상이다.

박효규. 자네, 미국에서는 어떤 차를 몰고 다니나? 괜히 궁금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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