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시노그라퍼 - 1975-2015 공연.영화.전시 공간을 창조하는 사람들
뤼크 부크리스 외 지음, 권현정 옮김 / 미술문화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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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흔히 잊고 있는 것 하나는 연극 역시 영화와 마찬가지로 시각 예술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연극이란 무대에서 보는 것은 배우와 연기만은 아니다. 그들이 말하과 움직이는 공간 역시 우리가 보는 것 중 하나다. 그들을 둘러싼 소품들, 장식들, 벽과 창문들 혹은 거리들 모두가 연극을 보는 우리의 눈으로 들어온다. 무대 공간은 그러나 우리 시야에서 쉽게 사라진다. 우리의 스포트라이트는 언제나 배우의 연기와 대사에만 머물 뿐, 실은 그것과 일체가 되어 드마라를 더욱 극적으로 만드는 의상이나 공간에는 그저 조연에 불과하다는 생각으로 잘 주목하지 않는 것이다. 시노그라퍼는 그렇게 우리 시야에서 쉽게 사라지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사람을 가리킨다. 연출가를 도와 무대 장치를 만들고 무대 의상을 디자인하는 사람 전부를 전문 용어로 시노그라퍼라 부른다. 20세기 초만 해도 무대 장식가로 불렸던 그들은 1960년대 말부터 프랑스에서 의상이나 무대 공간의 연출이 연극 연출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받으면서 그들의 전문성을 존중하는 의미로 '시노그라퍼'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드디어 연극 또한 영화만큼 시각적 종합 예술의 영역이라는 게 받아들여진 것이다.



 '시노그라퍼'라는 말이 프랑스에서 처음 생겨난 것처럼, 프랑스는 그동안 시노그라퍼 영역에서 선도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다. 70년대 공공연하게 '무대 혁명'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무대 연출이 연극 연출 못지 않게 독자적인 예술 가치를 얻게 된 것은 프랑스의 시노그라퍼들 덕분이었다. 현재 그로노블-알프스 대 연극학과 명예 교수로 시노그라퍼 유럽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는 뤼크 부크리스를 비롯한 네 명의 시노그라퍼 전문가가 공저한 '프랑스 시노그라퍼'는 오늘의 시노그라퍼를 있게 한 프랑스 시노그라퍼의 50년 역사와 57명의 시노그라퍼의 예술을 담는다. 책은 시기에 따라 10년 단위로 하여 모두 네 부분으로 나뉜다. 처음은 무대 장식에서 시노그라퍼로 넘어가는, 그렇게 시노그라퍼 예술이 형성되는 1975년에서 1985년 까지의 개척기이고, 다음은 시노그라퍼 예술이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는 1985년에서 1995년 까지의 시기이며 세 번째는 1995년에서 2005년 까지로 시노그라퍼 예술이 독자적 영역으로 단단히 뿌리내리는 시기이고 마지막은 2005년에서 2015년까지 새로운 상황에서 시노그라퍼 예술을 또 다시 새로운 예술로 도약시키는 시기로 1970년대에 태어난 차세대 시노그라퍼들을 다룬다. 한 마디로 시노그라퍼 역사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태동에서 또 다른 단계로의 진입까지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책이라고 하겠다. 책은 인물 중심이다. 앞서도 말했듯 모두 57명의 시노그라퍼를 각 시기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인물마다 그들의 대표작 무대를 중심으로 간결하게 설명하는 형식이다.


  말하자면, 이런 형식. 사진은 1943년생, 프랑스의 시노그라퍼 장기 르카에 대한 부분이다. 사진 속 무대 연출은 유명한 연극 연출가인 피터 브룩의 마하바라타 공연 장면이다. 1987년, 아비뇽 축제 때 상연된 것으로 무대 연출을 맡은 장기 르카는 채석장에다 무대를 만들었다. 마하바라타 연극 러닝 타임은 무려 12시간. 답답한 실내 공연이라면 인내심을 갖고 몰두하기가 힘들다. 그런 조건까지 감안하여 자연의 풍광을 즐길 수 있는 곳에다 무대를 마련한 것이다. 아예 연극 진행을 자연의 진행과 일치시키기도 했다. 관객의 뒤에서 태양이 떠올라 관객 앞에서 태양이 지도록 했으며 연기 방향 또한 태양의 방향에 따라 결정했다. 출입구 또한 바람의 방향에 따라 정해졌다. 한 마디로 자연과 일체가 된 무대였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이것만 봐도 시노그라퍼가 왜 독자적인 예술 영역으로 인정되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그 때 참여한 관객에겐 분명 남다른 경험이었으리라.


 1942년, 아테네 생 시노그라퍼 클로에 오볼렌스키의 작품들. 피터 브룩은 '마하바라타'에 이어 다시 한 번 채석장의 무대 위에 연극을 올렸는데 그 때 무대 연출을 맡은 사람이 바로 클로에 오볼렌스키다. 작품은 바로 유명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태풍'. 원래 그리스에서 연극을 했던 그는 특히 그리스 신화의 무대를 연출하는데 남다른 재능을 보였는데 사진의 '디도와 에네아스'도 그 중 하나다. 이것은 영국의 작곡가 헨리 퍼셀이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를 각색한 오페라로 오볼렌스키는 퍼셀이 기숙학교 소년 소녀들을 위해 작곡했다고 전제하고 거기에 따라 무대를 만들었다. 무대 앞에 장식된 쇠시리와 꽃줄이 이채롭다. 양 쪽 사진을 비교해 보면 오볼렌스키는 원과 정사각형을 바탕으로 한 원초적인 기하학적 구성을 주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화가 가지고 있는 아르케타입, 즉 원형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오볼렌스키는 극의 진행에 조명의 변화를 잘 이용하는 시노그라퍼인데, 그 효과를 더욱 극적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1953년, 튀니지 생 시노그라퍼 아고스티노 파스의 작품들이다. 보는 방향에서 왼쪽은 장 주네의 '하녀들'의 무대이고, 오른쪽은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를 위한 무대이다. 프랑스의 변방인 튀니지 출신이라 그런지 무대 연출에 있어서도 이국적인 것을 적극 도입하는 게 그의 스타일인 것 같다. '하녀들'은 일본 공간 양식을 차용했고 '아이다'에선 중국의 그림자 인형극 양식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서양의 내용을 동양의 그릇으로 담는다. 그럴 때 자연스레 일어나는 긴장과 동요 그리고 융합을 관객에게 주려는 듯하다.


 1943년, 아르헨티나 생 시노그라퍼 리샤르 페두지의 작품들. 무대가 정말 이채롭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무대만 보고는 이것이 무엇을 위한 무대인지 얼른 짚어내기가 힘들 것이다. 역시 보는 방향에서 왼쪽의 무대는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희곡 '햄릿'을 위한 것이고 오른쪽 무대는 '전쟁 레퀴엠'으로 유명한 작곡가 벤저민 브리튼이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으로 만든 오페라를 위한 것이다. 과연 이런 무대에서 어떻게 연극과 오페라가 연출될 지, 거기에 대한 호기심만으로도 연극과 오페라를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게 만든다. 직접 보면 분명 이제까지 자신이 알던 것과 전혀 다른 낯선 '햄릿'과 '나사의 회전'의 세계로 인도될 것만 같은 느낌이다. 이런 것이 바로 시노그라퍼의 능력이 아닐지. 익숙한 것도 낯선 것으로 만들어 새로운 이면을 경험하게 만드는 것. 이렇게 독특한 세계를 구체적으로 구현해 내기에 시노그라퍼들의 작업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듯하다.


컬러 사진 도판이 그들의 무대 연출에 대한 이해를 돕고 짤막하게 인용된 작가의 육성과 저자들의 설명이 거기에 가미된 작가의 철학을 헤아리게 만든다. 시노그라퍼라는 전문 영역에 대한 책이지만 말이 그렇게 어렵지 않기 때문에 무난하게 이해되는 수준이다. 구체적 무대 공간을 다루지만 그것이 바탕이 된 철학은 추상적인 것이므로 어쩔 수 없이 설명이 모호할 수 있는데 보통의 예술서를 이해할 수 있다면 그렇게 난해하지 않게 다가오리라 생각된다. 예전부터 무대 연출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에겐 더 할 나위 없는 책으로 보인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더 권해주고 싶은 이들은 이제 막 시노그라퍼의 존재를 알고 여기에 흥미를 가지게 된 사람들이다. 이 책을 읽으면 그 뒤부터 연극이든, 오페라든 정말 다르게 보일 것이라 자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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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4-16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터 브룩 <마술피리>를 인상적으로 보고 동굴에서 했다는 <마하바라타> 공연 무척 궁금했는데 이 책 보면 더 자세히 볼 수 있겠군요. 피터 브룩 <살로메>는 살바도르 달리가 무대 연출을 했다고 하죠^^

ICE-9 2017-04-16 14:24   좋아요 0 | URL
사실 이 책으로 마하바라타 공연에 대한 자세한 얘기를 듣는 데는 다소 아쉬운 부분이 있을 것 같아요. 소개 글이 거의 반 페이지 정도에 불과한지라. 피터 브룩이 ‘빈공간의 예술가‘라고 불릴만큼 독특한 무대를 많이 만들어 유명했는데 지금까진 그것이 모두 피터 브룩의 공으로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시노그라퍼들의 공헌이 무시되었던 것은 아닌지...
그건 그렇고 살바도르 달리가 무대 연출을 한 ‘살로메‘는 저도 꼭 한 번 보고 싶네요^^

2017-04-17 0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4-18 15:1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