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킬
아밀 지음 / 비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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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갇힌 여인'. 이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 5권의 부제다.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성은 종종 그러한 존재로 묘사되곤 했다. 대표적인 것이 샬럿 브론테가 쓴 '제인 에어'에 나오는 '다락방의 미친 여자'일 것이다. 남편에 의해 갇혀졌던 그 여인은 자신의 너무 강한 독립적인 개성으로 그렇게 되었다. 그 개성이 남성중심사회가 만들어 놓은 틀 안에 갇히길 거부하였기에 내면의 갈등이 광기로 치닫게 된 것이다. 로드킬은 도로라는 인간 문명이 만든 공간에서 일어난다. 야생 생물이 인간이 그어놓은 경계를 뛰어넘어 인간이 만든 공간에서 자신의 야성을 드러낼 때 로드킬의 운명은 뒤따른다. 


 이러한 로드킬의 궤적은 여성에게도 있다. 여성 또한 남성중심사회가 규정한 틀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존재가 되려할수록 '제인 에어'에 나오는 다락방의 미친 여자처럼 광기의 존재로 치부되어 '로드킬'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적인 영역에서 배제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로드킬은 독립적인 여성이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을 경우 만나게 되는 항존하는 위협이라 할 수 있다. 아밀이 단편집의 표제작으로 '로드킬'을 가져 온 것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단편집, '로드킬'엔 여섯 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구체적인 소개를 하기 보단 이 단편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에 먼저 주목하고 싶다. 일단 여성이 있다. 그들을 가두는 사회 주류 세력이 있다. 주인공 여성은 그런 사회에 위화감을 가지며 그들에게 규정 당한 존재로 남는 것을 거부한다. 적극적 혹은 소극적으로 저항하다 끝내 그런 사회와 단절한다.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길을 용기 있게 선택하는 것이다. 하지만 낙관적인 미래만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다. '로드킬'처럼 아주 비극적인 결말도 아가리를 크게 벌리고 있다. 두 번째 단편, '라비'의 결말처럼.


 그런데도 잔류를 거부한다. 마치 결과야 어떻게 되든, 탈주하려는 몸짓 자체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실은 남아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소설에서 그리고 있는 세상이란,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남으려는 존재에겐 더없이 지옥이기 때문이다. 그 사회는 강자와 약자로 나뉘어지는, 철저한 이분법적 체제다. 지배와 순종만이 유일하게 통하는 규칙이다. 그런 세상에서 여성 같은 약자들은 강자가 규정한 존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로드킬'에선 남자에게 간택될 수 있는 전형적인 신부의 모습이 되어야 하고, '외시경'의 아내는 작가로 등단까지 했지만 책 읽는 것조차 남편에게 금지 당한다. 하나같이 자신들이 그러는 이유로 '보호'를 내세운다. 하지만 그건 보기에만 좋은 허울이고 정말은 오히려 자기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그들도 아는 것이다. '외시경'의 아내가 그랬던 것처럼, 자립한 여성들의 강한 자의식 아래에서 희생당할 것임을.



아밀의 '로드킬'을 읽으면서 마치 BGM처럼 떠올렸던 노래는 

루신다 윌리엄스의 'CAR WHEELS ON A GRAVEL ROAD'였다.


Can't find a damn thing in this place
Nothing's where I left it before

(....)

There goes the screen door slamming shut
You better do what you're told. (가사 중에서)



 하지만 아무리 억누르려 해도 '오세요, 알프스 대공원으로'의 강시병처럼 막을 수는 없다. 이솝 이야기에도 잘 드러나듯이, 억지로 길들이려는 건 더 강한 반발만 부를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야기를 만든다. 날조해 유포한다. 그들이 보호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걸 그것을 통해 납득시킨다. 스스로 호랑이가 아니라 생쥐라고 여기도록 하는 것. 이것이 바로 강자들이 만든 이야기의 목적이다.


 그래서 작가에겐 담론이 중요해진다. 이건 여섯 단편 모두에게 유장하게 흐르는 강물이다. 이야기에 이야기로써 맞서는 것.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이들은 규정과 강요를 통해 주입되는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경험과 생각으로 직접 이야기를 창출한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신화에 고백으로 대항한다. 그 분투 속에서 자신을 빚어나간다. 소설에서 탈주의 성공 여부는 도달 여부에 달려 있지 않다. 발을 선 밖으로 내딛는 자체에 이미 탈주는 완성되는 것이다. 육체가 아니라 내면의 해방이야말로 진정한 구원이기 때문이다. 


 다시 처음에 말한 '갇힌 여인'으로 돌아가 본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그 소설에서 갇힌 여인은 알베르틴을 말한다. 하지만 프루스트는 이야기의 전개를 통해 정말 갇힌 사람은 누구인가를 서서히 드러낸다. 그건 바로 갇혀 있다고 여겼던 주인공 마르셀 자신이라는 것을. 알베르틴을 향한 자신의 욕망에 마르셀은 유폐되어 있는 것이다. 이를 영화로 새롭게 풀어간 샹탈 아커만의 '갇힌 여인'도 이와 비슷한 말을 들려준다. 가두고 억압할수록 정작 더 그렇게 되는 건 행하고 있는 자신이라는 것을. '로드킬'이 되어야 할 것은 바로 그런 모습이다. 그러니 두려워말고, 진짜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기꺼이 무단횡단을 하라! 아밀의 '로드킬'은 이런 선포로 무장하고 있다.



샹탈 아커만의 영화 '갇힌 여인'의 포스터. 정말 시선과 감금의 대상이 되는 건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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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9-19 0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른 사람이 바라는 사람이 되는 건 안 좋을 듯합니다 이렇게 생각해도 어쩌면 그런 게 아주 없지 않을지도 모르겠네요

연휴는 17일부터였을지... 명절 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코로나19는 여전하지만...


희선
 
달콤한 숨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6
유즈키 유코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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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독한 늑대의 피'로 유명한 유즈키 유코의 소설로는 세 번째 만나보는 작품이다. 

 제목은 '달콤한 숨결'. 남자의 세계를 리얼하게 그리기로 찬탄을 받던 작가각 처음으로 여성 주인공을 전면으로 다뤄 화제가 된 작품이라고 한다. 이 점이 내 관심을 끌었다. 그녀가 여성을 중심으로 그려내는 세계는 아무래도 전작과 다른 이채로운 맛을 주지 않을까 기대되었다. 거기다 유즈키 유코의 소설들은 늘 몰입감 하나만큼은 흔한 말로 '쩔'었으므로 선택은 더 쉬웠다. 역시 이번에도 단번에 읽었다. '달콤한 숨결'은 이야기 구성도 신선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우린 소설 처음에 한 여성을 만나게 된다. 이름은 다카무라 후미에. 왕따까지 당할 정도로 볼품없었던 외모를 스스로의 힘으로 멋지게 가꿔 중, 고등학교 시절엔 제법 미소녀란 말을 들으며 연애 편력도 나름 화려했던 여인이다. 하지만 현재는 그저 한 남자의 아내로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자존감이 무척 많이 깎여 있다. 외모가 점점 아팠던 시절의 과거로 회귀하는 걸 보면서 그것이 정신적인 부담으로 작용했는지 과식증에 해리성 장애까지 앓아버린다. 그러다 응모했던 인기 남자 연예인 디너쇼에 덜컥 당첨되어 후미에는 잃었던 삶의 의욕을 재충전할 기회로 삼고 오랜만에 꽃단장을 하고 참석한다. 그런데 그건 정말 재충전할 기회가 되었다. 디너 쇼가 아니라 거기서 만난 중학교 동창 때문이었다. 무타라는, 결혼 전 성으로 먼저 자신을 부르며 다가 온 스기우라 가나코는 한 때 미소녀였던 후미에조차 기가 눌릴 정도로 매력적인 외모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가나코는 이건 성형으로 얻은 외모이며 중학교 때는 전혀 그렇지 못해 많이 힘들었다면서 주인공이 해 준 다정한 말 때문에 힘을 많이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때의 은혜를 갚겠다면서 자기가 개인적으로 런칭하려고 하는 '뤼미에르' 화장품을 일반 대중에게 설명하는 강사가 되어달라고 말한다. 자신은 외모 때문에(그녀는 눈 주위의 상처 때문에 늘 선글라스를 쓰고 있다.) 대중 앞에 나설 수 없으니 대신 그 일을 해 달라고 하면서 한 달에 50만엔을 그 대가로 지급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렇지 않아도 쪼들리는 살림살이라 그만한 돈은 충분히 유혹적이었지만 그보다는 그걸 하면 '다시 아름다워질 거야'라는 가나코의 말에 결정적으로 매혹되어 그 일을 받아들인다.


 



 이것만 보면 아무런 희망 없이 그저 시름시름 앓기만 하던 삶에 갑자기 찾아온 눈부신 빛과 같은 행운을 얻게 된 여인의 이야기라 생각할 것이다. '달콤한 숨결'이란 제목도 그런 인상을 마구 부추기고 말이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작가가 누구인가? 하드보일드 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유즈키 유코가 아닌가! 마치 그런 달달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작가는 후미에가 가즈코에게 별장 초대를 받는 장면에 바로 뒤이어 독자를 한 남자의 살인 사건 현장으로 인도한다. 도대체 이 사건과 후미에의 이야기는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독자는 민완 형사 히타와 이제 막 그의 파트너가 된 미모의 여성 형사 나쓰키의 안내로 접점을 찾아나가기 시작한다. 처음에 살해된 남자는 주위에 선글라스를 쓴 여인의 존재로 인해 가나코의 사기 피해자로 보였다. 그런 진실이 밝혀지는 과정과 후미에가 점점 더 가나코의 일에 깊게 빠져드는 것이 병행 전개 되기에 우리는 후미애 역시 그런 피해자가 되지는 않을까 우려하게 된다. 역시나 너무 밝은 빛은 조심해야 한다면서. 하지만 역시 능수능란한 유즈키 유코는 그런 식상한 전개를 허락하지 않는다. 둘로 나뉘어 전개되던 이야기는 중반에 놀라운 반전의 사실과 함께 통합된다. 그리고 우리는 만나게 된다. 모처럼 후미에 인생에 찾아온 찬란한 빛과 같은 것 그 너머엔 그보다 몇 배는 더 무섭고 비정한 어둠이 도사리고 있는 것을. 스포일러가 되기에 그 어둠의 정체를 밝힐 수는 없지만 후미에는 정말 태양에 매혹되어 자신의 최후를 앞당긴 이카루스처럼 될 뻔했다. 


 무대 한 가운데서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고 싶은 것은 누구나 한 번쯤은 가져 보는 욕망이다. 하지만 삶이란 알고 보면 주연인 줄 알았던 자신이 실은 엑스트라에 불과했다는 걸 천천히 그리고 처연하게 깨달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다시 빛 가운데 설 수 있다는 유혹은 자못 크게 다가온다. 오늘날, 특히 젊은 세대 사이에서 만연하고 있는 한탕주의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만 산다'는 주의야말로 가장 위험하다. 오직 눈부신 태양만 보고 날았던 이카루스가 그랬듯이 말이다. 유즈키 유코의 '달콤한 숨결'은 그러한 눈부신 빛에 현혹되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이들에게 매서운 경고를 날리는 작품이다. 일본의 젊은 세대들도 우리나라 못지않게 '인생 한방이다!'에 빠져 있는 형국이니까 말이다. 여름밤의 풀벌레들을 유혹하는 환한 아크 등이 그러하듯, 빛에 눈이 멀어 가까이 다가갔다간 몸이 타버리기 쉽상이다. 너무나 밝은 빛엔 언제나 그런 위험이 잠재되어 있다. 그러나 한 번 눈이 멀면 직접 몸이 타오르는 걸 느끼지 않는 한 빠져나올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아니, 어쩌면 사정은 그보다 더 나빠서 냄비 안 개구리가 될 수도 있다. 그 개구리처럼 몸이 마구 뜨거워지는데도 '설마 그럴 리가? 적어도 나는 아닐 거야. 이걸 위해 준비 많이 했잖아.'하는 헛된 믿음에 집착하다 푹 삶아져버리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소설에서 살해된 피해자들이 바로 그 좋은 예가 아니던가!(나는 지금 피해자들이라는 복수형을 썼다. 그렇다. 이 소설에서 살해당하는 사람은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후미에처럼 살면서 한 번은 아니 어쩌면 여러 번 마주하게 될, '실은 내가 별거 아니다'라는 각성의 파고 앞에서 나를 그냥 내던지는 방식으로 익사당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아마도 그 대답 비슷한 것을 주기 위해 난 히타의 파트너 나쓰키가 있는 게 아닐까 한다. 그녀는 가나코도, 후미에도 그토록 갖고 싶어하던 미모를 소유한 사람이다. 그녀를 본 남자들은 모델 혹은 연예인이 아닐까 착각할 정도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것에 구애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형사 일에만 최선을 다할 뿐이다. 작가는 그런 식으로 넌지시 암시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빛을 얻으려 애써 노력하는 것보다 현재의 삶을 지속적으로 성실히 가꿔 나가는 것이 더 빛에 가까워지는 길이라고. 왜냐하면 그렇게 자신의 삶에 한없이 충실하다보면 구태여 바깥에서 빛을 찾지 않아도 스스로 빛날테니까. 작가는 나쓰키란 존재를 통해 빛은 구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창출하는 것이라 전한다. 갈구의 대상은 내 외부가 아니라 내면에 있다고.


 이런 저런 투기 광풍이 잘 보여주듯(한국 은행에 따르면 현재 39세 이하 MZ 세대는 역사상 가장 빚이 많다고 한다. 20, 30대가 주식을 위해 증권사에 신용 융자만 3조 4297억원이라고 하니 말 다했다.) 지금은 크고 환한 빛에 많은 이들이 눈이 멀어 있는 상태다. 빛은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 없다. 언젠가 반드시 어둠은 오고 거품은 꺼지게 마련이다. 그렇지 않아도 여기저기서 지금 상황에 대해 경고의 말들이 나오고 있다. 그러니 사실 지금은 뒤쳐지지 않으려고 남들과 같은 속도로 욕망에 뛰어들기 보다는 언제 찾아올 지 모르는 추락에 대비해야 할 때는 아닐까? 이런 조심스러움 때문에라도 유즈키 유코의 '달콤한 숨결'을 한 번 더 들이마시게 된다. 모자라고 부족하지만 그런 나도 기꺼이 껴안고 그저 오늘의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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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턴 록
그레이엄 그린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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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독일을 휩쓴 파시즘의 매혹과 그것에 대항하여 희망을 재건하는 휴머니즘을 두 여성을 중심으로 섬세하게 조명하는, 묵직하면서도 강렬해 그 여운이 오래 남는 느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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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 젖은 땅 - 스탈린과 히틀러 사이의 유럽 걸작 논픽션 22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함규진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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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전쟁을 다룬 역사책은 많았지만 이 책만큼 희생된 개인들을 세밀하게 복원한 건 없었다. 전쟁사(史)도 결국은 인간사(事)라는 걸 보여준 명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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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의 섬 JGB 걸작선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 지음, 조호근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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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G 밸라드의 팬들이여 기뻐하시길! 드디어 '콘크리트의 섬'이 발간되었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크래시' 그리고 '하이 라이즈'와 더불어 도심 재난 3부작을 이루고 있는 의미 깊은 작품이지만 지금껏 우리나라에 소개되지 않아 여간 궁금했던 책이 아닌데, 드디어 우리들 눈 앞으로 당도한 것이다. 꽤 마음에 드는 표지와 함께. '콘크리트의 섬'은 여러모로 우리나라 영화 '김씨 표류기'가 생각나는 작품이다. 그 영화가 도저히 표류자가 생길 것 같지 않는 서울의 한강에서 표류되어 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렸듯이 이 소설 또한 고속도로 사이에 있는 교통섬에 우연히 갇혀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로빈슨 크루소의 후예들이다. 바다 저 멀리 있는 섬이 아니라 도시 한 가운데에서 그런 일을 당한다는 것만 다를 뿐




. 이런 일이 과연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을까 싶지만 소설을 읽어보면 얼마든지 가능해 보인다. 그만큼 발라드가 현실감 넘치게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까닭이다. 발라드의 소설답게 한 번 그 세계를 받아들이게 되면 놀라운 몰입력으로 끝까지 내처 읽게 만든다. 주인공은 로버트 메이틀랜드. 건축사무소를 운영하고 있을 정도로 성공한 건축가인 그는 운전 도중 과속으로 교통 사고를 일으키고 교통섬에 고립된다. 주위엔 차들로 가득하지만 그의 구조 요청엔 아무도 응답하지 않는다. 바로 지척에 안온한 일상을 두고도 가지 못하며 참혹한 일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더 커다란 절망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곧 거기에 자기 혼자 살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다. 자신처럼 교통섬에 고립되어 살아가는 이들을 많이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들은 바깥 세계로 나갈 수 있는데도 거기에 머무르는 걸 선택한 이들이다. 그들은 자기들만의 문화와 규칙으로 살고 있다. 메이틀랜드는 차츰 그 공동체에 적응해 간다. 그러면서 전보다 훨씬 강한 인간으로 성장하게 된다. 로빈슨 크루소가 그랬듯이. 그 역시 거기 있는 다른 이들처럼 그렇게 지내는 것에 매력을 느껴 머무르고 싶은 강한 충동이 들지만 바깥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가족을 생각하여 빠져나갈 의지를 버리지 않는다. 과연 그에게 탈출할 기회는 찾아올까? 소설은 열린 결말로 그에게서 시선을 거둔다. 


 '콘크리트의 섬'은 문명 비판을 담고 있다. 인간은 무자비한 자연 앞에서 약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문명을 만들어냈으나 아이러니 하게도 그 문명에 너무 의존하느라 오히려 더 약해져버렸다는 메세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메이틀랜드의 곤경은 문명의 발전 속에서 오히려 더 소외되기만 하는 인간 보편의 운명을 상징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죽음을 암시하는 것 같은 장면을 매개로 문명과 격리된 교통섬의 공간으로 삽입되게 된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인간의 진정한 성장이 문명의 안에선 불가능하다는 뜻일까? 어쨌든 메이틀랜드는 야만의 영역이라 해도 무방한 교통섬에서 전보다 더 강한 인간이 되는 건 사실이다.


 '로빈슨 크루소' 이야기를 현대 문명에 빗대어 새롭게 써내려 간 '콘크리트의 섬'은 이처럼 찾아낼 수 있는 다양한 의미들이 있어 더욱 연거푸 읽게 되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왜 여전히 J. G 밸라드의 팬으로 남을 수 밖에 없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원서 초판본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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