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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형제들에게 전화를 거네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72
요나스 하센 케미리 지음, 홍재웅 옮김 / 민음사 / 201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낯선 경험. 소설은 꼭 지문은 모조리 생략된 채, 대화만 나와 있는 희곡 같다. 스웨덴의 기대주라는 요나스 하센 케미리라는 작가의 소설이다. 제목은 '나는 형제들에게 전화를 거네'. 우리 나라 명동과 같은 스톡홀롬의 드로트닝가탄에서 실제로 일어난 자살 폭탄 테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주인공은 아모르. 그는 아랍 청년이다. 소설은 온전히 그의 내면으로만 채워져 있다. 전화로 자살 폭탄 테러 소식을 전해 들은 그는 불안에 떤다. 테러는 자기와 같은 아랍인의 소행이었고 사람들이 자신을 그 테러범으로 오인할까봐 두려운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현재 규정의 폭력을 당하고 있다. 아랍인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아모르가 가진 모든 개성은 말살당하고 오롯이 그들이 규정한 '아랍인'의 틀에 끼워 맞춰진 형태로만 존재하게 되는 폭력. 아랍인에 의한 테러가 발생할 때마다 아모르는 유주얼 서스펙트가 되어 그런 폭력을 감내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아모르가 실제 그런 폭력을 당하는 것은 아니다. 의심과 감시의 시선 그리고 경멸과 냉대가 그를 따라다니지는 않는다. 모든 것은 오로지 그의 내부에서만 일어난다. 요나스 하센 케미리가 소설의 형식을 이렇게 만든 것도 바로 그래서다. 그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규정의 폭력에 너무 길들여진 나머지 이제 그것이 너무도 깊이 내면화된 나머지 외부의 공격이 없어도 자신이 먼저 자기 검열부터 하게 되어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자의 내면인 것이다. 마치 조건 반사와도 같은 그 과정을.
그렇게 아모르는 분단된다. 온전한 자신과 규정당한 자신으로 폭력적으로 갈라진다. 그 규정에 저항하고자 그는 친구와 옛 애인과 전화를 하면서(실제로 하는 지는 알 수 없다. 내 생각엔 그 모든 대화가 실은 환상인 것 같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부인한다. 친구 샤비를 헬륨이란 원소로 부른 그는 샤비가 그럼 너는 어떤 원소냐고 묻자 우눈트룸이라고 대답한다.
그게 뭔데?
합성 원소인데, 아직 확정되지 않아서 임시로 붙여 놓은 이름이야. 원자번호는 113이야. 원소 기호는 Uut (p. 22)
그는 정말 그렇게 되고 싶어 한다. 확정이 아니라 임시의 존재. 규정의 그물을 바람처럼 빠져나갈 수 있는 존재. 그래서 더이상 자기 검열로 인한 공포를 느끼지 않아도 되는 존재.
그가 스토킹했던 옛 여자 친구인 발레리아가 그에게 한 말 그대로 자신을 도시의 똑같은 일부로 만드는 규정의 마비 가스로부터 달아나려 한다.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에 넌 계속해서 집착하고 있는 거야. 나를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그 사랑을, 이제는 바로 네가 끝내야만 해. 나는 존재하지 않아, 너는 나를 고정관념으로 만들어 놨어. 그러는 바람에 상상 속에 만들어 놓은 나와 실제의 나는 결코 대응이 안 되는 거야, 알아듣겠어? (p. 86)
알아듣겠어?
발레리아가 아모르에게 하는 말은 사실 작가 케미리가 스웨덴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다. 헤닝 만켈의 쿠르드 발란더 형사 시리즈가 잘 보여줬듯이, 또 스티그 라르손이 '밀레니엄 시리즈'가 여실히 드러냈듯이 스웨덴의 인종 차별은 뿌리가 깊고 심각한 상황이다. 이웃 노르웨이에서 일어난 한 인종차별주의자에 의한 이민 자녀 학살극이 그저 강 건너 불구경할만한 사건이 아닌 것이다. 케미리의 이 소설은 실제 일어난 테러로 인해 더욱 심각해질 인종 차별에 경종을 울리기 위하여 이렇게 규정의 폭력을 당하는 자의 내면을 드러낸 것이다.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말하는 존재에 대한 모든 규정이 당하는 자들에겐 얼마나 묵직하고 둔중하게 영향을 끼치는 지 경험할 수 있도록.
정체성의 분단과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사념의 혼동 그리고 해소할 길 없는 불안.
이런 것들 모두가 신체의 멍과도 같은 정신의 상흔이 되는 것을 보게 한다.
그리고 그런 규정의 폭력을 행하는 자들 또한 당하는 사람만큼이나 위험하다는 것을 내비친다.
당하는 자들과 똑같이 가해자들 역시도 자신의 고유함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자신이 개체성을 보존할 수 없듯이 가해자도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 도시의 일부가 되기 위해 늘 똑같은 연기를 해야만 하므로 개체의 고유성을 잃어버릴 수 밖에 없다. 그러기에 아모르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난 맹세해. 너희같이 비겁한 사람들은 모두 색깔을 고백하지 않고 스며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하잖아. 너희를 심판하는 날이 올 거야, 기다려 봐. 너희를 박살내고 말 거야. 알아들었어?(p. 110)
케미리는 인종 차별을 행하는 사람들 역시 처한 상황은 피해자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 본다. 그러므로 분리 보다는 포용을, 증오 보다는 이해를 촉구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대화를 할 수밖에 없는 전화가 나타나는 이유이며 소설 전부가 대화로 이루어진 것의 까닭이다.
분명 낯선 형식의 소설이다. 하지만 그런 생경함이 이 책을 끝까지 읽는데 아무런 문제가 안되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 가장 갈등을 낳는, 하여 본질이라고 불러도 좋을 차별에 대해서 포를 떠서 말린 오징어처럼 오롯이 드러나는 당하는 자의 심리를 통해 공감을 바탕으로 천천히 실타래를 풀듯 조금씩 우리의 사유를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설령 이야기나 문장이 암호문 같다고 하더라도 그 말을 낚시 바늘처럼 꿰어 이끌어내었을 저의는 우리도 한 번쯤 겪어봤을 법한 정황을 가리켜 나를 거기에 대입시키기 때문이다. 내 말은 이 소설이 꼭 인종차별에만 해당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계층, 서로 다른 성별, 서로 다른 종교, 서로 다른 세대 간에도 얼마든지 통용 가능하다. 그 모든 지점마다 규정의 폭력은 쉽게 자행될 수 있으므로.
그런 곳마다 이 소설은 경고의 표지판을 세우려 한다. 타인을 향한 규정의 폭력은 반드시 자신에게로 되돌아 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불과 136페이지 밖에 안 되는 짧은 소설이지만 여운은 제법 오래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