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라이시의 1대 99를 넘어 - 부의 불평등을 바로잡는 11가지 액션플랜
로버트 라이시 지음, 안기순 옮김 / 김영사 / 2015년 6월
평점 :
절판


 로버트 라이시의 '1대 99를 넘어'의 원서 제목은 'BEYOND OUTRAGE'이다.

 우리말로 하면 '격노를 넘어'쯤 될 것이다. 분노보다 더 강도가 센 격노다. 그는 왜 이런 제목을 한 것일까? 그 이유는 이 책을 읽어보면 안다. 아니 대번에 느낀다고 해야 하나?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절대 1%에 속할 리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분명 이 책을 읽고 정말 격노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왜?

 당신이 1%의 거짓말에 속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도 의문을 가졌으리라. 열심히 일하는데 왜 삶이 조금도 나아지지 못하는 걸까?

 연례 행사처럼 보도되는 연봉 서열을 보면서 어쩌면 내 능력이 모자라서 그런 지도 몰라 생각하기도 했을 것이다. 사실 그런 보도의 목적이 바로 그것이다. 당신의 호기심을 채워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사실은 당신의 현재가 오로지 당신 탓이라는 것을 주지시키기 위함인 것이다. 괜한 음모론 아니냐고? 지금의 언론을 너무 과소평가 하는군. 푸코의 통치성에 관한 강의를 읽어보자. 그러면 알게 될 것이다. 근대 이후로 자본가 계급이 노동자의 계급의식과 집단 행동을 무력화시키기 위하여 얼마나 세밀하게 통치 기술을 조련해 왔는지.


 일례로 보험이 있다.

 보험이 순수하게 언제가 당할지 모르는 리스크로부터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 천만에! 보험이 나왔던 진짜 목적은 원래 사회가 맡았어야 할 리스크의 책임을 오로지 개인에게 전가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야 노동 계급이 똘똘 뭉치지 않을 테니까. 모든 리스크, 현재 삶의 상태를 순전히 개인 책임으로 돌려버리면 지배 계급은 그만큼 더 수월해진다. 노동자들은 실은 구조적 모순 때문에 가난해지는 것인데도 어리석게도 자기 탓으로만 생각해 더 지배 계급이 하라는 대로 할 뿐, 뭉쳐서 뭔가 변화를 이루어내려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계급 의식은 저지 되고 그만큼 집단 행동도 와해 된다. 제도 변화의 핵심은 주로 그런 쪽으로 섬세하게 튜닝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파업이 마냥 나쁜 것으로만 여기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파업이 노동자들에게 해가 되는 경우는 없다. 설령 귀족 노조의 파업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다.(사실 귀족노조란 노동자들이 분열하길 바라는 프레임에 불과하다.) 어떤 파업이든 종국엔 노동자의 지위 향상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배층은 더욱 파업이 양성화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이제는 재판을 통해 노조에 천문학적인 배상 판결을 때린다. 실직한 노동자들에게까지 어마어마한 액수의 배상금을 내도록 한다. 쌍용자동차의 해고자들과 그 가족들이 연속적으로 자살한 것은 순전히 그 때문이다. 그러니 사법살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얼마전 또 하나의 사법 살인이 있었다. 대법원이 외주로 돌린 KTX의 여승무원을 한국철도공사의 직원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판결하는 바람에 복직이 좌절되었을 뿐만아니라 1심과 2심의 승소로 받게 된 과거 4년간의 임금과 소송비용(1인당 8640만원)을 다시 토해내게 되어 절망한 나머지 다섯 살과 세 살 아이의 엄마이기도 했던 여승무원이 그만 투신 자살한 것이다. 엄마가 가장 필요했을 나이의 자식을 두고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그녀에게 정말 어려운 선택이었을 것이지만 그녀는 가족을 위해 뛰어내렸다. 그렇지 않으면 갑자기 토해내야 하는 배상액으로 인해 가족 모두가 커다란 고통을 겪을 것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녀를 투신 자살로 내몬 것은 바로 대법원이다. 그녀의 유언은 '빚만 남기고 떠나서 미안해.'였다.


 이게 비단 그녀만의 비극일까? 아니다. 어쩌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도 얼마든지 닥쳐올 수 있는 일이다.  그녀들이 이런 비극에 처해졌던 것은 노동의 유연화로 인한 것이었다. 그리고 노동의 유연화는 앞으로도 더욱 거세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얼마전에도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정규직 과보호로 비정규직을 양산한다며 정규직 과보호를 개선해야 한다고 떠들어대지 않았던가. 이것이 그들의 소망이다. 언제든 쉽게 쳐낼 수 있고 가급적 노동자 복지에 들어가는 비용을 줄이기를 바라고 있다. 그들의 소망은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에 나오는 것과 같은 상황이 되는 것이다. 너무나 많은 실업자가 있어서 아주 적은 임금으로도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부릴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언젠가 앨런 그리스펀이 말했던 대로다. 그는 말했다. '미국의 노동자에게 너무 많은 임금을 주면 다른 생각을 하게 되니 노동자들에겐 그저 삶이 약간 아슬아슬할 정도의 임금만 줘야 한다.'고.


 굳이 그런 임금 정책을 펼 것도 없이 실은 지금도 계속 노동자들은 원래 자신이 가져야 할 몫을 자본가들에게 빼앗기고 있다. 무엇보다 그건 당신의 노동생산성과 실제로 받는 임금의 격차에서 나타난다. IMF가 터지기 전까지 우리나라의 노동자들은 노동생산성이 오르면 오른만큼 실제 임금으로 돌려 받았다. 그랬기에 영화 '국제시장' 같은 이야기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당신의 노동생산성과 실질 임금의 격차가 커지고 있다. 그러니까 당신은 지금 일한 만큼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 부분을 자본가들에게 빼앗기고 있다는 뜻이다. 이제 앞에서 말한 그 '왜?'에 대한 답을 해야겠다.


 당신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삶이 전혀 나아지지 못했다고 여기는 것은 당신이 일하는만큼 전혀 돌려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선진국들은 그 격차가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심하므로 우리 역시 앞으로도 점점 더 빼앗길 것이 뻔하다. 그렇지 않으려면 1%가 아닌 99%를 위해 일하는 정권을 창출해야 하는데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니 여전히 우리의 주머니는 빈약하게 될 것이고 내수가 결코 살아나지 않을 것이니(정말 지금의 불경기가 세월호와 메르스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갈수록 더 가볍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당신이 아무리 자기 계발서를 읽고 용을 써도 바라는 미래는 결코 도래하지 않는다. 그냥 그 돈으로 몸 보신이나 하는 게 좋을 것이다. 의료민영화를 대비해야 하니.


 희망? 그런 게 과연 있을까?

 있다면 오로지 하나 당신의 행동 밖에는 없다. 그렇기에 로버트 라이시도 격노만 하지 말고 행동하라는 뜻에서 'BEYOND'를 쓴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다른 게 아니다. 착취의 노골화다. 더 뻔뻔하고 더 무제한으로 노동자들의 몫을 빼앗아 오는 것이다. 그래도 이러다 노동자들이 화내지는 않을까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신자유주의의 핵심은 푸코가 정확히 내다봤듯이 기업가 마인드를 전 노동자에게 파급하여 노동자 스스로가 자신의 모든 삶을 기업가적인 눈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다. 즉 노동자에게 경영자 코스프레를 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신에게 결코 해당될 리 없는 종부세를 가지고 반대했던 어리석은 이들이나 가난한 자들이 부자들을 걱정해 그들을 위한 정당에 투표하듯이. 그런 존재로 만들어 일체의 저항을 무력화 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의 목표인 것이다. 순응주의자들의 양산. 지금 보니 아주 잘 되고 있군 그래.


 그러니 행동의 전망은 요원하다. 신자유주의는 체계적으로 노동자들의 분노와 의지를 기화시켜왔다. 물론 월스트리트의 점령하라 운동도 있었고 지금도 유럽에선 저항이 일어나고 있지만 근본적인 개혁은 힘들다. 그러니까 미국의 루즈벨트가 했었던 그런 개혁 말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에 따르면 그 시기야 말로 미국의 전성기라고 한다. 사실 지금도 옛 세대들은 그 때를 가장 행복했던 시기로 생각한다. 하지만 자본가들에겐 아니었다. 가장 엄혹의 세월이었다. 흔한 말로 잃어버린 10년이었다. 루즈벨트가 부자들에겐 높은 세금을 매겼기 때문이다. 루즈벨트 전만 해도 대부분의 백만장자들이 요트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루즈벨트 시대엔 그런 부자를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그 돈은 모두 케인즈 이론에 따라 노동자들과 그들의 삶을 개선시키는 쪽으로 흘러 갔다. 그리하여 미국 역사상 가장 행복한 시대를 이루었다. 지금의 미국은 힘들다. 행복지수가 우리나라와 거의 비슷할 정도로 아주 낮다. 그런데 최상위 1%의 부자들은 행복하다. 세금이 50년간 계속해서 51%에서 26%의 비율로 낮아졌기 때문이다.(p. 49) 미국의 역사는 이것을 증명한다. 부유층의 세금이 많아질수록 다수가 행복해진다. 그들의 세금이 적어질수록 다수가 불행해진다는 것을. 그건 우리나라의 부자 감세도 마찬가지다.


 하나 더, 대공황 이야기를 해 보자. 대공황의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단순히 수요에 비해 공급이 너무 과잉된 탓일까? 그렇다면 왜 수요가 갑자기 줄어들었을까? 그 이유는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소비자인 노동자들의 수입이 대폭 줄었기 때문이란 걸 말이다. 실제로 그랬다. 1929년 대공황이 시작되었을 때, 수 년간 노동자들의 임금은 제자리였다. 노동시간은 여전했고 노동생산성은 올랐으나 그들은 증가한 만큼 돌려 받지 못했다. 그 대부분의 이익은 기업과 부유층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노동자들은 임금이 더이상 늘지 않았지만 여전히 현재 생활 수준을 유지하려 했고(대부분 그런 생활의 관성이 있는 고로 어찌할 수 없다.) 덕분에 부채의 늪에 깊숙이 빠졌다. 대공황은 그러다 터진 것이다.


 우리나라 경제학자들이 계속해서 가계 부채가 심각한 수준이라고 경고를 보내는 것도 이런 역사적 경험 때문이다.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도 대공황과 판박이였다. 그러니 우리만 예외라고 섣불리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지그문트 바우만에 따르자면 이런 상황은 쉽게 개선되지 않을 것 같다. 그의 말에 의하면 현재의 자본주의는 어디까지나 부채의 지속적인 증가로 지탱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는 지금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빚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야말로 은행이 가장 혐오하는 고객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니 우리나라의 정부가 계속해서 금리를 낮추는 것이다. 그들이 언제나 말하는 국제경제의 불안 때문이 아니다. 부채를 늘려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 편이 그들에게 훨씬 이익이 되니까.


 우리들은 그저 세금을 내는 도구에 불과하다. 그 세금으로 그들은 배를 불린다. MB 시절의 4대강, 사자방. 그렇게 우리의 세금은 그들의 이익으로 전환된다. 이번에도 최경환 부총리는 15조의 추가경정예산을 요구했다. 경기를 진작시키겠다는 게 이유다. 똑같은 이유로 지금까지 최경환이 가져다 쓴 예산은 3년 동안 모두 90조. 그 천문학적 액수의 돈을 다 어디에 썼는지 경기는 3년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살림 형편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고 내수가 죽어 자영업자의 수는 계속 줄어들고 있는 형편이다. 물론 그 돈은 서민이 아니라 기업들에게로 대부분 흘러갔을 것이다. 이미 유통기한이 지난 낙수효과를 운운하면서. 어떤 은행 광고처럼 기업이 살아나면 일자리가 늘어날 것이라 말하지만 실제론 망상에 불과했다. 기업이 얻은 이익은 전혀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다. 현대자동차처럼 부동산을 구입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저 쌓아만 두었다. 사실 그들이 시설 투자와 고용을 늘리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봤자 아무런 이익이 안 되기 때문이다. 시설을 확장하고 고용을 늘려 아무리 생산을 많이 해봐야 사 주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낙수 효과가 내수를 진작시키지 않는다.

 진실은 거꾸로다. 내수를 먼저 진작시켜야 낙수효과도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임금은 늘 제자리다. 수요가 줄어드니 물가는 계속 오른다. 어떤 당의 대표는 애국하는 마음으로 이번 휴가는 외국으로 가지 말고 우리나라에서 즐기자고 했다는데 과연 외국으로 휴가를 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알아는 보았는 지 모르겠다. 아니면 그에게 국민이란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만 해당되거나.


 어쨌거나 최저임금은 겨우 6,030원.(가장 행복한 나라로 늘 꼽히는 노르웨이의 최저 임금은 2만원. 최저 임금은 다수의 행복과 비례한다. 극소수의 행복과는 반비례하더라도.) 앞은 깜깜하다. 그래도 아직도 많은 이들이 나만은 예외일 것이란 마음으로 살아갈 것이다. 분노해야 할 때 침묵하고 행동해야 할 때 무임승차만 바랄 것이다. 그렇게 언제까지나 우리나라는 변하지 않을 것이고 예외이길 꿈꾸었던 사람들 모두에게 무자비한 현실로 밀어닥칠 것이다. 셜리 잭슨의 '제비뽑기'처럼 뽑은 그 순간엔 아무리 저항해도 이미 늦었다.


 * 로버트 라이시의 책을 읽고 화가 너무 난 나머지 새벽의 멜랑꼴리한 기분도 돕고 해서 책 내용과는 상관없이 그동안 생각하던 것들을 마구 써버리고 말았는데(그래도 책의 기본 논지와는 통하기는 하는데...) 어쩌면 나중에 이 글을 지워버릴 지도 모르겠다. 이런 글은 써봤자 기분만 꿀꿀해진다. 보면 꿀꿀해지는 글을 일부러 놔 둘 필요는 없겠지. 아, 모르겠다. 어쨌든 지금은 나중에 이 책의 리뷰를 다시 쓸 지도 모르겠다는 말만 해 놓기로 하자. 가급적 적은 분들이 이 글을 보기를...(뭐, 어차피 내 서재는 메르스 때의 평택처럼 인적이 뜸한 곳이니 괜한 바람 같긴 하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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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판미동 출판사 입니다.

출간 도서 <한글 대학·중용>, <한글 맹자>의 서평단을 모집합니다.



시대를 초월한 삶의 교과서를 한글로 만나다!

대한민국 대표 인문학자 신창호 교수가 풀어낸 내 삶을 이끄는 <한글 사서> 시리즈 완결!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그 기준점의 하나로 인문학을 꼽는다. 그러나 막상 고전을 읽자니 그 벽이 너무 높고, 고전을 자기계발로 풀어낸 서적들을 보자니 뭔가 아쉽다.

이번에 판미동에서는 앞서 출간한 『한글 논어』에 이어 『한글 대학』과 『한글 중용』, 『한글 맹자』를 출간하면서 <한글 사서> 시리즈를 완간하였다.

특히, 『대학』과 『중용』을 묶어 공자의 핵심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처음과 끝을 읽어볼 수 있게 하였다. 대한민국 대표 인문학자인 신창호 교수는 ‘사서’의 읽는 순서로, 『대학』을 앞에 두고, 『논어』, 『맹자』를 가운데 두며, 『중용』으로 마무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먼저 『대학』을 통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학문과 정치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규모를 정하고, 그 뒤 『논어』를 읽으면서 삶의 근본을 세우며, 그 다음으로 『맹자』를 읽어 인생에서 그 공부가 어떻게 응용되었는지 살핀다. 이런 작업을 거친 후 마지막으로 『중용』을 통해 옛사람들의 미묘한 지혜를 구한다. 



이벤트 참여방법

 

1. 이벤트 기간: 7월 15일 ~ 7월 21일 (당첨자 발표 : 7월 22일)

발송: 7월 23일


2. 모집인원 : 3명 (상기 2권 모두 증정드립니다)


3. 참여방법

- 이벤트 페이지를 스크랩하세요.(필수)

-책을 읽고 싶은 이유와 함께 스크랩 주소를 댓글로 남겨주세요.


4. 당첨되신 분은 꼭 지켜주세요.

- 도서 수령 후, 10일 이내에 '개인블로그'와 '알라딘' 에 

도서 리뷰를 꼭 올려주세요.

(미서평시 서평단 선정에서 제외됩니다)



요즘 중국에 대한 관심이 많아져서 이것저것 읽어보고 있는 참인데 문득 사서 중에 제대로 읽은 것은 논어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기서 특히 대학, 중용이 관심이 가는데 학문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서 공자가 어떻게 설명하는지 봐두고 싶다. 지금만큼 학문이 권력의 시녀가 되었던 적이 없으며 학문이 권력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된 적도 없는 것 같아서다. 읽고 거기에 대해 좀 많이 생각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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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옛상인의 지혜 인간사랑 중국사 5
리샤오 지음, 이기흥 옮김 / 인간사랑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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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금했었다. 상인의 '상'자가 왜 하필이면 '상' 나라의 '상'자일까? 까닭이 있더라.

 알고보니 슬픈 역사의 결과물이었다. 중국 고대 왕조인 상은 결국 주나라에게 망한다. 나라가 망했으니 특히나 상나라의 귀족들은 더이상 예전처럼 살 수 없었다. 그들은 농사도 지을 줄 몰랐고 이렇다할 수공업 기술도 가지지 못했다. 당장 먹고 살 일이 막막했다는 뜻이다. 하여 그들은 조상 대대로 내려온 전통이기도 한 장사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주나라에서 직업적으로 장사를 했던 이들은 대부분 이렇게 상나라 사람이었다. 그래서 장사하는 이들을 오늘도 '상인'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인간사랑에서 중국사 시리즈 다섯번째로 나온 '중국 옛 상인의 지혜'를 읽다가 알게 된 사실이다.


 제목처럼 이 책은 중국의 상인 역사를 담고 있다.

 모조리 담는 것은 아니고 사마천의 '사기' 중 '화식열전'을 저본으로 하여 강의하는 형식의 책이다. 아니나 다를까 원래 중국의 국영방송 cctv에서 강연했던 내용이라고 한다. 어쩐지 알기 쉽고 요점 정리가 잘 된 것 같더라니. 사기를 읽어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화식열전'은 열전의 거의 마지막에 나온다. 순서가 그렇게 된 것은 아마도 상공업을 경시하던 당대 가치관의 반영으로 보인다. 한나라에서도 상앙이 실시한 '중농억상' 정책은 여전히 위력을 떨치고 있었으니까. 사실 이렇게 상공업의 역사를 기술한 책조차 '사기'와 '한서' 밖에는 없다. 역사적으로는 '화식열전'이 최초의 기록이다. 어쩌면 이건 궁형을 당한 사마천의 울분이 낳은 반골 기질 탓인지도 모른다. 하여간에 그는 상공업을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주요한 수단으로 여겼고 춘추전국시대 말기부터 한나라에 이르기까지 모두 52명의 상공업인의 역사를 '화식열전'에 기록했다. 제목의 '화식'이란 재화의 '화'자와 불어날 '식'의 결합으로 재화가 쉼없이 늘어난다는 것으로 상인으로 성공한 자들을 뜻한다. 그러나 52명 모두가 상세히 기술되는 것은 아니고 그 중 10명만 자세히 기록할 뿐 나머지는 간략하게 정리하거나 이름만 올린 경우도 있다.


 아무튼 중국정법대학 교수인 저자 리샤오는 여기서 '화식열전'에 기록된 상인들을 통해서 오늘날의 상인들이 본받으면 좋을만한 것들을 중심으로 들려주고 있는데 '화식열전' 맨 앞에 나오는 주나라의 강자아(흔히 강태공이라고 잘 알려진)부터 한나라의 복식까지 7명(상성으로 추앙받는 범려는 무려 두 챕터를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다.)과 전통적으로 국가의 중요한 치부책이었던 '염철(소금과 철)'에 따로 한 꼭지를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고 인물만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그 인물이 활약했던 당대 상업환경과 그 이유에 대해서도 조목조목 짚어주기에 꽤나 얻는 게 많고 그래서 읽는 맛이 제법 나는 책이다. 대표적으로 중국 영화에서 친구를 말할 때마다 듣게 되는 '붕우'가 실은 상행위에서 나온 말이었다는 것과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관포지교'가 단순히 우정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 실은 사람을 경영하는 CEO의 자세를 보여주는 일화였음을 아는 것은 느낌이 새로웠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여 말하자면 특히나 인상 깊었던 것은 범려였다.

 그는 '오월동주'란 고사성어로도 유명한 오나라와 월나라의 대립 시절, 패배해 오왕 부차의 똥까지 먹었던 월왕 구천을 도와 오나라를 멸망시킨 장본인이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범려가 한 권의 책대로 한 것이었다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계연지책'이다. 그는 나중에 월나라가 기틀을 잡자  '계연의 책략은 모두 일곱가지인데 월나라에선 그 중 다섯가지만 쓰고도 뜻을 이루었다. 나라에서 효과를 보았으니 이제 집안을 다스리는데 쓰리라.'라며 모든 권세를 내려놓고 낙향하는데 월왕이 '그대가 가는 것은 하늘이 이 월나라를 버리는 것과 같으니 제발 여기 남아서 우리 나라를 분할하여 다스리도록 합시다. 만일 그래도 가겠다면 그대의 처자식은 모두 목숨을 잃을 것이오.'라며 붙잡았으나 범려는 뜻을 굽히지 아니하였고 결국 아내와 아이, 하인 몇 명만 데리고 도주한다. 그렇게 거의 가진 것 없이 새로운 삶을 시작했지만 그는 염전과 수산물의 무역으로 크게 성공하여 거부가 되었다. 하지만 이 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가 돈이나 성공에 연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마천은 범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열아홉 해 동안 세 번 큰 돈을 모았지만 또 몇 차례나 가난한 친구와 먼 친척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니까 그가 세 번이나 큰 돈을 모으게 된 것도 사업이 실패해서가 아니라 돈을 모두 다른 이들에게 나눠주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는 벌고 쌓아두는 사람이 아니라 나눠주기 위해 버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돈이란 '계연지책'이 누누이 강조하는 대로 저장의 대상이 아니라 순환의 흐름이었다. 하여 사마천은 그를 '자기가 가진 재산을 어진 덕으로 널리 나누어주기를 좋아한 군자'라며 크게 기렸다고 한다. 범려가 무려 상성으로 추앙받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러고 보니 조선 최고 거상이라 칭했던 김만덕이 생각난다. 중국보다 더 심한 '중농억상'에다 가부장제가 강력했던 조선에서 누구의 도움도 바랄 수 없는 고아로 태어나 여인의 몸으로 그만한 거상이 된 것도 대단하지만 그렇게 마련한 재물을 모두 백성의 구휼을 위해 아낌없이 베풀었다는 것에서 더욱 놀랄만한 인물이었다.


 얻는 것 보다 주는 게 더 어려운 법이다.

 우리나라 최고 부자라는 삼성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상속세를 탈루하고자 전환사채라는 법망의 구멍을 교묘히이용, 단 46억으로 에버랜드를 차지하고 그 에버랜드의 지분으로 삼성을 장악했던 것과 똑같이 삼성물산을 통해 삼성을 지배하고자 이번엔 제일모직으로 사명을 바꿔 그 주식의 가치를 세배나 뻥튀기 해 삼성물산과 무리한 합병을 했다. 언론을 동원하여 합병을 가로막는 헤지펀드 엘리엇을 공격하는 한편 합병만 하면 주식의 가치가 상승하리라 선전했지만 현재 결과는 거꾸로 주가가 추락하는 중이다. 캐나다 연기금을 비롯한 해외 장기 투자자들이 삼성에 등을 돌렸다고도 한다.


 문득 원숭이 잡는 법이 떠오른다.

 구덩이에 원숭이가 좋아하는 곡식을 갖다두고 위를 단단한 판자로 덮은 다음 원숭이 손 하나 정도만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을 만들어 둔다. 원숭이가 곡식 냄새를 맡고 구멍 안으로 손을 집어 넣어 곡식을 잡는다. 그런데 곡식을 잡느라 움켜쥔 손은 구멍을 빠져나오지 못한다. 곡식을 버리면 손은 쉽게 빠져나올 수 있지만 원숭이는 손에 잡은 곡식을 놓치기 싫어 계속 움켜쥐고 있다가 잡힌다는 것이다. 상업이라는 게 이 원숭이와 같지 않을까? 시간 문제일 뿐 움켜쥔 손은 언젠가 화를 부른다. 삼성의 이번 합병은 국제의 신임을 잃었고 그것은 언젠가 타격으로 돌아올 것이다. 지금도 과도한 대출을 받아 하루가 멀다하고 불안에 빠져있는 하우스푸어처럼 소유의 집착은 더 큰 고통을 양산한다. 역사에 이름을 올린 거상들은 꼬리인 돈을 쫓지 않았다. 보다 큰 뜻을 품고 내어주는데 힘쓰다 보니 절로 돈이 따라온 격이었다. 절제와 포기 그리고 베품이 사업 확장, 수입 확대 그리고 세습 경영보다 더 중요했다. 바로 눈 앞의 이익이 아니라 보다 멀리 볼 수 있었던 자들. 무엇보다 그런 안목이 그들을 거상으로 만든 원동력이었다.


 문자 그대로 물질 만능이요, 배금주의의 시대.

 날로 탐욕스러워지고 천박해져만 가는 이 자본의 시대에 부의 진정한 의미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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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주 연속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10년의 기다림단 한 순간의 만남

눈먼 프랑스 소녀와 독일 고아 소년이 간직한  나는 이야기


2차 세계 대전의 참혹한 경험에 얽히고설킨 이야기를 뛰어난 상상력으로 그려 낸 소설. 단순한 문체와 우아한 구성으로 기술의 힘과 인간 본성에 대해 탐색한다.—퓰리처상 선정단

2015년 퓰리처상 수상작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장님 소녀 마리로르와 고아 소년 베르너가 2차 세계 대전 전후로 겪는 10여 년간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다. 아름다운 문체와 감동적인 플롯, 철저한 조사를 바탕으로 한 실감 나는 묘사로 언론과 평단의 큰 주목을 받았으며, 수많은 미국 독자의 심금을 울렸다. 2014년 봄 출간 이후 2015년 여름 현재까지 1년 넘게 《뉴욕 타임스》와 아마존 베스트셀러 순위권을 지키며 《뉴욕 타임스》 ‘올해의 책’ 10권에 선정되었다는 사실이 그 열광적인 반응을 뒷받침해 준다. 미국 내에서만 100만 부 넘게 판매되고 39개국에 판권이 팔리는 쾌거를 이루었으며, 지난 6월 ‘앤드루 카네기 메달 상’을 수상하면서 다시 한 번 대중성과 문학성을 입증받았다.

수차례 문학적 모티프가 되어 왔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완전히 새로운 상상력, 영화 시나리오처럼 눈앞에 생생히 그려지는 인물들의 행동과 심리, 코맥 매카시를 닮은 짧고 정곡을 찌르는, 함축적인 표현과 빠른 장면 전환을 통한 플롯 전개, 클라이맥스와 에필로그를 통한 진한 여운까지,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은 이 시대 독자를 매료시킬 모든 조건을 갖춘 소설이다. 읽다 보면 자연스레 영화가 떠오르는 작품으로, 실제로 출간 직후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트루먼 쇼」, 「클로저」, 「소셜 네트워크」등을 제작한 스콧 루딘 감독이 영화 판권을 사들여 영화화를 계획 중이기도 하다.

 

<이벤트 참여방법>
 
1. 이벤트 기간
- 2015년 7월 14일 ~ 7월 19일 
- 당첨자 발표 : 7월 20일 (리뷰 작성 기간 : ~8월 3일)

 
2. 모집인원 
- 20명

 

3. 참여방법
- 이벤트 페이지를 자신의 개인블로그/알라딘 블로그에 스크랩 해주세요.(필수)
- 서평단 응모 링크(https://goo.gl/wiEUIv)를 클릭하여 설문지 작성
- 책을 읽고 싶은 이유와 함께 스크랩 주소를 댓글로 남겨주세요.
 

4. 당첨자 미션
- 도서 수령 후, 14일 이내에 개인블로그에 도서 리뷰를 올려주세요.
-서평 링크를 댓글로 달아주시면 됩니다.
- 서평이 등록되지 않는 경우 추후 서평단 선정에서 제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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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형제들에게 전화를 거네 민음사 모던 클래식 72
요나스 하센 케미리 지음, 홍재웅 옮김 / 민음사 / 201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낯선 경험. 소설은 꼭 지문은 모조리 생략된 채,  대화만 나와 있는 희곡 같다. 스웨덴의 기대주라는 요나스 하센 케미리라는 작가의 소설이다. 제목은 '나는 형제들에게 전화를 거네'. 우리 나라 명동과 같은 스톡홀롬의 드로트닝가탄에서 실제로 일어난 자살 폭탄 테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주인공은 아모르. 그는 아랍 청년이다. 소설은 온전히 그의 내면으로만 채워져 있다. 전화로 자살 폭탄 테러 소식을 전해 들은 그는 불안에 떤다. 테러는 자기와 같은 아랍인의 소행이었고 사람들이 자신을 그 테러범으로 오인할까봐 두려운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현재 규정의 폭력을 당하고 있다. 아랍인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아모르가 가진 모든 개성은 말살당하고 오롯이 그들이 규정한 '아랍인'의 틀에 끼워 맞춰진 형태로만 존재하게 되는 폭력. 아랍인에 의한 테러가 발생할 때마다 아모르는 유주얼 서스펙트가 되어 그런 폭력을 감내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아모르가 실제 그런 폭력을 당하는 것은 아니다. 의심과 감시의 시선 그리고 경멸과 냉대가 그를 따라다니지는 않는다. 모든 것은 오로지 그의 내부에서만 일어난다. 요나스 하센 케미리가 소설의 형식을 이렇게 만든 것도 바로 그래서다. 그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규정의 폭력에 너무 길들여진 나머지 이제 그것이 너무도 깊이 내면화된 나머지 외부의 공격이 없어도 자신이 먼저 자기 검열부터 하게 되어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자의 내면인 것이다.  마치 조건 반사와도 같은 그 과정을.


 그렇게 아모르는 분단된다. 온전한 자신과 규정당한 자신으로 폭력적으로 갈라진다. 그 규정에 저항하고자 그는 친구와 옛 애인과 전화를 하면서(실제로 하는 지는 알 수 없다. 내 생각엔 그 모든 대화가 실은 환상인 것 같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부인한다. 친구 샤비를 헬륨이란 원소로 부른 그는 샤비가 그럼 너는 어떤 원소냐고 묻자 우눈트룸이라고 대답한다.


 그게 뭔데?

 합성 원소인데, 아직 확정되지 않아서 임시로 붙여 놓은 이름이야. 원자번호는 113이야. 원소 기호는 Uut (p. 22)


 그는 정말 그렇게 되고 싶어 한다. 확정이 아니라 임시의 존재. 규정의 그물을 바람처럼 빠져나갈 수 있는 존재. 그래서 더이상 자기 검열로 인한 공포를 느끼지 않아도 되는 존재.


 그가 스토킹했던 옛 여자 친구인 발레리아가 그에게 한 말 그대로 자신을 도시의 똑같은 일부로 만드는 규정의 마비 가스로부터 달아나려 한다.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에 넌 계속해서 집착하고 있는 거야. 나를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그 사랑을, 이제는 바로 네가 끝내야만 해. 나는 존재하지 않아, 너는 나를 고정관념으로 만들어 놨어. 그러는 바람에 상상 속에 만들어 놓은 나와 실제의 나는 결코 대응이 안 되는 거야, 알아듣겠어? (p. 86)


 알아듣겠어?

 발레리아가 아모르에게 하는 말은 사실 작가 케미리가 스웨덴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다. 헤닝 만켈의 쿠르드 발란더 형사 시리즈가 잘 보여줬듯이, 또 스티그 라르손이 '밀레니엄 시리즈'가 여실히 드러냈듯이 스웨덴의 인종 차별은 뿌리가 깊고 심각한 상황이다. 이웃 노르웨이에서 일어난 한 인종차별주의자에 의한 이민 자녀 학살극이 그저 강 건너 불구경할만한 사건이 아닌 것이다. 케미리의 이 소설은 실제 일어난 테러로 인해 더욱 심각해질 인종 차별에 경종을 울리기 위하여 이렇게 규정의 폭력을 당하는 자의 내면을 드러낸 것이다.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말하는 존재에 대한 모든 규정이 당하는 자들에겐 얼마나 묵직하고 둔중하게 영향을 끼치는 지 경험할 수 있도록.


 정체성의 분단과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사념의 혼동 그리고 해소할 길 없는 불안.

 이런 것들 모두가 신체의 멍과도 같은 정신의 상흔이 되는 것을 보게 한다.

 그리고 그런 규정의 폭력을 행하는 자들 또한 당하는 사람만큼이나 위험하다는 것을 내비친다.


 당하는 자들과 똑같이 가해자들 역시도 자신의 고유함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자신이 개체성을 보존할 수 없듯이 가해자도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 도시의 일부가 되기 위해 늘 똑같은 연기를 해야만 하므로 개체의 고유성을 잃어버릴 수 밖에 없다. 그러기에 아모르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난 맹세해. 너희같이 비겁한 사람들은 모두 색깔을 고백하지 않고 스며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하잖아. 너희를 심판하는 날이 올 거야, 기다려 봐. 너희를 박살내고 말 거야. 알아들었어?(p. 110)


 케미리는 인종 차별을 행하는 사람들 역시 처한 상황은 피해자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 본다. 그러므로 분리 보다는 포용을, 증오 보다는 이해를 촉구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대화를 할 수밖에 없는 전화가 나타나는 이유이며 소설 전부가 대화로 이루어진 것의 까닭이다.


 분명 낯선 형식의 소설이다. 하지만 그런 생경함이 이 책을 끝까지 읽는데 아무런 문제가 안되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 가장 갈등을 낳는, 하여 본질이라고 불러도 좋을 차별에 대해서 포를 떠서 말린 오징어처럼 오롯이 드러나는 당하는 자의 심리를 통해 공감을 바탕으로 천천히 실타래를 풀듯 조금씩 우리의 사유를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설령 이야기나 문장이 암호문 같다고 하더라도 그 말을 낚시 바늘처럼 꿰어 이끌어내었을 저의는 우리도 한 번쯤 겪어봤을 법한 정황을 가리켜 나를 거기에 대입시키기 때문이다. 내 말은 이 소설이 꼭 인종차별에만 해당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계층, 서로 다른 성별, 서로 다른 종교, 서로 다른 세대 간에도 얼마든지 통용 가능하다. 그 모든 지점마다 규정의 폭력은 쉽게 자행될 수 있으므로.


 그런 곳마다 이 소설은 경고의 표지판을 세우려 한다. 타인을 향한 규정의 폭력은 반드시 자신에게로 되돌아 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불과 136페이지 밖에 안 되는 짧은 소설이지만 여운은 제법 오래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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