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중력의 사람들
발레리아 루이셀리 지음, 엄지영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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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무릇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무게를 지닌다. 무게는 중력의 반향이다. 존재는 중력의 자장 안에서 실존을 이룬다. 유령은 둥둥 떠다닌다. 그들에겐 무게가 없다. 중력의 자장을 벗어나 있다. 유령은 무중력의 존재다. 실수가 아닌 허수의 존재다. 실용주의에 물든 우리들은 실존이 아닌 이런 존재들에게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유령은 그저 우리에게 불안과 공포만 가져다 줄 뿐, 실제 사는 데는 아무 도움도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죽음을 인식시키고 영원히 살 것만 같은 우리들의 생각에 찬물을 끼얹으며 현재 내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에 엄연한 한계가 있다는 것을 주지시키기 때문이다. 근대의 역사란 죽음을 생활에서 몰아내는 역사였다. 중세엔 묘지들이 마을의 중심인 교회 옆에 있었지만, 근대가 되면서 죽음을 연상시키는 묘지들은 쉽게 찾아갈 수 없는 도시 외곽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공동묘지가 그렇듯이. 중세는 '메멘토 모리'가 유행어였고 삶은 죽음을 통해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것이었지만, 근대 이후 죽음은 오로지 피해야만 할 것이 되었고 느닷없는 종결로 황망한 아픔만 가져다 줄 뿐인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죽음의 잔영인 유령도 그와 같은 대접을 받았다. 햄릿의 유령과 70년대 미국의 대표적인 괴담인 아미타빌의 유령은 얼마나 다른가? 아미타빌 유령은 오직 선별과 배쳑을 통해 형성된 근대 생활 방식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햄릿의 유령은 체제가 은폐한 진실을 알려주는 진실의 목소리였으나 아미타빌의 유령은 그저 충격과 공포만 있는 괴물에 지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다시금 햄릿의 유령으로 돌아가려는 작품이 있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가장 독창적이고 지적이며 흥미진진한 목소리로 평가받는 멕시코 여성 작가 발레리아 루이셀리가 처음으로 쓴 장편, '무중력의 사람들'이다. 마치 작가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은 여성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그는 작가가 되고 싶어하는 편집자다. 그녀가 다니는 출판사는 아주 영세한 규모로 잘 알려지지 않은 라틴 아메리카 작가를 발굴하는 것을 주된 업무로 한다. 그것을 위해 그녀는 매일 도서관을 돌아다니며 케케묵은 먼지 가득한 장서들을 뒤진다. 망각이라는 지층 저 아래 묻혀버린 작가라는 존재들 사이를 떠돌아다닌다는 점에서 그녀에게 도서관이란 묘지나 다름없다. 그는 늘 덧없이 사라져간 삶들과 가까이 있고 때문에 유령은 친숙한 존재다. 아니, 그녀 스스로 죽음을 바라고 있다. 아무런 삶의 무게를 느낄 수 없는 그녀에게 자신의 실존이란 그저 뜻없이 배회하고 있는 유령인 것만 같아서 차라리 이럴거면 완전한 종지부를 찍고 싶은 것이다. 그녀가 멕시코 태생의 무명 시인 오웬이 살았다는 건물 옥상에서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죽은 나무'에 마음이 꽂혀서는 몰래 집으로 가져오기까지 하는 것은 바로 그런 그녀의 염원을 나타낸다. 그녀는 어느 날 자신의 상사 화이트에게서 시인 에즈라 파운드 일화를 듣는다. 지하철에서 얼마 전 죽은 친구의 유령을 우연히 보게 된 그는 별안간 온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삶의 절대적인 허무를 절감하는데, 그렇게 자기 발 밑으로 벌어진 공허의 싱크홀 위에서 그는 거기로 빠지지 않기 위해 시를 쓰는 것으로 버틴다. 바로 그것이 그녀에게 영감을 주어, 썰물의 해변에 서 있는 것과도 같이 발 아래로 쓸려가는 모래처럼 차츰 붕괴되어가는 자신의 삶을 글쓰기로 지탱할 생각을 한다. 그녀는 오웬이란 유령에 대해 쓰고 그것이 자기 삶에 남긴 여파를 기록한다. 그 과정의 채록이 바로 '무중력의 사람들' 전체 이야기다. 유령이 저 바깥에서 서성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령이 중심이고 삶이 그것을 기점으로 돌아가는 이야기.


 그렇지만 이 소설은 우리에게 익숙한 스타일로 전개되지 않는다. 일관된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며 많고도 얼른 종잡을 수 없는 다양한 이야기로 산포된다. 주인공의 실제 삶과 허구의 이야기가 경계없이 뒤섞이며 주인공의 실제 경험 또한 과연 진실인지 아니면 꾸며낸 것인지 알 수 없다. 우리가 어느 것이 실제이고 어느 것이 허구인지 가늠하는 기준은 작중 인물이 실존의 무게를 지닐 때다. 작가는 독자에게 그 무게를 느끼게 하기 위해 등장인물이 우리처럼 땅을 단단히 발로 딛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여러 설정을 한다. 개인의 역사를 만들고 땀내가 느껴질만큼 그의 일상을 세부적으로 형성한다. 이 소설엔 그런 게 느슨하거나 아예 없다. 뚜렷한 상황 설명 없이 그저 목소리로만 남아 다른 이야기 중간에 삽입된다. 마치 유령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출현하는 것처럼. 실존을 이루는 배경은 점점 사라지고 우리는 어느새 라디오를 듣는 것처럼 목소리만이 전부인 세계에 처하게 된다. 유령들의 영토로.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유배인 것은 아니다. 주인공이 글쓰기를 통해 그런 세상을 창조한 것이기 때문이다. 글쓰기란 주체가 되는 행위이다. 삶 속에서 우리의 주체란 온전히 우리가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규격으로 만들어 놓은 주체란 옷에 우리의 몸을 억지로 끼워맞추는 것에 불과하다. 일상에서 느끼는 우리의 답답함과 목마름은 바로 거기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지금 내 모습이 진짜 내 모습은 아니라는 것에서 말이다. 그런데 글쓰기는 온전한 나로 있게 한다. 남이 규정한 내가 아닌, 나 스스로 고유한 나를 정립하는 여정이 된다. 그래서 소설에서 글을 통해 창조된 유령들의 대지는 비로소 그녀가 진정한 주체로 주권자가 되는 국가라고 해야 하리라. 중력이라는 외부가 부여한 실존이 아니라, 자신이 실존을 부여하며 그로 인해 의미와 진리가 형성되는 게토. 소설의 세계는 그렇게 일변한다. 이를 통해 발레리아 루이셀리는 햄릿의 유령처럼 유령이 불안과 공포의 징후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을 재단하고 규정하는 체제가 숨긴 진실을 드러내고 그것의 사슬에서 해방시켜 자유롭게 만드는 새로운 목소리로 바라보고 그것을 자신의 소설 속에서 충실히 재현한다. 허구가 그저 무용한 것이 아니라 자유의 숨결이 되고 진짜 자신이 될 수 있는 거름이라는 것을 말이다. 문득 우리가 소설을 즐겨 읽게 되는 것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단순히 이야기가 주는 재미의 탐닉이 아니라 유령과 허구에 그런 힘이 있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감지하고 있기에.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허구의 이야기가 쾌락의 대상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산에 오를 때마다 실존의 잔영이지만 온전히 내 것은 아닌 메아리를 만들고 듣는 것을 즐겨하는 것과도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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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팩스 부인과 여덟 개의 여권 스토리콜렉터 55
도로시 길먼 지음, 송섬별 옮김 / 북로드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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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미국 뉴저지 출신으로 현재는 코지 미스터리계 대모로 평가받는 도로시 길먼의 대표 시리즈인 '폴리팩스 부인'을 이제서야 읽어 보았다. 시리즈 첫 작품은 아니고 이번에 나온 세 번째 작품이다. 제목은 '폴리팩스 부인과 여덟개의 여권'. 도로시 길먼은 43세부터 77세까지 무려 35년 동안 14권의 폴리팩스 부인 시리즈를 썼다. 이혼으로 인해 힘겨운 나날을 보내던 그녀가 자신의 인생이 점점 쓸모없어지는 것 같아서 그러지 않으려고 뭔가 자기 삶에 대한 응원 같은 것으로 쓴 이 시리즈는 작가만큼이나 남편과 사별한 뒤 자식도 다 떠나보내고 홀로 쓸쓸하게 노년을 보내던 할머니가 뜻하지 않게 CIA의 스파이로 활약하며 인생의 전성기를 보낸다는 이야기다. 뭐랄까? 비유하자면 애거사 크리스티의 '미스 마플'과 이언 플레밍의 '007'의 콜라보라고나 할까?



 개인적으로 존 르 카레 식의 어두운 스파이 물을 좋아해서 코지 미스터리 분위기의 스파이라고 하니 그닥 끌리지 않았고 거기다 할머니가 스파이로 활약해봐야 얼마나 대단하겠나 싶어서 엄청 유명한 시리즈인 줄은 알지만 스킵해버렸는데 견물생심이라고 세 번째 작품까지 나온 것을 보니 도대체 어떤 작품이기에 발간된 지 몇 십년이 지난(이번에 나온 폴리팩스 부인과 여덟 개의 여권이 출간된 연도는 세상에 1971년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렇게 계속 나오는가 문득 궁금해져 속는 셈 치고 읽어버렸다.


 그런데 왠걸... 꽤 재밌었다. 선우용녀에 빙의라도 된 듯 '뭐야 뭐야' 하면서 이야기에 거침없이 빠져들어 갔다. 폴리팩스 부인은 멕시코와 이스탄불에서의 스파이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현재는 원래 사는 곳인 뉴브런스윅(이곳은 저자의 고향이기도 하다.)에서 스파이가 되기 전에 자신의 주력 분야였던 원예에 충실하고 있다. 현재 그녀가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프로젝트는 손가락선인방의 꽃을 밤에 피우는 것. 소설은 그것의 성공과 함께 시작한다. 폴리팩스가 성공의 기쁨에 젖어있을 무렵, CIA의 카스테어스와 비숍은 불가리아에 파견되었던 정보원 쉽코프에게서 이상한 정황을 보고 받는다. 누군가 불가리아에서 비밀리에 정탐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쉽코프에게 다가와 그가 지금 불가리아 비밀경찰(이 때 불가리아는 사회주의 국가였다.)에 노출되었으니 이러이러한 경로로 빠져나가라고 하면서 만일 무사히 미국까지 가게 되거든 자신의 동료들이 불가리아를 탈출할 수 있도록 여권 여덟 개를 만들어 갖다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처음 반신반의했던 쉽코프는 집에 갔다가 비밀경찰들이 있는 것을 보고 한번 더 속는셈 치고 그가 말해준 경로로 찾아간다. 그런데 정말 불가리아를 무사히 빠져나왔던 것이다. 그 사실을 들은 카스테어스와 비숍은 불가리아의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그것에 신속하게 대처하기 위해서라도 거기 있는 쉽코프를 도와준 이들과의 연결 고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여덟 개의 여권을 갖다주려 한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과연 누구에게 그 일을 맡길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일이 잘못되면 불가리아와 미국과의 관계가 완전히 경색될 수도 있다. 되도록 정보원 티가 나지 않는 인물이 필요하다. 결국 카스테어스는 비숍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폴리팩스에게 다시 한 번 일을 맡긴다. 여덟 개의 여권을 그것을 위해 특별하게 제작한 모자에 숨겨 불가리아에 갖다 주도록.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에 있는 릴라 호텔. 폴리팩스 부인이 묵게 되는 바로 그 호텔이다. 실제 있는 곳이다.

 혹시 여기 가게 되신다면 폴리팩스 부인을 생각하며 한 번 묵어보시길...


 처음엔 그렇게 단순한 임무였다. 그래서 카스테어스도 폴리 팩스 부인에게 맡긴 것이다. 그러나 세상 일이 다 그렇듯 카스테어스의 예측 대로 흐르지 않는다. 불가리아로 가기 위해 바꿔 탈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던 베오그란데 공항에서 일은 터졌다. 폴리 팩스 부인은 거기서 우연히 배낭 여행 중이던 일단의 미국인 청년들을 만났는데, 절대 불가리아로 가지 않겠다던 필립이란 청년이 불가리아에 왔고 그만 간첩 혐의로 비밀경찰에 체포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필립과 같이 있던 데비란 아가씨에게 그 이야기를 들은 폴리팩스 부인은 자신의 임무와는 별개로 누구도 관심 가지지 않는 필립의 고초를 자기라도 나서서 해결해주려 한다. 그런데 그 일이 그만 불가리아의 비밀경찰까지 얽혀서는 폴리팩스 부인이 상상한 것 이상의 재난을 가져 온다. 무려 세 번이나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는 것도 모자라 끝내 불가리아 역사상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했다는 감옥까지 잠입하도록 만든다. 바야흐로 카스테어스와 비숍은 다시 한 번 속쓰림을 달랠 위장약을 연거푸 들이켜야 할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속표지의 모습이다. 소설에 나오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표지에 신경을 많이 썼다. 전작을 못봐서 전작도 이런 표지인지 모르겠다. 이런 표지라면 다 소장하고 싶다.(나는 의외로 이런 외관에 약하다. 으음...) 아무래도 작품의 연식이 연식인지라 장르소설의 빈티지적 취향을 자극하는데(옛날 장르소설을 즐겨 읽으시는 분들이라면 이 느낌을 아실듯), 그런 작품의 특성을 잘 알고 있는지 표지도 거기에 맞춰 빈티지스럽다. 마음에 든다.


 처음엔 폴리팩스 부인이 받은 미션이 별 것 아니라서 '할머니 스파이가 다 그렇지 뭐' 하고 흥미가 한풀 꺾였었는데(그래도 내처 읽었던 것은 폴리팩스 부인과 그녀에 대해 인간적인 연민을 가지고 있는 카스테어스와 비숍이 빚어내는 케미 때문이었다. 분명 폴리팩스 부인의 상관인 그들이 폴리팩스 부인이 엄마, 그들이 자식으로 유사 모자 관계를 보여주어 흥미로웠다. 이런 것이 전반부터 느껴질 정도로 소설의 캐릭터 형성이 참 좋다. 특히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폴리팩스 부인과 동행하게 되는 데비와 정체불명의 불가리아 협력자 찬코의 캐릭터 묘사가 뛰어나다. 데비가 자신도 언젠가 폴리팩스 부인이 찬코에게 받았던 것처럼 남자에게서 그런 시선을 받고 싶다고 고백할 정도로 폴리팩스 부인과 찬코가 나누는 우정은 소설에서 가장 감미로운 부분 중 하나다.) 불가리아에 도착하고 나서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방향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지라 도대체 이 이야기가 어떻게 결말이 날까 궁금하여 증기기관차 화로에 석탄을 마구 던져넣듯 페이지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냥 푹 빠져서 재미만을 추구한다면 분명 만족스런 독서가 될만한 작품이다. 왜 이 시리즈가 인기 있는지 제대로 체감했다고나 할까.


 소설에서 폴리팩스 부인과 데비가 지나쳐 갔던 시프카 패스(Shipka Pass). 아시다시피 불가리아는 1396년부터 1878년까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1876년 4월, 불가리아인들은 수백년에 걸친 오스만 제국의 통치에서 벗어나고자 봉기를 일으켰다. 이것에 대해 터키인들은 무자비한 탄압으로 응답했는데 결국 많은 불가리아인들이 학살당했다. 시프카 패스는 그 때 가장 많은 불가리아인들이 학살당한 장소로 이름 높다. 무려 2만 8천명의 사람이 터키인들에게 무참히 도륙되었던 것이다.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18명에 불과했다. 불가리아는 자신의 가장 아픈 역사를 이렇게 기념하고 있다. 폴리팩스 부인은 이곳을 지나가며 그런 사정을 데비에게 설명한다. 이런 역사는 나중에 필립의 비극과 오버랩 되면서 묘한 반향을 일으킨다. 과거의 피해자가 현재의 가해자가 되는 이러한 아이러니는 어떠한 연유로 생겨나는 것인가 하고.


 그런데 그것 이상으로 내게는 이 이야기가 깊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최근에 일어난 한 비극적인 사건 때문이었다. 바로 북한에서 1년 넘게 억류되어 있다가 혼수상태로 미국에 송환되자마자 사망한 웜비어 말이다. 그는 여러모로 소설 속에서 간첩 혐의로 불가리아 비밀경찰에게 억류당하는 필립과 비슷하다. 일단 나이가 그렇고 풀려나자마자 심장마비로 죽는다는 점에서도 그렇다.(물론 여기엔 불가리아 비밀경찰을 장악한 이그나토프의 음모가 서려있다. 명확하게 혼수상태와 사인이 판명나지 않는 웜비어에게도 어떤 음모가 깃들어있는지 모를 일이다.) 무려 56년 전의 소설에 바로 오늘날 일어난 이야기가 들어 있으니 놀랍기도 하고 소설 속 세계와 현실 세계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한 편 이렇게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도 똑같은 비극이 여전히 계속되는 것을 보면 역사의 발전이라는 것에 깊은 회의가 든다. 사실 폴리팩스 부인이 필립의 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미국 대사관을 비롯하여 책임있는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필립의 생사와 안전에 대해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 때 박근혜 정부와 언론이 그러했듯이. 만일 폴리팩스 부인마저 모르쇠했다면 필립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 최후를 맞았을 것이며 그 죽음을 통해 권력을 영원히 쥐려고 했던 이는 자기 소망을 이루었을 것이다. 어쩌면 무모하고 누군가에겐 귀찮기만한 그녀의 관심이었지만 그 하나가 많은 이들에게 삶의 새로운 기회를 가져다 주고 불가리아 또한 올바르게 통치할 계기를 마련해준 것을 보면 진정한 역사의 발전이란 이렇게 비록 우리처럼 작은 자라 하더라도 그 어떤 약자에게 닥친 비극도 나와 무관하지 않으며 바로 나의 일인 것처럼 관심을 갖고 실제 뭔가 실행하는 자들 덕분에 이뤄지는 것 같다.

 뭐, 이런 거창한 이야기는 사족에 불과하다. 캐릭터의 매력과 재미만으로도 책의 가치는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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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속 소녀
도나토 카리시 지음, 이승재 옮김 / 검은숲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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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년이나 정신과 의사로 일해 온 플로레스에게 레베가 레이어 검사가 한 남자를 데리고 온다. 남자의 이름은 포겔. 얼마 전 이 곳 아베슈를 뒤흔들었던 애나 루 소녀 실종 사건을 담당한 형사다.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외과 병원으로 가야지 왜 정신과? 검사는 필요한 게 있다고 한다. 바로 이 형사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한 어젯밤 행적이 궁금하다는 것이다. 검사는 플로레스에게 부탁한다. 이 남자를 상담하여 어젯밤 무엇을 했는지 알아내 달라고. 그렇게 포겔의 고백으로 애나 루 실종 사건에 얽힌 이야기가 흘러가기 시작한다. 이탈리아 출신으로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릴러 작가가 된 도나토 카리시가 2015년에 발표한 '안개 속 소녀'는 이렇게 출발한다. 그런데 플로레스와 포겔이 만난 날은 애나 루가 실종된 지 무려 62일이나 지난 후다. 과연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길래 애너 루 실종 사건을 맨 앞에서 진두 지휘하던 형사가 갑가지 용의자가 된 것일까? 마치 그 궁금증을 풀어주겠다는 듯이 작가는 포겔의 고백을 매개로 하여 독자를 실종 이틀 후, 크리스마스 때로 데려간다. 포겔이 실종 사건을 지휘하기 위하여 아베슈 마을로 파견되어 온 날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오지의 마을, 아베슈. 조용히 몰락해가던 중이었으나 뜻밖에 형석이라는 귀중한 광맥이 발견되어 다시금 되살아나는 중이다. 하지만 그 부활의 과실은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가지 않았으니, 혜택을 입어 졸지에 졸부가 된 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하고 점점 더 가난에 찌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있는 자들은 부를 과시하고 없는 자들은 그런 자들을 혐오한다. 마을은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깊은 심연을 둔 채 양 쪽으로 갈라지고 있었다. 실종 된 소녀 애나 루는 고립된 아베슈 마을만큼이나 눈에 띄지 않는 아이였다. 넉넉하지 못한 가정 환경 속에서 그래도 고양이를 사랑하는 구김살 없는 아이로 자라났다. 특별한 문제도 갈등도 없었다. 이 말은 뚜렷한 용의자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랬기에 실종 사건 수사는 난관에 부딪혔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어려운 사건을 곧잘 해결한 포겔이 특별히 아베슈 마을로 파견되었다. 그런데 같이 온 형사 보르기는 포겔의 수사에서 어떤 위화감을 느낀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애나 루 실종 사건의 제 1 원칙은 애나 루를 찾는 것인데, 포겔의 관심은 오직 범인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애나 루에 대한 것보다 범인에 대한 말을 더 많이 하며 '그는 유명세를 원하니 무대를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둥 '괴물을 수풀에서 내몰아 정체를 밝혀야 한다'는 둥의 이야기만 한다. 아무래도 포겔의 목적이 누구나 다 바라듯이 애나 루를 찾아 집으로 무사히 돌아오도록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범인을 잡아 자신의 명성을 드높이는데 있는 것 같다. 포겔의 주특기는 미디어의 적극 활용이다. 그러나 애나 루의 무사생환을 위한다면 혹시 납치했을 지도 모를 범인을 자극하지 않기 위하여 미디어는 되도록 쓰지 않는 게 현명하다. 그러나 포겔은 미디어를 이용하는데 거침이 없다. 이것만 봐도 포겔은 애나 루가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관심은 오직 어떻게 하면 연기를 계속 피워 그것을 피해 뛰쳐나온 너구리를 포획할까 뿐이다.


 결국 한 남자가 덜커덕 걸려든다. 이름은 로리스 마티니. 애나 루가 다녔던 고등학교 문학 교사다. 클리어란 미모의 아내와 모니카란 십대 딸과 함께 6개월 전에 갑자기 아베슈로 이사왔다. 갑작스런 이주 때문에 졸지에 친한 친구와 헤어져야 했던 모니카는 그것을 주도한 엄마 클리어와 사이가 좋지 않다. 그런데 그들이 갑자기 이사해야 했던 이유가 있었다. 변호사로 잘나가던 클리어가 자신의 모든 경력을 포기하면서까지 아베슈로 와야 했던 이유가. 마티니가 포겔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그가 타고 다니던 차 때문이었다. 그 차는 애나 루를 거의 스토킹 하듯 촬영한 영상에서 애나 루가 있던 장소마다 마치 애나 루를 따라다닌 것처럼 반복적으로 등장하여 수사진을 긴장케 했는데, 그 차의 주인이 바로 마티니였던 것이다. 이 사실이 밝혀지는 부분이 정말 압권이다. 무심코 있다 복부로 강렬하게 들어오는 훅을 맞게 된 느낌이었다. 포겔은 유일하게 수면 위로 떠오른 용의자 마티니를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다. 그는 이번 수사를 멋지게 해결하여 명예 회복을 해야 한다. 이전에 맡았던 손가락 테러리스트 수사에서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가 용의자로 점찍은 회계사를 증거 조작까지 해서 잡아 넣었는데 그만 조작 사실이 들통나는 바람에 자신의 명성에 커다란 금이 가고 만 것이다. 그는 부하 직원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워 가까스로 파면되는 것을 면했다. 미디어를 적극 활용하여 늘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 세례라는 스포트라이트의 한 가운데 있었던 포겔은 마약 중독에 버금가는 그 쾌락을 다시 한 번 누려보고자 애나 루 사건을 적극 활용하기로 한다. 그래서 동기도 부족하고 증거도 불충분한 마티니를 미디어 맛사지를 통해 이웃과 가족 모두에게서 고립시켜선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지게 하고 그의 특기인 증거 조작으로 감옥에 집어 넣는다. 미디어의 영향력은 대단해서 사람들은 삽시간에 애나 루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오직 덤불 속에서 뛰쳐나온 늑대처럼 마티니에게만 관심을 갖는다. 마녀 사냥이 시작되고 평범하지만 성실했고 가정적인 남자에다 친절한 이웃인 마티니는 제대로 된 변호의 기회조차 한 번 얻지 못하고 미성년자나 유혹하는 음험한 괴물로 낙인찍힌다. 사정을 제대로 헤아리려는 시도는 없이 심판만 하기 바쁘다. 그것은 아내 클리어와 딸 모니카에게도 마찬가지다.


 이대로 포겔의 계획대로 되어가나 했는데 9회말 투아웃까지도 경기 결과를 섣불리 예단할 수 없는 야구 시합처럼 갑자기 뜻밖의 물건이 포겔에게 도착한다. 한 대의 노트북. 거기엔 30년 전에 소녀 여섯 명을 납치하고 사라져 버린 '안개 속 남자'에 대한 사건 파일이 소개되어 있었는데 그가 노린 여섯 명의 소녀에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애나 루처럼 빨간 머리에 주근깨가 있는 소녀라는 것. 파일은 애나 루의 범행이 단독범이 아니라 30년 전 연쇄 살인의 부활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놀란 포겔은 얼른 노트북을 보낸 사람을 확인한다. 지금은 은퇴한 기자. 과연 이것은 진실일까? 정말 30년 전 '안개 속 남자'가 부활하여 다시금 저지른 범죄인 걸까? 그렇다면 포겔은 어떻게 해야 하나? 다시 또 증거 조작을 저지르고 말았는데. 느닷없이 나타난 단서에 두렵고 복잡한 심정이 된 포겔은 기자를 만나러 간다. 과연 그것은 또 어떻게 플로레스와의 대화로 연결되는 것일까?


 예측 불허의 이야기 전개와 출중한 페이지터너 능력이 도나토 카리시의 특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번 '안개 속 소녀' 역시 주특기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앞서 잠깐 언급했듯이, 이야기를 가지고 노는 재주가 상당하다. 이 소설엔 두 번의 놀라운 반전까지 마련되어 있는데 그것이 결코 억지스럽지 않기에 더욱 그렇게 보인다. 마티니는 소설 속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은 언제나 '악당'의 역할이다(p. 136)라는 말을 하는데, 마치 그것을 실천하기라도 하듯 이 소설은 악인 열전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악인들로 넘쳐나고 있다. 한 소녀가 사라졌고 생사여부 또한 밝혀지지 않았는데 소설 속 인물들 대부분은 거기에 별 관심이 없다. 모두들 어떻게 하면 그것을 밑천 삼아 떡고물을 많이 떨어지게 할까만 신경 쓴다. 실종되어 돌아오지 않은 애나 루는 우리들에게 아무래도 세월호 참사의 아이들을 연상시키는데, 그래서 더욱 그들의 행태가 분노를 자아내게 만든다. 오직 마티니의 아내, 클리어만이 애나 루 소식에 대해 노심초사 신경을 쓴다. 같은 딸을 가진 엄마로서 결코 자신과 먼 이야기가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 클리어를 제외하고 애나 루는 제목 그대로 안개 속에 가려져 있다. 그런데 그 안개는 결코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한없이 인위적인 것이다. 미디어가 피워 놓은 안개이니까 말이다. 제목의 안개는 정확히 그것을 가리킨다. 포겔과 그와 짝자꿍이 된 미디어의 이기심이 피워 낸 안개. 그것이 사람들이 정말 봐야 할 곳을 보지 못하게 눈을 가리고 포겔과 미디어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만 보게끔 짙은 안개를 피워냈다. 세월호 참사 때, 박근혜 무리들과 거기에 야합한 언론들이 그랬던 것과 똑같이. '안개 속 소녀'는 바로 그러한 미디어의 행태를 매섭게 비난하는 작품이다. 소설에서 포겔은 플로레스에게 이런 말을 한다.


 제가 해야 할 일은 사건을 지켜보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일이었습니다. (...) 우리 모두에겐 괴물이 필요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른 누군가보다 자신이 더 낫다고 느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전 그런 사람들이 원하는 먹잇감을 던져줬을 뿐입니다.(p. 132 ~ 133)


 사실 이러한 포겔의 고백은 지금의 미디어가 하는 것 그대로다. 한겨례, 경향, JTBC, 오마이뉴스도 예외는 아니다. 조국의 어머니가 이사장으로 있는 웅동학원이 마치 어마어마한 탈세를 한 양 과장하고 강경화 남편이 살기 위해 지은 집을 부동산 알박기로 몰아가며, 김부겸의 아내가 얼마되지 않는 비상장주식 신고 누락을 마치 엄청난 금액을 고의로 누락한 것처럼 포장하는 것과 같은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괴물을 찾아내는 게 아니라 괴물을 만들어내는 게 지금 언론이 하는 일이었다. 포겔이 하는 것과 똑같이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멋대로 조작하고 왜곡한 괴물을 우리보고 뜯어 먹으라고 던져준 것이다. 그들은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을 포장하고 있으나, 그들의 말은 정직한 게 아니었고 오로지 독일 뿐이었다. 우리들을 자신들과 같은 괴물로 만들기 위한. 괴물을 만들어내는 자들이 계속 성공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뿐이다. 우리 모두들 자신과 같은 괴물로 만드는 것. 우리가 그들처럼 괴물이 되어 점점 더 비이성적이 되고 정의나 도덕이 아니라 오로지 이기심에 물들어갈 때, 그들의 일은 점점 더 영향력을 가지게 되고 거기에 드는 수고는 적어질테니까. 그들은 우리가 아직 미몽 속에 빠져 있으며 자신들이 우리를 진실로 선도하고 있다고 악을 쓰지만, 사실 그들이 인도하는 곳은 더 깊은 안개 속이다. 우리가 계속 무지와 혼돈 속에 함몰되어 있는 것만이 그들이 원하는 것이니까. 문재인 정부 한 달. 특히 인사청문회를 둘러싼 보도 행태를 보며 더 절절하게 깨닫게 되었다. 그들이 특종이라며 요란하게 호각 소리를 내면 낼수록 그것은 우리를 더 짙은 안개에 둘러싸게 만드는 주술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제 그런 눈속임과 선동에서 눈과 귀를 닫아야 할 때다. 인위적 안개는 스스로 뚫고 나가는 수밖에 없다. 수동적 수용이 아니라 능동적 파악이 될 때, 우리는 타인을 괴물로 삼지도, 또 우리 자신이 괴물이 되지도 않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 우리의 눈과 귀는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바로 그들이 안개를 피우는 진정한 목적이기도 한, 그들이 안개로 가리려 하는 희생자와 약자들의 모습과 목소리다. 누구도 애나 루의 행방에 대해 관심 갖지 않을 때, 유일하게 신경을 썼던 형사 보르기가 다음과 같은 것을 배웠던 것 그대로.


 희생자들도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

 희생자들이 자신의 입장에서 사건에 관한 진술을 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이 부분은 수사 초기부터 무시되곤 한다. 하지만 희생자들에게도 목소리가 있다. 그들의 과거가 대신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단지 누군가가 귀를 기울여주면 될 뿐이다.(p. 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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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 1 - 5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5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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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도록 기다렸던 콜린 매컬로의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지의 제5부가 드디어 나왔다. 제목은 '카이사르'. 오래도록 지속되었던 공화국 로마의 역사가 막을 내리고 제정 로마가 시작되는, 그렇게 법의 지배에서 사람의 지배로 나아가는, 로마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클라이막스인 시기가 바야흐로 펼쳐지는 것이다.



  이야기는 카이사르가 브리타니아 2차 원정 때, 그의 부하 트레바티우스가 폼페이우스가 쓴 편지 두 통을 카이사르에게 가져가는 것에서 시작한다. 브리타니아 2차 원정은 카이사르에게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는데, 그것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예기치 않게 찾아온 천재지변 때문이었다. 운명의 장난 같은 것. 여태껏 운명의 여신 포르투나의 총애를 각별하게 받아온 카이사르였는데, 이제 포르투나가 숱이 적은 카이사르 머리 위에 올려두고 있었던 애정의 손길을 거두기라도 한 것일까? 트레바티우스가 가져온 편지엔 카이사르가 결코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불운한 소식이 담겨 있었다. 바로 자신의 딸이자, 폼페이우스의 아내인 율리아가 사망했다는 것. 율리아. 그녀는 현재 원로원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이자 그들이 가진 능력으로 볼 때 언제든 로마의 일인자 자리를 놓고 격렬한 라이벌이 될 수 있는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를 하나로 묶어두는 유일한 존재였다. 비록 그들의 반대편에 있는 카토가 로마제국이 결혼상담소냐고 툴툴거리긴 했지만 말이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에, 자신이 총애하는 브루투스와 율리아의 약혼까지 억지로 깨고 율리아를 폼페이우스에게 준 것이었다. 브루투스가 아주 오랫동안 율리아를 흠모했으며 그 사랑이 거의 맹목에 가깝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도착한 그의 정부이자 이 소설의 메데이아라고 할 수 있는 세르빌리아의 편지에서 브루투스가 율리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이피우스 클라우디우스의 딸 클라우디아와 결혼했음을 알게 된다. 오직 그녀가 폼페이우스가 자기 아들 혼인 상대자로 점찍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브루투스는 그렇게 자신의 사랑을 빼앗긴 복수를 한 것이다. 이로써 카이사르는 비로소 브루투스에게 율리아가 어떤 의미였는지 절실하게 깨닫는다. 브루투스가 율리아가 죽자 마침내 결혼한 것은 율리아가 살아 있을 동안 내내 그녀와 이어질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는 뜻인 것이다. 그만큼 그의 사랑은 좋게 말하면 지고지순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맹목적이었다. 그리고 카이사르에 대한 원망을 억누를 수 있는 바윗돌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그런 율리아는 없다. 연대의 매듭은 산산히 깨어졌다.


 콜린 매컬로가 그 편지로 5부를 시작하는 것은 당연하다.

 5부란 갈리아 지방이 로마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나며 이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로마 최고 권력을 놓고 아주 격렬한 내전을 펼치게 되는 이야기니까 말이다. 이제 로마라는 이름 아래 하나된 모든 것들이 균열과 파열을 일으키고, 뜻을 함께 했던 동지마저 칼 끝을 겨누고 등 뒤를 찌르게 된다. 이처럼 모든 연대가 낱낱이 부서져 버리니, 연대 종말의 상징과도 같은 율리아의 죽음을 담은 편지로 시작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까? 일종의 신호탄인 셈이다. 그 편지를 든 트레바티우스가 처음으로 만나는 사람이 카이사르의 직속 부관 라비에누스인 것도 의미심장하다. 카이사르가 가장 신뢰하여 자신의 배후까지 맡겼던 자였지만, 폼페이우스와 치른 내전에서는 카이사르를 버리고 폼페이우스에게 투항하여 그의 장수로서 카이사르를 가장 힘들게 만들었던 존재가 아니었던가? 이렇게 콜린 매컬로는 5부가 유대의 파괴로 점철될 것임을 꼼꼼하게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도 과거의 것에 기댈 수 없고, 이제 자신의 힘으로 닥쳐온 난관을 타개하며 역사를 만들어가야 한다. 로마는 이제 그런 시기에 완벽하게 접어들었다. 카이사르가 주인공이 되는, 법이 지배하던 시대에서서 사람이 지배하는 시대로의 변화는 바로 그런 것을 뜻한다. 그러나 여전히 시대의 변화를 알지 못한 채, 과거의 것에 기대려는 자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귀족들의 원로원이 그러하다. 온갖 비리에, 매관매직에 로마의 자랑인 선거마저 돈과 폭력에 오염되어 공정성을 잃은 지 이미 오래인 상황이 되었으나 원로원은 자신의 기득권에만 집착하여 자꾸만 침몰해가는 로마를 바로잡을 줄 모른다. 누가 봐도 깊이 가라앉고 있는데, 귀족들은 자기만 괜찮으면 로마가 다 괜찮은 것이라고만 생각한다. 그들에겐 그들이 곧 로마인 것이다. 폼페이우스도 그랬다. 그 역시 자신을 로마라 여겼다. 그는 로마의 모든 권력을 혼자 쥘 수 있는 독재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로마를 개혁하고자 하는 마음 같은 게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것이 뛰어난 자로 태어난 자신에게 걸맞는 자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원로원에게 로마가 과거의 기득권과 동의어라면, 폼페이우스에게 로마는 자신의 가치를 빛내 줄 훈장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누구도 타인을 위해서 로마를 생각하거나 자신을 로마로 여기지 않는다. 평민을 위해 싸우겠다며 귀족의 지위를 버린 푸블리오 클로디우스도 마찬가지다. 그는 여전히 키케로에 대한 복수를 포기하지 않았다. 오직 복수를 위해 그는 권력을 장악하려 한다. 


 클로디우스의 가장 큰 약점은 복수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존엄을 모욕하거나 손상시키면 그를 복수 대상 명단에 올린 뒤 자신이 당한 그대로 되갚아줄 완벽한 기회를 기다렸다.(p. 231)


평민을 선동하여 그가 평민의 유일한 편인 것처럼 여기게 하고 그것을 통해 해방 노예들을 각 선거구에 은밀히 보내어 자신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호민관 10명을 만들려 한다. 콜린 매컬로는 로마의 연대가 무엇 때문에 깨어지는가를 이렇게 샅샅이 보여준다. 바로 이기심이라는 것을.


 타인을 위해서 로마를 생각하며 자신을 로마와 같다고 여기는 사람은 카이사르가 유일하다. 그는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초월한 로마를 위해 사는 것을 자신의 존엄이라 여겼다. 왕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갈리아의 베르킹게토릭스에게 카이사르는 이렇게 반대하는 말을 한다.


"사람들에겐 왕이 필요하오. 눈 한 번 깜빡하면 새로 바뀌는 사람들이 아니라. 민주주의에서는 어느 한 집단이 이득을 보고 그다음엔 또다른 집단이 이득을 볼 뿐, 전체가 이득을 보는 상황은 절대로 발생하지 않소. 결국엔 왕정만이 유일한 해답이오.(...) 당신은 이미 왕이오, 카이사르! (...) 당신은 우연히 투표권자들에게 선택을 받은 알렌산드로스 대왕이요."


 "나는 여전히 전체의 일부일 뿐이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었을 때 마케도니아도 죽었소. 그의 나라는 그와 함께 사라졌소. 그는 스스로 왕이라 생각했기에 그리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리고 제국의 중심을 다른 곳으로 옮겼소.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나라가 위대했던 것은 오로지 알렉산드로스 대왕 때문이었소.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했고 자기가 가고 싶은 대로 갔소. 그는 왕이었으니까, 베르킹게토릭스! 그는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착각했소. (...) 반면 나는 내 나라의 종복이오. 로마는 로마가 낳은 그 누구보다도 훨씬 위대하오. 내가 죽더라도 로마는 계속 다른 위대한 인물들을 낳을 것이오.(...) 민주주의에서는 바보와 현자가 늘 공존하지만, 전반적으로 왕가의 계보보다는 낫소. 위대한 왕이 하나 나오려면 보잘 것 없는 왕을 열 명은 거쳐야 하니까."(p 196 ~ 197)


 존엄은 로마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였다. 존엄을 중시하는 것은 로마인의 자부심이었다. 그러나 존엄에 대한 해석은 모두가 달랐다. 폼페이우스도, 그의 부추김에 의해 클로디우스를 암살하게 되는 밀로도, 드디어 자신이 원하는 것이 충족되려는 직전에 생명이 꺼져버린 클로디우스도 존엄은 오직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거기에 고귀함은 없었다. 오직 권력과 동의어인 존엄만 있을 따름이었다. 그들만이 아니었다. 재산이나 권력을 가진 로마인이라면 누구나 그랬다. 권력을 얻을 수 있다면 그 어떠한 비열하고 비천한 수단도 마다하지 않았다. 광장은 정치적인 이유로 폭력이 횡행하는 장소로 변했고 선거는 돈과 협박으로 검게 물들었다. 정의와 고귀한 명예를 지키려는 이들은 조롱당했고 음모의 희생자가 되어 추방이라는 차디찬 냉대를 받아야 했다. 로마가 세계 만방에 자랑했던 민주주의는 완전히 무너졌다. 다만 뼈다귀만 있을 뿐이었다. 카이사르를 공공연히 반대하는 카토를 비롯한 보니파는 다만 그 뼈다귀에 묻어 있는 얼마 안되는 살점을 뜯어먹고 있을 뿐이었다. 개도 안 쳐다볼 그 희박한 살점이 언제까지나 있을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변화는 필연이었다. 카이사르가 갈리아의 베르킹게토릭소에게 말한 것처럼. 카이사르는 자기 어깨에 놓인 시대의 의무를 느꼈다. 포르투나의 은총은 그 때문에 그와 함께 하고 있는 것이라 여겼다. 클로디우스가 죽고, 폼페이우스마저 보니파와 손잡은 지금 개혁 진영엔 이제 카이사르만이 남게 되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없었다. 율리아의 죽음과 더불어 맞이한 어머니의 죽음은 그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카이사르에게 남은 것은 오직 로마의 올바른 재건 밖에 없다는 것을. 5부의 이야기는 변화를 거부하는 자들과 카이사르와의 전면전이다. 갈리아 지방의 변화를 두고 카이사르와 베르킹게토릭소와 벌였던 논쟁 그대로. 결전의 시기는 그렇게 무르익고 있었다.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너무나 몰입해서 읽었다. 이야기가 지금 우리 상황과 결코 멀리 있지 않아서 더욱 그랬다. 여기서 카이사르는 과거의 모습과 기득권을 고수하는 세력과 싸운다. 문자 그대로 적폐 세력이다. 지금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유시민의 말대로 지금 상황은 그저 대통령 하나만 바뀐 것에 불과하다. 적폐세력은 어디든 아직도 건재하다. 개혁을 위해 외롭게 분투해야 하는 것은 지금의 정부나 카이사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런 사정을 염두에 두고 읽다보니 소설의 모든 이야기가 살갑게 다가오지 않을 수 없었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액튼 경의 말처럼 권력의 추구는 늘 사리사욕의 유혹을 받는다. 거기에 물들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올곧게 지켜내는 것은 정말 힘들다. 폼페이우스도 결국 유혹에 넘어가 버렸다. 자신의 출신 신분이 로마 정통 귀족이 아니라는 사실이 그를 끝내 사리사욕으로 몰아간 것이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가 가진 단 하나를 정말 부러워한다. 그가 로마를 건국한 핏줄의 정통 계승자인 파트리키라는 것. 마리우스가 그토록 출중한 능력에 막강한 권력을 가졌지만 로마인 누구도 그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은 마리우스가 파트리키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로마인들은 술라가 파트리키였기 때문에 너무나 두려워했다. 폼페이우스도 파트리키였다면 선택이 달랐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카이사르가 그렇게 태어난 것 역시 포르투나의 은총 때문이라 해야 하리라. 어쨌든 운명은 그렇게 결정되었다. 이렇게 보자면 그 때 로마인으로 태어난 것도 은총이었을 것이다. 갈리아와 로마의 관계는 식민지와 제국의 관계라 읽으면서 어쩔 수 없이 일본 제국주의 시대 때의 우리나라가 떠올랐다. 그래서 실은 베르킹게토릭소에게 더 공감했다. 콜린 매컬로도 그것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같다. 3부가 왜 '포르투나의 선택'인지 궁금했는데 비로소 알게 되었다.


 사람이 어디서 어떻게 태어날지는 자신이 결정할 수 없다. 하이데거가 인간을 피투적 존재라 불렀듯이 우리는 우연히 떨어지는 빗방울에 불과하다. 빗방울 스스로 어떤 대지에 떨어질지 선택할 수 없다. 그것은 우연으로 결정된다. 삶에는 이렇게 필연적으로 우연의 몫이 있다. 콜린 매컬로가 말하는 포르투나의 결정이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 우연을 절대로 여기고 그 우연의 은총을 받지 못한 자신을 내내 불만스럽게 생각한다. 마리우스가 술라를,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를 질투한 것처럼.  그것이 하나의 컴플렉스가 되고 강박이 되어 우연이 준 상처를 억지로 지우려다 해서는 안 될 과오마저 저지르기도 한다. 반면, 그런 우연의 흉터를 가볍게 넘겨버리는 자들도 있다. 그것이 한계가 아니라 출발점으로 여기는 자들이 있다. 콜린 매컬로의 '카이사르'는 그렇게 상반된 자들이 벌이는 일종의 전면전이기도 하다. 우연의 한계에 너무 구애받은 나머지 삶의 진정한 기회를 놓치는 자와 그것을 초월하여 진정한 변화를 이뤄내는 이들 사이의 전면전. 카이사르도 원래는 혈통 외에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자였다. 그런 그가 결국 로마의 패자가 된 것은 오직 우연의 잔영인 과거에 연연해하지 않고 보다 큰 대의를 위해 자신을 주저없이 기투 했던 것에 있었다. 우리나라 적폐 세력들이 주머니에 든 것을 놓치지 않으려 더욱 몽니를 부리는 지금, 무엇보다 요청되는 태도이지 않을까 싶어 앞으로의 이야기가 한층 더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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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트러몰로지스트 1 - 괴물학자와 제자
릭 얀시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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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침공'으로 우리나라에도 이제 제법 이름을 알린 미국 작가 릭 얀시가 새로운 작품을 들고 찾아왔다.

 '몬스트러몰로지스트(Monstrumologist)'가 바로 그 장본인. 얼른 우리말로 풀이하자면 '괴물학자'가 되겠다. 제목 그대로 한 괴물학자와 열 두살 나이의 조수가 주인공인 19세기의 미국을 무대로 한 이야기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였던 전작과는 전혀 다른 크리쳐 물이다. '페니 드레드풀'이란 미드가 있는데, 이와 비슷하다고 하겠다. 개인적으로는 꽤나 취향 저격인 작품이었다. '페니 드레드풀'처럼 19세기를 배경으로 한 으스스한 공포물을 참 좋아하는데, '몬스트러몰로지스트'는 그런 내 취향을 정확하게 만족시켜주었으니까 말이다. 정말 손에 들자마자 끝까지 정신없이 읽었던 것 같다. 무더운 여름밤을 잊기에 제 격이지 싶다.



 소설은 실제 릭 얀시가 등장하여 한 요양원의 원장을 만나는 것에서 시작한다. 릭 얀시는 원장에게서 누군가가 쓴 노트 열세 권을 받게 된다. 그것을 쓴 사람은 '윌리엄 제임스 헨리'라는 사람으로 자신이 1876년에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누구도 믿지 않지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 사람의 신분을 증명할만한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가족은 물론 친척도, 태어난 고향조차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의 과거를 조금이라도 알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 노트로 조사를 좀 해 달라고 릭 얀시에게 노인이 직접 쓴 공책들을 준 것이었다. 직접 봐도 되었을텐데, 굳이 소설가 릭 얀시를 부른 것은 노인이 12살 때 겪었다고 노트에 기록한 이야기들이 전혀 믿을 수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가라면 일반인보다 좀 더 잘 정보들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의뢰하게 된 것이었다. 바로 그 노트에 적힌 이야기가 '몬스트러몰로지스트' 본편이다. 이런 구성은 메리 셀리의 '프랑켄슈타인'이나 로버트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같은 소설이 나오던 시기에는 흔한 것이었다. 이처럼 그 때의 장르 소설은 주로 누가 남긴 수기 혹은 목격담 같은 것으로 소개 되었다. '윌리엄 제임스 헨리' 이름 자체에세도 릭 얀시의 농담이 느껴진다. 심리학의 아버지라 일컫는 윌리엄 제임스와 작가로 이름이 드높은 헨리 제임스, 그렇게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형제의 이름을 하나로 합쳐 놓은 것이니까 말이다.


 본편으로 넘어가면, 윌리엄 제임스 헨리가 12살의 나이로 등장한다. 그는 부모를 모두 다 잃고, 아버지가 살아 생전 충실히 모시던 괴물학자 펠리노어 워스롭의 조수로 지내고 있다. 하루는 도굴꾼 에라스무스 그레이라는 노인이 찾아온다. 자신이 무덤을 도굴하다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며 가져온 것이다. 그레이란 노인이 탁자에 놓은 것은 두 구의 시체였다. 하나는 10대의 어린 소녀였고 다른 하나는 성인 남자의 시체였다. 성인 남자는 마치 엄마가 자식을 껴안듯이 어린 소녀를 칭칭 감고 있었는데 하나가 정말 이상했다. 머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소녀의 얼굴은 반쪽이 사라져 있었다. 무언가에게 이빨로 물어뜯긴 것이었다. 괴물학자 워스롭은 남자가 소녀를 잡아먹고 있었다고 말한다. 헨리는 의문을 가진다. 머리가 없는데 어떻게 잡아먹는단 말이지? 그 의문은 곧 풀린다. 남자에겐 입이 있었다. 바로 배가 입이었다. 남자가 소녀를 감싸듯 칭칭 감고 있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배로 소녀를 먹고 있던 중이었던 것이다. 헨리가 남자로 생각했던 것은 세상에 태어나 처음보는 괴물이었다. 워스롭은 헨리에게 이름을 알려준다. '안트로포퐈기'라고. 한없이 잔인하고 사람을 잡아 먹는...



 그런데 헨리 못지않게 워스롭 또한 충격에 빠진다. 안트로포퐈기는 미국에 결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먼 남쪽 바다에서만 서식한다.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바다를 건너 미국으로 올 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미국에 있을 수 있는 것인가? 언제 처음 여기에 왔는지도 중요했다. 왜냐하면 안트로포퐈기가 자궁이 있는 자리에 뇌가 있어 번식이 어렵기는 하지만 그래도 1년에 한 두 마리 정도는 낳을 수 있기 때문에 언제 여기로 왔는지 알아야 어느 정도의 숫자가 여기에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안트로포퐈기는 무리를 이루며 산다. 본거지를 찾아내 박멸하지 않으면 워스롭과 헨리가 사는 뉴예루살렘은 엄청난 위기에 처할 것이다. 워스롭은 자신과 똑같이 괴물학자였던 아버지의 기록에서 바너 선장이라는 인물을 찾아낸다. 무려 20년 동안 정신병원에 갇혀 있는 사람인데, 알고 보니 그가 바로 안트로포퐈기를 미국에 싣고 온 자였다. 그것도 위스롭의 아버지의 의뢰로.


 그 사실은 워스롭에게 정말 커다란 충격을 준다. 아버지는 왜 이토록 위험한 존재를 일부로 미국으로 가져온 것일까? 그 의문을 제대로 풀기도 전에 다시 한 번 엄청난 사건이 벌어진다. 안트로포퐈기가 처음 발견된 공동 묘지 근처 교회의 목사관에서 어린 자녀 네 명을 포함한 일가족이 안트로포퐈기에게 처참하게 살육된 것이다. 이대로 사태를 도저히 묵과할 수 없게 된 워스롭은 자신과 똑같은 괴물학자이자 안트로포퐈기 토벌에 일가견이 있는 존 컨스를 부른다. 그러나 그는 안트로포퐈기를 상대하는 능력은 탁월해도 인간성에 커다란 문제가 있다. 자신의 목적만 중요하지 타인의 목숨은 하찮게 여기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친구 워롭스가 아끼는 헨리의 목숨이라 해도.


 이야기는 그렇게 안트로포퐈기의 본거지를 찾아가는 것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거기서 드러난 진실 앞에서 워롭스는 마침내 의문을 풀게 된다. 그것도 충격 속에서...


 '안트로포퐈기'는 다른 땅에서 흘러든 존재로, 그렇게 이주자들을 비유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인간과 전혀 다른 신체 구조와 인간을 잡아먹는 그들의 문화는 신체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낯설 수밖에 없는 이주자들의 모습을 많이 과장한 것이다. 어쩌면 그들이 서식하는 땅으로 먼저 가 어떤 목적을 갖고 배에 태워 데려왔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는 '흑인 노예'의 면모도 갖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런 이주자들이 예측과 통제를 벗어났을 때 갖게 되는 두려움이 바로 이 소설에 선연하게 드리워진 공포가 아닐까 싶다.



 통제와 예측을 벗어난 이주자들을 상징하는 안트로포퐈기를 대하는 소설의 태도는 인물을 중심으로 크게 두 가지로 나눠진다. 하나는 존 컨스처럼 무조건 제거하고 보자는 식이다. 다른 하나는 워스롭처럼 그럴수록 더욱 알려고 애쓰자는 식이다. 물론 릭 얀시가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후자다. 그랬기에 소설의 주인공을 괴물에 대해 공포라는 비합리적 감정이 아니라 관찰과 검증이라는 합리적 태도로 다가가는 '괴물학자'로 삼았을 것이다. 아예 소설에서는 워스롭이 헨리에게 존 컨스에게 절대 다가가지 말라고 경고까지 한다. 여기서 작가가 왜 워스롭과 헨리 모두가 비슷한 처지를 가지고 있는지도 드러난다. 헨리는 부모를 잃었다. 그는 아주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워스롭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어렸을 때, 하나밖에 없는 아버지에게서 아무런 애정을 받아본 적 없는 아주 외로운 소년이었던 것이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기숙사에서 늘 혼자 지내야만 했던 워스롭은 아버지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것만이 가장 커다란 소원이었으나 괴물 연구에 지나치게 빠져버린 그의 아버지는 단 한 번도 그런 것을 주지 않았고 그래서 늘 아픔과 자신이 못나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자책에 빠져 있어야 했다. 존 컨스에게조차 워스롭이 괴물학자가 되어 이토록 열성을 다해 일하는 까닭이 실은 아버지의 인정을 그렇게라도 해서 받아보려는 것 아니냐는 빈정거림을 당할 정도로. 헨리는 우연히 발견하게 된 워스롭이 어릴 때 아버지에게 쓴 편지에서 그런 워스롭의 모습을 본다. 헨리는 워스롭이 자신과 결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를 전보다 더욱 잘 도와주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는 내 머리 위에 우뚝 서서 성인의 권위를 휘두르며 잔뜩 주눅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마음 속으로 나는 작고 어린 외로운 소년을 보고 있었다. 낯선 곳에 홀로 떨어진 불쌍한 소년, 아버지의 관심과 애정을 갈구하며 편지를 쓰던 어린 소년. 그러나 그 애정에 대한 보답으로 아비가 보내온 것은 거부라는 치욕감뿐이었다. 편지는 뜯어 보지도 않은 채 낡은 트렁크 속으로 던져져 잊혔다. 이 얼마나 이상하고 비극하고 운명의 아이러니인가! 우리는 종종 긴 세월이 흐른 뒤에 아무 잘못도 없는 이들에게 복수를 꾀하곤 한다. 과거에 우리를 괴롭힌 이들과 똑같은 죄악을 반복하면서, 그렇게 나 자신이 겪었던 고통을 끝없이 보존하고 영속시키는 것이다. 그의 부친은 그의 간청을 묵살했고, 그래서 그는 나의 간청을 묵살했다. 그리고 나는... 무엇보다 가장 기묘한 아이러니이긴 하지만, 바로 그였다.(p. 137)


 워스롭도 겉으로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지만 속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소설이 후반으로 나아가며 더욱 많이 드러내게 된다.


  바로 이런 식의 연대가 실은 릭 얀시가 작품을 통해 정말 보여주고 싶은 게 아닐까 싶다. 이주자들의 존재가 넘쳐나는 이 시대에 말이다. 겨우 인간의 모습을 찾았던 이주자들이 어느새 점점 '안트로포퐈기'가 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들이 우리와 공존해야 할 존재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한, 그들은 더욱 빨리 인간의 얼굴을 잃어버린 '안트로포퐈기'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안트로포퐈기가 되어버린 그들에게 우리 역시 인간이 아니라 그저 잡아먹어야 할 먹이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상대방이 인간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먼저 인정해 주는 일. 그것이 바로 우리 역시 인간의 얼굴을 잃어버리지 않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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