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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속의 삽화 -

(칼라 삽화가 책에는 흑백 삽화로 나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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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구들 대부분이 불 꺼져 있는 데다가 보안등까지 고장 난 게 많아 아파트 단지는 어둠의 단지가 되었다.

철지난 검은 동복 차림에 뒤축이 반쯤 닳은 운동화를 신고서 어둠의 단지 안으로 걸어 들어온 아이. 삼십여 분 전에 돌발사건을 겪어서 경황없는 정신상태다. 이상한 것은, 그런 정신상태가 되자 아이는 이곳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걸어왔다는 사실이다.

사실, 아이가 걸어올 때 도로 변 전주에 있는 불법주정차 단속카메라나 상점들의 방범카메라, 심지어는 지나가던 차량들의 감시카메라에도 그 모습이 잇달아 찍힐 수밖에 없었다. 아이가 용의선상에서 벗어날 생각이었다면 돌발사건 현장에서 부근 주택가 골목으로 들어갔어야 했다. 그 골목은 감시카메라 하나 없이, 비좁고 긴 터널 같은 길로 이어져서 도피 로로써는 최적이었다. 아이는 그러나 아무 생각 없이 터벅터벅, 넓은 보도를 걸어서…… 어둠의 단지 앞 정문으로 들어온 것이다. 정문이라고는 하지만 기둥 구조물들만 남은 열린 공간이다. 게다가 양쪽 기둥 구조물에 설치한 등 두 개도 그 중 하나는 아예 켜지지 않았고 다른 하나는 제 촉광을 잃고 일대의 어둠에 눈치 보듯 아주 흐릿하게 켜져 있었다. 지친 모습으로 들어서는 아이를 아무도 보지 못한 까닭이다.

정문을 지나자마자 왼편으로는 단지 내 상가가 있다. 열 개 점포 중‘2단지 슈퍼마켓하나만 전등불을 켜놓아서 단지 내 상가임을 겨우 알리고 있었다. 그 옆을 지나서 어둠 속 보도를 이십 미터쯤 걷던 아이는 문득 멈춰 섰다. 긴 밤을 노숙하려면 아무래도 맨 정신으로는 안 될 거라는 생각이 든 때문이다. 아이는 동복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지폐 한 장을 확인했다. 지난번에 학교에 잠깐 들른 형이 비상금 하라며 쥐어 준 돈 만 원이다. 형은 시내 독서실에서 총무를 맡아 그곳에서 먹고 자며 한 달에 사십 만원 받는다는데, 아이와 함께 지낼 십 평 원룸의 전세 보증금 오백만 원을 목표로 그 돈 대부분을 예금하고 있다 했다.

아이는 방금 지나친 상가 쪽으로 되돌아 걷는다. 어두운 바닥의 보도블록도 깨지거나 파인 것들이 많아서 걷기가 편치 않다. 아스팔트가 깔린 차도로 내려와 걷는데 그 때, 정문 쪽에서 웬 차 한 대가 전조등 불빛을 두 눈처럼 부라리며 들어왔다. 아이는 경찰차가 아닌가 싶어서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차는 전조등 불빛을 쏘면서 아이 가까이로 다가오더니, 휘발유 태우는 시큼한 냄새를 남기고 옆으로 지나쳐 갔다. 아이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다시 상가 쪽으로 걷는다.

지린내 가득한 상가로 들어섰다. 문 닫은 점포 개수만큼이나 공허한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2단지 슈퍼마켓’. 무덤덤한 표정으로 텔레비전 뉴스를 보고 앉은 주인 영감은, 아이가 소주 한 병과 오징어 구운 것 하나를 고른 뒤 만 원을 건네자 잠시 갈등했다.‘까짓 거, 학생복을 입었다고 해도 부모 심부름으로 온 줄 알았다 하면 되는 거다고 속으로 다짐한 뒤 돈을 받았다.

아이는 상가를 나와서 다시 걷는다. 105동 아파트를 향하는 걸음이다. 그 몇 분 사이에 더욱 무거워진 어둠.

일 년 전만 해도 아이는 105동의‘3-4’현관을 향해 늦은 밤마다 이 길을 걸어갔었다. 학교에서 야간자율학습까지 하고 오느라 몸은 지쳤지만 마음은 항구에 닻을 내리는 배처럼 안온했었다. ‘우리 집에 다 왔으니까. 아버지가 105403호 안방에 혼자 해골처럼 누워 있어서, 썩어가는 몸 냄새로 십팔 평 공간이 진동했지만 그래도 우리 집에 왔다는 생각에 아이 마음은 안온했었다.

지금 아이는 그런 안온한 닻 하나 내릴 데 없이 사는 삶이다. 오늘 105동 아파트의 밤 풍경이 생소해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일까? 일 년 전보다 불 꺼진 빈 집들이 더욱 늘어난 탓도 있겠지만.

아이는 걸음을 멈췄다. 105동의 ‘3-4’ 현관이 코앞에 있는, 공중전화 부스와 예전의 꿈동산 유치원건물 사이다. 공중전화 부스는 그대로 남아 있지만 유치원은 현대 재활용 센터로 간판이 바뀌었다. 재갈대던 유치원 꼬마들 대신에 빈병과 폐휴지 따위가 와글거리며 모여 있는 걸까?

아이는 주공 2단지 아파트 열 개 동 중 가장 전망 좋고 양지바른 곳이라던 105, 그 중의 403호를 어둠 속에서 올려다본다. 예전에 중간고사라도 치르고 일찍 귀가하면 아이는 저 403호의 발코니에 서서 눈앞에 펼쳐지는 한낮의 전경을 즐겼다. 멀리 단지 앞 차도를 느릿느릿 지나가는 시내버스들, 단지 내 상가의 다양한 간판들, 그리고 바로 앞의 꿈동산 유치원 꼬마들이 병아리들처럼 재갈대며 귀갓길을 서두르는 모습들…….

덥수룩한 머리에, 뒤축이 반쯤 닳은 운동화에, 철지나서 땀내 풀풀 나는 동복 차림으로 잠시 회상에 잠겨 있는 아이. 누가 아이의 지금 외양을 봤다가는 고등학생이기는커녕 밤거리의 노숙자인 줄 알고 기겁했을 게다. 하긴, 기숙사의 사감 선생이 오늘 낮에 아이를 보고 이런 말을 했다.“, 노숙자냐?”

사감 선생이 보기에 아이는, 당신이 기숙사 일을 맡은 지 세 달 만에 처음 보는용의 및 복장 상태가 100% 불량인 학생이었다. ‘어떻게 이런 자식이 내 눈길을 피해서 기숙사에서 지내왔지?’하는 험한 눈빛으로 다시 아이한테 이렇게 물었었다. “그래, 너는 부모님도 없냐? 용돈이라도 타서 이발하고 운동화도 사 신고 그래야 되지 않겠어?”

아이는 답했다.“네에…… 부모님이 없는데요.”

그 순간 뒤통수를 한 대 쾅 맞은 듯했던 사감 선생의 표정을 떠올리면 아이는 우습다기보다 캄캄한 나락으로 다시 굴러 떨어지는 심정이다.

내가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 이게 다, 일 년여 전에 우리 집안이 해체된 후 벌어지는 일들이다. 조금 전의 돌발사건도 그렇다. 그 여자는 내가 어쩐 게 아니었다. 그 여자는 나와 마주치자 제풀에 놀라 차도 건너 편 보도로 달아나다가, 그 때 마침 달려오던 시내버스에 치인 것이다.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버스가 뭐에 부딪힘과 동시에 급정거하는 소리를 내며 섰고 순식간에 일대가 소란스러워질 때 나는 그냥 가던 발걸음을 재촉했을 뿐이다. 어디로 가는 길이었냐면…… 그냥 가는 길이었다. 처음부터 그냥 가는 길이었는데 그렇듯 그 여자는 보도에서 나와 맞닥뜨리자 제풀에 놀라서 달아나다가 그랬다.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 자리를 떠나 보도를 걸어 올 때 구급차가 경광등을 희뜩이며 내 옆의 차도로 허겁지겁 지나갔다. 그 여자를 수습하려고 가는 건지, 다른 일로 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알 바가 아니니까. 솔직히 나는 그 여자가 모르는 여자였다면 그 자리에 남아서 사건을 수습했을 테다. 여자가 숨이 붙어 있었다면 택시라도 잡아서 응급실이 있는 종합병원으로 갔을 테고, 그것도 아니라면 하다못해 그 자리에 남아서 신고를 받고 달려온 경찰한테 전후 사정을 진술했을 테다.

나는 그러지 않았다.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그 여자였으니까. 그냥 나는 내 갈 길을 걸어갔다. 오가던 차량들이 일제히 급정거하고 행인들이 비명을 질러대는 어수선한 사고 현장을 나는 그렇듯 담담하게 벗어났다. 그때가 만일 대낮이었더라면 어쩔 뻔했을까? 행인들이 사고 현장에서 나를 붙잡고는 멱살을 쥐고 난리 치지 않았을까? 정말 어둡고 어수선하기가 천만다행이었다.

햇빛 환한 대낮은 내게 늘 두려운 시간이었다. 오늘 대낮만 해도 그렇다. 평상시였다면 교실이나 기숙사의 방 같은 그늘진 데서 편히 지냈을 대낮이었다. 생각지도 않게 연휴를 맞아 기숙사에서 ‘12일 전원 귀가'를 실시하니까, 갈 데가 없는 나는 대낮에 잘못 나온 박쥐처럼 거리를 헤매다가 결국 이 지경에 다다랐다.

기숙사 친구들이 인디언처럼 끼호끼호소리까지 지르며 신나게 귀갓길로 나설 때 나는 사감실을 찾아가 이번 연휴 동안에 혼자 기숙사에 남아 있으면 안 되냐고 말씀 드리려 했다. 말씀드리기도 전에 사나운 얼굴로 내 용의복장의 불량부터 지적하던 사감 선생님. 급기야는 내가 부모님이 없다고 말씀 드리자 놀라서 입을 떡 벌린 그 표정이라니. 내 얘기를 듣고 나서 하는 그분의 대답이란 게 이랬다.“어찌 됐건…… 예외는 없다. 여하튼, 이 기숙사를 나가서 하루 지내고 내일 오후 다섯 시까지 귀사 하는 거다. 이상 끝.”

일은 그렇게 꼬이기 시작했다. 정말 이해가 안 되는 이번 사감 선생님이다. 먼젓번 사감 선생님은 달랐다. 작년 연휴 때 내가 그런 사정까지 다 말씀 드리자, 참 안 됐구나 하는 표정으로 침묵하다가 이렇게 말씀해 주었었다.“그렇다면 말이야, 다른 애들한테 절대 말하지 말고 너만 혼자 남아 있어라. 다만, 내가 기숙사의 철문을 닫고 전원도 내려놓고 갈 거니까, 그런 불편은 참고 지내야 해. 웬만해서는, 낮에 공부하고 밤에는 그 동안 밀린 잠이나 열심히 자두는 게 어떻겠니?”

그 때가 작년 추석연휴 때였다. 그런 분도 있었는데 올해의 사감 선생님은 영 아니다. 교장선생님보다도 더 늙어보여서인자한 할아버지일 거라는 인상을 받았었는데 까다롭기가 여간 아니다. 일이 그래서 꼬이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하룻밤 잠자리를 얻고자 힘겹게 찾아간 아는 교회마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일 년 전까지도 고등부 활동에 빠지지 않은 나였으니까 그것을 믿고 찾아간 것인데 그 모양이 되어 버렸다. 닫힌 교회의 문짝에는 이런 글이 A4 용지 한 장에 적혀서 달랑 붙어 있었다.‘연휴를 맞아 12일로 산상기도회를 갑니다. 연락처 011-’

교회 문 앞 층계에 맥이 쭉 빠져 주저앉아 있을 때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던 햇살은 얼마나 무겁던지. 그래, 나는 한 마리 박쥐였다. 잘못돼서 대낮에 나온 박쥐. 환한 대낮이 그토록 끔찍할 줄이야.

, 내 책가방? 지금 내 손에 들린 것은 소주병과 구운 오징어뿐이다. 그럼, 기숙사를 나설 때부터 들었던 책가방을 내가 어디에 놓았지? 연휴 중에도 풀어야 할 문제집만 골라서 담은 책가방인데. 나 참. 여하튼 그 여자와 아까 마주친 것 하나만 봐도 오늘은 재수에 옴 붙은 날이다. 인구 이십만을 넘었다는데도 그 여자와 보도에서 딱 마주쳤으니 아직도 좁은 도시다. 그 여자나 우리 형제나 서로 마주치지 않으려고 신경을 쓰며 살아왔을 텐데, 오늘 참, 일이 더럽게 꼬여 버렸다. 나야 항상 교실이거나 기숙사에서 지냈고, 형은 독서실을 밤낮으로 지키면서 사는데 어떻게 내가 오늘 그 여자와 보도에서 맞닥뜨리는 재수 없는 일이 생겨났을까?

이게 다 늙은 사감 선생 새끼 때문이다. 개새끼. 기숙사에 빈대 붙어 사는 내 처지를 이해하고 그냥 넘어가 준다면 길어야 아홉 달 뒤에 수도권 대학에입학성적 우수 장학생으로 합격하면서 이 도시를 영영 떠날 것인데…… 그거 하나 봐 주지 않아 내가 대낮부터 헤매다가 책가방도 잃고 이 고생이다. 에에 개새끼 퉤퉤퉤.

아이는 공중전화 부스에서 분무되는 빛들에 몸을 반쯤 적시고 서서 침을 욕처럼 뱉다가, 105동의 ‘3-4’현관 쪽으로 발걸음을 떼었다. 웬 인기척 때문에 이루어진 행동이다. 아이는 방문할 집이라도 있는 양 바삐 걸어 ‘3-4’현관으로 들어갔다.

노인 한 분이 폐휴지 가득한 수레를 끌고 나타난 것이 웬 인기척의 정체였다. 공중전화 부스의 빛들에 모습을 드러낸 노인은현대 재활용 센터건물 앞에 수레를 세워놓고서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박 선생은 화장실 좌변기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 모처럼 연휴를 맞아 집에 와서 불고기를 많이 먹은 게 체한 듯싶다. 나 참, 그 아이가 그런 기막힌 사연으로 기숙사에 맡겨진 줄을 몰랐다. 삼월 인사이동으로 이 학교로 전근 오면서 맡은 기숙사 사감 일이다. 세 달째로 접어드는데 팔십 명 되는 기숙사 애들 중에 그런 애가 끼어있을 줄은 나는 정말 몰랐다. 진작부터 애들의 신상을 파악해 두었어야 하는데, 낮에는 교실에서 수업을 하고 밤에는 기숙사를 지켜야 하니까 바빠서 그럴 사이가 없었다. 직접 드릴 말씀이 있다면서 사감실로 찾아온 그 아이. 처음 보는 얼굴에 복장까지 아주 불량해서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야단치려는데 그 아이가 하던 말. “네에…… 부모님이 없는데요.”

그런 충격적인 존재한테 무슨 꾸지람인가? 그 아이의 용의나 복장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못했고,‘연휴에 혼자 기숙사에 남아서 공부하고 싶다는 바람이나 묵살해 버렸다. 괜히 이런 이상한 자식을 남겨 두었다가, 전기도 내린 기숙사 방에서 무슨 사고라도 내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다. 예를 들어, 촛불이라도 켜놓고 지내다가 잘못돼서 기숙사에 불이라도 낸다면 그건 정말 수습할 수 없는 사고다. 사감인 내가 책임을 지게 되면서 최소한 교감으로 승진하고자 하는 노력이 하루아침에 무산될 게 뻔하다. 내 나이가 어언 오십육 세. 교장보다는 두 살 아래이지만 교감보다는 다섯 살 위다.

아이를 박정하게 처리해서 내 보냈는데, 뒤늦게 께름칙한 마음이다. 오갈 데 없는 그 아이가 그 꼴로 거리를 헤매다가 무슨 사고를 저지르지 않을까 걱정이다. 내 나이가 환갑을 바라보면서 생겨난 쓸 데 없는 노파심인가? 아니다. 아무래도 불길하다.

!

하고 힘을 주는데도 편치 않은 아래뱃속의 것이 나올 기미가 없다. 꾸럭꾸럭 속이 편찮은 대로 더 기다려 봐야 하나? 결국 일을 못 보고 화장실을 나왔다. 거실의 아내는 오전에 목욕탕에라도 다녀왔는지 허벅지 속살을 언뜻언뜻 보이며 이심전심의 욕정을 전한다. 제기랄, 보름 만에 서울 집으로 올라와 편히 쉬려도 아내 욕정을 달래줄 의무가 기다리고 있다니. 그 아이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아서 뱃속도 시원치 않은데 그런 의무가 가능할까?

소파에 앉아서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고는 있지만 그 아이 걱정뿐이다.

아비가 위암으로 삼 년이나 앓다 죽고, 그 바람에 집안이 거덜 나면서 엄마마저 다른 남자와 재혼해서 산다는 막장 가정의 아이. 몇 안 되는 친척들도, 아이 아비가 사업할 때 보증 선 것이 잘못되면서 남만도 못한 사이가 되었다고 했다. 아이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피붙이라고는 독서실에서 총무를 한다는 형 하나. 그 형도 집안이 해체되자 숙식을 해결하고자 그 곳에 가 있단다.

기가 막힌 아이 사정이 학교에 파악된 게 작년 삼월 학기 초에 학급 별로가정환경조사 자료를 걷으면서였다고 했다. 그 때부터 학교에서는 아이를 기숙사에 넣어 숙식을 해결해 주는 한편으로학업성적은 우수하나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을 위한 장학금까지 주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했다. 그 아이가 학교 측의 후의를 단단히 입게 된 것은,‘서울대 합격 가능성이 높은, 학업성적 우수 학생이라는 사실이 적극 고려된 때문이라 했다. 이런 사실들을 나는 오늘 오후에야 알았다.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는데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아이여서, 동서울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아이의 담임한테 전화를 걸어낮에 기숙사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고 의견을 구했더니 그렇게 그간의 사연을 일러주었다.

담임은 이런 말을 덧붙이며 통화를 마쳤다. “너무 염려 마세요. 요즈음 날씨가 더워졌으니까 아무 데서 잔들 얼어 죽기야 하겠습니까? 하하하. 애들은 말입니다, 야영가면 밤새 한 잠 안 자고 잘 놀잖아요? 그런 애들이니까…… 부장님, 전혀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그럼 이만 끊습니다.”

담임은 사십 대 초반의 사내이다. 그런 나잇대 사람이니까 말을 쉽게 하는 것이지, 어디 나처럼 세상의 이런저런 풍파를 보거나 겪으면서 살아온 나이의 사람이 그럴 수 있나? 지금 어느 곳에서 헤매고 있을 그 아이. 내가 여기서 어떻게 해야, 그 아이가 안전하게 오늘 밤을 보낼 수 있을까.

그렇다. 비상시를 대비해서 내가 지갑 안에 접어서 넣어둔 유인물 한 장이 있지 않나. ‘기숙사 학생회 임원 명단 및 전화번호’.

회장 녀석의 휴대폰 번호를 찾아 통화를 시도한다. 녀석은 뭔 바쁜 일이 있는지 일 분 넘게 있다가 전화를 받으며 내게 한 첫 마디가 이랬다. “, 누구니 새끼야?”

기가 막히지만 화를 억누르고 답한다. “나다, 사감 선생이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선생님! 저는 제 친구가 건 줄 알고!”

괜찮다. 다름이 아니고 내가 하나 물어볼 것이 있거든.”

예예 말씀하십시오.”

멋모르고 전화 받은 죄를 씻고자 회장 녀석은 아주 어조가 공손하다. 휴대폰을 들고 연실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싶다. 내가 그 아이의 이름을 대며연락할 일이 있는데 혹시 휴대폰 번호라도 알지 않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 걔요. 걔는 휴대폰 같은 것도 없어요. 그냥 밤낮으로 공부만 하는 애에요. 왜 그러세요, 선생님?”

내가 꼭 연락할 게 있어서 그러거든.”

걔는 기숙사에 남아 공부하지 않나요? 작년 연휴 때도 걔는 특별히 봐 주는 것 같더라고요. , 걔는 엄마가 쌩까서 그렇게 된 애잖아요? , 안 된 애죠.”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쌩깐다는 말은 일부러 모른 척 한다거나 도망갔다는 뜻이 아닐까? 애들도 다 아는 그 아이의 가정사이구나. 그렇다면 내가 굳이 조심스레 얘기할 것도 없겠다. 솔직하게 말하자.“그러면 너를 믿고 말하겠다. 다름이 아니고.”

하면서 낮에 그 아이가 사감실을 찾아와서 벌어진 일을 대강 말하고서, 내가 지금 걱정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회장 녀석이 반문했다.“무슨 걱정이세요?”

그 아이가 잠자리도 없이 길거리를 헤매다가 무슨 사고라도 나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지. 그 아이한테 하나 있는 형이란 사람도 자기 몸 하나 해결하기 바쁜 처지라니…… 아이가 형한테 들를 것 같진 않고. 그래서 내가 그 아이와 연락이 닿으면, 거 뭐야, 학교 수위실에 딸린 방에서라도 하룻밤 잠을 자라고 일러주려는 거지. 그 방이야, 내가 수위 아저씨한테 전화 한 통 걸어주면 되니까.”

선생님, 잘 알겠습니다. 제가 만일 그 애를 만나거나 연락이 닿으면 그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휴대폰으로 전해지는 바쁜 어조로 봐서 회장 녀석은 뭐 이런 시시한 일로 전화를 다 하시나?’하는 표정인 게 역력했다. 어찌 됐건 이만 하면 됐다. 내가 아이한테 여기 멀리서 할 수 있는 조치는 다 했다. 그러면…… 가만 있자, 우리 아내가 어디 있나? 이제야 한 번 안아줄 마음이 생겨나는데 말이야.

 

앞뒤바퀴의 바람이 다 빠진 낡은 자전거가 105‘3-4’현관의 왼쪽 벽에 기대어 있다. 그 위쪽에 있는 각 호별 우편물 수취함.

아이는 수취함에서 403호 칸을 본다. 오래 되어‘403’이란 페인트 글씨는 흔적도 없고 이삿짐센터 스티커들만 겹겹이 붙어 있지만 아이는 403호 칸인 것을 안다. 그 칸 아가리에 무슨 유인물이 물려 있다. 아이는 아가리 덮개를 쳐들어 그것을 꺼내어 본다.‘재개발 사업 시행 인가 고시

다른 칸의 아가리들도 같은 유인물을 물고 있다. 어떤 것은 상품 광고 전단들까지 물고 있어 구토하는 모양 같다.

일 년 전, 403호 칸의 아가리에는 기분 나쁜 우편물들이 끊임없이 물렸다.‘채무변제 3차 독촉’‘법적처리 통보’’신용불량자 등재를 예고함’‘파산신청 안내 등등. 해골이 다 되어 누워 있는 아버지를 대상으로 날아들던 기분 나쁜 문서들. 그 때부터 어머니는, 아니 그 여자는 집에 들어오는 날이 줄어들어갔다.

아이는 재개발 사업 시행 인가 고시유인물을 수취함 아가리에 다시 쳐 넣고서 층계에 발을 디딘다. 사 년 전인가, 일 층의 103호에 살던 귀여운 꼬마가 층계 벽에 그려놓은 그림이 여태 남아 있다. 빨강 크레파스로 그려놓은 꽃 한 송이. 그 즈음부터 이 아파트는최소한의 관리로 들어서지 않았을까?

이 층.

삼 층.

사 층으로 오르는 층계에서 아이는 가슴이 떨린다. 그럴 리가 없지만 이제 층계를 다 올라서 403호 문을 열면 멀리 안방의 아버지가 희미한 기척으로 자기를 맞을 것 같다. 아버지는 병석에 누워 지내면서 힘이 다 빠져버려, 머리맡의 물병을 손으로 쓰러뜨려 소리 내거나 부스럭거리는 이불 소리로 당신의 반가운 마음을 알렸다. 그러면 아이는 아버지, 저 왔습니다.”하면서 현관으로 들어섰다. 책가방을 거실바닥에 내려놓고서 여기저기 창문들부터 활짝 엶으로써, 십팔 평 실내에 가득한 역한 냄새부터 환기시키는 첫 번째 집안일을 했다. 두 번째 집안일은 아버지의 병 수발이다. 병 수발이랬자, 아버지 샅에 채워진 기저귀를 갈아주고 죽 그릇을 설거지한 뒤 새 죽을 끓여 담아 놓는 일이다. 죽도 그냥 방치하면 곰팡이가 퍼렇게 껴서 내버려야 했다.

아이가 당신 샅의 기저귀를 갈 때 눈을 꾹 감고 마른 장작개비처럼 움직여지던 아버지 모습. 아이는 그 아픈 기억을 지울 듯이 고개를 숙이고 조심스레 403호의 문 앞을 지나 오 층으로 향한다. 밤 열 시도 안 되었을 텐데 무덤처럼 어둡고 조용한 통로다. 텔레비전 소리나 어느 집 말다툼 소리 같은 것도 없다. 아까 공중전화 부스 옆에 서서 올려다봤을 때 열 가구 중 두 가구가 불을 켜고 있었는데…… 불 꺼진 가구들은 모두 다른 데로 이사 간 걸까?

이제 오 층이다. 층계가 끝났다. 여기서 벽에 있는 쇠사다리로 삼 미터쯤 오르면 자물쇠로 채워진 정사각형의 철문이 있고 그 문을 열면 옥상이다. 그 열쇠가 아직도 있을까? 관리소 아저씨가 그 자물쇠의 열쇠를 층계 벽의 작은 환기창에 몰래 놓고 다니던 것을 아이는 기억해 냈다. 높은 환기창이라 아이는 발끝을 곧추세우고 오른팔을 바짝 올려 손바닥으로 더듬어 본다. 있다, 먼지 속에. 아이는 차가운 그 열쇠를 입에 물고서 쇠사다리 틀을 하나하나 잡으며 오른 뒤, 자물쇠를 따고 철문을 연다. “삐이이걱

낮에 달궈진 옥상의 더운 기운이 아이 얼굴을 공격한다. 아이는 철문을 열어놓은 채 다시 쇠사다리로 오 층까지 내려와 동복 상의를 벗는다. 팔소매들을 서로 잡아매자 상의는 광주리처럼 되었다. 그 안에, 아까 바닥에 놓았던 소주병과 오징어 구운 것을 담은 뒤 목에 걸고 조심조심 쇠사다리를 오른다.

지상은 어둠에 깔리면서 낮의 열기가 식었는데, 옥상은 그렇지 않았다. 아이는 뜨듯한 옥상 바닥에 주저앉은 뒤 소주병 마개를 따고서 꿀꺽꿀꺽 소주를 마신다. 점심은 기숙사 식당에서 먹고 나왔지만 저녁은 먹은 게 없어, 목구멍 너머로 들어간 소주는 이내 독한 기운으로 내장에 퍼진다. 아이는 벌써 흔들리는 눈길로 오징어를 찾아 두 손으로 뜯어 먹다가, 다시 소주병을 들어 마신다.

밤하늘의 별들이 총총하게 보여야 할 옥상인데 그렇지 않다. 백여 미터 거리를 두고 지어진 이십오 층 고급 아파트의 휘황한 전등불빛들이 여기 옥상까지 날아오면서 밤하늘을 허연 그물처럼 막은 탓이다. 그 여자가 산다는 저 이십오 층 아파트의 어느 집. 그 여자는 아버지 화장한 재를 강물에다 뿌리고 돌아온 날 저녁에 우리 형제한테 이런 메모 한 장을 남기고 사라져버렸다.‘나는 네 아버지와 이혼해서 벌써부터 남이었다. 인제는 너희끼리 잘 살기 바란다.’

그 때부터 엄마는 그 여자가 되었다. 엄마가 아버지와 이혼한 사실은 우리도 아는 오래 전 일이었다. 아버지의 부채가 넘어오는 것을 피하기 위한 문서상의 위장이혼이라 했는데…… 그것을 실제로 적용시킨 것이다. 아버지의 건강음료 판매사업이 그럭저럭 되어가고 있었을 때 그 여자는 엄마였었다. 아파트 관리비니 전기료니 하는 것들을 꼬박꼬박 잘 내고 살 때는 좋은 엄마였었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

그래도 오늘 밤, 예전에 십 년 넘게 살았던 105403호 가까운 위에서 지내게 되지 않았나. 403호 안방의 아랫목처럼 따듯한 옥상 바닥이라니……. 소주에 취한 탓일까, 아이는 눈물이 글썽글썽해진 채로 앉아 있다가, 벗었던 상의를 이불처럼 뒤집어쓰며 옥상 바닥에 누웠다. 밤잠을 청한다. 뒤집어 쓴 상의가 검은색 동복이니까, 박쥐가 하늘로 날아오르려다가 쳐 놓은 빛 그물에 걸려 추락해 버린 꼴 같았다.

 

다음 날.

오후 다섯 시까지 학생들이 기숙사로 들어오게 되어 있다. 박 선생은 서울 집에서 오후 세 시쯤 학교가 있는 지방 도시로 출발해도 될 텐데 오늘은 점심을 먹자마자 한 시에 바로 출발했다. 아무래도 그 아이가 마음에 걸려 집에 있느니 기숙사에 일찍 가 있는 게 나을 듯싶었다. 오후 세 시도 되기 전에 학교 내의 기숙사에 도착한 박 선생.

이 층 건물인 기숙사의 일층 출입구 옆에 전원박스가 있다. 그것을 열어 기숙사에 전기가 들어오게 하고, 이어서 출입구를 가린 철제문의 잠금장치를 풂으로써 기숙사는 정상이 되었다. 쥐 죽은 듯 조용한 기숙사 내부. 박 선생은 뚜벅뚜벅 걸어 사감실로 들어가서는, 벽에 붙은각 실 별 명단부터 살핀다. 일 층에는 101호실부터 110호실까지 있고, 이 층은 201호실부터 210호실까지 있다. 그 아이 이름은 210호실에 들어 있었다. 이 층 맨 끝 구석방이다.

그 아이가 그 동안 내 눈에 뜨이지 않았던 게 맨 끝 구석방인 때문이었나? 그보다는 그 아이가 내 눈길을 피해 생활했을 개연성이 더 크겠다. 각 호실마다 네 명씩 배정되어 있는데, 애들은 기숙사를 수학여행 온 여관방처럼 여기는지 쉬지 않고 들락날락거리며 떠들어댄다. 그 아이가 그런 소란 속에 숨어 있으면 내가 몇 달 정도는 모르고 지낼 수도 있지.

박 선생은 사감실을 나와 어둑한 복도를 걸어 210호실에 다다랐다. 문을 열자, 하루가 지났는데도 여전한 악취. 한창 크는 애들이라 수컷의 냄새에다가 안 빤 양말 냄새, 땀 냄새 등이 뒤섞여 남아있다. 방의 왼쪽에는 사 단으로 설치된 침대가 있고 오른 쪽에는 네 조의 책걸상이 나란히 놓여 있다.

네 조의 책걸상 중 가장 구석에 있는 그 아이의 자리. 책상 앞 벽에는 아이가 형으로 보이는 청년과 함께 찍은 사진 한 장과, ‘서울대 합격!’이라고 검은 매직으로 굵게 쓴 종이가 나란히 붙어 있다.

박 선생이 놀란 것은 책상 밑에 가득한 책들이다. 어둑해서 미처 못 봤었는데 의자에 앉아 두 발을 뻗기 힘들게 책상 밑에 꽉 찼다. 극빈이라는 아이가 웬 책이 이렇게 많아?

궁금해서 책 하나를 꺼내 환한 창가에서 보니까 영어 문제집이다. 들쳐보자 지저분한 밑줄 긋기도 많은데다가, 책 표지에 적힌 이름도 그 아이가 아닌 다른 아이 이름이다. 그제야 감이 잡혔다. 아이가 문제집을 살 돈이 없자 학교 쓰레기장에서 주운 것이다. 요즈음 애들은 학년이 오르거나 졸업하면 그 동안 보던 책들을 미련 없이 다 쓰레기장에 내다 버린다. 조금 풀다가 말아서 새 것이나 다름없는 문제집도 그냥 다 내버린다. 여하튼 공부 하나는 열심히 하는 아이이구먼.

그런 아이를 기숙사에 남겨놓는다면, 내가 전기를 꺼 놓아도 양초라도 구해 밤새 공부했을 게 뻔하다. 그건 안 돼지. 이렇게 책들도 많고 좁은 방에서 그랬다가는, 자칫 양초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기숙사 전체로 불이 번져 대형화재가 될 텐데. 안 됐지만, 내가 어제 아이한테 나가서 자고 오라 한 것은 아주 잘한 결정이었다. 암 그렇고말고.

박 선생이 사감실로 돌아와 텔레비전의 재방 드라마를 보는 중에 오후 네 시가 되었다. 그 때부터 아이들이 와글와글 기숙사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다섯 시. 박 선생은 사감실의 방송장치를 켠 뒤 마이크를 잡고서 각 방의 대표들에게 현재인원을 즉각 보고하도록 알린다. 잠시 후 이십 명의 대표 모두 사감실 앞에 모여 101호실부터 보고하는데 210호실에 이르도록 단 한 명의 결원도 없었다. 일부러 210호실의 대표에게 재차 확인했으나 전원이 입사했단다.

그럼 됐구나. 어제 오후부터 편치 않은 박 선생의 마음이 확 풀렸다. 그 아이가 여하튼 들어왔으면 되었다. 박 선생은 기숙사 구내식당을 인터폰으로 불러기숙사생들의 여섯 시 저녁식사에 차질이 없도록당부해 놓고 다시 텔레비전 드라마를 본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의 갈등이 본격화될 때 그 아이가 왔다. 부은 듯한데 겁먹은 얼굴이다. “기숙사 학생회장 애가,(콜록) 사감 선생님이 어제부터 저를 찾으셨다고 해서, 왔습니다.(콜록)”

내가 말이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너를 학교 수위실 빈 방에 재울 것을 그랬나 싶더라고. 그래서 찾았지. 그래, 간밤에 잠은 어디서 잘 잤냐?”

.”

기침하는 것을 보아, 어디 공원 벤치 같은 데에서 잠잤을 듯싶다. 박 선생은 캐묻지 않았다. 이제 그만 가 봐도 된다고 손짓해서 보냈다. 그래놓고 생각해 보니, 녀석이 여전히 땀내 나는 동복 차림에다가 덥수룩한 머리인 게 어제처럼 용의복장 불량한 상태 그대로였다. 그런 녀석을 방치해서는 집단의 질서를 잡을 수 없다는 게 지론이지만 이번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아이고, 이놈의 기숙사 사감 짓도 못할 짓이다. 밤새 들락날락하며 떠드는 놈에다가, 배탈 났다고 찾아오는 놈, 물건 잃었다고 찾아오는 놈, 다른 호실에 들어가 잠자는 친구를 후려치고 도망 오다가 잡힌 놈 등등. 어디 그뿐인가? 수시로 막히는 화장실의 변기, 수시로 갈아주어야 하는 형광등, 수시로 시내 기술자를 불러들여 고쳐야 하는 고물 세탁기. 게다가, 화장실에 비치하는 두루마리 화장지는 하루나 이틀 만에 거덜 난다. 다섯 칸이나 되는 화장실에 비치되는 것들이 거의 동시에 그런다. 학교의 행정실장은 나만 보면 투덜거린다.“두루마리 화장지 비용으로 올해 기숙사 운영비가 다 나가겠습니다!”

객지의 하숙비도 아낄 겸, 교감 승진이 되기 위한 평가 하나 잘 받아보려고 자원한 고생치고는 고되기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 사감이란 짓은 올 한 해로 끝이다. 내년에는 학교 부근에서 하숙하며 설렁설렁 출근하다가…… 교감 자격 연수로 들어가야 되겠지. 어쩌다가 마누라를 안아주는 일도 버거운 늙은 놈이 이제 무슨 낙이 있나. 교감, 교장이 되는 것, 그 낙밖에 없지.

박 선생이 신세타령을 속으로 하고 있을 때 누가 문을 노크한다. 문을 열자 이번 주 화장실 청소를 맡은 녀석이 서 있다. 이 녀석은 지난주에 화장실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다가 걸려 이번 주 화장실 청소 전담이라는 벌을 받았다. 이 녀석은 왜 왔나? “무슨 일이냐?”

선생님, 변기 구멍이 하나 막힌 것 같은데요.”

다음 날 오전.

학교 교무실로 형사 두 사람이 찾아 왔다. 한 사람은이 학교 동복을 입은 아이가 웬 여자를 시내버스 쪽으로 세차게 밀치는장면이 찍힌 감시카메라 사진 한 장을 손에 쥐었고 다른 한 사람은 헌 책가방을 들었다. 헌 책가방을 든 형사가 기막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사고현장에서 이 책가방을 채증해 왔기에 그 안의 책들을 보고 용의자를 특정하려 했는데 책마다 적힌 이름이 다 다르니, 나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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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금강산을 풍악산이라고도 부른다.

 

()이가 사내를 만난 곳은 풍악산 초입인 단발령 고갯마루다. 사기그릇들을 잔뜩 얹은 지게를 지겟작대기로 간신히 세워놓고 그 그늘에 앉아 쉬려할 때 산발한 사내가 불쑥 나타난 것이다. 어쩌면 사내가 용이보다 먼저 고갯마루에 와 있다가 다가온 건지도 모른다. 용이는 지게 위 그릇들이 무겁고 조심스러워 땅만 내려다보며 고개를 올라왔으니까.

사내는 상투도 못 틀고 산발한 데다가, 길바닥에서 지내는지 옷차림도 걸레처럼 더러웠다. 짚신도 못 신은 맨발이었다. 지게 그늘에서 쉬려다가, 느닷없이 기괴한 꼴로 나타난 사내에 기겁한 용이. 하마터면 지겟작대기를 건드려 그릇들을 다 깨트릴 뻔했다.

그렇게 놀라게 했다면아이고 죄송합니다같은 사과의 말이라도 건네야 옳지 않을까. 하지만 사내는 그런 말은커녕 괴이한 소리를 내었다.

어버버!”

이 사람, 뭐하자는 거야?”

용이는 본능적으로 지게 등태에 숨겨두었던 칼을 찾아 빼들었다. 세상이 흉흉한 탓에 먼 길을 다닐 때에는 이런 칼 하나는 비치해야 했다. 사내는 서슬 퍼런 칼에 놀라 무릎 꿇고 앉더니, 두 손을 비비며 다시어버버소리를 냈다. 그제야 용이는 상황을 알아챘다. 사내는 말 못하는 벙어리였다. 용이는 칼을 다시 지게 등태 속에 넣었다. 그러자 사내 표정이 밝아지더니 이번에는 웬 작은 보따리를 두 손으로 바친다. 용이가 그 보따리를 받아 풀어보았다. 머루 다래만 가득했다. ‘숲에 들어가면 지천인 게 머루 다래일 텐데, 이걸 바친다고?’하는 어이없다는 생각에 보따리를 되돌려주려 하자 사내는 머리를 가로 저으며 용이 지게가지 끝에 붙들어 매단 전대를 가리켰다. 전대에는, 용이가 오늘 새벽 방산에서 길을 나설 때 아내가 볶아준 콩 열두 홉이 들어 있다. 사내 행동이 짐작 갔다. 보따리의 머루 다래를 드릴 테니 그 전대에 들었을 식량 좀 받아먹고 싶다는 뜻이다. ‘바꿔먹자는 것 같지만 사실 구걸하는 거나 다름없다. 사내는 그 동안 산에서 머루 다래 같은 산열매나 따 먹으며 연명하느라 지친 것일까.

이 단발령 고개를 내려가면 내금강이다. 내금강에는 절이 많다. 더러, 전란 중에 불타버린 절도 있지만 다행히 대부분의 절이 무사하며 특히 정도사(正道寺)가 예전처럼 불사를 정상적으로 유지한다기에 용이는 쌀을 얻어올 희망을 가졌다. 십 년 전, 어머님의 천도재를 정도사에서 지냈기 때문이다. 마음 푸근한 주지 스님이 용이가 지게에 지고 가는 사기그릇 오십 점 정도는 흔쾌히 받으시며, 그 값으로 공양미로 쓰이는 쌀 한 가마니를 성큼 내주실 게다.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넉넉해진 용이는 애절히 구걸하는 사내한테 인심 한 번 쓰기로 했다. 전대를 풀어 볶은 콩 두 홉쯤 꺼내 건넨 것이다. 사내는 얼른 땅바닥에서 일어나면서 두 손으로 볶은 콩들을 받더니 이내으직으직씹어 먹기 시작했다. 볶은 콩이 얼마나 고소하던지, 애절했던 사내의 표정이 순식간에 행복해졌다. 용이는 어이없어 하다가 보따리에서 머루 서너 알을 꺼냈다. 하지만 쉰내에 먹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자신도 전대에서 볶은 콩을 한 홉쯤 꺼내 입안에 털어 넣고 사내처럼 으직으직씹어 먹기 시작했다. 이제 전대에 볶은 콩이 아홉 홉쯤 남았다.

사기장은 나라에서 명하는 대로 도자기들만 잘 구워내 바치면 농사 지어먹을 만큼의 녹봉도 나오는 안정된 업이었다. 하지만 근년 들어 왜구들의 침략이 잇따르고 이성계 장군의 위화도 회군이라는 큰 사건까지 나자, 나라가 몹시 어지러워지면서 사기장의 생계마저 흔들려버렸다. 관청의 명대로 도자기들을 구워 바쳐도 녹봉이 제대로 내려오지 않기 시작한 것이다. 용이와 아들이 사기그릇 백 점을 반씩 나누어 지게들에 지고 아비는 풍악산 정도사로, 아들은 개경으로 각기 집을 떠난 건 그 때문이다.

처음에는 가는 길이 비교적 편한 개경은 용이가 가고, 높은 단발령 고개를 넘어야 하는 정도사에는 아들이 가는 것으로 계획했었다. 하지만 집 앞에서 출발하기 직전에 길을 바꿨다. 정도사 주지 스님을 만나 뵙고 사기그릇들을 사 달라는 부탁을 하려면 아무래도 나이도 있고, 안면도 있는 자신이 가는 게 더 좋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부처님께 공양드릴 때 쓰이는 그릇들이야 귀한 놋그릇이지만 스님들이 먹고 마시는 데 쓰이는 그릇들은 목기가 고작일 터. 이번에 갖고 가는 사기그릇들이야말로 그런 스님들의 품격을 한 단계 높여주는 물건이 될 게다. 용이는 무거운 사기그릇들을 지게에 지고 이 높은 단발령 고갯마루를 향해 겨우겨우 올라오면서 그런 희망적인 생각들로 몸의 고통을 참았던 것이다.

 

사내가 볶은 콩 두 홉을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더니, 자세를 가다듬고서 땅바닥에 엎드려 큰절 한다. 비렁뱅이치고는 인사성이 발랐다. 고갯마루에서 받는 늦가을 햇살이 따갑다. 용이는 지게가 드리운 그늘에 혼자만 앉아 쉬기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지게가지 위에 높이 얹은 그릇들 덕에 긴 그 그늘이 최소한 두 사람은 수용할 듯싶다. 용이는 땡볕을 받고 있는 사내한테 말했다.

이 그늘로 들어오시게.”

사내는 멍청한 표정으로 용이를 볼 뿐이다. ‘, 이 사내가 말소리를 듣지 못하는 탓에 벙어리가 된 거겠지.’뒤늦은 생각에 용이는 사내의 한 손을 잡아 지게 그늘 안으로 끌어들였다. 비로소 알았는데 사내는 왼쪽다리마저 절고 있었다. 까치집 같은 산발에 넝마 같은 차림에 다리마저 절다니, 어쩌다가 이런 딱한 꼴이 됐을까.

한동안, 왜구들에다가 홍건적들까지 쉴 새 없이 쳐들어와 약탈과 살상을 일삼다가 격퇴됐었다. 사내가 그 때 식구들을 모두 잃고 몸마저 상한 채 유랑민이 된 걸까? 용이는 자신보다 더 딱해 보이는 사내를 보며 왠지 서글퍼져 저잣거리에서 떠도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얄라.

살어리 살어리랏다 바다에 살어리랏다.

나문재 굴 조개랑 먹고 바다에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얄라.”

 

본래 용이네 집안은 남해 바닷가 사기장이 마을에서 살았다. 사기장이 마을은, 도자기를 구워 나라에 바치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기장들의 공동체다. 용이의 아버님은 마을에서 가장 지체 높은 지유(指諭)’자리를 맡았다. 도자기도 굽지만 다른 사기장들도 통솔하는 자리다. 물론 나라로부터 받는 녹봉도 마을에서 가장 많았다. 용이 아버님은 도자기 만드는 일을 마치면 언제나 물 빠진 갯벌에 나가 굴도 따고 낙지도 잡았다. 미천한 집 가장이 바랄 게 뭐가 있던가. 그저 식솔들 입에 거미줄 칠 일 없이 사는 것 하나 바랄 뿐이다. 행복한 용이네 집에 불행이 닥친 것은 어느 여름 날 배 타고 와 습격한 왜구들 때문이었다. 왜구들은 웃옷만 걸친 기괴한 차림으로 긴 칼을 휘두르며 사기장 마을을 도륙 냈다. 식량은 말할 것도 없고 도자기들까지 모조리 빼앗아 가 버렸다. 반항하는 양민은 그 자리에서 칼로 베 죽였는데 그 때 용이의 아버님도 참변을 당했다. 그 후로 마을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마음 편히 도자기를 구울 수 있고 토질도 적합한, 다른 좋은 땅을 찾아 헤매다가 정착한 데가 바로 방산이다. 방산 땅에는 도자기 재료로 쓰는 흙 중 가장 좋은 백토가 곳곳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너무 어렸던 탓에 도자기 일도 제대로 배우진 못한 용이었지만 아버님의 유업을 이을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이십여 년이 흘렀다. 그 동안 용이는 마음씨 고운 옆집 처녀와 결혼해 아들을 낳았고 아버님처럼 지유도 되었다. 하지만 지유가 된들 뭐하나. 녹봉도 끊기다시피 돼, 먹고 살 길이 아득한데…….

 

용이는 사내와 그쯤에서 헤어질 생각이었다. 헤어지고 말고도 없었다. 그냥 용이가 먼저 지게를 다시 지고 내금강 쪽으로 단발령 고개를 내려가면 되었다. 그러면 사내는 반대방향인 두타연 쪽으로 내려가든지, 아니면 고갯마루에 남아 있다가 만나게 되는 사람들한테 음식동냥을 하든지 할 게다.

막상, 지게 지고 일어나 고개 아래쪽으로 발길을 내디디려던 용이가 생각을 바꿨다.

어이, 나 좀 보시게.”

사내는 소리를 못 듣는 탓인지 어리둥절한 낯이다. 하는 수 없이 용이는 등에 진 지게를 다시 땅에 내려놓은 뒤 강아지한테 하듯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사내가 다리를 절면서 다가왔다. 용이는 손짓발짓으로뒤에서 이 지게가지를 붙잡으며 고개 아래까지 따라와 달라. 그러면 전대에 든 볶은 콩을 다 주겠다는 뜻을 전했다.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용이가 다시 지게를 지고 비탈진 고갯길을 내려가는데 과연 사내가 뒤에서 지게가지를 붙잡아주지 않는다면 사달이 났을 것 같다. 작은 지게에 사기그릇 오십 점이라니 욕심이 과했던 걸까. 비탈길 아래쪽으로 쏠리려는 그릇들 무게 중심 탓에 용이의 지겟작대기가 연실 후들거렸다. 고개는 오를 때보다 내려갈 때가 더 위험하다더니 딱 맞는 말이다. 용이는 고개의 사분지 일쯤 내려오다가 결국 다시 지게를 세웠다. 물건들이 높이 얹힌 지게를 비탈길에 세우는 일만큼 어려운 일이 어디 또 있을까. 뒤의 사내가 두 팔 벌려 지게가지에 얹힌 그릇들을 안아주었기에 가능했다.

목덜미고 겨드랑이고 용이의 몸은 땀범벅이 되었다. 용이는 소매자루로 땀을 닦으며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내도 따라 앉으며 둘 사이에 적막이 흘렀다. 하긴, 애당초 벙어리인 사내와 무슨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 적막하게 앉아 있는 두 사람의 눈앞으로 그림같이,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이 가을 햇빛을 받아 하얀 백옥들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 아래로 솟아 있는 검푸른 소나무 잣나무 숲은, 마치 백옥 보석들을 떠받쳐주는 검푸른 색 비단 같다. 저 일만 이천 봉에 허연 운무라도 피어나면 신선들이 바둑 두며 천 년을 보낸다는 선경이 따로 없을 것이다.

이 고개의 전설이 용이한테 떠올랐다.

신라왕조 말기 때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이 천 년 사직을 왕건에게 고스란히 바치고자 했다. 이를 반대했던 마의태자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측근들을 데리고 금강산으로 떠났다. 이 고개에 이르러 일만 이천 봉의 황홀한 풍경을 보게 되자, 마의태자는 나라를 다시 일으키려 했던 마음이 덧없어졌다.‘신선세계에 들어왔으니 다시는 속세에 나가지 않겠다며 당신의 머리칼들을 다 잘라버리고 말았다. 그 후로 이 고개를 단발령(斷髮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저 봉우리들 중 가장 높은 비로봉에서 능선을 따라 북쪽으로 오 리쯤 내려가면 마의태자 묘도 있다니, 정말일까? 용이가 이런저런 생각도 하며 눈앞의 선경을 즐기는데 문득 무슨 소리가 고개 아래쪽에서부터 들려왔다. 일정하게 반복되는따그닥따그닥소리. 분명, 말들이 달려오는 소리였다. 용이는 가슴이 섬뜩해져 자기도 모르게 주저앉은 채로 다리가 후들거렸다. 전란이 그쳤나 했는데 다시 시작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우선, 길 복판의 지게를 다른 데로 옮겨놓고 피신하려는데 도와 줄 사내가 보이지 않았다. 놀랍게도 용이보다 먼저 말발굽 소리를 듣고 피신한 것 같다.

귀 먹은 자가 어떻게 나보다 먼저 말발굽 소리를 들었지?’

용이는 지게를 질 새도 없이 그대로 질질 끌어다가 길가 숲속으로 옮겼다. 목발이 땅바닥의 튀어나온 돌에 걸려 하마터면 지게가 넘어갈 뻔했다. 말발굽 소리들이 점점 더 커지더니 살벌한 창끝이 보이고 뒤이어 그 창대를 든 병사의 투구가 보였다. 누런 말 타고 나타난 그 병사 뒤로 검은색 복두를 쓴 사람이 잿빛 말을 탄 모습으로 따르고 있었다. 앞에서 창을 들고 가는 병사는 뒤의 복두를 쓴 사람을 호위하는 역할인 것 같았다. 이윽고 히이잉!’하는 말울음 소리들에 이어 두 사람의 모습이 온전하게 가까워졌다. 병사는 눈매가 사나웠고 복두 쓴 사람은 긴 수염을 날렸다. 길가 숲속에 숨은 용이는 제발 별 일 없기를 부처님께 빌었다. 말들의 거친 숨소리와 옷자락들의 펄럭소리가 한껏 커지더니 다시 작아져갔다.

그들이 일으킨 뿌연 흙먼지가 가라앉은 뒤에야 용이는 숲에서 조심스레 나왔다.‘따그닥 따그닥말 타고 고개를 올라가는 그들의 뒷모습이 멀어져간다. 아무래도 개경으로 달려들 가는 것 같다.

나라에 무슨 일이 생겼나?’

나중에 알았지만 그들은 이성계 장군의 명을 받고 이듬해 봄, 비로봉에 봉헌할 불사리갖춤 일로 장안사(長安寺)에 다녀가던 중이었다. 이성계 장군이 누구이던가. 왜구와 홍건적을 잇달아 물리치며 온 백성의 구세주처럼 떠오른 대단한 장군이 아니던가. 대국 명나라를 치라는 무리한 명을 거부하며 벌어진 위화도 회군 성사 후, 나라의 새로운 권력으로 떠오른 지 2년째 되는 해 늦가을이었다. 이성계 장군은 자신의 주도로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음을 불사리 봉헌이라는 최고의 제의를 통해 온 백성에게 선언하고 싶었다. 정도전 같은 성리학 선비들을 만나며 역성혁명을 준비한 장군의 마음 한 편에, 이천 년 전 석가모니께서 남긴 불경말씀이 여전했다는 건 참 놀라운 일이 아닐까.

말발굽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다. 다시 지게를 지고 출발하려는데 사내가 여전히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잠시 궁리하던 용이는 우선 눈에 뜨이는 땅바닥의 돌멩이들을 여러 개 주운 뒤, 바위 뒤고 숲이고 사방으로 마구 던졌다. 깃털 화려한 장끼 한 마리가 진달래 숲에서푸드득!’나타나 멀리 날아가고 뒤이어어버버!’소리치면서 싸리나무 숲에서 사내가 기어 나왔다. 무서움이 여전한 표정으로 말이다.

뭘 그리 무서워해?”

사내는 용이가 하는 말을 여전히 알아듣지 못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렇다면 아까 그들이 멀리서 말 타고 달려오던 소리는 어떻게 용이보다 먼저 들었는지, 영 앞뒤가 맞지 않는 벙어리 사내였다. 다시, 용이가 지게작대기를 짚으며 지게지고 일어서자 사내가 뒤에서 지게가지들을 붙잡아주었다. 조심조심 비탈진 고갯길을 내려가는데 땀은 다시 나지만 주위는 서늘해졌다. 하늘 한복판의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탓이다. 미시(未時)에서 신시(辛時) 사이쯤 되지 않을까. 늦가을 해는 짧아지는 해다. 정도사가 머지않았지만, 도착한 뒤 그릇 파는 일뿐만 아니라 스님이 힘들어 미뤘던 일들도 도와 드리려면 잠시도 지체해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고개를 다 내려와서는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폭이 마흔 자는 될 냇물이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그렇기도 하고 밀삐에 어깨 살갗이 다 벗겨졌는지 몹시 쓰라렸다. 갈증 나는 목도 축여야 했다. 지게를 일단 냇가에 세워놓고 용이는 엎드린 자세로 흐르는 냇물을 훌쩍훌쩍 들이켰다. 오장육부가 시원해졌다. 그런 뒤 웃옷을 벗어, 벗겨진 어깨의 살갗 부분을 찬 냇물로 여러 번 씻었다. 이래놓아야 덧나는 걸 방지한다.

냇물이 얼마나 맑은지 바닥의 조약돌들이 남김없이 다 보였다. 그런데 흐르는 물살에 모난 데가 다 다듬어져 동글동글한 모양들뿐이다. 용이는 짚신들을 벗고 맨발로 물속의 조약돌들을 한 번 밟아보았다. 짐작대로 여간 매끄러운 게 아니었다. 그냥 짚신을 신고서 간다면 조약돌에 미끄러지는 불상사를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냇물을 건넌 뒤 물에 젖은 축축한 짚신으로 길을 걸을 걸 생각하니, 짚신은 짚신대로 쉬 망가져버리고 발이 짓물러질 게 뻔해서 영 내키지 않았다. ‘집을 나설 때 짚신 한 켤레쯤 여분으로 챙겼더라면 좋았을 것을!’용이는 한탄했다.

게다가, 냇물이 어떤 데는 검푸르게 깊고 어떤 데는 연한 빛으로 얕아서 고른바닥도 못 됐다. 일정한 간격으로 큰 돌들을 놓아 만든 징검다리가 눈에 뜨이긴 하지만 사기그릇 가득 얹은 지게 지고 가기에는 위험천만이다. 천생, 고개를 내려올 때처럼 사내가 뒤에서 지게가지를 붙잡아주며 내를 건너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사내가 또 보이지 않았다.

이 비렁뱅이자식이 그 새 어디 갔어?”

다리를 저니 멀리 달아나지는 못 했을 것 같다. 용이는 근처 떡갈나무의 굵은 가지 하나를 꺾어들었다. 그것을 휘두르며 부근 숲을 뒤졌다. ‘후다닥!’소리가 난 곳을 봤더니 노루였다. 송아지만 한 노루가 기겁해서 겅중겅중 숲속 멀리 달아나고 있었다. 웃옷도 채 걸치지 못한 꼴로 숲을 뒤지느라 용이의 상반신은 나뭇가지나 풀잎에 여기저기 긁혔다. ‘이 자식을 놓쳤구나!’체념하며 숲을 나오려는데 가까운 바위 뒤에서 사내가 두 손을 싹싹 비비며 겁먹은 얼굴로 나타났다.

상반신의 긁힌 상처들을 냇물에 여러 번 씻고 난 용이는, 지게를 지고 일어서는 대신 등태 속의 그 칼을 다시 빼들었다. 길이가 한 자밖에 안 되지만 날이 잘 서 있다. 백자를 열 점이나 대장장이한테 주고 장만한 거다. 사내가 듣거나 말거나 용이는 사나운 낯으로 말했다.

자네 말이야, 내가 그만 따라와도 된다고 할 때까지는 나를 따라와야 해. 만일 또 제멋대로 달아났다가는 그 때는 이 칼로 죽여 버릴 거다.”

고개를 다 내려가면 전대의 볶은 콩들을 다 주겠다고 한 약속은 얼버무려졌다. 그래서는 안 되지만 세상은 강자가 하자는 대로 약자가 순종하며 돌아가기 마련 아닌가.

이 냇물을 건너고 나면, 정도사까지 오 리쯤 된다. 십 년 전 천도재를 지내려고, 단발령 고개 너머에서 가장 가까운 절을 찾다가 정도사를 만난 것이다. 사실상 오늘 목적지에 거의 다 왔다. 그렇다면…… 이 냇물만 건너면 사내를 풀어주자. 남은 볶은 콩들도 그 때 주자. 벙어리가 다리를 절면서 여기까지 도와준 것만 해도 꽤 고맙지 않나?

사실 말이 오 리지, 산길 오 리를 혼자 무거운 지게를 지고 갈 걸 생각하면 쉬운 결정이 아니다. 하지만 용이는 다시 좋게 마음먹었다. 하긴 냇물이 거울처럼 맑고, 붉거나 노랗거나 한 단풍들이 지천으로 어우러진 아름다운 가을 풍경 속에서 마음을 모질게 먹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용이는 벗은 짚신 켤레를 새고자리에 매단 뒤 바지 대님을 풀었다. 바짓가랑이를 걷어붙이고는 지게를 지었다. 사내의 도움을 뒤로 받으며 냇물로 조심조심 들어섰다. 얼음장같이 찬 냇물에 발가락들이 다 얼어 떨어져버릴 것만 같다. 참아가며, 매끄러운 조약돌들을 조심조심 밟으며 나아간다. 연한 물빛으로 얕은 데는 걷기가 괜찮지만 검푸른 물빛으로 깊은 데는 허리춤 가까이 냇물에 젖어, 사내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고생깨나 했을 게다.

내를 거의 다 건너는가 싶었는데 긴장이 풀어진 탓일까, 결국 사달이 나고야 말았다. 지게 뒤의 사내가 바닥의 매끄러운 큰 돌에 휘청미끄러지면서 지게가지에 얹힌 사기그릇 스무 점 가까이가 물에 떨어져 버렸다. 물 깊은 곳이었다면 충격이 덜해 덜 상했을 텐데 얕은 데라 바닥의 조약돌들에 세게 부딪치며 대부분 금이 가거나 깨져버렸다. 용이가 몸을 재빨리 움직이지 않았더라면 큰 일 날 뻔했다. 용이는 본능적인 동작으로 지게를 내려놓음과 동시에 몸을 돌려 지게가지에 남은 그릇들을 두 팔로 안았다.

냇물에 자빠지며 입은 저고리가 반 가까이가 벗겨진 사내가 처연한 낯으로 용이를 올려다보았다. 그 때 사내 가슴에 검게 문신된 한 글자이 용이의 눈에 뜨였다. 섬광처럼 사내의 정체를 깨달았다. 사내는 왜구였다. 용이는 두 팔로 안은 그릇들을 냇가에 내려놓고는 지게 등태에서 칼을 빼들었다.

이 개새끼!”

다스케테! 다스케테!”

두 손을 비비며 연실 외치는, 애걸하는 표정으로 봐살려 달라는 왜놈 말인 듯싶다.

이 개새끼야. 우리 아버님이 니네 칼에 돌아가셨어. 이 원수 놈의 개새끼!”

도우조 다스케테! 도우조 다스케테!”

어떻게 왜구 새끼가 풍악산 일대를 떠돌고 있었을까. 약탈하러 동해안에 왔다가 다리를 다치면서 낙오된 놈이 아닐까. 용이가 쳐든 칼 앞에서 이제는 삶을 체념한 듯 두 눈을 감고서 합장 자세로 물속에 앉아 있는 사내였다. 그 때 잠자리 한 마리가 부근 하늘을 맴돌다가 용이의 높이 쳐든 칼끝에 무심히 내려앉았다 

​*   *   *  

   

입춘을 보름 지났지만 겨울 한기가 남아 있다. 어쩌다 핀 들꽃들도 큰 것은 없고 자잘한 것들뿐인데, 낮의 햇빛은 화사하지만 밤만 되면 싸늘한 추위에 꽃잎들을 쉬 오므려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용이는 가마 일을 서둘렀다. 백자사발들을 하루라도 빨리 만들어놓아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아서다.

백자사발은 백토가 있어야 만들 수 있다. 백토 캐내는 일을 아들이 맡았다. 겨우내 언 땅에서 캐내는 일이라 여간 힘들어 보이지 않는다. 용이는 아들이 안 돼 보이지만 조금도 돕지 않았다. 녀석 스스로 받는 벌이기 때문이다. 녀석은 지난 해 가을, 개경으로 지고 가 팔고 오라 했던 사기그릇 오십 점을 길가 주막의 여자에게 홀려 닷새 간 잠자리 값으로 다 넘겨버리고는 추레해진 꼴로 집에 돌아왔었다. 그 때, 용이 마음 같아서는 당장 집에서 내쫓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녀석의 나이 벌써 스물. 아비처럼 열여섯 나이에 장가갔더라면 자식을 둘쯤은 낳았을 게다. 빈한한 집안 형편 탓에 장가를 못 보낸 아비에게도 죄가 있지 않겠는가, 하여 침묵으로 아들의 허물을 반쯤은 용서했다.

백토는 캐어낸 그대로 사용할 수 없다. 녀석은 캐낸 백토를, 미리 파 놓은 물웅덩이에서 수십 번 체로 걸러 불순물 하나 없는 고운 백토로 바꾸는 일까지 이어나갔다. 차디찬 웅덩이물이라 녀석의 손과 발은 벌겋게 터 버렸다. 그 험한 고생 보름여 만에 다섯 수레 분이나 곱디고운 백토를 작업장 한 편에 마련해 놓았다. 반쪽얼굴이 돼버린 아들 녀석의 등을 그제야 용이는 쓰다듬어주었다. 아들은 고개 숙인 채 눈물을 뚝뚝 흘렸다. 부자가 그러고 있는 작업장은 네 기둥 위에 초가지붕만 얹혀있는, 사방이 트인 공간이다. 가까운 데서 부자의 정겨운 모습을 훔쳐본 어미는 돌아서서 흐느꼈다.

본격적으로 백자사발과 향로를 만드는 일이 시작되었다. 용이가 하는 작업을 아들이 곁에서 거들며 부자가 함께 나선 것이다.

백토에 점성이 있는 다른 지역의 흙을 일정 비율로 보탠 뒤, 물을 줘가며 주물러서 차지게 반죽했다. 이것이 첫 번째 단계다. 차진 반죽덩이를 물레에 올려놓고 돌려가며 사발과 향로가 될 수 있는 기본형태들을 만들었으니, 두 번째 단계다. 세 번째 단계는 이 기본형태들을 부자가 손으로 섬세하게 매만져, 사발과 그 뚜껑 및 향로 모양으로 빚어낸 것이다. 이것들을 그늘에서 잘 말리는 일이 네 번째 단계인데 아직은 추운 날씨 탓에 본래 열흘 정도면 충분할 게 보름이나 걸렸다. 작업장이 사방이 트인 곳이라, 마르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통풍은 걱정할 게 없었다.

충분히 잘 마른 것들을 수레에 조심조심 실었다. 사이사이마다 볏짚을 풀어, 혹시 부딪치는 일이 생겨도 그 충격이 흡수되도록 했다. 아들이 수레 앞에 서서 손잡이를, 아비는 수레 뒷부분을 두 손으로 잡았다. 작업장에서 가마가 있는 데까지는 마흔 보쯤 된다.

출발하거라.”

네에.”

짧은 거리임에도 수레가 가는 길 가에는 냉이들이 파릇하고 고들빼기가 연보라색 꽃을, 씀바귀가 노란색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가마 앞에 도착했다. 이제는 초벌구이 차례다. 모름지기 자기는 흙이 불을 만남으로써 이뤄지는 예술이다. 용이는 가마 안에 들어가, 밖에서 아들이 건네는 것들을 하나하나 받아 불과 잘 어우러지도록 정연하게 쌓았다. 그런 뒤, 소나무장작들로 빈 공간을 빼곡하게 채우면서 가마 밖으로 나왔다. 마침내 가마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뒤로 물러선 용이를 대신해 아들 녀석이 아궁이와 도수리구멍들을 통해 가마 안의 불길을 살펴가며 장작들을 보탰다.

불기운이 강해져 가마 밖까지 열기가 뜨겁게 전해졌다. 용이는 이 때부터 아들을 쉬게 하고 혼자 가마를 지켰다. 자신의 오래된 가마 불 감각이 절대로 필요한 때가 온 것이다. 달라져가는, 가마의 독특한 흙냄새만으로도 불의 세기를 느끼는 용이. 불이 너무 강했다가는 가마 안의 작품들이 찌그러지거나 깨지거나 옆의 것과 붙어버리거나 한다. 물론 약해서도 안 된다. 아주 적당하게 뜨거운 불을 유지해야 한다. 마치 양 극단을 피하라는 부처님의 중도 (中道) 말씀처럼.

지난가을, 용이는 사기그릇을 오십 점이나 지게에 지고 내금강 정도사로 가다가 냇물에서의 사고로 반 가까이 깨뜨려버렸다. 그래도 주지 스님이 남은 여남은 그릇들을 쌀 한 가마니 값으로 그냥 쳐주었다. 게다가, 스님은 용이한테 장안사 신관(信寬) 스님을 찾아뵙도록 주선하여 쌀을 두 가마니나 별도로 더 얻게 해 주었다. 잇달아 흰 쌀을 세 가마니나 얻게 된 일도 놀랍지만 더 놀라운 일이 있다. 용이가 장안사로 생면부지인 신관 스님을 뵈러 갔을 때 일이다.

어둑할 때에 장안사에 도착해 사천왕문으로 들어서던 용이는 기절초풍할 뻔했다. 사천왕 못지않게 무섭게 생긴, 눈썹이 시커먼 스님 한 분이 염주를 손으로 매만지며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방산에서 오시는 보살님. 어서 오십시요.”

당황한 용이는 정도사 주지 스님이 적어주신 소개문도 꺼내 보이지 못한 채 합장하며 고개 숙였다.

소승은신관이라 하옵니다. 아무 말씀하시지 말고 조용히 소승을 따라오십시요.”

신관 스님은, 불경 외는 소리가 나는 대웅전 뒤편의 한 요사(寮舍)로 용이를 안내했다. 다른 사람은 없는 방에서, 스님은 생김새와는 다르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름이 아니고…… 송헌시중께서 사람을 보내 전하시기를, ‘명년 4월에 금강산 비로봉에 불사리를 봉헌하려는데 그에 필요한 백자사발과 향로를 장안사에서 해결해 주십시요.’하셨습니다.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소승은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잖아도 며칠 전 미륵불께서 제 꿈에 나타나셔서여기서 멀지 않은 땅 방산이라는 데에서 한 사기장이 불원간 장안사로 찾아올 것이니 사리갖춤 백자 일을 부탁하면서 그 값으로 공양미 두 가마니를 주거라.’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송헌시중이란 이성계 장군을 가리키는 말이다. 용이는 놀랍고도 감사한 마음에 뜨겁게 눈물 흘리며, 하신 말씀대로 사리갖춤을 위한 백자 생산을 약속드렸다. 부담스런 마음고생이 만만치 않겠지만 비천한 사기장에게 얼마나 영광된 책무이던가. 하물며 식솔들을 편히 배부르게 할 백미를 두 가마니나 더 얻게 됐으니.

신관 스님은 말씀을 이어나갔다.

이번에 백자들을 만드시게 될 때에 마을 사람들한테 송헌시중 얘기를 하셔서는 안 됩니다. 그저 금강산 장안사에서 귀하게 쓸 백자를 주문한 거라고만 말씀하면 될 듯싶습니다. 잘못 소문이 났다가는, 그분이 악한 무리들로부터 위해를 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도탄에 빠진 만백성을 구하실 분입니다. 허허허……. 모쪼록 힘이 많이 드시겠지만 보살님 식솔의 도움만으로 백자를 만들어주시기 당부 드립니다. 그래야 쓸데없는 낭설이 항간에 퍼질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말씀이라고 감히 제가 거스르겠습니까, 스님.”

인연에 따라 심용 보살님과 소승은 한 배를 탔습니다.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가마의 초벌구이나 재벌구이는 아낙네가 겪어야 하는 산고나 다름없다. 그럴 때 지아비는 곁을 떠나서는 안 된다. 용이는 가마 불을 지키며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고 있다.

아들 녀석은 오랜만의 여유에, 가마 부근 바닥에 깔아놓은 이불에서 마냥 퍼질러 자고 있다. 추운 밤 날씨임에도 이불을 냅다 걷어차기까지 하며 잔다. 용이가 그런 아들의 이불을 끌어다 덮어주며 다시 가마 불을 살피려할 때 하늘에서 백토가루를 닮은, 때늦은 싸락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금강산에도 눈이 내리고 있을까? 그 비렁뱅이 왜구 놈이…… 추운 지난겨울을 잘 지냈을까?’

냇물에서 놈을 단 칼에 죽일 수 있었건만 용이는 칼을 거두고 말았다. 살아생전에 사람의 피를 칼에 묻히는 일 없이 마음 편히 살고 싶었다. 그 날, 남은 사기그릇들을 다시 지게가지에 얹고 떠나는 용이 뒤에서 사내는 연실 아리가또우 고자이마스!’라 외쳤다. 그 후, 잇달아 용이한테 흰쌀이란 귀한 양식이 세 가마니나 생기고 비로봉에 봉헌하는 사리갖춤 일에 미천한 사기장이로서 한 역할 하는 영광까지 얻게 된 것은 그 냇물에서 하찮은 왜구일지언정 따듯한 자비심을 베풀었기 때문이 아닐는지.

 

먼동이 트기 전에 싸락눈이 그쳤다. 무겁게 뜬 해가 중천에 자리 잡을 때쯤에서야 초벌구이가 끝났다. 용이는 아들한테 피해 있으라.’ 당부한 뒤, 꽉 막아두었던 아궁이의 흙부터 긴 작대기로 부숴버렸다. 순간 뜨거운 열기가 가마 안에서 밖으로화악!’ 뻗쳐 나왔다. 다른, 막아뒀던 도수리구멍들의 흙도 다 부숴버리면서 가마 주위는 한동안 뜨거운 열기가 맴돌았다. 용이가 작대기를 땅바닥에 내려놓으며, 싸리비를 들고 선 아들한테 말했다.

뒷일은 네게 맡기마.”

네에 아버님. 그런데 제가 길의 눈을 비로 쓸기는 했는데…… 조심하셔야 합니다.”

뒷짐 지고 돌아선 용이를, 아내가 달려와 부축했다. 비로 눈길을 쓸어놓긴 했지만 아무래도 미끄러운 데다가, 잠까지 쏟아지는 지아비가 혼자 걸어오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내외는 조심조심, 칠십 보쯤 떨어진 집까지 눈길을 함께 걸어갔다. 사립문 따위는 달 필요가 없는, 마음씨 착한 사람들의 방산 마을이다. 용이는 편히 집 마당으로 들어선 뒤 아내한테 말했다.

고생 많구려.”

무슨 말씀을…….”

용이는 아내가 방문을 열어주자마자 그대로 방바닥에 대자로 누워버렸다. 코를 드렁드렁 곯으며 밀린 잠에 빠졌다. 아내는 지아비의 저고리와 바지를 조심스레 벗기고는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녀는 난생처음으로 식량걱정 하나 없이 지난겨울을 났다. 흰 쌀이 세 가마니나 집에 들어오다니, 이게 꿈이 아닌가 싶어 자신의 손끝을 한 번 깨물어보기까지 했었다. 흰 쌀뿐인가. 소나무장작들까지 다섯 수레 분이나 집에 들어왔다.

이런 것이 다, 지난가을 장안사에서 보내준 것이다. 지아비가 장안사에서 하룻밤 묵은 뒤 빈 지게만 지고 편히 귀가한 다음 날, 장안사 젊은 스님들이 쌀 세 가마니와 많은 소나무장작들을 수레 둘에 나눠싣고 여기 집 앞까지 찾아와 내려놓고 돌아갔다. 첫눈이 내리기 전까지 스님들은 세 번이나 더, 소나무장작들을 수레로 실어다 주었다. 그녀는 아직도 지난가을의 일만 떠올리면 자기도 모르게 합장한다.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뻐꾹 뻐꾹 뻐꾹……

방산 마을 뒷산에서 뻐꾸기가 울었다.

용이는 백저포로 갈아입고 조건을 쓴 뒤 마당으로 나왔다. 마당 한복판에 깔아놓은 돗자리에 앉아, 품안의 사발을 꺼내놓았다. 이 사발은 명문을 새길 대상으로 선정된 두 점 중 하나다. 어제까지 용이는 이틀 간, 선정된 사발 두 점의 명문 새기기에 매달렸다. 한 점은 완료했으나 다른 한 점은지금 품에서 꺼내놓은 이 사발은 반쯤 하고 말았다. 왜냐면 이 사발의 굽에 새겨야하는 마지막 명문이 용이로서는 아주 중요한 내용이라서, 지친 몸과 정신으로 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물론 신관 스님이 한지에 붓글씨로 적어 인편에 보내주신 명문이다.

사실, 명문을 새길 사발 두 점을 선정하는 데만도 사흘이 걸렸다. 초벌구이를 마친, 가마에서 나온 백여 점의 사발들을 하나하나 살핀 끝에 스무 점을 일단 추렸고 그 중 명문을 새길 두 점을 다시 추린 것이다. 명문을 새기는 대상에서 제외된 열여덟 점의 사발도 나중에 함께 유약을 칠해 가마에 넣어 재벌구이를 거치면, 빛나는 백자사발이 스무 점이나 탄생한다.

지금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아들은 재벌구이를 준비하느라 가마에 가 있고 아내는 마을에서 혼자 사는 가난한 노인네 집에 가 있다. 쌀도 퍼다 드리고 부엌일도 돕고 그러는 것 같다.

화사하게 떨어지는 봄 햇살들을 한 번 담아보려는 것같이 용이는 눈앞의 사발을 두 손으로 조용히 쳐들어보았다. 무늬 하나 없기에 오히려 수많은 무늬가 담겨 있는 듯 여겨지는 깊은 담백함과…… 세속의 모든 욕심들이 다 씻겨나가고 따듯한 마음 하나 남은 듯한 순백함의 결정체였다.

사발의 둥근 굽이 보이게 뒤집어서 내려놓았다. 방산 사기장의 명성을 수백 년, 아니 수천 년 남기는 작업에 들어갈 참이다. 용이는 떨리는 가슴을 심호흡으로 가라앉혔다. 이윽고 조각칼로 천천히 그 굽에 한 자 한 자 명문을 새겨나갔다.

辛未四月日防山砂器匠 沈竜 同發願比丘 信寬

열아홉 자를 다 새기고 나자 눈부신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이 갑자기 눈앞에 선하게 떠올랐다. 용이는 그 까닭을 좀체 헤아리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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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과 우리는 강을 사이에 두고 맞선다.

강폭은 그들의 얼굴이 노란 콩알처럼 보일 만큼 넓다. 그래도 그들을 늘 보게 되자 특유의 동작이나 몸집이 눈에 익으면서 구별이 가능해졌다. 그 쪽에서 활 잘 쏘는 놈이 나서면 곧바로 우리 쪽에서도 그런 자가 나서서 응사할 수 있는 게 그 때문이다.

그들과 우리는 자기 편 강나루를 지킨다. 많은 사람과 물자가 오갈 수 있는 강나루는 전략적 요충지일 수밖에 없다. 본래는 사절들의 왕래를 위해 만들어졌다지만 유사시엔 피비린내 나는 첫 장소가 될 것이다. 삼십 년 전의 전란도 그들이 우리의 이 강나루를 야습하며 비롯되었다. 노략질하러 쳐들어온 그들을 다시 강 건너로 패퇴시키기까지 일 년이나 걸렸단다. 그 후론 정기적인 사절들의 왕래마저 단절되고, 증강된 병력으로 강나루를 지킨다.

우리는 밤낮으로 경계를 선다. 환한 낮은 물론, 밤에도 횃불들 밝혀놓고 강 건너 나루를 경계한다. 그들도 매한가지다. 밤마다, 우리와 거의 같은 수의 횃불이 시뻘건 눈초리들처럼 떠 있다.

날이 밝으면 그들이 먼저 요상한 피리를삐리삐리분다. 우리는 북을쿠당쿠당쳐서 대응한다. 그들이 화살을 쏘면 우리도 비슷한 수의 화살을 쏜다. 심지어, 우리가 엎어놓았던 배들을 바로 놓고 손질하면 그들도 덩달아 자기네 나룻배들을 갖고 법석 떤다.

날마다 반복되는 일이다. 지루하다.

당장이라도 배타고 건너가 창칼 한 번 부딪치고 싶다. 복무연한인 이 년 내내 적을 지켜보다 끝날 것만 같아서다. 그래도 쳐들어가라!’는 임금님의 명이 없는 한 어쩔 수 없다. 삼십 년 전, 일 년 간의 전란이 끝난 뒤 그 후유증으로 온 나라가 십 년 가까이 고생한 뒤로는 임금님은 이 강나루를전쟁을 사전에 방지하는 보루로 여기는 것이다. 그들이 먼저 쳐들어온다면 모를까 이 지루한 경계가 쉬 해제될 것 같지 않다.

그들은, 삼십 년 전 도발한 전란의 보복이 반드시 있을 거라 판단했는지 강 건너 우리에게 한 치의 허점도 보이지 않으려 한다. 오히려 자기네가 먼저 피리를 불고 활을 쏘고 욕을 퍼부음으로써 긴장을 조성해 간다. 그렇다고 강을 건너 쳐들어오는 것도 아니다. 그들 역시 전쟁의 사전 방지에 주안점을 둔 게 아닐까.

강물은 검푸르게 흐른다. 그 모습이, 엄청나게 큰 검푸른 구렁이가 꿈틀거리며 가는 것 같다. 바람이 불어 허연 물결이 일면, 마치 구렁이의 비늘들이 허옇게 서는 것처럼 보이는 건 그 때문이다. 봄에서 가을까지는 강나루를 지키는 게 그리 어렵지 않지만 겨울 들어 강이 얼기 시작하면 달라진다. 엄청나게 고생해야 한다. 물가라 별나게 춥기도 하고, 언 강 위로 그들이 쉽게 걸어서 쳐들어올 수 있어서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지난겨울만 해도, 수만 개의 표창들처럼 온몸을 찌르는 추위 속에서 우리는 털가죽 한 장씩 두르고 강 복판을 지켜보아야 했다. 강 복판이 국경선이라, 그곳을 그들이 넘어온다면 전쟁이 시작되는 신호인 거다. 천만다행으로, 양 강가에서부터 형성되던 얼음장이 복판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봄이 되자 양 강가에 얼어붙은 것들마저 다 녹아버렸다.

지난겨울 그리도 우리를 괴롭혔던 강이 지금 눈앞에서,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침 뚝 떼고 유들유들 흐르고 있다.

그런데 걱정이 생겼다. 언제부턴가 강물이 줄어들고 있다!

그 동안 안 보이던 물속 바위가 그 등을 보이는 것만 봐도 분명한 현상이다. 하긴, 지난겨울 눈 한 번 제대로 내리지 않고 춥기만 했다. 올봄 들어서도 비 내린 날이 몇 번 없었다. 이 여름 들어와선 빗방울 비슷한 것도 떨어지질 않는다. 가뭄이 시작되려는가?

그렇다면 국경은 어떻게 되는 건지, .

 

삐리삐리삐리

그들이 아침부터 요상한 피리를 분다. 두 놈이 나란히 서서 그런다. 우리도 질세라 둘이 나서서 북채를 잡았다.

둥당둥당둥당!”

강물이 더 줄어들었다. 등을 보이던 물속 바위가 이제는 허리까지 보이고 있다. 가뭄의 징조가 분명하다. 어제 군량을 타러 성에 다녀온 동료들의 소식에 의하면, 성내에서는 벌써 식량 배급제를 실시하더란다. 오가며 본 많은 논밭도 금이 쩍쩍 갈라지기 시작하더란다. 우울하다. 가뭄이 장기화되면 우리가 후방의 다른 이들과 교대하는 일이 무기한 연기될지도 모른다.

삐리삐리삐리

그들의 피리소리도 약해진 게, 전만 못 한 것 같다. 그들도 우리처럼 양이 준 식사를 공급받는 걸까.

하늘 한복판으로 옮겨간 해가 따가운 햇살들을 아래로 내리쏜다. 엄청 큰 구렁이 같던 강물이 이제는 가느다란 줄뱀 닮은 개울이 돼, 따가운 햇살 아래 겨우 흐른다.

휘익 탁! 휘익 탁!’

화살이 날아와 꽂혔다. 몇 발자국 앞 자갈밭에 떨어졌다. 대부분 저쯤에 떨어지지만 우리가 서 있는 데까지 날아오기도 한다. 몇 년에 한두 건씩 저런 화살에 맞아 몸을 다치거나 죽은 일이 생긴다. 작년부터 올해까지는 아직 그런 일이 없는데, 그들이 피리로 호들갑을 떨다가 느닷없이 활을 쳐들고 나설 즈음에 이미 우리는 바위 뒤나 나무 뒤로 몸을 피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응사한다.

얼마 후, 그들 중 하나가 방패로 화살을 막으며 강 쪽으로 나와 고래고래 욕한다. ‘을 담당하는 놈이다. 목소리가 제일 크기 때문에 그 놈이을 맡았을 게다. 물론 우리 쪽에서도 목청 큰담당이 방패 들고 나서서 같이 욕한다.

그들의 욕은 대체로 알아들을 수 있다. 그들의 말이 우리가 듣기에는 심한 사투리 같기 때문이다. 아득한 옛날에 그들과 우리의 시조가 한 형제였다는 전설이 있다.

한동안 오가던 욕설은 점심 먹는 때가 다가오면 그친다. 무언의 약속이다. 그 때부터 이상한 정적이 존재한다. 점심을 먹고 나면 식곤증에 창을 부여잡고 졸기 일쑤다.

날이 갈수록 강바닥이 더 드러나고 있다. 검푸르던 강물 대신 하얀 자갈밭 세상으로 바뀌고 있다. 자갈밭에서 반사된 햇살들에 눈이 시다. 나무나 바위 뒤에 기대어 서서 꾸벅꾸벅 졸게 된다. 코골고 자는 놈도 있다. 그들의 화살이 이런 때 독사처럼 날아들기도 하더니 요즈음엔 사라졌다. 그들도 밥 먹고 나면 졸린 생리를 존중하게 된 걸까.

어두워지면 횃불을 밝힌다. 밤의 근무가 낮보다 나을지도 모른다. 따가운 햇살도 없을뿐더러 대개 낮잠들을 자 놔서 졸리지도 않다. 컴컴한 밤에도, 개울처럼 됐지만 어쨌든 강물이 흐른다.

그러더니, 계속된 메마른 날씨에 개울처럼 흐르던 것조차 멈춰버렸다. 국경이 증발해 버린 거다. 우리는 망연히, 말라버린 국경강 복판을 바라보았다. 건너편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을 담당하는 놈이 강기슭에서 멍하니 강 복판을 바라보고 서 있다.

이런 가뭄은 오십 년만이라 했다. 전설처럼 전해오는 오십 년 전 큰가뭄 얘기. 나라 안 우물이 반 이상 말라붙고 작물들까지 다 시들어버리면서 온 백성이 나무껍질이라도 벗겨 먹겠다며 산과 들을 헤맸다 했다. 그 큰가뭄이 다시 돌아온 건가?

이젠 우리 나루의 샘에도 물이 고이지 않아, 십 리 떨어진 후방 마을의 물을 길어다 먹는 판국이다.

야아!”

우리 쪽 이 갑자기 소리 질렀다. 그러자 건너편 이 놀라서 후딱 방패를 쳐들고는 먼저 욕을 고래고래 퍼붓기 시작했다.

왜 그러니 썅놈아!”

 

강물이 흐를 때에는 밤마다 횃불도 밝히고 강물소리에도 귀 기울였다. 그들이 몰래 배 타고 오거나 헤엄쳐 오는 소리가 나지 않나 해서. 그런데 강물이 다 말라 버리자 이제는 발자국소리에 귀 기울여야 했다. 그들이 강바닥으로 쳐들어온다면 자갈들 밟는 소리를 안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바닥 자갈들에서 나는 소리가 간단치 않았다. 쥐 같은 작은 짐승들이 오가는 달가닥소리, 부는 바람에 작은 자갈들이 내는사그락소리, 그 외도 규명하기 힘든 갖가지 소리들.

낯선 강의 변화 탓에 밤 근무가 고되어졌다. 날이 새면 그 때부터는 눈 따가운 햇살들의 난무를 견뎌야 한다. 강바닥의 흰 자갈밭이 푸르스름해지다가 붉어지는 어지러움에 눈이 멀 것 같다. 그뿐만이 아니다. 온몸을 땀으로 젖게 하는 무더위, 그런 와중에 악을 쓰며 피리를 부는 그들, 우리의 북 소리, 화살들, 거친 욕들.

가뭄이 장기화되면서 우리는 지쳐갔다. 어둠은 언제나 동녘 빛에 사라져갔고, 날씨는 무덥기만 하고, 한낮의 욕들이 오가면 멋쩍은 정적이 자리 잡았다. 모든 게 변함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욱 지치게 만들었다.

그렇다. 강물이 말라버린 것은 상황의 변화일 뿐 사건이 아니었다. 특별 경계는 평상근무로 환원되었다. 그들도 강물이 말라 버린 날부터 별스럽게 며칠 간 바락바락 악쓰더니 이젠 다시 예전처럼 적당히 그런다.

비상은 일상으로 환원되었다. 긴장했던 며칠 동안이 쑥스러워지면서 습관적인 신경전만이 무더운 날을 이끌어가고 있었다.

 

 

 

그런 어느 날 아침이다.

삐리삐리시작되던 그들의 피리소리가 갑자기 끊겼다. 뒤따라 북을 치려던 우리는 긴장해, 강 건너편을 주시하였다.

흑갈색의 거친 움직임이 눈에 들어왔다. 흑갈색 털의 큰 멧돼지였다. 그 놈이 산에서 강나루로 내려오다가 그들과 맞닥뜨린 것 같았다. 놈은 송곳니를 하얗게 빛내며 강바닥으로 달음질쳤다. 그들의 창이 날았으나 잽싼 놈을 맞추지 못했다.

놈이 강 복판을 지나 우리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우리도 급히 창과 방패를 들고 나갔다. 두 아름은 될 포식거리를 놓칠 수는 없었다. 식량보급이 제대로 되질 않아 개구리까지 잡아다 먹는 판이다.

자갈들을타다닥!’튕기며 멈춰 선 놈은 양쪽에서 협공 당한 꼴이 됐다. 놈의 뒤로는 그들이 허겁지겁 창을 주우며 달려오고 있었고 앞쪽에서는 우리가 창을 치켜들고 던질 참이다. 놈은 째진 눈매로 휙 둘러본 뒤 상류 쪽으로 내달린다. 우리는 창도 던져 보지 못한 채 방패 들고 뒤를 쫓았다. 그들도 그 쪽에서 쫓아갔다.

강 한가운데로 달리는 놈의 뒤를 그들과 우리가 경주하듯 나란히 따라가는 셈이다. 소리치며 방패를 두드리며 자갈들에 넘어지기도 하며, 창을 꼬나 쥐고 달린다. 창들이 놈을 맞추지 못해, 자갈들 새에 꽂히거나 퉁겨지거나 촉이 부러져버리거나 한다.

달아나던 놈이 지쳤는지, 뾰족한 주둥이로 홱 돌아서서 칼 같은 송곳니로 달려든다.‘와악!’우리와 그들이 흩어진다. 놈이 휭 하니 그 틈으로 다시 내닫는다. 그 때 창들이 날아가서 그 중 하나가 놈의 엉덩이에 꽂혔다.

꽤애액!”

놈이 강바닥을 뒤흔들듯 비명 지르며 날뛰자 그 창이 떨어지며 핏방울이 튀었다. 주춤대며 멈춘 놈의 째진 눈에 시퍼런 불길이 서렸다. 그들과 우리는 가쁜 숨을 진정시키며 방패에 몸을 가린 채 조심조심 물러났다. 놈은 앞쪽으로 나아갈 듯하다가 확 돌아 돌진한다. 그 쪽에 선 이들이 창도 못 던지고 방패를 떨어뜨리며 피하자, 놈은 송곳니로 방패 하나를 콱 찔러 마구 윽박지른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방에서 창들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꽤애액!”

놈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창들에 고슴도치 꼴이 돼 숨을 가쁘게 쉬며 버드럭거렸다. 몸뚱이에 꽂힌 창들도 같이 흔들거렸다. 모두 조심조심 다가서다가, 놈이 다시꽤애액!’하자 곤두박질치듯 물러섰다. 놈은 마침내 신음마저 약해지며 죽어간다. 부근 자갈들에 물감처럼 붉은 피가 번졌다. 송곳니도 붉게 물들어갔다. 모두 땀에 젖어 놈의 주위를 에워싸고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우리와 그들은 엉거주춤 일어나 두어 발씩 물러났다. 새삼스럽지만 적과 함께 앉아있었던 거다. 창들은 모두 멧돼지에 꽂혔거나 부러져버려, 반사적으로 허리춤의 칼자루에 손댔으나 체력이 다한 상태였다. 힘겨운데다가 적개심을 되살리기엔 어울리지 않았다. 그들 역시 칼자루에 손대고 있을 뿐 뽑지 못했다. 햇살이 폭우처럼 쏟아졌다. 서로 상대편을 말없이 보았다. 멀리서 구별되던 그들이 생생한 얼굴로 코앞에 있었다. ‘담당의 비쩍 마른 얼굴생김도 구체적이었다. 우리와 다를 게 없는,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었다. 그들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피식피식 웃었다. 우리도 따라 웃었다.

사실, 삼십 년 전 전란은 옛날 일이고 지금의 그들과 우리는 단 한 번도 창칼을 맞부딪친 적이 없었다. 관념으로만이었다. 노려보며 지내다가 오늘 처음 만난 것이다.

강 한복판 지점이라, 경계선의 검붉은 표식처럼 멧돼지가 쓰러져있었다. 꽂힌 양쪽 창의 수는 거의 같았다. ‘반으로 나누자고 우리 쪽에서 제의하였다. 그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각기 한 사람씩 나서 칼로 멧돼지의 숨통을 끊고 창을 뽑으며 살코기를 나누었다.

그 후 그들과 우리 사이는 달라졌다. 그들의 화살이 엉뚱하게도 먹다 남은 멧돼지 뼈다귀를 매단 채 날아왔고, 우리는 응답으로 멧돼지 꼬리를 화살에 매달아 쏘았다. 그들의 피리 소리가 요상한 곡조 대신 흥겹게 바뀌는가 하면, 우리의 북은 반주가 돼 주었다. 그들의도 약해져서 아예 나타나지 않는 날도 있었다. 멧돼지 고기를 나누어 먹은 뒤로 확실히 사이가 달라졌다.

강물이 말라버리면서 경계심과 적개심까지 말라버린 걸까. 이제는 경계하는 모양들만 유지할 뿐이다.

그런 어느 날이다.

자갈 밑의 새우라도 주우려고 강바닥에 나간 우리 편과 그들의 부식 담당자끼리 멧돼지 쓰러졌던 그 중간지점에서 다시 만났다. 그 자리에서 부식거리를 바꿔 먹기로 합의가 되었다. 사실 그들이나 우리나 늘 같은 부식에 질려 있었다. 다음 날부터퍼붓는 시간에 만나기로 했다. 뜸해지던 이 결국 사라진 것이다.

해가 하늘 한복판에 이르면 그들이 먼저 피리를 불었다. 우리가 북을 쳐 응답하면 양쪽에서 한 사람이 바꿔먹을 부식거리를 들고 나갔다. 우리는 뒤쪽에 수목이 우거진 산이 있어 열매가, 그들은 바위투성이 산이라 새알이 주였다.

가뭄이 길어지고 있어서, 형편없는 식량 보급을 탓할 수도 없고 이제는 식량을 자체 조달해야 했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처지인지 연실 강바닥을 뒤지고 산을 오르고 하는 모습이다. 우리처럼 두 패로 나누어 한 패는 경비를 서고 다른 한 패는 식량 구하기로 나선 듯했다.

지난 번 멧돼지 고기는 얼마나 맛있었나! 사흘이나 푸짐하게 먹은 얘기를 지금도 꺼낸다.

햇빛이 눈부신 강바닥을 지켜보다보면 뭔가 시커먼 게 강 복판에서 아른거린다. 멧돼지인가 놀라 눈 비비고 보면 그들과 우리 쪽 두 사람이 마주 서서 부식거리를 교환하는 모습이었다. 두 사람 위 아득히 높은 하늘에는, 그 죽어가던 멧돼지의 눈동자에 담겼던 샛노란 해가 발광하고 있었다.

 

 

***

 

오늘은 내 차례다.

삐리삐리소리가 들려오고, 우리 쪽 북이둥당둥당울리자 나는 칼을 풀어놓은 뒤 강바닥으로 나아갔다. 어제 합의대로 불쏘시개 관솔을 싸 들고 자갈밭 위를 걸어갔다. 그들 쪽에선 부싯돌을 가져올 것이다. 이처럼 바꿀 물건의 내용은 전날에 합의된다. 바꿔먹을 부식거리가 마땅치 않게 되면서 물물교환으로 발전된 거다. 어제는 우리의 질그릇과 그들의 모피가 바꿔졌다.

자그락자그락

자갈들이 내 발에 밟히며 나는 소리다. 건너편 쪽에서도 그런 소리가 나며 가까워졌다. 그런데 상대는 지난번에도 만난 녀석이다. 녀석은 뚱뚱한 몸집으로 웃으며 내게 부싯돌을 건넨다. 나도 불쏘시개 관솔을 건네며 말했다.

내일 우리 쪽은 칡 끈을 한 뭉치 가져올 테니 너희는 장식용 새 깃들을 두 묶음 가져오는 게 어때?”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합의가 된 거다. 돌아서서 가려는데 어이!’하고 나를 불렀다. 뒤돌아섰더니 녀석이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그리곤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손을 젓고는 자기가 돌아선다.

별 싱거운 녀석. 나는 목덜미의 땀을 소매로 닦으며 우리 강나루 쪽으로 다시 걸어갔다. 강바닥의 자갈들이 매섭게 햇빛들을 반사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조심조심 왔다.

 

열흘이 지났다.

다시 내 차례다. 오늘은 가죽부대를 메고 가 그들의 우물물을 받아오는 일이다. 대신 그들한테는 과일을 몇 알이나마 건네기로 돼 있다. 그들은 먹을거리를 조금씩이나마 공급받고 우리는 십 리나 되는 마을의 물을 길어다 마시는 고역이 사라진 셈이다. 그들한테서 식수까지 공급받다니, 전에는 상상도 못했다. 그렇다면 예전에 흐르던 강물은 든든한 국경도 됐지만, 이처럼 서로 도와가며 편히 살 수 있는 걸 가로막은 장애물도 됐던 게 아닐까?

따가운 자갈들에, 나는 발바닥의 통증을 참아가며 강 복판에 다다랐다. 그랬더니, 열흘 전 그 녀석이 나를 맞는 게 아닌가. 그들이나 우리나 바꾸러 나서는 인원이 한정돼 있어 생길 수 있는 일이긴 하다. 그래도 녀석을 또 만나니 기분이 묘했다. 녀석도 같은 기분인지 멀겋게 웃는다. 과일을 건넨 뒤 녀석이 가져온 가죽부대의 물을 우리 가죽부대에 받아 채우고서 돌아섰다.

어어이.”

녀석이 나를 불렀다. 돌아서니, 먼젓번처럼 어색하게 서서 머리를 긁적거린다. 주변의 반사된 햇빛들에, 뚱뚱한 그의 몸이 사라져 없어질 것 같았다. 나는 무거워진 가죽부대를 멘 채 서 있었다. ‘왜 자꾸 그래?’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내 몸도 주변의 어지러운 햇빛들에 사라질 것 같아 땀만 흘렸다. 녀석이 마침내 말했다.

오늘 밤에 놀러오지 않을래? 우리 후방 마을에서 기우제가 있거든. 볼 만해. 여기서 상류 쪽으로 오 리쯤 올라가면 집채만 한 큰 바위가 강 복판에 있는데, 거기서 내가 기다릴게.”

놀란 내 표정이 녀석의 눈동자에 비쳐있었다. 나는 가타부타 말 못하고 뒤돌아서 걸어갔다. 녀석의 생각지도 못한 제의를 어떻게 해야 하나. 세 달째로 접어든 가뭄에 녀석의 정신이 이상하게 된 건 아닐까. 아니, 진심일 수도 있지. 이젠 친해지고 싶은 게지. 모르지. 어떤 음모일 수도 있어.

여하튼, 적한테서 놀러 오란 제의를 받은 이 믿기지 않는 일을 우리 편 그 누구에게도 나는 얘기할 수 없었다. 오늘밤은 마침 내가 경비를 쉬는 차례였다. 나는 갈등하던 끝에 한번, 녀석이 기다린다는 데까지 일단 가 보기로 결심했다. 갔다가 분위기가 이상하면 되돌아올 생각이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비수 하나를 품속에 숨겼다.

경비 맡은 패가 횃불들을 지피느라 부산한 틈을 타, 벼랑 밑으로 몸을 근접시킨 채 상류 방향으로 갔다. 양쪽의 강가가 험한 산벼랑으로 길게 이어진 지형이라, 강나루 부근만 경비가 엄하다.

오 리쯤 가자, 녀석 말대로 집채만 한 바위가 강 복판에 있었다. 발소리를 죽이고 주위를 살폈다. 초승달빛이라, 바위 빼고는 다른 사물들은 흐릿하다. 침침한 어느 곳에 그들이 숨어서 나를 잡으려고 할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내가 뒤돌아서 달아나기엔 이미 늦었다. 하는 수 없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품속의 비수로 자결하는 수밖에.

하하하……

웃음소리가 나면서 녀석이 바위 뒤에서 나타났다. 내게 옷 뭉치를 안겨주며 갈아입으라 했다. 그들의 복장이었다. 녀석이 앞장서 걸어갔다. 강 복판 건너 그들의 강바닥으로 들어섰다.

그들의 마을에 다다랐다. 기우제가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시조신을 모신 사당에 노루 한 마리를 바치며비를 내려주십사수십 명이 엎드려 기원하고 있었다. 나도 녀석을 따라 구석진 곳에 자리 잡은 뒤 함께 절하고 주문도 외웠다. 나눠 주는 음식도 받아먹었다. 기우제가 절정에 다다랐다. 제관이 노루의 목을 칼로 베어 쳐들며 뭐라 외치자 옆에 선 자들이 시조신의 화상 앞에 피운 불에 나뭇가지들을 얹었다. 불길이 하늘로 올라가는 용처럼 치솟으며 훨훨 타올랐다. 순간 나는 그들 시조신의 모습을 뚜렷하게 보았다. 불빛에 훤히 드러난 그 모습은 우리 시조신과 많이 닮아 있었다. 부리부리한 눈매며, 거친 턱수염에 장대한 기골이 그랬다. 우리 쪽이 칼을 쥔 데 반해 활을 들었다는 것, 머리에 쓴 관과 옷의 모양이 다른 것 외에는 쌍둥이처럼 닮아 있었다.

전설은 사실이었다. 아득한 옛날, 우리 시조와 그들의 시조가 한 형제였는데 무술이 용호상박으로 맞서면서 결국은 강을 사이에 두고 갈라서야 했고……그 후 오랜 세월이 흘렀다는.

기우제가 끝나고 녀석과 나는 다시, 강나루를 피해 산의 벼랑으로 해서 조심조심 강바닥으로 내려왔다. 밤이라 강바닥의 자갈들이 식어 있었다. 이윽고 강 복판의 그 큰 바위에 다다랐다.

조심해 가게.”

그래.”

응답하고 돌아서려다가 녀석을 불렀다.

이것 받아.”

품에 지녔던 비수를 건넸다. 녀석은 놀라서 말했다.

내가 가져도 돼?”

기우제를 보여줘서 감사하단 뜻이야.”

내가 우리 강나루로 돌아왔을 때는 꼭두새벽이었다. 경비를 선 패들이 횃불을 새로 가느라 분주한 틈에 슬그머니 들어왔다. 떠날 때 마치 자고 있는 것처럼 잠자리를 꾸며 놓았었는데 다행히 그대로 있었다. 나는 잠자리에 눕자마자 이내 곤한 잠에 빠졌다.

눈을 뜨니 늦은 아침이었다. 강 건너에서 삐리삐리피리 소리가 들려오고 이어서 우리 쪽에서 둥당둥당북을 쳤다. 잠시 후면 화살이 날아올 거며 한낮이 되면 강 복판에서 물물교환이 이뤄질 게다.

모든 게 변함없었다. 지난 밤 적국에 몰래 다녀온 일이 꿈같았다. 나는 품속의 비수를 정말 녀석에게 선물했는지 확인해 봤다. 비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어젯밤 일은 사실이었다. 아무한테도 어젯밤 일을 얘기해서는 안 되었다. 적의 안내로 적국에 들어가서 기우제까지 보고 무사히 돌아왔다는 얘기를 그 누가 납득할 수 있을까.

이 여름에 우리는 그들을 매일 만나 물까지 받아 마시지만, 마시기 직전에 항상 은덩이로 그 물에 독이 있는지 검사한다. 이젠 장난처럼 화살이 오가지만 여하튼 항상 상대편을 향해 화살을 쏜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다. 매일 만나지만 강 한복판 중간 지점 그 이상을 넘지 않는다.

강물은 말라 버렸지만 경계는 여전했다.

아득한 옛날, 그들의 시조와 우리 시조 사이로 흐르기 시작한 경계의 강. 오랜 세월 깊게 파인 적개심의 강을 어떻게 내가 쉬 넘어갔다 왔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이 이상야릇한 감정. 적을 친구로 두었다는,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 여하튼 이런 감정과 모순은 절대 녀석과 나만 남몰래 간직해야 한다.

 

오늘도 그들과 우리의 물물교환은 순조로웠다. 피리소리와, 뒤이은 북소리, 그리고 우리 쪽에서 한 명이 과일 몇 알을 들고 강 복판의 지점에 가 그들의 물을 받아 왔다. 우리는 그런 광경을 지켜보다가 대부분 졸고 있었다.

그런데 담당자가 받아온 물에 은덩이를 담그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반짝이던 은덩이가 시커먼 사색을 띤 것이다. 들쥐를 잡아 그 물 몇 방울을 찍어 먹이자 파르르 떨다 죽는다. 독을 탄 물이었다.

영문을 알 순 없지만 차가운 살의였다. 비상경계령이 내려져 모두 허겁지겁 무기를 찾아 들고 제 자리를 찾았다. 낮잠 자던 두엇은 호되게 맞고서 얼떨떨한 채로 경계에 임했다. 벌써 그들의 화살이 싸악허공을 날카롭게 찢으며 날아든다.

뒤이어, 건너편 강나루에서 누군가 방패로 몸을 막으며 강바닥으로 나섰다. 오랜만의담당이었다. 쌍욕을 냅다 퍼붓고 나서 말했다.

너희가 포섭해 놓은 첩자가 여기 있으니 데려가라!”

그런 뒤 그들 서넛이 누군가를 질질 끌어다가 강 복판에 내팽개쳤다. 우리는 무슨 짓거리를 벌이는 거야?’수군거리며 지켜보았다. 햇볕에 뜨거워진 자갈밭 위에 누군가 산발이 돼 피범벅 몸뚱이로 내팽개쳐 있었다. 순간 하늘이 시커메지는 전율이 나를 휩쌌다. 그것은 녀석이었다. 뚱뚱한 녀석의 몸이 갓 잡은 짐승처럼 핏덩이가 돼 꿈틀거렸다.

우리 편 욕 담당자도 앞으로 나서 쌍욕을 냅다 퍼붓고는 말했다.

싸우고 싶으니까 별 짓을 다 꾸며대는구나!”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그저께 밤, 그들 땅에 다녀온 일이 잘못된 거다. 그 날 밤 나는 녀석을 따라다니며 우물이니 사냥터니, 그들의 숙소까지 몰래 구경했다. 그리고 돌아오다가 강가에서 녀석의 동료와 마주쳤다. 너무 뜻밖이라 피할 수도 없었다. 횃불은 안 들었으나 달빛이 밝았다. 나는 둘러보는 양 고개를 돌리며 지나쳤지만 지나친 놈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가는 듯했다. 나는 태연히 걸어가면서도 식은땀을 흘렸다. 상류의 그 바위 부근에서 녀석과 헤어질 때 내가 말했다.

아까 어떤 사람과 마주친 게 마음에 걸리네.”

걱정 마라. 자네는 신경과민이야.”

그런 뒤 어제, 오늘 한낮까지도 별 일이 없기에 나는 안심했었다.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녀석은 첩자로 몰려 온갖 고문을 받았을 테고, 그들이 보복 차원에서 우리에 대한 독살 음모가 마련돼 오늘 한낮의 식수 공급 때까지 평화로운 상황을 위장한 것이다.

이 여름에 뭔가 달라지던 것들이 모조리 독살되었다. 메마른 강바닥엔 햇살이 범람한다. 어쩌다 불어오는 바람도 뜨겁다. 우리는 바위나 나무 뒤로 몸을 피한 채 건조해진 목구멍으로 마른침을 삼키며 화살촉에 독즙을 발랐다. 다시 칼날을 갈고 창끝을 바로 잡았다.

하늘은 해의 큰 덩어리처럼 변해 그 뜨거운 열기에 지상의 모든 게 침묵 당했다.

눈가로 흘러드는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훔쳐내며 나는 다시 강 복판을 지켜보았다. 화살을 쥔 손이 푸르르 떨렸다. 뜨거운 자갈 위에서 녀석은 언젠가 그 멧돼지처럼 피투성이로 꿈틀거린다. 갈기갈기 찢겨진 옷이 피로 물들어 같이 흔들린다. 이따금 쳐들려다 다시 가슴으로 떨어뜨리는 헝클어진 머리카락. 쓰디쓴 신음이 들려오는 듯했다.

뜨거운 하늘이 가루로 부서져 내리며, 녀석을 제외한 강바닥에 하얗게 쌓여갔다.

나는 화살의 오늬를 시위에 걸었다. 그리고 이 무거운 적막을 향해, 세 달째나 된 물기 없는 가뭄의 심장을 향해녀석의 시뻘건 고통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화살은 쏟아지는 햇살들을 가로지르며 비수처럼 날아갔다. 녀석의 몸뚱이가 순간 경직됐다가 크게 흔들리더니 서서히 고꾸라졌다. 핏빛 몸뚱이에 꽂힌 화살은 마치 가는 흰 뼈 하나가 삐죽이 솟은 것처럼 보였다.

 

까마귀들이 지난밤의 부서진 조각들처럼 점점이 날아들었다. 녀석의 몸뚱이 주위, 너더댓 발 떨어진 부근에서 가늘고 긴 부리들로 깍깍거렸다. 제각기 딴전을 부리다가 슬금슬금 시체 가까이로 간다. 그 중 한 놈이 날개를 까닥거리며 다가가 시체를 콕콕콕 쪼다 물러나더니 다시 접근한다. 맞은편 놈도 따라한다. 두 놈이 마침내 거침없이 시신을 쪼기 시작하자 다른 놈들도 달려들어 그 군집(群集)이 흉측하게 꿈틀거린다.

바람이 불 때마다 악취가 풍겼다. 시신 썩는 냄새인지, 다른 곳에서 나는 것인지 확실치 않았다. 나는 역해져서 입술을 깨물며 참다가 끝내는 질펀하게 눈물 흘리며 토했다. 긴 내장 같은 걸 길게 문 놈을 선두로 까마귀들이 다 날아가 버린 날, 하늘 한 편에서부터 그을음 같은 구름들이 소리 없이 몰려들면서 강바닥이 어두워졌다.

우리는 며칠째 계속되는 긴장에다가, 무겁게 가라앉는 날씨에 탈진할 것 같았다.

그 날 밤, 별 하나 안 보이더니 후두두둑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바위 밑에 앉은 채로 들이치는 찬비에 몸을 떨었다. 빗소리 자욱한 캄캄한 강 쪽을 바라보다가, 시커멓게 흐트러진 녀석의 머리칼들이 내 발에 닿은 것 같아 소스라쳐보면 비에 젖은 긴 풀잎들이었다.

동이 터도 빗줄기들은 그 무수한 햇살들처럼 쉬지 않고 쏟아졌다. 강 복판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오는 듯해 귀 기울이면 자욱한 빗소리뿐. 폭우는 닷새나 쏟아졌다. 상류에서부터 누런 황토 빛으로 흘러내려오기 시작한 강물은 그 긴 혀로 녀석의 흔적을 핥아버리고, 흐릿하게 풍기던 악취까지 삼켜버리며 잔뜩 불어난 무서운 꼴로 변해버렸다.

강물은 거대하게 다시 찾아들었다.

지쳐서, 지켜보는 우리와 그들 사이로 거대한 장벽같이 굳건하게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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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심이 이 소설을 쓴 시기는 1980년경이다. 이십 년쯤 지나 2000'공동경비구역 JSA’란 영화가 나왔다. 공교롭게도 영화와 작가의 이 소설이 줄거리가 흡사하다. 작가의 소설이 시기적으로 앞섰으므로 결코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영향을 받거나 표절한 게 아니다. 단지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못하고 사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오해가 염려된다. 그 자세한 사연을 '가뭄"의 창작배경에서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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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가구나 되는 마을이 아침부터 산그늘에 있다가 밤을 맞는다. 햇볕 한 번 쬘 일 없이 어둡게 지내는데도 뜻밖에 유원지로 자리 잡은 이 이상한 마을. 그 내력은 이렇다.

이 마을 앞으로 맑고 얕은 하천이 흐른다. 가족 단위로 물놀이하며 놀기 좋은 이 하천이 홍수만 나면 마을을 덮쳤다. 홍수를 피해 마을의 집들이 뒤로 물러나 뒷산 기슭으로 붙었다. 이 뒷산도 묘하다. 높이가 해발 사백구십 미터밖에 안 되지만 가파르면서 북향이니까, 마을은 종일 산그늘 속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십여 년 전부터 전국적으로 여가를 즐기는 바람이 불었다. 이 마을이 물놀이하기도 좋고 등산하기도 재미난 곳이라고 소문이 나면서 외지 사람들이 주말마다 몰려들었다. 본래 열다섯 가구이던 게 두 배로 늘어나면서 마을은 유원지처럼 되었다. 대부분 민박집이거나 가게들로 바뀐 것이다.

내 사랑 닭갈비집은 이 마을에서 별난 존재이다. 다른 집들은 모두 산기슭에 자리 잡았는데 이 집만 하천 가에 제방을 쌓고 남았기 때문이다. 마을에서 이차선 도로를 사이로 두고 다른 집들과 떨어져 있는 이 집은 그래서, 혼자만 햇빛을 받는다.

 

내 사랑 닭갈비집 박 사장이 산그늘에 깔려 있는 어둑한 마을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낮인데도 등을 켜놓고 손님들 기다리고들 있지만, 그러면 뭐하나? 강아지 한 마리 안 지나가는데……. 이럴 때는 우리 식당이 그만이지, 전등 하나 켜 놓지 않아도 햇빛이 잘 들어서 이렇게 밝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손님이 없을 수가 있나. 이맘때면 대학생들부터 오티니 엠티니 찾아와서 우리 마을 모두들 정신없이 바빴는데…… 올해는 이렇게 썰렁하니, 나 참.

속으로 그러고 있을 때 웬 낡은 경차 하나가 도로에 나타났다. 방향지시등도 깜빡이지 않고 천천히 이 쪽으로 방향을 틀어 들어왔다. 산그늘이 도로까지 드리운 때라서 그 차는 무거운 자주색이었다가 이쪽으로 들어서면서 햇빛을 받아 밝은 색으로 바뀌었다. 예전 같았으면 박 사장은 이럴 때 문을 열고 나가 그 손님을 맞는 시늉이라도 했다. 지금은 그냥 실내에서 지켜보기만 한다.

식당 옆 주차장으로 들어서더니 멈춰서는 경차. ‘우리 식당 주차장에 차 세워놓고 딴 데 일을 보러갈 사람이다.’고 박 사장은 단정했다. 한적한 도로라 해도 도로변 주차는 단속대상이니까 남의 주차장을 슬그머니 이용하는 모습이겠다. 검은색 등산복 차림의 남자가 차에서 내리더니 잿빛배낭을 등에 메는 것을 보고 박 사장은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확인했다.

남자는 주차장을 벗어나 도로 쪽으로 걷는다. 다니는 차들도 없으니까 지팡이로 천천히 아스팔트 도로를 탁 탁 짚으며 간다. 등산복에 묻은 햇빛들을 떨어내며 도로를 가로질러 어둑한 산그늘의 마을 쪽으로 가는 남자. 박 사장은 그런 뒷모습에 고개를 갸우뚱한다. 지금 시각이 오후 두 시 반이다. 이런 시간에 혼자 산을 간다고? 보름 전에 내린 눈이 산에 적지 않게 남아 있을 텐데 등산한다고? 어디 눈뿐인가, 산의 곳곳이 얼음판으로 변해서 위험할 텐데. ……아는 민박집이라도 찾아가는 게 아닐까? 오늘은 그 민박집에서 자고 내일 오전에 산에 올라갈 계획으로 말이다. 그러려면 여자와 함께 민박집으로 가는 게 보통인데 저 남자는 뭐야? 하긴 저런 낡은 경차에 동승할 여자는 없겠지. 쪽팔리니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들이나 하며 박 사장이 밖을 내다보고 있을 때 그 남자김 과장은 구멍가게 앞에 섰다. 가게 간판이 짧은데 그나마도 왼쪽 부분이 떨어져나가 니슈퍼이다. 여닫이문이 덜그덕 소리를 내며 열리니까, 담요를 두른 채 졸고 앉았던 구멍가게 주인이 화닥 깨어 눈을 떴다. 이런 가게는 말하지 않고 손짓으로도 충분하다. 김 과장은 진열장의 먼지 덮인 위스키 한 병을 손으로 가리켜 그걸 넘겨받은 뒤 만 원 한 장을 건네고는 거스름돈을 받았다. 배낭 속에 위스키 병을 집어넣고서니슈퍼를 나섰다.

이제 준비는 다 되었다.

구멍가게 옆으로 비좁은 골목이 나있다. 무질서하게 들어찬 민박집들 사이로 생겨난 이 골목을 빠져나가야, 산으로 오를 수 있다. 김 과장은 좁고 퀴퀴하기가 사타구니 같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다른 데는 몰라도 골목길은 다니는 사람들 발길에 지난 번 내린 눈이 다 녹았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걸레쪼가리 같은 꼴들로 추하게 남아 있는 것은 물론이고 살짝 얼어 있기까지 해서, 하마터면 김 과장은 미끄러질 뻔했다. 옆의 담벼락을 잡지 않았더라면 몸을 다칠 뻔했다. 왜 이리 이 골목이 다른 데보다 싸늘한 거야?

그늘진 산기슭에 있어서 다른 데보다 기온이 낮은 게 아닐까? 창자처럼 구불구불한 골목 모양이 긴 굴뚝같은 역할을 하면서 바깥의 찬 공기를 잘 빨아들이니까 다른 데보다 한층 낮은 기온을 유지한 것일 수도 있겠지.

김 과장은 오늘 이 산을 찾은 음울한 목적에 어울리지 않게 과학적인 추리도 해 보며 골목길을 오르는데 ! !”어느 집에서 종이봉지를 찢는 소리로 개가 짖기 시작했다. 다른 집의 개까지 합세해서 짖는다. 민박집들이니까 사나운 개는 없다. 대부분 복날에 잡을 수 있는 종류들인 데다가 찾아들 민박 손님들의 안전을 위해서 목에 줄까지 매어 놓았으니까 전혀 걱정할 게 없다. 작년까지 여기를 자주 지나다닌 김 과장이었으므로 그런 개들의 처지까지 잘 알고 있다. 괘념치 않고 골목길을 가면 되는데 다만 한 군데 신경 쓰이는 데가 있다. 골목이 끝나는 지점에 있는 민박집의 개다. 그 놈은 얼토당토않게 시베리안 허스키라는 고급 견종이다. 그 놈은 별로 짖지도 않고 허연 눈길로 지켜보는데 그게 여간 무서운 게 아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각 철장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이다.

겁먹을 필요도 없이 그 앞을 그냥 지나가면 될 텐데 김 과장은 그러질 못한다. 바닥을 탁 탁 찍던 지팡이까지 들어 올려 두 손으로 쥐고는 조심스런 걸음으로 골목을 올라간다.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험한 겨울 산을 올라가서 음울한 목적을 이루려는 사람이 그깟 철망에 들어 있을 개 한 마리에 신경이 쓰이다니.

그 민박집 앞에 다다랐다. 허연 눈매로 자기를 지켜볼 그 개를 예감하고서 앞만 보며 지나치려다가 언뜻 눈에 들어온 마당 풍경이라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철망 안이 텅 비어 있고 마당에 세워 두던 민박이라고 먹물로 굵게 쓴 목재 입간판도 보이지 않는다. 대신, 지난 가을부터 산에서 날아들어 자리 잡았을 낙엽들이 즐비하다. 낙엽들만도 아니다. 과자 봉지들,‘단체 오락에 쓰이는 플라스틱 막대’, 터진 빨간 풍선 조각, 검은 비닐봉지 따위도 널려 있다. 무슨 일이 있었나? 물론 김 과장은 이 집 주인이나 가족들을 알지 못한다. 다른 민박집과는 다르게담장이나 대문도 없이 마당 한가운데에 민박이란 입간판 하나 세워 놓는 풍경으로 골목의 끝자락을 점하고 있어서 기억할 뿐이다. 게다가, 사납게 생긴 시베리안 허스키까지 있으니까.

일 년 사이에 이 집이 망했나?

그런 생각을 하며 골목을 빠져나왔는데 그러고 보면 좀 이해가 안 되는 마을 풍경이었다. 작년 이맘때눈 한 번 내리지 않은 겨울이었다.도 혼자 이 마을로 등산을 왔었는데 그 때는 대학생들이 넘쳐나서 좁은 골목을 빠져나가기가 변비 걸린 것처럼 여간 힘들던 게 아니었다.

북적대던 이 마을에도 불경기가 찾아들었나? 김 과장은, 길게 산 위 쪽으로 난 시멘트 포장길로 들어서면서 불경기 걱정도 해 보았다. 나중에 깨달았지만 그렇게 쓸데없이 남의 걱정을 하며 산기슭을 오르던 게, 벌써부터 흔들리는 결심이었다.

 

산기슭의 빽빽한 민박집들을 빠져나와 시멘트 길을 밟으며 천천히 산을 오르는 남자가 여기 내 사랑 닭갈비집에서도 보인다. 저 부근은 경사도가 사십도 쯤 된다. 시멘트 길이 휘지 않고 곧게 났기 때문에, 여기서 바라보기에는 남자가 조금씩 위로 이동하며 작아지는 전자게임의 사람처럼 보인다.

저 남자가 절에 가나? 시멘트 길은 백여 미터쯤 나아가다가 오른편으로 꺾이면서 절로 들어간다. 절은 여기서 보이지 않는다. 소나무나 향나무들을 울타리 삼아 가득 심어놓아서, 여기서는 검푸른 색깔뭉치로 보이는 데에 절이 있다. 그 곳을 빼놓고 일대는 낙엽송들뿐이다. 잎들을 다 떨기고 선 낙엽송들 풍경이, 산에 긴 꼬챙이들이 꽂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낙엽송들 사이로 난 시멘트 길에서 우회전하지 않고 그대로 사라지는 남자. 시멘트 길을 벗어나서 그대로 산으로 오르려는 모양이다. 거 참, 눈도 있고 얼음도 깔렸을 텐데.

내 사랑 닭갈비집 박 사장은 그런 알지도 못하는 남자를 걱정하다가, 쳐들었던 오른손을 내렸다. 눈부시게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을 막느라 쳐들었는데 이제 저리기 때문이다. 갈증이 난다. 주방 쪽을 향해 소리친다.“아줌마아!”

아줌마는 주방 바닥에 앉아 김장하다가 박 사장이 부르는 소리에 두 손을 물에 씻은 뒤 냉장진열장부터 향한다.

아줌마, 그거.”

뭐 그렇게 재촉하지 않아도 그녀는 안다. 진열장에서 소주 한 병과, 오이무침을 꺼내어 쟁반에 담아 들고 박 사장이 죽치고 앉아 있는 출입문 가까운 좌석커다란 둥근 쇠판과 그것을 에워싸고 있는 나무판에 갖다 놓는다.

술을 쪼금만 하세요.”라는 당부를 잊지 않던 그녀였는데 그냥 주방으로 되돌아온다. 박 사장이 소주라도 마시면서 속상한 마음을 달랠 수 있다면 그만도 다행이라는 생각에서다. 글쎄, 같은 여자로서도 이해하기 힘든 박 사장 사모님이었다. 여기 장사는 불황이지만 도시에 아파트를 두 채나 가진 부자인데다가 남편도 착하겠다, 애들도 서울에서 명문대학을 다니겠다, 모실 시부모도 없겠다…… 그런데 뭐가 아쉽다고 바람이 나? 그것도 단골손님으로 들르던 산악회 총무라는 연하 남자와 말이다. 여섯 살이나 어리다니, 그 남자는 고작 서른여섯 살이겠다. 우리 큰아들 나이밖에 안 되는 철부지 남자와 눈이 맞다니, 그건 다 너무 걱정 없이 살다 보니까 쓸데없이 걱정거리를 만든 경우가 아닐까.

아줌마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주방에서 김장을 다시 할 때 박 사장은 소주를 마시기 시작한다. ……. 목구멍을 넘어가자 위벽을 통해 온몸으로 퍼지는 알싸한 소주 맛. 저물녘에 저 산 위로 노을 지는 그 맛이겠다. 불그레하게 사방으로 번져나가다가, 끝내는 어둠으로 사라지는 노을의 맛.

박 사장은 아직도 오후의 햇살이 여전해서 두어 시간은 지나야 볼 수 있는 그 산의 노을을 잔으로 따라 마시는 듯, 취흥에 잠긴다. 사는 게 무어람. 이렇게 소주 몇 잔으로도 불콰해지면 되는 거지.

박 사장이 그러고 있을 때 산 중턱의 김 과장은 낙엽송 지대를 벗어나 생강나무와 아카시나무들이 많은 지대로 들어섰다. 이 부근은 산 위에서 굴러 내려온 바위에 맞아 꺾이거나 밑동이 눌린 나무들이 적지 않다. 눈도 곳곳에 남아 있다. 바위 밑이거나 나무 밑동의 그늘진 곳에 남은 건조한 눈들. 등산화에 밟히면 푸석 하고 속 빈 붕어빵 꺼지는 소리를 내면서 납작해진다.

이윽고 비탈이다. 수직에 가까운 비탈이니까, 겁먹은 여 등산객들은 오를 생각을 포기하고 갖고 온 김밥이나 까먹고 다시 하산한단다. 이 비탈은, 중간 중간 서 있는 참나무들을 타잔이라도 된 듯 잽싸게 잡아가며 올라야 한다. 그런 나무 잡기에 실수했다가는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지기 십상이다. 이런 험한 비탈 때문에 이 산을 오르는 게 재미있단 소문이 나고 그래서 등산객들이 몰려들면서 산그늘 마을이 번창하게 된 게 아닐까?

김 과장은 배낭끈을 다시 한 번 조이면서 잠시 쉬었다가, 마침내 비탈을 오르기 시작한다. 오를 때 손으로 잡는 참나무들 밑동에는 바위가 걸려 있는 경우가 많다. 위에서 굴러 떨어지다가 나무 밑동에 걸린 것들이다. 그런 바위들도 조심해야 한다.

나 참, 자살하려는 놈이 이런 조심까지.

어찌 됐건 이런 어수선한 비탈에서는 죽고 싶지 않은 김 과장이다. 정신없이 비탈을 다 올라왔다. 땀도 나고 기진했으므로 쉬어야 한다. 두 평 넓이의 너럭바위가 하나 있다. 김 과장은 배낭을 벗어서 그 바위에 놓고 앉았다.

돌이켜보니까, 뜻밖에 비탈에는 눈이 없었다. 경사가 심하니까 내린 눈이 쌓일 수가 없었거나, 동쪽 비탈이라서 아침마다 햇빛을 받으면서 다 녹았을지도 모른다.

7부 능선에서 8부 능선 사이가 될 이 너럭바위 부근에는 눈이 허옇게 남아 있다. 비탈을 오르기 전에 만났던 건조한 눈도 아니다. 얼음처럼 된 단단한 눈이다. 이런 눈밭에 싸리나무, 철쭉나무들이 이파리 하나 없는 앙상한 몸체들로 남아있다. 김 과장은 배낭을 연다. 그 속에는 아까 니슈퍼에서 산 위스키와 음울한 목적을 위해 준비한 밧줄이 꽈리를 튼 꼴로 들어 있다. 계획은 다 서 있다. 우선은 위스키로 만취한 뒤에 부근의 벼랑 위에서 몸을 던지거나,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든든한 나무그루를 찾아서 가지에 밧줄을 건 뒤 목을 맬 계획이다. 두 가지 자살 방법을 설정해 놓았으니 이제는 선택만 남았다.

벼랑은 여기서 삼사 미터를 나아가면 나타난다. 벼랑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까마득하게 산기슭이 보인다. 술김에 눈을 감고 벼랑을 뛰어내린다면 까마득한 허공으로 몸이 떨어지면서…… 산기슭의 바위들에 부딪치며 산산조각이 날 테다. 그게 내키지 않으면 그냥 이 부근에서 나무를 찾아 목을 매면 될 것이고.

이 일대는 키 작은 관목들이 대부분이지만 제법 큰 소나무도 두엇 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사실 이 곳으로 장소를 정하기도 간단치 않았다. 최소한도 집에서는 결행하고 싶지 않은 김 과장이었다. 결혼해서 십오 년째 살아온 지긋지긋한 공간이란 점도 그렇고, 아내가이 인간이 나가서 뒈지지 않고 이게 뭐야하며 자기 시신을 타박할 것 같은 우려에서였다. 동네 야산을 생각했지만 사람들이 많은 거기서 남의 이목들을 피해 결행한다는 게 불가능할 것 같았다. 더구나 요즈음은 봄방학이라고 학생들까지 야산을 놀러 다니고 있었다. 결국 김 과장은 지난 번 내린 눈이 여태 남아 있을이 산을 결행 장소로 정하고 오후를 기다려 차를 몰고 온 것이다. 이 산을 전에 다녀본 자신의 경험에 의하면 사람들은 오전에 등산하지, 오후 들어서 하는 경우가 없었다. 오후 시간에 이 산 아래로 차를 몰고 온 이유는 그러했다.

김 과장은 위스키 병마개를 딴 뒤 우선 한 모금 맛을 본다. 왜 이리 써? 소주처럼 달착지근하게 쏘는 맛도 아니고, 이건 그냥 쓰다. 소주 사 올 것을 그랬나? 죽는 첫 번째 순서를 밟으면서도 이렇게 생각이 많다.

 

내 사랑 닭갈비식당 안으로 들이치는 햇살이 길어졌다. 안 쪽의 냉장진열장까지 닿았다. 오후 네 시는 되겠지. 박 사장은 벽시계를 본다. 역시 오후 네 시 오 분이다. 도로 건너 산그늘 속에 있는 가게들의 불빛이 이 무렵에는 유난해 보인다.

기우는 햇살이 산의 서쪽에 강하게 달라붙으면서 산그늘의 어둠이 더욱 부각되니까 가게 불빛들이 유난하게 보이는 게 아닐까. 그건 산그늘 밖의 서녘 햇빛과 만나려고 몸부림치는 모양 같다.

내통하려고.

아내가 그 놈과 대낮에 도시의 모텔에서 만나 껴안고 뒹굴고 그러다가 시치미를 떼고 식당으로 돌아오고 그러는 줄은, 박 사장은 몰랐었다. 아내는 은행 일 따위를 본다고 정기적으로 도시를 다녀왔고, 박 사장은 그런가 보다 하고 식당만 지키고 있었다. 주인이 가게를 비우는 횟수에 비례해서 매상이 떨어지게 마련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온 마을 사람들에게 다 퍼진 아내의 바람소문인데도 혼자만 까맣게 몰랐던 건 이 식당만 도로를 건너 혼자 있는 탓이다. 웬만해서는 도로를 건널 일 없이 지내는 박 사장이니까.

그냥 집에서 살림이나 하라 할 것을, 식당의 품삯을 조금이라도 아끼려고 아내를 끌어들인 게 잘못이었다. 지금, 주방 아줌마는 모르고 있지만 박 사장은 이 식당을 도시의 아는 복덕방마다 부탁해 놓았다. 가격대가 맞으면 팔아 버리고 이 마을을 떠날 것이다. 애들 이름으로 사 놓은 도시의 아파트 두 채 중에서 한 채도 팔고 그러면 다른 데 가서 무슨 장사인들 뭣하겠나.

박 사장은 소주병이 다 비워졌으므로 다시 한 병을 갖다 마시려고 의자에서 일어나다가 콰당 넘어졌다. 주방에서 김장을 마쳐가던 아줌마가 허겁지겁 달려온다.

괜찮아요.”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비틀대며 일어나는 박 사장이다.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오후만 되면 술타령인 사람이니, 딱하다. 쯧쯧쯧. 아줌마는 혀를 차다가 말한다. “고만 마시지요.”

괜찮아요.”

하면서 박 사장은 그예 냉장 진열장으로 가서 소주 한 병을 집었다.

 

위스키 한 병을 다 비웠는데도 왜 이리 정신은 말똥말똥한 거야?

이거 중국산 짝퉁 위스키 아니야?”

하고 산 위의 김 과장은 혼잣말로 떠들어보는데 짝퉁 위스키는 아닌가 보다. 자기가 지금 떠드는 말이 라디오 방송처럼 귀에 들리니 말이다. 취한 것은 분명하다. 일어서려니까 사방이 어지럽다. 다시 너럭바위에 털썩 주저앉았는데, 몸은 휘청거리고 정신은 말똥한 이 기괴한 분리 현상이 감당하기 어렵다. 이런 몸으로는 벼랑까지 가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나무를 찾아 밧줄을 걸어놓기는 더욱 힘들 것 같다. 그예 걱 걱 울기 시작한다.

어떻게 내가 사 년 만에 폐인이 된 걸까? 사 년 전 직장에 사표를 던지고 나왔을 때만 해도 이렇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이제 마흔임에도 나이 많다고 받아주는 곳 없는 취업현실에다가,‘집안의 생계를 맡을 수밖에 없다며 어딘가를 다니기 시작한 아내, 낮잠 자기나 텔레비전 보기로 소일해야 하는 날들의 무료함 등은 나를 이 지경으로 내몰았다. 특히 아내의 변화. 최소한의 잠자리도직장 일로 피곤하다며 거부한다. 대학 후문 부근의 카페에서 주방 일을 새벽까지 보고 오느라 피곤하다는데, 얼마 전 알았지만 아내는 노래방 도우미를 다니고 있었다. 그건 사실상 매춘이다. 나는 창녀의 기둥서방이 되었다.

한 때, 여기서 멀지 않은 도시의 자동차 판매 대리점의 과장이던 사내가 지금 찬 기운이 들이치는 산의 8부 능선에 앉아 울고 있다. 이십 여 분은 울다가, 일어서서 산 아래 쪽을 내려다보니까 뜻밖에 마을 풍경이 훤히 보인다. 전에는 푸른 숲이나 무성한 나뭇잎들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풍경이, 겨우내 잎들이 떨어지니까 그렇게 훤히 보인다.

문득 오줌이 마렵다. 허연 김을 날리면서 흰 눈밭에 검은 구멍을 송송 만드는 오줌줄기. 더하는 한기에 몸을 떨고서 김 과장은 바지춤을 여몄다. 여유를 갖고 경이로운 눈길로 산 아래 마을 쪽을 내려다본다. 산기슭의 많은 집들이 지붕이나 옥상을 보이며 어둑한 산그늘 속에 있는데 오직 도로 건너 한 집만 햇빛을 받고 있다. 차를 두고 온 그 식당이다. 그 옆의 검붉은 한 점처럼 보이는 그 차. 서쪽에서부터 긴 땅거미가 깔리고 있어서, 그 식당이 혼자서 받는 지금의 햇빛도 한낮처럼 밝고 투명한 빛이 아니다. 불그레한 게 왠지 불길하다. 어둑한 산그늘 속의 집들보다, 지는 햇빛을 받는 그 식당이 오히려 음울하게 보이는 이 기괴함이라니.

지금 몇 시나 됐을까? 폴더에 시간이 나타나는 휴대폰을 바지주머니에서 찾았는데, 없다. 어떻게 된 걸까? 분명 바지주머니에 있었는데…… 차에서 내릴 때 떨어트렸나? 이럴 때가 종종 있다. 무슨 생각에 골몰하면서 차에서 내리다 보면 휴대폰이 자기도 모르게 운전석 밑에 떨어져 있었다. 이따 내려가서 찾아 봐야지. 결국 김 과장의 음울한 목적은 이런 식으로 흐지부지 되었다. 하긴 다부지게 자살할 사람이었다면 오직 죽겠다는 마음 하나로 이 산을 올랐어야 하지 않을까? 아까 민박집들 골목을 빠져나올 때부터 이런저런 것들에 신경을 썼으니, 솔직히 그 때부터 김 과장의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이제 당면한 문제는 어떻게 하산하느냐이다. 취해서 휘청거리는 몸에, 가파른 비탈길에, 어두워지는 시간에, 휴대폰도 없는 처지에.

김 과장은 취기가 빠지느라 그런지, 아니면 해가 지느라 그런지 더욱 오싹한 한기에 몸을 쭈그리고 앉아서 당면한 문제의 해결책을 생각해 본다. 그렇다. 술이 더 깰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다가, 그 때 내려가자. 갖고 온 밧줄을 이용해서 참나무에 걸었다가 풀기를 반복하면서 비탈길을 내려가면 되지 않을까? 괜히 서둘렀다가는 참나무들에 부딪치며 굴러 떨어질 텐데 중상을 입기 십상이다. 그런 일은 없어야겠지. 서두르지 말자. 깨끗하게 죽느니 만도 못한 몸의 꼴이 되어서는 안 되니까.

김 과장은 민망하게도 자기 목에 걸려고 준비했던 밧줄을 믿고 이 험난한 비탈길을 내려갈 참이다.

 

아줌마는 박 사장한테 퇴근을 허락받았다. 경기가 좋았을 적에는 늦은 밤에도 손님들이 찾았지만 요즘 같아서야 어디. 그녀는 만일 손님이 드시면 연락 주세요.”라는 말은 남기고 식당 문을 나선다.

사실, 박 사장은 소주를 세 병째 마시고 있는 중이라 종업원이 무슨 말을 해도, 다 듣지도 않고 고개부터 끄덕일 것이다. 그런 주인을 두고 종업원이 먼저 퇴근한다는 것은 안쓰럽지만 동시에 부담스럽기도 해서 그녀는 그렇게 먼저 퇴근한다. 막냇동생 나이 되는 주인이지만 남녀가 유별하지 않나. 좁은 이 마을에서 부인이 바람나서 홀아비가 된 남자와 단 둘이서 밤늦게까지 있기는 좀 뭐하다.

그녀가 도로 쪽으로 발걸음을 뗄 때 무슨 고상한 클래식 음악이 들렸다. 도로 건너 카페에서 나는 쿵쾅거리는 음악은 아니다. 뭐에 갇혀 있는 듯 답답한 느낌이 있는 음악. 그녀는 멈춰 서서 둘러보다가 옆의 주차장 구석에 있는 경차에서 그 소리가 나고 있음을 알았다. 다가가서 차 안을 살펴보니까 역시 운전석 아래에 떨어져 있는 휴대폰이 그런 음악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발길을 되돌렸다.

저녁을 지나면서, 일대는 어둠을 뒤집어쓰고 있다. 해가 떠 있을 때에는 햇빛을 받는내 사랑 닭갈비집과 그렇지 못하고 산그늘 속에 있는 가게들로 양분된 마을이었는데이렇게 밤이 되면 그런 구별이 없어지면서 모두가 한 어둠 속에서 불들을 밝히며 지내는 다정한 풍경이다.

아줌마는 가로등 불빛과 가게들 불빛이 서로 겹치거나 엇갈리느라 어지러운 도로를 건넌다. 작년 초까지만 해도 그녀는 집에서 민박을 치면서 살았다. 술을 즐기던 영감이 추운 날 뇌졸중으로 마당에서 쓰러지면서 모든 게 바뀌었다. 영감은 두 달 만에 세상을 떴지만 남은 것은 빈한한 살림과 시베리안 허스키라는 괴상한 양놈 개 한 마리. 개 사료 대기도 어려운 판에 뜸해가던 민박손님들마저 끊긴 불경기. 그녀는 그 양놈 개를 도시의 사람에게 헐값에 팔아치우고 민박 일도 닫아 버렸다.

닫고 말고도 없었다. 벌써부터 들지 않는 손님이었으니까. 그냥 고인이 소싯적 익힌 붓글씨라며 쓴 민박이란 입간판을 뒤꼍에 갖다 놓는 것으로 십여 년 된 생업을 접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와서 주방 일을 거들어 달라고 연락을 준 박 사장님이 얼마나 고마웠던지. 그런 착하고 좋은 분이 저렇게 폐인이 되어가고 있다니……. 사모님도 나쁜 분은 아니었는데. 인물도 고운데다가 마음씨도 상냥해서, 사모님을 보러 식당 단골이 되었다는 손님들도 적지 않았는데.

아줌마는 니슈퍼옆의 좁은 골목으로 들어간다. 비좁고 어두운 길이지만 수 십 년 간 다녔으니까 눈을 감고도 갈 수 있다. 그래도 조심해야지. 이웃집 할미도 지난 가을에 산으로 땔감 하러 갔다가 발목을 삐끗한 게 여태 낫지 않아 절룩이는데.

자기 집에 다 다다랐을 때다. 골목 위쪽에서 누군가 멈춰서는 모양이면서 독한 술 냄새. 그녀는 하는 수 없이 몸을 가자미처럼 옆으로 돌려 담벼락에 바짝 붙인 꼴로 한 발 한 발 올라간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만난 사람 역시 그녀처럼 몸을 담벼락에 바짝 붙이고 지나쳐 내려갔다. 지나갔는데도 여전한 술 냄새. 그리고 비릿한 피 냄새도 나는 듯싶다. 늙었으나 냄새 맡기에 관한 한 그녀는 아직도 젊었다.

감이 잡힌다. 눈도 덜 녹은 이 때 겁 없이 산에 올라 술까지 마신 사람이 하산하다가 비탈길에서 구르면서 어디를 다친 모양이다. 전에 민박 일을 할 때에는 저런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불러서 집의 옥도정기라도 발라주고 보냈었다. 안 됐으니까. 이제 그녀는 그런 마음도 다 사라졌다. 먹고 살기 어려운 지경이 되니까 마음씨도 팍팍해졌다.

아줌마가 자기 집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서 세수부터 하고 있을 때 김 과장은 경차 안에 앉아 있었다. 비탈길을 거의 다 내려와서 마음을 놓았다가 그만 발을 헛디디며 굴러 떨어졌는데…… 얼굴 오른 쪽도 까여서 피가 나다가 멈춰 있고, 발목도 시큰거리는 게 여간 아픈 게 아니다.

그래도 살아 내려오지 않았나. 역시 운전석 바닥에서 찾은 휴대폰. 문자메시지가 어서 수신하라며 깜빡이고 있고 부재중수신이라는 표식도 하나 있다. 먼저 부재중수신부터 확인해 보니까 중학교 일학년인 딸의 번호가 뜬다. 문자메시지도 딸이 보낸 것이다. 메시지는아빠 지금 어딨어?’이것뿐이다. 그 외에는 아무런 문자메시지도, 부재중수신번호도 찍혀있는 게 없다. 아내한테서도 오지 않았다. 아내는 지금쯤 화장을 떡칠처럼 하고 노래방에 나갈 채비가 아닐까? 아내와의 대화는 김 과장이 직장에 사표내고 나온 지 딱 일 년이 되던 날의 대화가 마지막이었다. 그 후로는 대화다운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사표 내고 나온 지 딱 일 년이 되던 날 저녁에 아내는 김 과장한테 말했다. “그래, 과장들은 맡은 과에서 한 명씩 줄일 직원을 알아서 적어내라 했다는데…… 그래, 고민 고민하다가 자기 이름을 적어내는 사람이 어디 있나? 당신은 여하튼 너무 마음이 약해서 탈이야.”

아내는 그런 말을, 설거지를 하면서 내뱉었다. 음식 찌꺼기를 싱크대 바닥에 버리듯이 내뱉었다. 대화도 아니고 독백이나 같았다. 그 후로 부부는 더 이상의 대화를 끊었다. 아내의 당신은 여하튼 마음이 약해서 탈이다는 말이 맞다. 나는 오늘도 눈 덮인 산까지 올라갔는데 결행하지는 못했다.

김 과장은 참담한 마음으로 앉아 있는데 이제 문제는 어떻게 집까지 가느냐이다. 이 차자동차 판매 대리점에서 근무할 때, 전시했던 것을 헐값으로 불하받았다.를 몰고 갈 수는 있다. 도시의 아파트까지 삼십 리 되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몰고 갈 수 있다. 운전경력이 십오 년이다. 다만 술 냄새가 걱정이다. 음주운전 단속에 걸렸다가는 면허정지에다가 벌금이 대단하다는데……. 백 만 원 이상은 기본이란 말을 어디서 들었던 듯싶다. 힘들게 산을 내려왔나 했더니 여전한 돈 문제. 살아 있는 한, 돈 문제를 벗어날 길은 없는가?

김 과장이 경차 안에서 그러고 있을 때 약 사 미터 거리의내 사랑 닭갈비식당 박 사장이 일을 벌였다. 식당 한 쪽 벽 위에 장식용으로 걸어둔 등산용 밧줄에 자기 목을 질끈 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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