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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 독점계약 번역 개정판
E.H. 카 지음, 김택현 옮김 / 까치 / 2015년 3월
평점 :
작년 많은 이들을 어이가 없게 만든 '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 역사는 다시금 격렬한 투쟁의 장소가 되었고 사람들은 역사의 중요성을 재차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역사가 중요하다는 것은 잘 알지만 역사 자체에 대해서는 과연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나는 학창 시절 국사를 정규 과목으로 배웠지만 첫 시간부터 선사 시대로 시작되는 '지식으로서의 역사'만 배웠을 뿐, 역사라는 것이 무엇이고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와 같은 '사유의 대상으로서의 역사'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다. 우리가 역사 자체에 대해 생각해 보기도 전에 역사는 이미 누군가가 규정한 모습으로 놓여져 있었고 그걸 정해진 식단과 순서로 기계처럼 암기했을 뿐이었다. E.H 카에 따르면 역사는 사유를 통해 생명을 얻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죽은 역사만 섭취한 것이었다. 그것도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누군가의 이익을 고취할 의도로 왜곡된 역사를 말이다. 상한 음식은 반드시 배탈을 부른다. 똑같이 나도 뒤늦게 진실된 역사를 알고는 커다란 충격과 함께 영혼의 복통을 겪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같이 배운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랬다. 그런데 국정화를 추진한다고? 다시 한 번 아이들에게 부패한 지식들을 마구 먹여 미래에 광범위한 복통과 설사를 유발토록 만들겠다고? 안될 말이다.
그러나 이 순간, 역사를 올바로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역사 자체에 대한 사유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지식으로서의 역사는 조석으로 변하기 쉬운 권력 관계를 생각해볼 때 언제든 위협받을 수 있다. 정권이 바뀌자 독재자 이승만이 국부로 미화되고 동상까지 세워지는 것을 보라. 이렇게 지식으로서의 역사는 권력에 의해 얼마든지 다시 기술될 수 있다. 그럴 때 올바른 모습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사유로서의 역사'일 것이다. 모두가 역사라는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존재해 나가는 지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잘 알고 있다면 제아무리 막강한 권력으로 역사를 자기 입맛대로 왜곡하려 들어도 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여기에 동의한다면, 꼭 추천하고픈 책이 있다. 그것이 바로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이다.
이 책은 무엇보다 역사에 대한 사유로 이끄는 초대장이다. 여기서는 많은 것들이 흔들린다. 특히나 역사를 오로지 암기로 대했던 나와 같은 이들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런 우리에겐 고정관념이 있었다. 역사를 순수한 과거 사실의 집적으로만 생각했고 그것을 연구하는 역사가 또한 좌고우면 하지 않는 공정한 판관으로만 여겼었다. 역사 기술을 뒷받침 하고 있는 사료와 문서에 대해서도 객관성과 공정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카는 그 모두가 오해라고 말한다. 역사에 기록된 그 어떤 과거 사실이든 그것은 특정 견해의 산물이며 그것을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의 가치관과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p. 24)고 말이다. 영국 역사가 배러클러프는 그것을 두고‘널리 승인된 일련의 판단들'이라 정의하기도 한다.
비단 역사 사실만의 문제가 아니다. 하물며 역사가도 마찬가지다. 한 명의 역사가를 대할 때,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으니, 바로 그 역시도 나와 마찬가지로 사회의 일개 구성원이라는 사실이다. 온전히 가치 중립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사회의 가치관이나 이익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대변(p. 53)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역사가들을 종종 마치 독수리처럼 여길 때가 많다. 그렇게 높은 하늘에서 역사라는 지상을 내려다 보며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객관적인 안목으로 관찰하는 존재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들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행렬의 일원이 되어 지상 위를 터덜터덜 걸어가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행렬의 영향에 부대끼면서 말이다. 이처럼 역사의 대상과 그것을 바라보는 주체 모두가 주관의 개입 앞에 여지 없이 무방비 하다면 역사를 이루는 과거의 사실 또한 온전히 과거의 것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주관이란 어디까지나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현재의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가 투영된 과거가 존재할 뿐이다. 더구나 역사란 카가 설명하는 바와 같이,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역사가들에 의해 발굴될 때 비로소 만들어진다.
‘역사가가 연구하는 과거는 죽은 과거가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현재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과거이다. 그러나 과거의 행동은 만일 역사사가 그것의 배후에 있었던 사유를 이해할 수 없다면 그 역사가에게는 죽은 것, 즉 의미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역사는 사유의 역사이며 역사란 사유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는 역사가가 그 사유를 자신의 정신 속에 재현하는 것이다. 역사가의 정신 속에서 이루어지는 과거의 재구성은 경험적인 증거에 의존한다. 그러나 그 재구성 자체는 경험적인 과정이 아니며 또한 사실들의 단순한 나열일 수도 없다. 실제로는 그 재구성의 과정이 사실들의 선택과 해석을 지배한다 : 정말이지 이 재구성의 과정이 사실들을 역사적 사실들로 만드는 것이다.(p. 35)
즉, 역사는 완결의 장소가 아니라 형성의 경로인 것이다.
역사에서 절대적인 것이란 과거 속에 있는 출발점과 같은 어떤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모든 현재의 사유는 반드시 상대적이기 때문에, 현재 속에 있는 어떤 것도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불완전하고 형성과정 중에 있는 어떤 것-우리가 전진하는 미래 속의 어떤 것, 우리가 전진할 때에만 형성되기 시작하는 어떤 것, 그리고 전진함에 따라서 우리가 점차 과거에 대한 해석을 형성할 수 있도록 빛을 밝혀주는 어떤 것-이다.(p. 167)
그것은 강물처럼 유동적이다.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상자를 열었을 때, 비로소 살았는지 죽었는지를 알 수 있듯이, 현재에서 어떻게 포착하느냐에 따라 역사의 모습은 천변만화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카는 사료나 문서를 너무 숭배하지 말라고 한다. 역사서를 볼 때에도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하는 것은 내용이 아니라 누가 썼으며 그의 학문적, 정치적 입장이라고 강조한다.
역사 사실들은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결코 순수한 것으로 다가서지 않는다.;그것들은 기록자의 마음을 통과하면서 항상 굴절된다. 우리가 역사책을 집어들 때 최초의 관심사는 역사가에 관한 것이 되어야 한다.(p. 36)
요컨대 기록된 역사는 정답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이제 우리가 정답을 골라내야 하는 보기에 지나지 않는다. 상황이 이렇다면 역사 앞에 서 있는 우리의 입장 역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우리는 역사와 저자의 권위에 압도되어 내내 수동적이었다. 하지만 카의 말대로라면, 역사라는 것도, 저자라는 것도 단지 하나의 개별적 해석에 불과하니 이제 우리는 보다 더 능동적인 입장에 설 수 있게 된다. 그들이 무엇을 내놓든 우리는 우리대로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능동적인 사유를 통해 발화하고 응답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역사가 우리의 대화 상대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비로소 역사는 자신의 진정한 얼굴을 우리에게 보인다.
역사가는 사실의 잠정적인 선택에서 그리고 동시에 그 선택을 이끌어준 잠정적인 해석-그 해석이 자신의 것이든 다른 사람의 것이든 간에-에서 출발한다. 그가 연구하는 동안 사실의 해석 그리고 사실의 선택 및 정돈 이 두 가지는 이러저러한 상호작용을 통해서 미묘하고도 얼마간 무의식적일 수 있는 변화들을 겪는다. 그리고 이 상호작용에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상호관계도 포함되는데, 왜냐하면 역사가는 현재의 일부이고 사실은 과거에 속하기 때문이다. 역사가와 역사의 사실은 서로에게 필수적이다. 자신의 사실을 가지지 못한 역사가는 뿌리가 없는 쓸모없는 존재이다. 자신의 역사가를 가지지 못한 사실은 죽은 것이며 무의미하다. 따라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첫번째 대답은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과정,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이다.(p. 46)
여기에 나온 상호 작용이라는 말은 사실 이 책의 핵심이기도 하다. 카가 굳이 '대화'라는 표현을 쓴 이유 중의 하나도 과거와 현재, 역사와 사회 그리고 역사와 우리가 서로 격리된 존재가 아니라 부단히 상호작용을 하는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역사의 사실은 분명히 개인에 관한 사실이지만 고립된 채 행한 개인의 행도에 관한 사실, 또는 실제적인 동기든 상상적인 동기든 개인 스스로가 자신들을 움직이게 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런 동기에 관한 사실은 역사의 사실이 아니다. 역사의 사실이란 사회 속에 있는 개인의 상호관계에 관한 사실, 그리고 개인의 행동에서 본인들이 의도했던 것과 자주 모순되거나 가끔 상반되는 결과를 생겨나게 하는 사회적 힘들에 관한 사실인 것이다.(p. 75)
역사에서 배운다는 것은 결코 단순한 일방적인 과정이 아니다. 과거에 비추어 현재를 배운다는 것은 또한 현재에 비추어 과거를 배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의 기능은 과거와 현재의 상호관계를 통해서 그 두 가지 모두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진전시키는 데 있다.(p. 96)
카는 어느 것 하나에 편중된 특권적 위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역사에 대한 결정론적인 시각도 거부하는 그다. 진보도 마찬가지다. 상식적인 견지에서 우리들은 아무래도 직선적인 시간관을 가진 기독교가 바탕이 된 서양 문명의 영향을 많이 받은 탓에 역사를 진보의 과정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많다. 흔한 예로 중세보다 지금이 더 진보했다고 생각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카는 역사의 진보를 그렇게 단순한 잣대로 평가할 수 없다고 말한다. 진보라고 부를 수 있는 과정 또한 전혀 동일하지 않다고 덧붙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자주 진보를 입에 올리고 실제 진보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카에 따르면 모두 착각이다. 누군가 우리에게 진보라는 이름으로 주입한 관념을 별 비판없이 수용하여 답습한 결과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상식으로 여기고 있는 진보에 대한 기준이란 것이 오로지 서양 문명의 우월성을 증거하는 것들에게만 치우쳐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알고 있는 진보란, 서양 문명에 대한 우리의 자발적 복종을 이끌어내기 위한 허위의 관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진보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고 동시적인 진보인 것은 아니며 또 그럴 수 없다. 의미심장한 것은 요즘은 저 몰락의 예언자들 거의 모두가, 다시 말해서 역사에서 아무런 의미도 찾지 못한 채 진보는 끝났다고 생각하는 저 회의주의자들 거의 모두가 몇 세대동안 문명을 전진시키는 일에서 지도적이고도 두드러진 역할을 의기양양하게 수행했던 바로 그 지역이나 사회계급에 속해있다는 사실이다.(p. 161)
진보가 이러하듯이, 역사를 결정짓고 단정 지으려는 그 어떠한 시선도 순수할 수가 없다. 대부분 그것은 그렇게 보도록 만든 자가 속한 사회의 우월과 이해 관계의 반영이다. 하물며 그 저변엔 우리를 복종하게 만들려는 의도가 서려있다. 그러므로 역사를 이렇게 상호작용으로 보는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만드는 시선이기도 하다. 알게 모르게 누군가에 의해 식민지가 되어 버린 생각과 시야가 올가미처럼 씌워져 내 현재와 미래를 조이고 있었다면 적극적인 참여와 능동적인 사유는 그 결박을 끊을 칼이 되고, 진정한 자유를 흡입할 수 있는 통풍구가 되어 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역사 안에서 우리는 소작농이 아니라 유목민이 되며, 역사라는 장소는 단지 지식을 습득하는 곳이 아니라 무수한 참조를 통해 보다 더 나은 현재를 만들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들이 숨쉬는 대지로 탈바꿈 한다. 그 땅에서 우리는 필요할 때마다 사유의 거처를 짓고 대화로 정착할 수 있으며, 현재 사정이 달라져 더이상 의미를 발굴할 수 없다면 홀연히 떠날 수도 있다. 그렇게 카는 우리에게 아주 광할한 자유의 대지를 선사하는 것이다.
역사는 다른 시대의 부당한 영향에서 우리를 구해야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시대의 부당한 영향에서도 환경의 억압과 우리가 숨쉬는 대기의 압력에서도 우리를 구제해야 한다.(p. 64)
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대지를 보며 난 둔중한 충격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나는 역사를 독단의 세계로 생각했다. 결정되어 있고 확실한 정답이 존재해, 우리는 그 권위 앞에서 마냥 엎드려야만 하는 독재의 영토라고 말이다. 하지만 카가 보여주는 역사는 그리스의 아고라 광장을 많이 닮아 있었다. 모두가 대등한 신분으로 참여하고 활발한 대화와 토론을 통해 민의를 형성해 나가는 그런 광장! 특히나 아고라를 떠올렸던 것은, 카가 참여하는 존재들의 독립과 자유 그리고 동등을 강조하면서도 독단으로 흐를 수 있는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이들에게 통용되는 올바른(여기의 '올바른'이란 역사의 객관성에 대해 공정한 수준에서 상호 인정할 수 있게 만드는 무언가를 뜻한다.) 기준 역시 강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고라에게도 발언과 토론에 있어서 서로 지켜야 할 규칙은 있었으니.
그렇다면 우리가 어느 역사가를 객관적이라고 칭찬하는 것은, 혹은 이 역사가는 저 역사가보다 객관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일까? 그것은 그가 단순히 사실을 올바르게 입수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올바른 사실을 선택한다는, 달리 말하자면 그가 중요성에 관한 올바른 기준을 적용한다는 뜻임이 분명하다.(p. 169)
이런 논의들은 내게 정말 새로운 것이었고 너무나 설득력이 있었기에, 마치 나는 역사를 이제야 처음으로 만나는 것 같았다. 그것도 아주 제대로 말이다. 그래서 그만큼 학창시절에 만난 역사가 후회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의 역사란 단지 누군가로 인해 꽉 잠겨진, 질식의 밀실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이렇게 역사가 대기에 자유가 가득한 광장인 줄 알았으면 나는 훨씬 더 많이 역사와 대화했을 것이며 어쩌면 삶의 태도마저 현격하게 달라졌을지 모른다. 역사에 만약이란 가정은 쓸모 없는 일이라지만 그래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것이 너무나도 아쉽다. 그러므로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 중에 아직 그런 밀실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한 이가 있다면 적극 이 책을 권하고 싶다. 그 자유를 누리기 위해 카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당신의 참여와 사유 밖에 없다. 주어진 모든 것에 자신을 수동적으로 길들이기 보다는 스스로 독립적인 주체가 되어 대화할 수 있는 영역을 적극적으로 만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아무리 권력이 역사를 마음대로 주물러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자신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들이 그 어떤 역사를 정답처럼 제시해도 결코 거기에 구애받지 않고 얼마든지 스스로 그 정당성을 따져 물을 수 있는 존재가.
학문에서든 역사에서든 사회에서든, 인간사에서의 진보는 기존질서의 점진적인 개선을 추구하는 일에 스스로를 제한시키지 않고 현존질서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이 의지하고 있는 공공연한 또는 은페된 전제들에 대해서 이성의 이름으로 근본적인 도전을 감행했던 인간들의 그 대담한 자발성을 통해서 주로 이루어진 것이다.(p. 210)
물론 처음엔 어려울지 모른다. 그래서 낙관이 필요하다. 이보다 더 나아지리라는 믿음. 카는 그 믿음을 얼마든지 가져도 괜찮다고 한다. 우리의 모습은 현재의 환경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함께 전진하면서 비로소 만들어지는 것이니까. 그것이 바로 진보라고, 카는 말한다.
진보에 대한 신념은 자동적이거나 필연적인 과정에 대한 신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잠재력의 부단한 발전에 대한 신념을 의미한다. 진보는 추상적인 용어이다. 그리고 인류가 추구하는 그 구체적인 목적들은 그때그때마다 역사과정에서 생기는 것이지 역사 외부에 있는 어떤 원천에서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전진해야만 밝혀질 수 있고, 획득하는 과정 속에서만 그 타당성이 입증될 수 있는 목표들을 향해서 나아가는 무한한 진보-바꿔 말하면, 우리가 상상할 수 있거나 상상할 필요가 있는 어떠한 한계에도 결코 굴하지 않는 진보-의 가능성에 찬성할 것이다. 역사에서 절대적인 것이란 과거 속에 있는 출발점과 같은 어떤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모든 현재의 사유는 반드시 상대적이기 때문에, 현재 속에 있는 어떤 것도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불완전하고 형성과정 중에 있는 어떤 것-우리가 전진하는 미래 속의 어떤 것, 우리가 전진할 때에만 형성되기 시작하는 어떤 것, 그리고 전진함에 따라서 우리가 점차 과거에 대한 해석을 형성할 수 있도록 빛을 밝혀주는 어떤 것-이다.(p. 167)
상호작용은 역사와 현실 사이에도 엄연히 존재하니, 결국 사유를 통한 역사의 상대화는 지금 나를 내리누르고 있는 현실 세계의 중력마저 약화시켜 줄 것이다. 어쩌면 자신에게 단순히 죽은 활자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를 역사가 내게 고립과 추락의 불안을 선사하는 벽을 넘어가게 만들 사다리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카는 그것을 마지막 '지평선의 확대'에서 보여 준다. 모두가 서구 문명의 종말을 말하며 지극히 비관적인 색채로 현실을 그리던 그 때, 그는 어찌하여 종말은 커녕 현재에서 희망을 보고 미래를 낙관하게 되었으며, 그것은 바로 역사를 보는 시야를 달리하여 가능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애초에 카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도 거기에 있었다. 이 책이 나온 것은 1961년으로 카에 따르면 시대가 온갖 비관적인 전망으로 넘쳐 났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역사와의 대화로 모든 비관들이 실은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엘리트들이 오직 자신에게 닥쳐온 위기를 보편화해서 말한 것임을 간파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허황되고 섣부른 비관에 다른 이들이 물들지 않도록 이 책을 썼던 것이다. 카는 이렇게 자신이 누리고 있던 자유를 나눠주려 했다. 이처럼 지금 우리가 시대를 절망으로 채색하고 불안과 초조에서 헤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시선이 아니라 우리가 그런 시선을 가지도록 의도한 누군가의 시선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더욱 카가 행하는 사유를 통한 자유의 세례를 받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사슬을 푸는 진짜 열쇠는 우리의 머릿속에 있다. 그것을 찾고 싶다면 얼른 대화로 가득한 이 아고라로 뛰어드는 것이 어떨까?